歲庚午에 庸再遊學京師하여 一時師友之盛으로 日以經史古義相硏究라 樂此不疲하여 兀坐成疾이나 不以爲困也라
時有父子著述하여 一家兩先生者하니 王石渠觀察曁令嗣曼卿學士也요 有夫婦著述하여 一家兩先生者하니 郝蘭皐戶部曁德配王婉佺安人也라
庸寓吳鑑菴通政家에 距石渠先生之居僅數廛이라 因得朝夕請益하고 而慕安人之學之名特至하여 嘗以孝節錄으로 從戶部乞言於安人하니 撰讀孝節錄一首以應이라
性情眞摯하고 文辭高曠하여 得六朝文法하고 書法亦遒勁하니 唐人歐褚遺法也라
旣而요 戶部以安人所著列女傳補注八卷과 敍錄一卷으로 屬庸校定하고 幷索序言하니 時庸久病하여 束裝南歸有日矣라
凡京師名卿大夫與庸交好者 無不詔庸以讀書爲戒하여 謂當心如槁木死灰하여 以資靜養이라하니 雖庸이나 亦以爲然이라 然感戶部相待之雅와 安人諈諉之意하여 又不能辭也라
力疾開卷하여 一再勘之하니 詮釋名理는 詞簡義洽하고 校正文字는 精確不磨한대 貫串經傳하여 尤多心得하니 不覺肅然敬起하여 以爲當代女師에 一人而已矣라
是書先有曹大家綦母邃虞貞節三家注하니 補注以曹爲主하되 而兼采綦母貞節之義라 故名이라
其注有虞二妃頌
의 元始二妃
하여 曰元
은 大也
오 始
는 初也
라 夫婦爲人之大始
니 劉氏
에 又於此託始也
라
注姜嫄傳의 姜嫄之性이 淸靜專一하여 曰荀子云 好稼者衆矣나 而后稷獨傳者는 壹也라하니 是后稷之性專壹이요 亦母敎使然이라
注簡狄傳
의 簡狄性好人事之治
하여 曰人事
는 謂五敎之屬
이니 契
明人倫
은 本之母敎
라
注衛寡夫人傳의 遂入하여 持三年之喪하여 曰遂入은 非禮也요 喪又不應三年也라
曾子問
에 取女
호되 有吉日而女死
커든 壻齊衰而弔
하고 旣葬
除之
하리니 夫死
커든 亦如之
라하니 鄭注
에 未有期三年之恩也
라
齊女情過乎禮하여 未爲中道라하니 斯竝微言하여 善解禮意라
故熹平立石에 亦本魯學하고 鄭康成箋毛에 用魯義尤多하니 范史特言從張恭祖受韓詩者는 疏漏之談耳라
補注考之經傳하고 核之毛韓호되 其文之不同과 義之有異者는 每定爲魯詩하니 斯亦近儒所罕聞이요 經生之絶業也라
如湯妃有㜪傳曰 詩云窈窕淑女
는 君子好逑
로다하니 言賢女能爲君子和好衆妾
이라하니 補注曰 此
魯詩說也
라 與毛氏異義
하니 爲鄭箋之所本
이라하여늘
衛姑定姜傳曰 詩云先君之思하여 以畜寡人이라하고 君子謂定姜爲慈姑라하니 補注曰 畜은 孝也니 言婦能孝於姑라 此魯詩說이요 毛詩畜作勖하니 義異라
按鄭注禮記坊記하여 以畜爲孝라하고 釋文云 是魯詩라하고 鄭志以爲盧子幹義同이라
晉弓工妻傳曰 君聞昔者公劉之行乎
아 羊牛踐葭葦
어늘 惻然爲民痛之
라 恩及草木
하니 補注曰 此以爲公劉事
니 蓋魯詩說
이라
按後漢寇榮傳曰 公劉敦行葦
하니 世稱其仁
이라하고 潛夫論德化篇引行葦及旱麓詩云 公劉厚德
이라 恩及草木
하니 羊牛六畜
이 文選班叔皮北征賦曰 慕公劉之遺德
이 及行葦之不傷
이라하니 皆本魯詩說也
라
陳國辯女傳에 乃爲之歌曰 墓門有梅어늘 有鴞萃止로다하니 補注曰 梅當作棘이니
楚辭注云 解居父聘吳
한대 過陳之墓門
이라가 見婦人
하고 欲與之淫泆
하니 婦人引詩刺之曰 墓門有棘
하니 有鴞萃止
라하니
庸著拜經日記에 考王叔師楚辭章句하여 徵詩與毛韓不同하여 定爲魯義하니 與補注正合이라 其他人人所習知及文字小異者는 不具著라도 亦足證立說之精矣리라
竊以三代治亂之原이 多本女德하고 士大夫興衰之兆도 亦由婦人하니 考之於古하고 驗之於今이면 昭昭然若黑白之分矣라
中壘斯傳은 爲垂世立敎之大經이어늘 士人旣多所不習하고 女子又鮮能通此하니 古道之不興이 蓋由是矣라
幸得如安人者하여 爲之疏通疑義하고 詮補舊說하여 而大旨瞭然하니 宜家置一編하여 爲人倫之始와 王化之端이니 海內之治가 將駸駸日上이리라
庸經生也라 不敢爲大言하고 姑摭微文末義와 平日所誦習者하여 應安人之屬하고 幷以質之戶部云爾라
경오년庚午年(1750,
옹정雍正 15)에 내(
)가 재차
경사京師에 유학하여 당대의 훌륭한
사우師友들과 날마다
경사經史의
고의古義를 연구하였다. 이를 즐거워하여 피곤한 줄도 모른 채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병이 들었으나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당시
부자父子가 저술하여 한 집안에 두 선생이 계신 경우가 있었으니 관찰사
와 그의 훌륭한 아들
학사學士 이요,
부부夫婦가 저술하여 한 집안에 두 선생이 계신 경우가 있었으니
호부시랑戶部侍郞 와 그의 덕스런 배필인
이다.
내가
통정通政 의 집에
우거寓居할 적에
석거石渠 선생의 집이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있었는지라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배우기를 청하였으며,
안인安人의 학문과 명성이 지극함을 경모하여 일찍이 ≪
효절록孝節錄≫을 가지고
호부시랑戶部侍郞을 통해
안인安人에게 한 마디 말을 청하니, 〈
독효절록讀孝節錄〉 1
수首를 지어서 응답하였다.
안인安人은
성정性情이 진실하고 차분하며
문사文辭가 고아하고 활달하여
을 터득하였고,
서법書法 또한 준엄하고 강건하니
당唐나라
의
유법遺法이었다.
얼마 뒤 호부시랑戶部侍郞이 안인安人이 저술한 ≪열녀전보주列女傳補注≫ 8권卷과 ≪서록敍錄≫ 1권卷을 가지고 나에게 교정을 부탁하고 아울러 서언序言을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당시에 나는 오래도록 병을 앓아 행장을 꾸려 남쪽으로 돌아온 지 여러 날이 되었다.
나와 교유하였던 경사京師의 이름난 경卿과 대부大夫가 모두들 나에게 책을 많이 읽지 말라고 고하면서 마음을 마른 나무나 식은 재처럼 무심하게 하여 정양靜養을 도와야 한다고 하였다. 내 비록 용렬하나 또한 옳은 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호부시랑의 고아한 대우와 안인安人의 간곡한 부탁에 감동하여 사양할 수 없었다.
병을 무릅쓰고 책을 펼쳐 한 두 차례 교감校勘하니 명리名理를 해석한 것은 말이 간이簡易하면서도 뜻이 풍부하였고 문자文字를 교정校正한 것은 매우 정확하였는데, 경전에 통달하여 특히나 마음으로 터득한 것이 많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숙연히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 당대當代의 여사女師 중에 제일인자라고 생각하였다.
이 ≪열녀전≫에 대해서는 앞서
․
․
삼가三家의
주注가 있었는데, ≪열녀전보주≫는 조대고의
주注를 위주로 하면서도 기모수와 우정절의 뜻을 겸하여 채택하였기 때문에 ‘
보주補注’라고 명명한 것이다.
〈유우이비전有虞二妃傳〉의 송頌에서 ‘부부의 인륜이 두 비妃에게 시작되었다.[원시이비元始二妃]’라고 한 것에 대해 주注하기를 “‘원元’은 처음이고, ‘시始’는 시초이다. 부부가 사람의 시초가 되는데, 유씨劉氏(유향劉向)가 전傳을 지을 적에 또 여기에 시초를 의탁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강원전姜嫄傳〉에서 ‘
의 성품이
청정淸靜하고
전일專一하다.[
강원지성姜嫄之性 청정전일淸靜專一]’라고 한 것에 대해
주注하기를 “
에 이르기를 ‘농사를 좋아하는 자가 많으나
후직后稷만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은
전일專一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후직의 성품이 전일한 것이고, 또한 어머니의 가르침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
간적전簡狄傳〉에서 ‘
의 성품이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예의를 닦기를 좋아하였다.[
간적성호인사지치簡狄性好人事之治]’라고 한 것에 대해
주注하기를 “‘
인사人事’는
의 등속을 말한다.
설契이
인륜人倫을 밝힌 것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근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과부인전衛寡夫人傳〉에서 ‘마침내 〈위衛나라로〉 들어가 삼년상三年喪을 치렀다.[수입遂入 지삼년지상持三年之喪]’라고 한 것에 대해 주注하기를 “‘마침내 〈위衛나라로〉 들어간 것’은 예禮가 아니고, 상喪 역시 삼년상을 행해서는 안 된다.
≪
예기禮記≫ 〈
증자문曾子問〉에 ‘증자가 묻기를 「여자를 취하되
길일吉日을 정했는데 여자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孔子가 「신랑 될 사람은
재최복齊衰服을 입고 가서
조문弔問하고
장례葬禮를 지낸 뒤
복服을 벗으니, 신랑 될 사람이 죽으면 〈신부 될 사람〉 또한 이와 같이 한다.」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의
주注에 ‘〈장례를 지낸 뒤에
복服을 벗는 이유는〉
기년期年이나
삼년三年의 은혜가 있지 않아서이다. 여자의 경우에는
참최복斬衰服을 입는다.’라고 하였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은미한 성인의 말씀을 아울러서
예禮의
본의本義를 잘 풀이한 것이다.
≪
한서漢書≫ 〈
예문지藝文志〉에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또한
노학魯學에 근본하였고,
정강성鄭康成(
정현鄭玄)이 ≪
모시毛詩≫에
전주箋注할 때 ≪노시≫의 뜻을 채용한 것이 더욱 많았으니,
은 소략한 담론일 뿐이다.
≪열녀전보주≫는
경전經傳을 상고하고 ≪모시≫와 ≪한시≫를 고찰하되 그 문장이 같지 않은 것과 의미가 차이가 있는 것은 매양 ≪노시≫로 확정하였으니, 이 또한 근래의
유자儒者에게 보기 드문 바이고
에게는 끊어진 학업이다.
예컨대, 〈
탕비유신전湯妃有㜪傳〉에는 “≪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라고 하였으니, 현명한 여자가 군자를 위하여 여러
첩妾과 화목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보주補注에서는 “이는 ≪노시≫의
설說인 듯하다.
모씨毛氏와 뜻이 다르니, 정현의
전주箋注가 근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식견이 얕은 자가 상고하지 않고 드디어 정현의 전주가 ≪모시≫를 고쳤다고 비판하였다.
살펴보건대,
정현鄭玄이 ≪
예기禮記≫ 〈
방기坊記〉에
주注를 내어 “‘
휵畜’은 ‘
효孝’이다.”라고 하였고,
에 이르기를 “이는 바로 ≪노시≫이다.”라고 하였고,
에 “
의 뜻도 같다.”라고 하였다.
〈진궁공처전晉弓工妻傳〉에는 “임금께서는 옛날 공류公劉의 일을 들으셨겠지요. 양과 소가 갈대밭을 짓밟자 측연惻然히 백성을 위해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은혜가 초목에까지 미쳤으니, 어찌 무고한 이를 죽이고자 하였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보주補注에서 “이는 공류의 일로 여긴 것이니, 아마 ≪노시≫의 설說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
후한서後漢書≫ 〈
구영전寇榮傳〉에 말하기를 “공류가 길 가의 갈대를 무성하게 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
인仁을 칭송하였다.”라고 하였고,
〈
덕화편德化篇〉에 〈
행위行葦〉․〈
한록旱麓〉
시詩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공류가
후덕厚德한지라 은혜가 초목에 미치니, 소와 양 등의
육축六畜까지도 덕에 감화되었다.”라고 하였고,
에 실린
의 〈
북정부北征賦〉에 이르기를 “공류가 끼친 덕이 길 가의 갈대가 손상되지 않는데 미침을 경모한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노시≫의
설說에 근본한 것이다.
〈진국변녀전陳國辯女傳〉에는 “〈뽕을 따던 여자가〉 이에 노래하기를 ‘묘문墓門에 매화나무가 있거늘, 올빼미가 모여 앉았도다.[묘문유매墓門有梅 유효췌지有鴞萃止]’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보주補注에서 “‘매梅’는 응당 ‘극棘’이 되어야 한다.
≪초사楚辭≫ 주注에 이르기를 ‘〈진晉나라〉 해거보解居父가 오吳나라에 장가들었는데, 진陳나라의 묘문墓門을 지나다가 자식을 업은 부인婦人을 보고 그와 간음하고자 하니, 부인이 시詩를 인용하여 풍자하기를 「묘문墓門에 가시나무가 있으니, 올빼미가 모여 앉았도다.」라고 하였다.
이는 묘문에 가시나무가 있으니 비록 사람은 없지만 가시나무 위에 오히려 올빼미가 있으니, 너는 유독 부끄럽지 않은가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아마 모두 ≪노시≫의 설說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
배경일기拜經日記≫를 저술할 적에
의 ≪
초사장구楚辭章句≫를 상고하여
시詩가 ≪
모시毛詩≫․≪
한시韓詩≫와 같지 않음을 증명하여 ≪
노시魯詩≫의 뜻으로 확정하였으니, ≪열녀전보주≫와 정확히 합치하였다. 그 밖에 사람들이 익히 아는 바와 문자가 조금 다른 경우는 자세히 드러내지 않더라도
입설立說의 정밀함을 증명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생각건대 삼대三代의 치란治亂의 근원은 대부분 여인의 덕德에 근본하고 사대부士大夫의 흥망興亡의 조짐도 부인으로 말미암았으니, 옛날 일을 상고하고 지금 일을 징험하면 흑백黑白의 구분처럼 분명할 것이다.
의 이 ≪열녀전≫은 후세에 가르침을 세운
대경大經인데,
사인士人들은 이미 대부분 익히지 않고
여자女子들은 또 이를 아는 자가 드무니,
고도古道가 흥기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안인安人과 같은 분이 의의疑義를 분석하고 구설舊說을 보완해서 대지大旨가 명백해졌으니, 의당 집안에 이 책을 1편씩 두어서 인륜人倫의 시작과 왕화王化의 단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해내海內의 다스림이 장차 점점 날로 향상될 것이다.
나는 경생經生인지라 감히 큰소리는 치지 못하고 우선 말단적인 문의文義와 평소에 익히 아는 것을 모아서 안인安人의 부탁에 응하고 아울러 호부시랑戶部侍郞에게 질정質正한다.
가경嘉慶 16년(1811) 가을 7월 무자일戊子日에 무진武進 장용臧庸은 서문序文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