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당감(唐鑑)》은 북송(北宋) 범조우(范祖禹)가 당 고조(唐高祖)부터 애제(哀帝)에 이르기까지 《자치통감(資治通鑑)》 기사에 근거하여 각 황제 통치 시기 정치의 득실을 비판한 저술로, 철종(哲宗) 원우(元祐) 원년(1086)에 완성되었다. 남송(南宋) 여조겸(呂祖謙)이 주를 달았으며, 북송 손보(孫甫)의 《당사논단(唐史論斷)》과 더불어 당사(唐史)를 평론한 서적으로 꼽힌다.
2. 저자
(1) 성명:범조우(范祖禹)(1041~1098)
(2) 자(字)·별호(別號):범조우의 자(字)는 순보(淳甫)(순(淳)은 순(醇) 또는 순(純)이라고도 하고, 보(甫)는 부(父)라고도 함) 또는 몽득(夢得)
(3) 출생지역:성도(成都) 화양(華陽)(현 중국 사천성(四川省))
(4) 주요활동과 생애
범조우의 선조는 본래 장안(長安)에 살았으나 당(唐)나라 말 황소난(黃巢亂)을 피해 사천(四川)으로 이주하였다. 범조우의 성명과 자(字)는 그의 출생과 관련 있다. 모친의 태몽에 한대(漢代) 대장군(大將軍) 등우(鄧禹)가 나타나 이로 인해 이름을 조우(祖禹)라 짓고, 자 또한 몽득(夢得)이라 한 것이다. 북송 인종(仁宗) 가우(嘉祐) 8년(1063) 진사에 합격하였다. 사마광의 《자치통감》 편찬에 참여하여 당사 부분을 맡아 낙양에서 15년간 매진하였고, 당시 사마광의 칭찬을 받았다. 《자치통감》이 완성되자 사마광의 추천으로 비서성정자(秘書省正字)가 되었다. 왕안석(王安石)의 동생 왕안국(王安國)이 그와 친분이 있어 왕안석과의 교유를 제안했으나 끝내 거절하였고, 신법의 폐단에 대해서 상주하였다. 신종(神宗) 붕어 후,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우정언(右正言)에 발탁되었다. 여공저(吕公著)가 권력을 장악하자 그의 사위라는 이유로 사직했으나 사부원외랑(祠部員外郎)에 임명되었다. 이를 거절하였지만 다시 저작좌랑(著作佐郎)으로 임명되어 《신종실록(神宗實錄)》 검토에 참여했다. 이후 급사중(給事中), 한림원시독학사(翰林院侍讀學士), 지국사원사(知國史院事) 등을 역임했다. 북송 중기 범진(范鎭), 범충(范冲)과 함께 ‘삼범수사(三范修史)’의 하나로 꼽힌다. 그가 편찬한 《당감》이 당시 사대부들의 존중을 받아 ‘당감공(唐鑑公)’이라고도 불렸다.
(5) 주요저작:《시해(詩解)》, 《고문효경설(古文孝經說)》, 《제의(祭儀)》, 《삼경요어(三經要語)》, 《경서요언(經書要言)》, 《가인괘해의(家人卦解義)》, 《당감(唐鑑)》, 《제학(帝學)》, 《인황훈전(仁皇訓典)》, 《범태사집(范太史集)》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범조우가 《자치통감》 편찬에 참여할 때 당대(唐代)를 맡았던 배경으로 이 책을 저술하였으며, 철종에게 바쳐 정치에 경계로 삼도록 했다. 총 306편, 11권으로 구성되었고, 남송 여조겸이 원문에 주를 달면서 매 1권을 2권으로 나누어 총 24권이 되었다. 판본은 상해도서관(上海圖書館)이 보관하고 있는 남송 효종대(孝宗代)의 절강각본(浙江刻本)(12권본)이 가장 오래되었고, 1984년 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에서 그 영인판을 출판하였다. 명(明)나라 홍치(弘治) 10년(1497)의 간본(刊本)은 누락된 부분이 많다.
4. 내용
당조(618~907)의 고조부터 애제까지 총 20명 황제 항목 아래, 《자치통감》 본문의 기사를 게시하고, 군신간의 대응에 관해 ‘신조우왈(臣祖禹曰)’로 시작하는 문장형식으로 득정(得政)과 실정(失政)을 논평한 것이다. 기록이 가장 많은 황제 순서는 태종(太宗) 시기 득정 26건·실정 28건, 덕종(德宗) 시기 득정 3건·실정 50건, 현종(玄宗) 시기 득정 7건·실정 33건, 헌종(憲宗) 시기 득정 19건·실정 10건 등으로 통치 기간과 관련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정치적 중요성과도 연관한다. 대외적으로 무력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 태종 시기 득보다 실이 많다고 지적하고, 헌종과 무종(武宗) 시기(득정 4건·실정 1건)에 득이 실보다 많은 까닭은 능력 있는 재상을 임명한 까닭이라 하였다. 중종(中宗)·예종(睿宗)·순종(順宗)·목종(穆宗)·선종(宣宗)·의종(懿宗)·희종(僖宗)·소종(昭宗)·소선제(昭宣帝)(애제(哀帝)) 시기는 득정에 관한 평가가 없다. 총 71개의 득정, 215개의 실정으로 나누어 평론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자치통감》의 기사를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는 적지만 대담한 사평·논단과 송대(宋代) 사대부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중국사평류(中國史評類)의 대표적 저작이다. 채조(蔡绦)의 《철위산총담(鐵圍山叢談)》에 “범조우의 아들 범온(范溫)이 상국사(相國寺)에 갔다가 여러 사람들이 그를 보고 ‘당감’의 아들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당시 ‘당감’이라는 서적의 명성이 잘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또한 장단의(張端義)의 《귀이집(貴耳集)》에는 《자치통감》을 읽으면 사마광이 재상의 도량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고, 《당감》을 읽으면 범조우의 간언 방법을 알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희(朱熹)는 《당감》이 너무 간략하다고 평가했었으나, 말년에 여러 차례 열독한 후 칭찬하며 자신의 비평이 잘못되었다고 시인했다. 《당감》보다 30년 앞선 가우 원년(1056)에 편찬된 《당사논단(唐史論斷)》이 92개 표제로 논단한 것에 비해, 득정과 실정에 대해 286건으로 상세히 논평하여 비평서로서 큰 가치를 지녔다.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따른 그의 시각은 《당감》의 서술에 잘 드러나 있다. 즉, 태종은 고조를 핍박하여 내선(內禪)한 것이며, 왕황후(王皇后)의 폐위와 무측천(武則天)의 책립을 비롯하여 현종이 태묘(太廟)를 칠실(七室)에서 구실(九室)로 증가시킨 것 등이 모두 예제에 어긋난 것이라 하였다. 태종의 현무문(玄武門)의 변과 무측천의 통치에 대해서도 천리(天理)와 인륜을 거스른 행위라 비난하여, 사마광을 비롯한 당시인의 관점과는 다르지만 남송 이학가(理學家)들에게 받아들여져 주희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땅을 넓히는 것은 덕을 넓히는 것만 같지 못하고, 병사를 강하게 하는 것은 백성을 강하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廣地不若廣德 强兵不若强民.] 〈태종(太宗) 1〉”
• “군자와 소인은 그 무리를 끌어들여 조정에 모으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인군(人君)이 현자 한명을 얻어 재상으로 삼으면, 재상된 자는 그 무리를 추천하여 나아가게 하고, 후에 나아가는 자 역시 그 무리를 추천하니, 이어지는 자들이 현자가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다.[君子與小人莫不引其類而聚於朝 人君得一賢者而相之 爲相者舉其類而進之 後之進者亦舉其類 繼之者莫非賢也]” 〈덕종(德宗) 3〉
• “사마천(司馬遷)이 여후본기(呂后本紀)를 지은 이래로 후세의 사관이 이를 따랐던 까닭에 당사(唐史)에도 역시 무후(武后)를 본기에 넣었는데, 일의 본체를 기록한 것은 곧 사실이나 춘추의 필법과 같은 평가는 쓰지 않았다.[自司馬遷作呂后本紀 後世爲史者因之 故唐史亦列武后於本紀 其于紀事之體則實矣 春秋之法則未用也]” 〈중종(中宗)〉
(2) 색인어:당감(唐鑑), 범조우(范祖禹), 당사논단(唐史論斷), 제왕학(帝王學), 자치통감(資治通鑑), 사마광(司馬光), 여조겸(呂祖謙), 주희(朱熹)
(3) 참고문헌
• 和刻本「唐鑑」について(大塚宏昌, 漢籍研究会)
• 范祖禹的史學與政論(王德毅, 宋史硏究論集, 商務印書館)
• 范祖禹與唐鑑(劉德美, 食貨, 華藝線上圖書館)
• 范祖禹《唐鑑》之研究(陳鏡光, 中國文化大學史學研究所)
• 唐鑑: 文白對照全譯(楊曉敏 等 譯注, 新疆少年出版社)
【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