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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女傳補注(1)

열녀전보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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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女傳補注序(臧庸)
歲庚午 庸再遊學京師하여 一時師友之盛으로 日以經史古義相硏究 樂此不疲하여 兀坐成疾이나 不以爲困也
時有父子著述하여 一家兩先生者하니 王石渠觀察曁令嗣曼卿學士也 有夫婦著述하여 一家兩先生者하니 郝蘭皐戶部曁德配王婉佺安人也
庸寓吳鑑菴通政家 距石渠先生之居僅數廛이라 因得朝夕請益하고 而慕安人之學之名特至하여 嘗以孝節錄으로 從戶部乞言於安人하니 撰讀孝節錄一首以應이라
性情眞摯하고 文辭高曠하여 得六朝文法하고 書法亦遒勁하니 唐人歐褚遺法也
旣而 戶部以安人所著列女傳補注八卷 敍錄一卷으로 屬庸校定하고 幷索序言하니 時庸久病하여 束裝南歸有日矣
凡京師名卿大夫與庸交好者 無不詔庸以讀書爲戒하여 謂當心如槁木死灰하여 以資靜養이라하니 雖庸이나 亦以爲然이라 然感戶部相待之雅 安人諈諉之意하여 又不能辭也
力疾開卷하여 一再勘之하니 詮釋名理 詞簡義洽하고 校正文字 精確不磨한대 貫串經傳하여 尤多心得하니 不覺肅然敬起하여 以爲當代女師 一人而已矣
是書先有曹大家綦母邃虞貞節三家注하니 補注以曹爲主하되 而兼采綦母貞節之義 故名이라
其注有虞二妃頌 元始二妃하여 曰元 大也 初也 夫婦爲人之大始 劉氏 又於此託始也
注姜嫄傳 姜嫄之性 淸靜專一하여 曰荀子云 好稼者衆矣 而后稷獨傳者 壹也라하니 是后稷之性專壹이요 亦母敎使然이라
注簡狄傳 簡狄性好人事之治하여 曰人事 謂五敎之屬이니明人倫 本之母敎
注衛寡夫人傳 遂入하여 持三年之喪하여 曰遂入 非禮也 喪又不應三年也
曾子問 取女호되 有吉日而女死커든 壻齊衰而弔하고 旣葬除之하리니 夫死커든 亦如之라하니 鄭注 未有期三年之恩也
齊女情過乎禮하여 未爲中道라하니 斯竝微言하여 善解禮意
劉氏世傳魯詩어늘 漢志言三家魯最爲近之
故熹平立石 亦本魯學하고 鄭康成箋毛 用魯義尤多하니 范史特言從張恭祖受韓詩者 疏漏之談耳
補注考之經傳하고 核之毛韓호되 其文之不同 義之有異者 每定爲魯詩하니 斯亦近儒所罕聞이요 經生之絶業也
如湯妃有㜪傳曰 詩云窈窕淑女 君子好逑로다하니 言賢女能爲君子和好衆妾이라하니 補注曰 此魯詩說也 與毛氏異義하니 爲鄭箋之所本이라하여늘
而淺者未考하고 遂議鄭箋爲改毛矣
衛姑定姜傳曰 詩云先君之思하여 以畜寡人이라하고 君子謂定姜爲慈姑라하니 補注曰 畜 孝也 言婦能孝於姑 此魯詩說이요 毛詩畜作勖하니 義異
按鄭注禮記坊記하여 以畜爲孝라하고 釋文云 是魯詩라하고 鄭志以爲盧子幹義同이라
晉弓工妻傳曰 君聞昔者公劉之行乎 羊牛踐葭葦어늘 惻然爲民痛之 恩及草木하니 補注曰 此以爲公劉事 蓋魯詩說이라
按後漢寇榮傳曰 公劉敦行葦하니 世稱其仁이라하고 潛夫論德化篇引行葦及旱麓詩云 公劉厚德이라 恩及草木하니 羊牛六畜 文選班叔皮北征賦曰 慕公劉之遺德 及行葦之不傷이라하니 皆本魯詩說也
陳國辯女傳 乃爲之歌曰 墓門有梅어늘 有鴞萃止로다하니 補注曰 梅當作棘이니
楚辭注云 解居父聘吳한대 過陳之墓門이라가 見婦人하고 欲與之淫泆하니 婦人引詩刺之曰 墓門有棘하니 有鴞萃止라하니
庸著拜經日記 考王叔師楚辭章句하여 徵詩與毛韓不同하여 定爲魯義하니 與補注正合이라 其他人人所習知及文字小異者 不具著라도 亦足證立說之精矣리라
竊以三代治亂之原 多本女德하고 士大夫興衰之兆 亦由婦人하니 考之於古하고 驗之於今이면 昭昭然若黑白之分矣
中壘斯傳 爲垂世立敎之大經이어늘 士人旣多所不習하고 女子又鮮能通此하니 古道之不興 蓋由是矣
幸得如安人者하여 爲之疏通疑義하고 詮補舊說하여 而大旨瞭然하니 宜家置一編하여 爲人倫之始 王化之端이니 海內之治 將駸駸日上이리라
庸經生也 不敢爲大言하고 姑摭微文末義 平日所誦習者하여 應安人之屬하고 幷以質之戶部云爾
嘉慶十六年秋七月戊子日 武進臧庸序하다


열녀전보주列女傳補注
경오년庚午年(1750, 옹정雍正 15)에 내()가 재차 경사京師에 유학하여 당대의 훌륭한 사우師友들과 날마다 경사經史고의古義를 연구하였다. 이를 즐거워하여 피곤한 줄도 모른 채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병이 들었으나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당시 부자父子가 저술하여 한 집안에 두 선생이 계신 경우가 있었으니 관찰사 와 그의 훌륭한 아들 학사學士 이요, 부부夫婦가 저술하여 한 집안에 두 선생이 계신 경우가 있었으니 호부시랑戶部侍郞 와 그의 덕스런 배필인 이다.
내가 통정通政 의 집에 우거寓居할 적에 석거石渠 선생의 집이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있었는지라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배우기를 청하였으며, 안인安人의 학문과 명성이 지극함을 경모하여 일찍이 ≪효절록孝節錄≫을 가지고 호부시랑戶部侍郞을 통해 안인安人에게 한 마디 말을 청하니, 〈독효절록讀孝節錄〉 1를 지어서 응답하였다.
안인安人성정性情이 진실하고 차분하며 문사文辭가 고아하고 활달하여 을 터득하였고, 서법書法 또한 준엄하고 강건하니 나라 유법遺法이었다.
얼마 뒤 호부시랑戶部侍郞안인安人이 저술한 ≪열녀전보주列女傳補注≫ 8과 ≪서록敍錄≫ 1을 가지고 나에게 교정을 부탁하고 아울러 서언序言을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당시에 나는 오래도록 병을 앓아 행장을 꾸려 남쪽으로 돌아온 지 여러 날이 되었다.
나와 교유하였던 경사京師의 이름난 대부大夫가 모두들 나에게 책을 많이 읽지 말라고 고하면서 마음을 마른 나무나 식은 재처럼 무심하게 하여 정양靜養을 도와야 한다고 하였다. 내 비록 용렬하나 또한 옳은 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호부시랑의 고아한 대우와 안인安人의 간곡한 부탁에 감동하여 사양할 수 없었다.
병을 무릅쓰고 책을 펼쳐 한 두 차례 교감校勘하니 명리名理를 해석한 것은 말이 간이簡易하면서도 뜻이 풍부하였고 문자文字교정校正한 것은 매우 정확하였는데, 경전에 통달하여 특히나 마음으로 터득한 것이 많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숙연히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 당대當代여사女師 중에 제일인자라고 생각하였다.
이 ≪열녀전≫에 대해서는 앞서 삼가三家가 있었는데, ≪열녀전보주≫는 조대고의 를 위주로 하면서도 기모수와 우정절의 뜻을 겸하여 채택하였기 때문에 ‘보주補注’라고 명명한 것이다.
유우이비전有虞二妃傳〉의 에서 ‘부부의 인륜이 두 에게 시작되었다.[원시이비元始二妃]’라고 한 것에 대해 하기를 “‘’은 처음이고, ‘’는 시초이다. 부부가 사람의 시초가 되는데, 유씨劉氏(유향劉向)가 을 지을 적에 또 여기에 시초를 의탁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강원전姜嫄傳〉에서 ‘의 성품이 청정淸靜하고 전일專一하다.[강원지성姜嫄之性 청정전일淸靜專一]’라고 한 것에 대해 하기를 “에 이르기를 ‘농사를 좋아하는 자가 많으나 후직后稷만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은 전일專一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후직의 성품이 전일한 것이고, 또한 어머니의 가르침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간적전簡狄傳〉에서 ‘의 성품이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예의를 닦기를 좋아하였다.[간적성호인사지치簡狄性好人事之治]’라고 한 것에 대해 하기를 “‘인사人事’는 의 등속을 말한다. 인륜人倫을 밝힌 것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근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과부인전衛寡夫人傳〉에서 ‘마침내 〈나라로〉 들어가 삼년상三年喪을 치렀다.[수입遂入 지삼년지상持三年之喪]’라고 한 것에 대해 하기를 “‘마침내 〈나라로〉 들어간 것’은 가 아니고, 역시 삼년상을 행해서는 안 된다.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증자가 묻기를 「여자를 취하되 길일吉日을 정했는데 여자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孔子가 「신랑 될 사람은 재최복齊衰服을 입고 가서 조문弔問하고 장례葬禮를 지낸 뒤 을 벗으니, 신랑 될 사람이 죽으면 〈신부 될 사람〉 또한 이와 같이 한다.」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에 ‘〈장례를 지낸 뒤에 을 벗는 이유는〉 기년期年이나 삼년三年의 은혜가 있지 않아서이다. 여자의 경우에는 참최복斬衰服을 입는다.’라고 하였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은미한 성인의 말씀을 아울러서 본의本義를 잘 풀이한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노학魯學에 근본하였고, 정강성鄭康成(정현鄭玄)이 ≪모시毛詩≫에 전주箋注할 때 ≪노시≫의 뜻을 채용한 것이 더욱 많았으니, 은 소략한 담론일 뿐이다.
≪열녀전보주≫는 경전經傳을 상고하고 ≪모시≫와 ≪한시≫를 고찰하되 그 문장이 같지 않은 것과 의미가 차이가 있는 것은 매양 ≪노시≫로 확정하였으니, 이 또한 근래의 유자儒者에게 보기 드문 바이고 에게는 끊어진 학업이다.
예컨대, 〈탕비유신전湯妃有㜪傳〉에는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라고 하였으니, 현명한 여자가 군자를 위하여 여러 과 화목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보주補注에서는 “이는 ≪노시≫의 인 듯하다. 모씨毛氏와 뜻이 다르니, 정현의 전주箋注가 근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식견이 얕은 자가 상고하지 않고 드디어 정현의 전주가 ≪모시≫를 고쳤다고 비판하였다.
살펴보건대, 정현鄭玄이 ≪예기禮記≫ 〈방기坊記〉에 를 내어 “‘’은 ‘’이다.”라고 하였고, 에 이르기를 “이는 바로 ≪노시≫이다.”라고 하였고, 에 “의 뜻도 같다.”라고 하였다.
진궁공처전晉弓工妻傳〉에는 “임금께서는 옛날 공류公劉의 일을 들으셨겠지요. 양과 소가 갈대밭을 짓밟자 측연惻然히 백성을 위해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은혜가 초목에까지 미쳤으니, 어찌 무고한 이를 죽이고자 하였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보주補注에서 “이는 공류의 일로 여긴 것이니, 아마 ≪노시≫의 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후한서後漢書≫ 〈구영전寇榮傳〉에 말하기를 “공류가 길 가의 갈대를 무성하게 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 을 칭송하였다.”라고 하였고, 덕화편德化篇〉에 〈행위行葦〉․〈한록旱麓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공류가 후덕厚德한지라 은혜가 초목에 미치니, 소와 양 등의 육축六畜까지도 덕에 감화되었다.”라고 하였고, 에 실린 의 〈북정부北征賦〉에 이르기를 “공류가 끼친 덕이 길 가의 갈대가 손상되지 않는데 미침을 경모한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노시≫의 에 근본한 것이다.
진국변녀전陳國辯女傳〉에는 “〈뽕을 따던 여자가〉 이에 노래하기를 ‘묘문墓門에 매화나무가 있거늘, 올빼미가 모여 앉았도다.[묘문유매墓門有梅 유효췌지有鴞萃止]’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보주補注에서 “‘’는 응당 ‘’이 되어야 한다.
초사楚辭에 이르기를 ‘〈나라〉 해거보解居父나라에 장가들었는데, 나라의 묘문墓門을 지나다가 자식을 업은 부인婦人을 보고 그와 간음하고자 하니, 부인이 를 인용하여 풍자하기를 「묘문墓門에 가시나무가 있으니, 올빼미가 모여 앉았도다.」라고 하였다.
이는 묘문에 가시나무가 있으니 비록 사람은 없지만 가시나무 위에 오히려 올빼미가 있으니, 너는 유독 부끄럽지 않은가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아마 모두 ≪노시≫의 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배경일기拜經日記≫를 저술할 적에 의 ≪초사장구楚辭章句≫를 상고하여 가 ≪모시毛詩≫․≪한시韓詩≫와 같지 않음을 증명하여 ≪노시魯詩≫의 뜻으로 확정하였으니, ≪열녀전보주≫와 정확히 합치하였다. 그 밖에 사람들이 익히 아는 바와 문자가 조금 다른 경우는 자세히 드러내지 않더라도 입설立說의 정밀함을 증명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생각건대 삼대三代치란治亂의 근원은 대부분 여인의 에 근본하고 사대부士大夫흥망興亡의 조짐도 부인으로 말미암았으니, 옛날 일을 상고하고 지금 일을 징험하면 흑백黑白의 구분처럼 분명할 것이다.
의 이 ≪열녀전≫은 후세에 가르침을 세운 대경大經인데, 사인士人들은 이미 대부분 익히지 않고 여자女子들은 또 이를 아는 자가 드무니, 고도古道가 흥기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안인安人과 같은 분이 의의疑義를 분석하고 구설舊說을 보완해서 대지大旨가 명백해졌으니, 의당 집안에 이 책을 1편씩 두어서 인륜人倫의 시작과 왕화王化의 단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해내海內의 다스림이 장차 점점 날로 향상될 것이다.
나는 경생經生인지라 감히 큰소리는 치지 못하고 우선 말단적인 문의文義와 평소에 익히 아는 것을 모아서 안인安人의 부탁에 응하고 아울러 호부시랑戶部侍郞에게 질정質正한다.
가경嘉慶 16년(1811) 가을 7월 무자일戊子日무진武進 장용臧庸서문序文을 쓴다.


역주
역주1 臧庸 : 1767~1811. 淸나라의 經學家이다. 자는 在東, 호는 拜經, 본명은 鏞堂이다. 盧文弨와 阮元에게 수학하였으며, 高祖 臧琳의 학문을 이었다. 저서에 ≪拜經日記≫, ≪拜經集≫, ≪孝經考異≫, ≪韓詩遺說≫, ≪爾雅古注≫ 등이 있다.
역주2 王石渠 : 淸나라의 經學家로, 학자들 사이에 ‘石渠先生’이라 불리었던 王念孫(1744~1832)을 말한다. 자는 懷祖, 호는 石臞이며 江蘇 高郵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8세 때 十三經을 독파하였으며, 翰林院庶吉士, 工部主事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讀書雜志≫, ≪釋大≫, ≪王石臞先生遺文≫ 등이 있다.
역주3 曼卿 : 王念孫의 長子 王引之(1766~1834)의 호이다. 자는 伯申, 시호는 文簡이다. 저서에 ≪經義述聞≫, ≪經傳釋詞≫ 등이 있다.
역주4 郝蘭皐 : 蘭皐는 王照圓의 남편 郝懿行(1757~1825)의 호이다. 淸나라의 經學家이자 訓詁學者로 자는 恂久이며 山東 棲霞 사람이다. 戶部主事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爾雅義疏≫, ≪山海經箋疏≫, ≪易說≫, ≪書說≫, ≪春秋說略≫, ≪竹書紀年校正≫ 등이 있다.
역주5 安人 王婉佺 : 婉佺은 王照圓(1763~?)의 자이다. 또 다른 자는 瑞玉이며 山東 福山 사람이다. 經史를 두루 섭렵하여 疏解가 精密하였다. 安人은 明淸時代에 6품관의 아내에 대한 품계이다. 저서에 ≪列女傳補注≫, ≪詩經小記≫, ≪列仙傳校正≫, ≪夢書≫ 등이 있다.
역주6 吳鑑菴 : 鑑菴은 淸나라 吳烜의 자이다. 또 다른 자는 旭臨이며 固始 사람이다. 禮部右侍郞 등을 역임하였다.
역주7 六朝의 文法 : 騈儷文을 말한다. 騈儷文은 對偶文이라는 의미인데, 4언과 6언의 문장을 조직적으로 對偶하고, 平仄을 잘 운용해 音律을 조화롭게 조탁하는 문장형식이다. 六朝時期에 전성을 구가하였고, 唐나라로 내려와 더욱 정교하게 발전하였다.
역주8 歐陽詢과 褚遂良 : 唐나라의 名筆들이다. 구양순(557~641)은 자가 信本으로 隋 煬帝를 섬겨 太常博士가 되고 唐 高祖가 즉위한 뒤 給事中의 요직에 발탁되었다. 처음 王羲之의 書法을 배우고 뒤에 一家를 이루었는데 필체가 준엄하고 강건해 北魏의 書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모든 서체에 능통하였으나 楷書에 가장 뛰어났다. 저수량(596~658)은 자가 登善으로 唐 太宗에게 발탁되어 고위직을 지내고 唐 高宗 때 河南郡公에 봉해지고, 尙書右僕射에 임명되어 세칭 ‘褚河南’으로 불린다. 처음에 虞世南의 書風을 배웠으나, 뒤에 왕희지의 書風을 터득하여 大成하였는데,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用筆에 힘찬 氣勢를 간직하고 있다는 評을 받았다.
역주9 曹大家 : 後漢의 班昭를 가리킨다. 班彪의 딸이자 班固․班超의 누이로, 자는 惠姬이다. 曹世叔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과부가 되었다. 여러 차례 궁에 들어가 황후와 귀인들을 가르쳤으므로 ‘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大家는 여자의 존칭이다.
역주10 綦母邃 : 위진남북조시대 사람으로, 자세한 이력은 미상이다. 저서에 ≪列女傳≫, ≪孟子注≫, ≪二京賦音≫ 등이 있으나, 모두 망실되었다.
역주11 虞貞節 : 三國時代 吳나라 趙姬로, 세상에서 趙母라 일컬었다. 虞韙의 아내로, 才思가 민첩하고 박학다식하였다. 虞韙가 죽은 뒤, 吳大帝가 그녀의 文才를 敬愛하여 宮庭의 女官으로 삼았다. ≪列女傳≫을 注解하였는데, 이를 ≪趙母注≫라 하였다.
역주12 姜嫄 : 周나라의 시조인 后稷의 어머니로, 上帝의 발자국을 밝고 임신하여 후직을 낳았다고 한다.
역주13 荀子 : 性惡說을 주장한 戰國時代 荀況의 저서로 2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荀况은 荀卿 또는 孫卿이라고도 한다.
역주14 簡狄 : 高辛氏의 妃로, 제비의 알을 삼키고 은나라의 시조인 契을 낳았다고 한다.
역주15 五敎 : 다섯 가지 가르침으로,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의 五倫을 말한다.
역주16 鄭玄 : 127~200. 後漢 말기의 대표적 經學者이다. 일찍이 太學에 들어가 여러 經書를 배운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연구와 교육에 진력했는데, 제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44세 때 ‘黨錮의 화’로 禁錮에 처해지자 저술에 전념했으며, 古文의 經說을 위주로 하되 今文의 경설도 받아들여 ≪毛詩≫, ≪周禮≫, ≪儀禮≫, ≪禮記≫ 등 여러 경서에 주석을 달아 漢代의 경학을 집대성하고 古文獻을 정리하는 데 크게 공헌하여, 후대에 그의 학문을 높여 ‘鄭學’이라고 칭하였다.
역주17 齊나라……않는다 :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4 〈貞順傳 衛寡夫人〉의 注에 보인다.
역주18 [作傳] : 저본에는 ‘作傳’이 없으나, 본서 권1 〈母儀傳 有虞二妃〉의 注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9 [之能] : 저본에는 ‘之能’이 없으나, 본서 권1 〈母儀傳 契母簡狄〉의 注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20 [如之何 孔子曰] : 저본에는 ‘如之何 孔子曰’이 없으나, ≪禮記≫ 〈曾子問〉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21 [而] : 저본에는 ‘而’가 없으나, ≪禮記≫ 〈曾子問〉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22 [女服斬衰] : 저본에는 ‘女服斬衰’가 없으나, ≪禮記≫ 〈曾子問〉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23 劉氏는……전수하였는데 : 漢 高祖의 少弟인 劉交가 글을 좋아하여 일찍이 魯나라의 申公, 穆生, 白生 등 세 선비와 더불어 浮丘伯에게 詩를 배웠는데, 그의 詩學이 4세손 劉向에게까지 대대로 전해졌으므로 이른 말이다.(≪漢書≫ 권36 〈楚元王傳〉)
역주24 三家……것이다 : ≪漢書≫ 〈藝文志〉에 “漢나라가 興하자 魯나라 申公이 ≪詩≫를 訓詁하였고, 齊나라의 轅固와 燕나라의 韓生이 모두 傳을 지었다. 혹 ≪春秋≫를 취하기도 하고 雜說을 채택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그 本意가 아니다. 부득이 그 本意를 구해본다면 ≪魯詩≫가 가장 近理할 것이다.[漢興 魯申公爲詩訓故 而齊轅固燕韓生皆爲之傳 或取春秋 采雜說 咸非其本義 與不得已 魯最爲近之]”라고 하였다.
역주25 熹平……적에 : 熹平은 後漢 靈帝의 연호이다. 靈帝 熹平 4년(175)에 鴻都門學을 설치하고 유학자들에게 조서를 내려 五經의 문자를 확정하게 한 다음, 議郞 蔡邕에게 명하여 古文․篆書․隷書 三體로 쓰게 하여 돌에 새겨 太學門 밖에 세우게 하였다. 이를 ‘熹平石經’, ‘鴻都石經’ 등으로 부른다.(≪史略≫ 권3 〈東漢〉, ≪後漢書≫ 권109 〈儒林列傳〉)
역주26 范曄의……것 : ≪後漢書≫ 권35 〈鄭玄傳〉에 “정현이 또 東郡의 張恭祖에게 ≪周禮≫, ≪禮記≫ ≪春秋左氏傳≫, ≪韓詩≫, ≪古文尙書≫를 배웠다.[又從東郡張恭祖受周官禮記左氏春秋韓詩古文尙書]”라고 하였다.
역주27 經生 : 원래는 漢나라의 博士를 뜻하였으나, 후대에는 經學을 공부하는 일반적인 유생을 뜻한다.
역주28 窈窕한……짝이로다 : ≪詩經≫ 〈周南 關雎〉에 보인다.
역주29 詩經에……다르다 : 先君은 定姜의 죽은 남편인 衛 定公을 가리킨다. ≪詩經≫ 〈邶風 燕燕〉에 “仲氏가 미더우니, 그 마음 진실하고 깊도다. 끝내 온순하고 또 순하여, 그 몸을 잘 삼갔고, 선군을 생각하라는 말로써 과인을 권면하도다.[仲氏任只 其心塞淵 終溫且惠 淑愼其身 先君之思 以勗寡人]”라고 하였다. ≪魯詩≫에는 ‘畜’으로 되어 있고, ≪毛詩≫에는 ‘勖’으로 되어 있다.
역주30 經典釋文 : 唐나라 陸德明이 經書의 뜻과 文字의 異同을 모아 考證한 책이다. 3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주31 鄭志 : 鄭玄이 그 門徒들과 問答한 經學에 대한 논설을, 鄭玄의 손자로서 魏나라의 侍中을 역임한 鄭小同이 모아서 편찬한 책이다. ≪隋書≫ 〈經籍志〉에는 모두 11권이라 했으나, 宋나라 때 이르러 3권본이 전해졌다.
역주32 盧子幹 : ?~192. 子幹은 盧植의 字이다. 後漢의 문신으로 涿郡 사람이다. 유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劉備와 公孫瓚의 스승이기도 하다. 어려서 馬融을 사사하고 鄭玄과 교유하였다. 저서에는 ≪尙書章句≫, ≪三禮解詁≫ 등이 있다.
역주33 [蓋] : 저본에는 ‘蓋’가 없으나, 본서 권1 〈母儀傳 湯妃有㜪〉의 王照圓 注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34 潛夫論 : 後漢 王符가 撰한 책 이름이다. 王符가 亂世를 만나서 세속과 영합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고 살면서 당시 정치와 사회에 대한 분개한 심정을 총 35편으로 나누어 펼친 高論이다.(≪後漢書≫ 권49 〈王符列傳〉)
역주35 文選 : 梁나라 昭明太子 蕭統이 편찬한 책으로 原本은 30권이다. 唐나라의 李善이 주석을 붙여 60권이 되었으며, 唐․宋 이래 과거보는 선비들에게 널리 읽혔다.
역주36 班叔皮 : 叔皮는 後漢 安陵 사람 班彪의 자이다. 처음에는 隗囂(외효)를 따르면서 ≪王命論≫을 지어 漢나라 황실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나, 隗囂가 깨닫지 못하자 隗囂를 떠나 竇融(두융)을 따르면서 竇融으로 하여금 光武帝를 섬기게 하였다. 역사 찬술에 뜻을 두어 ≪漢書≫를 저술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의 아들인 班固가 이를 완성하였다.(≪後漢書≫ 권40上 〈班彪列傳〉)
역주37 [豈欲殺不辜者乎] : 저본에는 ‘豈欲殺不辜者乎’가 없으나, 본서 권6 〈變通傳 晉弓工妻〉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38 [且猶感德] : 저본에는 ‘且猶感德’이 없으나, ≪潛夫論≫ 〈德化〉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39 [負其子] : 저본에는 ‘負其子’가 없으나, 본서 권8 〈續傳 陳國辯女〉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40 [言墓門有棘……汝獨不愧也] : 저본에는 ‘言墓門有棘 雖無人 棘上猶有鴞 汝獨不愧也’가 없으나, 본서 권8 〈續傳 陳國辯女〉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41 王叔師 : 叔師는 王逸의 자이다. 後漢 順帝 때 侍中을 지냈다. 劉向이 편한 16편의 작품에 王逸이 다시 직접 지은 작품 〈九思〉와 班固가 지은 두 편의 序를 더해 17권으로 만들고 각각 주석을 달아 ≪楚辭章句≫를 지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초사≫ 주석본이다.
역주42 中壘 : 漢나라 때 中壘校尉를 지낸 劉向(B.C. 77~B.C. 6)을 가리킨다. 沛縣 사람으로, 본명은 更生이고, 자는 子政이다. 楚元王 劉交의 4세손이고, 劉歆의 아버지다. ≪春秋穀梁傳≫을 공부했고, 〈陰陽休咎論〉으로 時政의 득실을 논하면서 여러 차례 外戚이 권력을 잡는 일에 대해 경계하였다. 궁중 도서의 교감에도 노력하여 해제서 ≪別錄≫을 만들어 중국 目錄學의 鼻祖로 간주된다. 楚나라 屈原의 辭賦와 그의 문인 宋玉의 작품을 모아 ≪楚辭≫를 편집하였으며 春秋戰國 시대로부터 漢나라 때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언행을 분류하여 ≪新序≫와 ≪說苑≫을 편찬했다. 그리고 ≪詩經≫과 ≪書經≫에 나타난 여인들 중 모범과 경계로 삼을 만한 사례를 모아 ≪列女傳≫을 저술했다. 그 밖의 저서에 ≪五經通義≫, ≪洪範五行傳≫ 등이 있다.

열녀전보주(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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