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姓
이요 繚
는 名
이요 子者
는 後人
이 尊而稱之也
니 魏惠王時人
이라
按漢書藝文志云 尉繚二十九篇
이라한대 注云
時人
이라하고
劉向别錄云 繚爲商君學
이라하고 又
이로되 今此書
는 只有二十四篇耳
라
史記
에 亦不見惠王用此人以何職
하니 觀
하면 其不用此人也明矣
라
況是時
에 用事
하여 嫉賢妬能
하여 誘孫臏
하여 其足而黥之
하니 恐此人一見惠王而卽去
하니 今不可考焉
이라
위尉은 성姓이고 요繚는 이름이고 자子는 후인들이 높여서 칭한 것이니, 위魏 혜왕惠王 때 사람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를 살펴보면 “《울료尉繚》가 29편이다.” 하였는데, 주注에 이르기를 “육국六國 때 사람이다.” 하였고,
유향劉向의 《별록别錄》에는 “울료尉繚가 상군商君의 학문을 했다.” 하였고, 또 병가兵家의 형세形勢에 “《울료尉繚》가 31편이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 이 책은 다만 24편이 있을 뿐이다.
《사기史記》에도 위魏 혜왕惠王이 이 사람(尉繚)을 무슨 관직으로 등용했는지 보이지 않으니, 혜왕惠王이 동쪽에서 제齊나라에게 패하고 서쪽에서 진秦나라에게 땅을 잃고 남쪽에서 초楚나라에게 욕을 당한 것을 보면, 울료尉繚를 등용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이때에 방연龐涓이 권력을 행사하여 어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미워하고 질투해서 손빈孫臏을 유인하여 그의 발을 베고 얼굴에 자자刺字(墨刑)를 하였으니, 울료尉繚가 한 번 혜왕惠王을 만나보고는 즉시 떠나간 듯한데, 지금 상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