1. 개요
본서는 남북조시대 강남에 위치했던 제왕조(479~502)의 역사를 기술한 기전체(紀傳體) 형식의 사서로 중국의 정사(正史)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남조 양의 관료이자 문인인 소자현(蕭子顯)이 지었으며 전 59권으로 대략 6세기 전반(양 무제(武帝) 천감(天監)연간(502~519))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조 제왕조의 역사서로서 현존하는 것은 본서가 유일하며 남조의 정사들 가운데 《송서(宋書)》와 본서만이 해당 조대를 체험한 남조시기의 인물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2. 저자
(1) 성명:소자현(蕭子顯)(489~537)
(2) 자자(字)·별호(別號):자는 경양(景陽)
(3) 출생지역:난릉(蘭陵)(江蘇 常州)
(4) 주요활동과 생애
소자현은 남조 제의 예장문헌왕(齊豫章文獻王) 소억(蕭嶷)의 8번째 아들로 제를 건국한 고제(高帝)의 손자에 해당한다. 남조 제에서 영도현후(寧都縣侯)에 봉해졌고, 왕자의 예에 따라 급사중(給事中)으로 기가(起家)했다. 502년 제에서 양으로 왕조가 교체되었으나 그는 작위만 후(侯)에서 자(子)로 강등당했을 뿐, 별다른 박해를 받지 않고 관료로서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양에서는 인위기실참군(仁威記室參軍), 사도주부(司徒主簿), 태위녹사(太尉錄事) 등을 거쳐서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 중서랑(中書郎) 등을 역임했고, 이후에도 승진을 거듭하여 시중(侍中),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올랐다. 양(梁)에서 입사(入仕)했을 당시부터 문재로 두각을 보였는데, 심약(沈約)도 그의 문장을 칭찬할 정도였고 무제(武帝)에게서도 총애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관료였지만 정치보다는 학문과 관련된 분야의 관직을 주로 맡아 기량을 발휘했다. 49세에 사망했는데 무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중서령(中書令)에 추증했다. 다만 그에 대한 시호는 그가 생전에 자신의 재주를 믿고 남에게 교만했음을 이유로 ‘교만하다’라는 의미의 교(驕)를 내리도록 했다.
(5) 주요저작
소자현의 열전은 《양서(梁書)》와 《남사(南史)》에 각각 수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본서 외에도 《후한서(後漢書)》, 양 무제 보통(普通) 연간(520~526)에 거행된 북벌의 시말을 기록한 《보통북벌기(普通北伐記)》, 그리고 《귀검전(貴儉傳)》 등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고, 이 밖에도 당시 황제인 양 무제의 문집 편찬에도 간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그 스스로도 문집 10권을 남겼는데 이들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본서뿐이다. 이후 청(淸)의 엄가균(嚴可均)(1762~1843)이 남조 양대 문인들의 문장을 집록한 《전량문(全梁文)》에 그의 문장으로 〈어강마하반야경서(御講摩訶般若經序)〉, 〈자서(自序)〉 두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자서가 본서에 대한 서문의 일부분으로 추정된다.
3. 서지사항
본서의 원래의 명칭은 ‘제서(齊書)’였다. 그러다가 양송(兩宋) 이후부터 북조 북제의 역사를 기술한 《齊書》와 구분을 두기 위해 《남제서(南齊書)》라 불리게 되었다. 소자현의 《제서》 이전에도 제의 사적을 기록한 사서는 존재했다. 이미 남조 제에서 강엄(江淹)이 《제서》의 지(志)를 지었고, 심약은 《제기(齊紀)》를 지었는데 모두 완성된 형태는 아니었다. 이에 양 무제 천감 연간(502~519) 당시 태위녹사(太尉錄事)였던 소자현이 제사(齊史)를 편찬할 것을 건의하여 이를 완성하고 표문과 함께 상주하였다. 무제는 조서를 내려 그 책을 비각(祕閣)에 소장케 하였는데 이를 통해 소자현의 《제서》는 완결성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무제의 뜻에도 부합했음을 알 수 있다.
본서는 원래 60권이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는 것은 59권이며 이 가운데 본기 8권, 지 11권, 열전이 40권이다. 서술 시점은 남조 송의 말기인 순제(順帝) 승명(昇明) 원년(477)에서 시작하여 제 화제(齊和帝) 중흥(中興) 2년(502)까지이다. 송 말기가 포함된 것은 제의 건국자인 고제 소도성(蕭道成)이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양서(梁書)》와 《남사(南史)》 〈소자현전(蕭子顯傳)〉과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 등에 따르면 본서 총 60권이라고 하였는데 현존하는 것은 59권으로 1권이 결락되어 있다. 결락된 1권은 소자현의 자서가 포함된 서전(序傳)으로 추정된다. 한편 양에서는 소자현의 《제서》 외에도 봉조청(奉朝請) 오균(吳均)이 《제춘추(齊春秋)》 20편을 지어 소자현의 책과 함께 유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균의 《제춘추》는 망실되어 오늘날은 전하지 않으며 《제서》도 당대(唐代)에 《남사(南史)》가 편찬되어 유행함에 따라 더 이상 읽히지 않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원문의 내용도 상당수가 산일되었다.
이에 북송 인종(仁宗) 가우(嘉祐)연간(1056~1063) 본서를 교감하고 산일된 부분을 보충하게 하였다. 그러나 증공(曾鞏)은 여전히 비각(祕閣) 소장본에 오류가 많음을 지적하고 민간에서 소장 중인 본서의 여러 이본(異本)을 수집하여 교정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하여 증공의 주도로 교정작업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영종(英宗) 치평(治平)연간(1064~1067) 증공이 본서의 교정본을 올렸다. 권질 상으로는 원본에 비해 1권만 결락되어 있으나 각 권의 내용에 완전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권58의 고려전(高麗傳)은 후반부가, 백제전(百濟傳)은 전반부의 내용이 완전히 빠져 있다.
현재 전하는 판본은 삼조체수본(三朝遞修本)(일명 삼조본(三朝本)), 명, 청시대 상숙(常熟) 모씨(毛氏)의 급고각(汲古閣)에서 간행한 십칠사(十七史), 남경국자감(南京國子監)(일명 남감(南監)), 북경국자감(北京國子監)(일명 북감(北監))의 이십일사(二十一史), 무영전(武英殿)의 이십사사(二十四史) 수록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삼조본은 송, 원, 명 세 왕조에 걸쳐서 수정된 판본을 이용하여 중수(重修), 보각(補刻)된 판본을 말한다. 이후 민국시기에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이십사사(二十四史)의 결락을 다른 판본들과 대조하여 보충하고 영인(影印)한 일명 백납본(百衲本) 이십사사(二十四史)가 간행되었고, 본서 역시 이 백납본 이십사사에 수록되었다. 1972년에는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이상의 판본들을 비교, 대조하여 원문을 교감하고, 표점한 점교본(點校本)이 간행되었고 오늘날에는 이 간행본이 가장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2018년 북경, 중화서국에서 이에 대한 수정본(修訂本)이 출판되었는데 기존 점교본의 표점이나 문단 구분 등의 오류를 수정하고 있고 참고가 된다.
4. 내용
본서의 기 8권은 제(齊) 7명의 황제에 대한 기록이며, 지 11권은 예(禮), 악(樂), 천문(天文), 주군(州郡), 백관(百官), 여복(輿服), 상서(祥瑞), 오행(五行)의 8지로 되어 있고 그 나머지 40권이 열전이다.
《송서》의 지와 달리 본서의 지는 남제 일대의 사적만을 대상으로 하여 서술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따라서 본서는 전형적인 단대사(斷代史)라고 할 수 있다. 본서의 지들 가운데는 명칭은 이전시대의 정사를 답습하면서도 내용의 구성에 있어서는 다른 면모가 확인되는 것들이 있다. 천문지, 주군지, 상서지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먼저 천문지는 천체의 운행과 주기, 그리고 그에 따른 각각의 수치가 기록된 아니라 일식이나 월식, 혜성의 출현 같은 당시로서는 이변으로 여겨지는 현상들만 열거되어 있다. 주군지의 경우 이전시대의 주군지나 지리지가 각 주와 군의 호구 숫자를 열거한 것과 달리 본서에서 호구는 빠져 있다. 상서지(祥瑞志)에서는 다수의 참위서(讖緯書)들이 인용되어 있다.
한편 본서의 열전 가운데는 당시 중국 대륙에서 제왕조와 병립했던 북조 북위(北魏)의 사적도 포함되어 있다. 북위에 대한 기록은 ‘위로전(魏虜傳)’이라는 제명 하에 수록되어 있다. ‘위로전’의 내용은 북위왕조의 역사보다는 제왕조와 북위와의 교전, 교섭기사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당시 제와 북위와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참고가 된다.
5. 가치와 영향
편목의 구성에 있어서 전대의 정사와 구분되는 독창적 체제는 없다. 내용상으로는 남조의 사정사(四正史)(《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가운데 원문의 산일이 가장 심하다. 따라서 본서 기사의 검토에 있어서는 《남사》와의 비교 검토가 요구된다. 본서가 산일되기 전 본서의 원문을 대량으로 절록한 것이 《남사》이기 때문이다.
문장의 서술방식에 있어서는 저자가 당시에 유행한 변려문을 극도로 구사하여 그 문장의 수준이 다른 정사들의 그것에 비해 떨어지며, 정작 중요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충실한 서술에는 소홀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본서 내용의 소략함을 두고 청대(淸代)의 사가(史家)인 조익(趙翼)은 본서가 유서법(類敍法)을 사용하여 열전을 편성했기 때문이며, 이는 오히려 제대로 방법을 얻은 것이라고 하였다. 원래 기전체의 경우 하나의 인물에 대해 하나의 열전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와 같이 할 경우, 당대의 모든 인물들에 대해 열전을 두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이에 비슷한 범주로 분류될 수 있는 인물들의 사적을 모은 후, 이를 하나의 열전 내에서 서술하는 것이 유서법이다. 조익은 본서의 열전이 양은 많지 않으나 모든 인물들을 갖추었다고 평하였다. 이같은 열전에서 유서법의 활용은 《양서(梁書)》로 이어진다.
한편 상서지에는 현재 전하지 않는 참위서들의 일문이 다수 인용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참위학의 내용과 신비주의 사상의 이해에 참고가 된다. 다만 본서의 상서지와 《위서(魏書)》의 영징지(靈徵志)를 제외하면 이러한 형식의 지는 그 이후의 정사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천문(지)에는 흉조와 길조만이 기록되어 있고, 주군(지)에는 호구를 저록되어 있지 않으며, 상서(지)에는 도참(圖讖)이 많이 실려 있다.[然天文但紀災祥 州郡不著戶口 祥瑞多載圖讖]” 〈조공무(晁公武),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
‧ “그 고치고 나누며 다듬고 꾸며대는 변화가 너무 많아 그 문장이 더욱 (수준이) 낮습니다.[其更改破析刻彫藻繢之變尤多 而其文益下]”〈증공(曾鞏), 〈남제서목록서(南齊書目錄序)〉
(2) 색인어: 남제서(南齊書), 제서(齊書), 소자현(蕭子顯), 서전(序傳), 제서(齊史), 양 무제(梁武帝), 남사(南史)
(3) 참고문헌
‧ 南齊書 標點校勘本(中華書局)
‧ 南齊書全譯(二十五史全譯, 漢語大詞典出版社)
【양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