祖崇義는 後魏殷州刺史로 永康公이요 父詮은 隋趙郡守라
靖은 姿貌瑰偉하고 少有文武材略이러니 每謂所親曰 大丈夫若遇主逢時하면 必當立功立事하여 以取富貴라하다
其舅韓擒虎 號爲名將이러니 每與論兵에 未嘗不稱善하고 撫之曰 可與論孫, 吳之術者는 惟斯人矣라하다
初仕隋하여 爲長安縣功曹하고 後歷駕部員外郎이러니 左僕射楊素와 吏部尙書牛弘이 皆善之하다
會에 高祖擊突厥於塞外러니 靖察高祖하여 知有四方之志하고 因自鎖上變하여 將詣江都할새
高祖克京城하고 執靖將斬之한대 靖大呼曰 公起義兵은 本爲天下除暴亂이어늘 不欲就大事하고 而以私怨斬壯士乎아하니
時에 蕭銑據荊州어늘 遣靖安輯之러니 輕騎至金州하여 遇蠻賊數萬이 屯聚山谷이라
廬江王瑗討之라가 數爲所敗러니 靖與瑗設謀擊之하여 多所克獲하다
高祖怒其遲留하여 陰敕硤州都督許紹斬之러니 紹惜其才하여 爲之請命하여 於是獲免하다
會
에 反
하여 率衆寇
州
하니 趙郡王孝恭與戰
하여 不利
라
靖이 率兵八百하고 襲破其營하며 後又要險設伏하여 臨陣斬肇則하고 俘獲五千餘人하다
高祖甚悅하여 謂公卿曰 朕聞使功不如使過라하더니 李靖이 果展其效라하고
又手敕靖曰 旣往不咎하니 舊事는 吾久忘之矣라하다
四年에 靖又陳十策以圖蕭銑하니 高祖從之하고 授靖行軍總管하고 兼攝孝恭行軍長史하다
高祖以孝恭未更戎旅라하여 三軍之任을 一以委靖하다
其年八月에 集兵於夔州하니 銑以時屬秋潦하여 江水泛漲하고 三峽路險하여 必謂靖不能進이라하여 遂休兵不設備하다
九月에 靖乃率師而進하여 將下峽하니 諸將皆請停兵以待水退어늘
今兵始集에 銑尙未知하니 若乘水漲之勢하여 倏忽至城下하면 所謂疾雷不及掩耳니 此兵家上策이라
縱彼知我나 倉卒徵兵하면 無以應敵이니 此必成擒也라하니
銑將文士弘이 率精兵數萬하고 屯淸江이러니 孝恭欲擊之한대
今新失荊門하고 盡兵出戰하니 此是救敗之師라 恐不可當也니이다
宜且泊南岸하야 勿與爭鋒하고 待其氣衰然後에 奮擊이면 破之必矣리이다
孝恭不從하고 留靖守營하고 率師與賊合戰이러니 孝恭果敗하여 奔於南岸하다
賊委舟大掠하여 人皆負重이라 靖見其軍亂하고 縱兵擊破之하여 獲其舟艦四百餘艘하고 斬首及溺死將萬人이러라
孝恭遣靖하여 率輕兵五千爲先鋒하여 至江陵하여 屯營於城下하다
士弘旣敗에 銑甚懼하여 始徵兵於江南이러니 果不能至라
孝恭以大軍繼進하고 靖又破其驍將楊君茂, 鄭文秀하여 俘甲卒四千餘人하고 更勒兵圍銑城하다
明日에 銑遣使請降한대 靖即入據其城하여 號令嚴肅하고 軍無私焉하다
時諸將이咸請孝恭云 銑之將帥與官軍拒戰死者는 罪狀旣重하니 請籍沒其家하여 以賞將士하노이다
今新定荊, 郢에 宜弘寬大하여 以慰遠近之心이니 降而籍之는 恐非救焚拯溺之義라
但恐自此已南城鎭이 各堅守不下하니 非計之善이라하여
於是에 遂止하니 江漢之域이 聞之하고 莫不爭下하다
以功授上柱國하고 封永康縣公하고 賜物二千五百段하며 詔命檢校荊州刺史하고 承制拜授하다
乃度嶺至桂州하여 遣人分道招撫하니 其大首領馮盎, 李光度, 寧眞長等이 皆遣子弟來謁이어늘
靖承制하여 授其官爵하니 凡所懷輯이 九十六州에 戶六十餘萬이라
優詔勞勉하고 授嶺南道撫慰大使, 檢校桂州總管하다
十六年
에 輔公
이 於丹陽反
이어늘 詔孝恭爲元帥
하고 靖爲副以討之
할새 李勣, 任瑰, 張鎭州, 黃君漢等七總管
이 竝受節度
하다
師次舒州러니 公祏이 遣將馮惠亮하여 率舟師三萬하고 屯當塗하고 陳正通, 徐紹宗은 領步騎二萬하고 屯靑林山하며
仍於梁山
에 連鐵鎖以斷江路
하고 築却月城
하니 延袤十餘里
하여 與惠亮爲
하다
孝恭이 集諸將會議한대 皆云 惠亮, 正通이 竝握強兵하고 爲不戰之計하니 城柵旣固하여 卒不可攻이라
請直指丹陽하여 掩其巢穴하노니 丹陽旣破면 惠亮自降하리이다
公祏精銳가 雖在水陸二軍이나 然其自統之兵도 亦皆勁勇이라
惠亮等城柵도 尙不可攻이어든 公祏旣保石頭하니 豈應易拔이리오
若我師至丹陽하여 留停旬月이면 進則公祏未平하고 退則惠亮爲患하리니 此便腹背受敵하여 恐非萬全之計니이다
惠亮, 正通은 皆是百戰餘賊이니 必不憚於野戰이요
止爲公祏立計하여 令其持重하여 但欲不戰以老我師라
今若攻其城柵하면 乃是出其不意니 滅賊之機 唯在此擧니이다
靖乃率黃君漢等하고 先擊惠亮하여 苦戰破之하니 殺傷及溺死者萬餘人이라
靖率輕兵하고 先至丹陽하니 公祏大懼하고 先遣僞將左遊仙하여 領兵守會稽하여 以爲形援하고
公祏擁兵東走하여 以趨遊仙이러니 至吳郡하여 與惠亮, 正通으로 竝相次擒獲하니 江南悉平하다
於是에 置東南道行臺하고 拜靖行臺兵部尙書하며 賜物千段과 奴婢百口와 馬百匹하다
丹陽이 連罹兵寇하여 百姓凋弊어늘 靖鎭撫之하니 吳, 楚以安하다
八年에 突厥寇太原한대 以靖爲行軍總管하여 統江淮兵一萬하여 與張瑾屯太谷하다
高祖每云 李靖
은 是蕭銑, 輔公祏
이니 古之名將
이 豈能及也
리오하다
九年에 突厥莫賀咄設이 寇邊이어늘 徵靖爲靈州道行軍總管하다
頡利可汗
이 入涇陽
이어늘 靖率兵
하여 倍道趨
州
하여 邀賊歸路
러니 旣而與虜和親而罷
하다
太宗嗣位하여 拜刑部尙書하고 竝錄前後功하여 賜實封四百戶하다
貞觀二年에 以本官兼檢校中書令하며 三年에 轉兵部尙書하다
突厥諸部離叛이어늘 朝廷將圖進取하여 以靖爲代州道行軍總管하여 率驍騎三千하고 自馬邑으로 出其不意하여 直趨惡陽嶺以逼之하다
頡利可汗이 不虞於靖이러니 見官軍奄至하고 於是大懼하여 相謂曰 唐兵若不傾國而來면 靖豈敢孤軍而至리오하고 一日數驚하다
靖候知之하고 潛令間諜으로 離其心腹하여 其所親康蘇密이 來降하다
四年에 靖進擊定襄하여 破之하고 獲隋齊王暕之子楊正道와 及煬帝蕭后하여 送于京師하니 可汗이 僅以身遁하다
以功進封代國公하고 賜物六百段及名馬, 寶器焉하다
太宗嘗謂曰 昔
은 提步卒五千
하여 不免身降匈奴
로되 尙得書名竹帛
이러니
卿以三千輕騎로 深入虜庭하여 克復定襄하여 威振北狄하니 古今所未有라
自破定襄後로 頡利可汗大懼하여 退保鐵山하고 遣使入朝謝罪하고 請擧國內附어늘
其年二月에 太宗遣鴻臚卿唐儉과 將軍安修仁하여 慰諭하니
靖揣知其意하고 謂將軍張公謹曰 詔使到彼에 虜必自寬하리니 遂選精騎一萬하여 齎二十日糧하고 引兵自白道襲之하리라
公謹曰 詔許其降하여 行人在彼하니 未宜討擊이니이다
如唐儉等輩를 何足可惜이리오하고 督軍疾進하여 師至陰山하여 遇其斥候千餘帳하여 皆俘以隨軍하다
靖斬萬餘級
하고 俘男女十餘萬
하고 殺其妻隋
하니 頡利乘千里馬
하고 將走投吐谷渾
이러니
俄而突利可汗來奔하여 遂復定襄, 常安之地하니 斥土界를 自陰山北至於大漠하다
太宗初聞靖破頡利하고 大悅하여 謂侍臣曰 朕聞主憂臣辱이요 主辱臣死라
往者國家草創
에 이 以百姓之故
로 稱臣於突厥
하니 朕未嘗不痛心疾首
하여 志滅匈奴
하여 坐不安席
하고 食不甘味
로라
今者에 暫動偏師하여 無往不捷하여 單于款塞하니 恥其雪乎인저하고 於是에 大赦天下하고 酺五日하다
御史大夫溫彥博이 害其功하여 譖靖軍無綱紀하여 致令虜中奇寶로 散於亂兵之手라한대
久之에 太宗謂曰 隋將史萬歲 破達頭可汗이어늘 有功不賞하고 以罪致戮이라
朕則不然하여 當赦公之罪하고 錄公之勳호리라하고 詔加左光祿大夫하고 賜絹千匹하고 眞食邑通前五百戶하다
未幾에 太宗謂靖曰 前有人讒公이러니 今朕意已悟하니 公勿以爲懷하라하고 賜絹二千匹하고 拜尙書右僕射하다
八年에 詔爲畿內道大使하여 伺察風俗이러니 尋以足疾로 上表乞骸骨호되 言甚懇至라
太宗이 遣中書侍郎岑文本하여 謂曰 朕觀自古已來로 身居富貴하여 能知止足者甚少라
不問愚智하고 莫能自知하여 才雖不堪이나 強欲居職하고 縱有疾病이나 猶自勉強이어늘 公能識達大體하니 深足可嘉라
乃下優詔
하고 加授特進
하여 聽在第攝養
하고 賜物千段
과 兩匹
하며 를 竝依舊給
하되 患若小瘳
면 每三兩日至門下, 中書
하여 平章政事
하다
未幾에 吐谷渾寇邊이어늘 太宗顧謂侍臣曰 得李靖爲帥면 豈非善也리오하다
靖乃見房玄齡하고 曰 靖雖年老나 固堪一行이라하니
統兵部尙書侯君集과 刑部尙書任城王道宗과 涼州都督李大亮과 右衛將軍李道彥과 利州刺史高甑生等五總管하여 征之하다
九年에 軍次伏俟城하니 吐谷渾燒去野草하여 以餧我師하고 退保大非川하다
諸將
이 咸言 春草未生
하여 하니 不可赴敵
이라호되
唯靖決計而進하여 深入敵境하여 遂逾積石山하여 前後戰數十合에 殺傷甚衆하여 大破其國하다
吐谷渾之衆이 遂殺其可汗來降이어늘 靖又立大寧王慕容順而還하다
初에 利州刺史高甑生이 爲鹽澤道總管하여 以後軍期어늘 靖薄責之러니 甑生因有憾於靖하다
及是에 與廣州都督府長史唐奉義로 告靖謀反이어늘 太宗命法官하여 按其事러니 甑生等竟以誣罔得罪라
靖乃闔門自守하고 杜絕賓客하여 雖親戚이나 不得妄進하다
十一年에 改封衛國公하고 授濮州刺史하고 仍令代襲이나 例竟不行하다
十四年에 靖妻卒에 有詔墳塋制度를 依漢衛霍故事하여 築闕象突厥內鐵山과 吐谷渾內積石山形하여 以旌殊績하다
十七年에 詔圖畫靖及趙郡王孝恭等二十四人於凌煙閣하다
十八年에 帝幸其第問疾하고 仍賜絹五百匹하고 進位衛國公, 開府儀同三司하다
太宗將伐遼東할새 召靖入閣하여 賜坐御前하고 謂曰 公南平吳會하고 北淸沙漠하고 西定慕容이로되 唯東有高麗未服하니 公意如何오
對曰 臣往者에 憑藉天威하여 薄展微效하니 今殘年朽骨이 唯擬此行이니이다
冊贈司徒, 竝州都督
하고 給
四十人
과 하고 陪葬
하고 謚曰 景武
라하다
이정李靖은 본명本名이 약사藥師이니 옹주雍州 삼원三原 사람이다.
할아버지 숭의崇義는 후위後魏의 은주자사殷州刺史로 영강공永康公에 봉해졌고 아버지 전詮은 수隋나라 조군趙郡의 군수郡守였다.
이정李靖은 외모가 훤칠하고 거룩하였으며, 젊어서부터 문무文武의 재략材略이 있었는데, 매번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대장부가 만약 훌륭한 군주를 만나 좋은 때를 얻으면 반드시 사공事功을 세워서 부귀를 취해야 한다.” 하였다.
그의 외삼촌인 한금호韓擒虎는 명장名將으로 이름이 났었는데, 매번 그와 병사兵事를 논할 적마다 일찍이 잘한다고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를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손자孫子》와 《오자吳子》의 병법兵法을 논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이 사람뿐이다.” 하였다.
처음 수隋나라에서 벼슬하여 장안현長安縣 공조功曹가 되었고 뒤에 가부원외랑駕部員外郎을 역임하였는데, 좌복야左僕射 양소楊素와 이부상서吏部尙書 우홍牛弘이 모두 그와 친하였다.
양소楊素는 일찍이 자기가 앉아있는 걸상을 어루만지며 이정李靖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끝내 마땅히 이 자리에 앉을 것이다.” 하였다.
수隋나라 대업大業(605~616) 말기에 여러 번 승진하여 마읍馬邑의 군승郡丞이 되었다.
마침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변방 밖에서 돌궐突厥을 공격하였는데, 이정李靖은 고조高祖가 천하를 차지하려는 뜻이 있음을 살펴 알고는 인하여 스스로 갇혀서 장차 수도인 강도江都로 나아가 상변上變하려 하였다.
그러나 장안長安에 이르러 길이 막혀서 통하지 못하고 중지하였다.
고조高祖가 경성京城인 강도江都를 함락하고 이정李靖을 잡아 장차 참형에 처하려 하였는데, 이정李靖이 크게 고함치기를 “공公이 의병義兵을 일으킨 것은 본래 천하를 위하여 포학한 자와 난을 일으킨 자를 제거하려 한 것인데, 대사를 성취하려 하지 않고 사사로운 원한으로 장사壯士를 죽인단 말인가.” 하였다.
고조高祖는 그의 말을 장하게 여겼고, 태종太宗이 또 굳이 청하여 마침내 사면하였다.
태종太宗은 얼마 후 그를 불러 막부幕府로 들어오게 하였다.
고조高祖 무덕武德 2년(619)에 종군하여 왕세충王世充을 토벌하고, 이 공功으로 개부開府에 제수되었다.
이때 소선蕭銑이 형주荊州를 점거하고 있었으므로 고조高祖는 이정李靖을 보내어 편안히 안무安撫하게 하였는데, 이정李靖이 정예精銳 기병騎兵을 이끌고 금주金州에 이르러 만적蠻賊 수만 명이 산골짝에 모여 주둔하고 있는 것을 만났다.
여강왕廬江王 이원李瑗이 이를 토벌하다가 여러 번 패전하였는데, 이정李靖은 이원李瑗과 계략을 설치하여 이들을 공격해서 포획한 바가 많았다.
이미 협주硤州에 이르자, 소선蕭銑에게 막혀 오랫동안 전진하지 못하였다.
고조高祖는 그가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는 것에 노하고 협주도독硤州都督 허소許紹에게 은밀히 명하여 목 베게 하였는데, 허소許紹는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기고 이정李靖을 위해 목숨을 살려줄 것을 청하여 이에 사면을 얻었다.
마침 개주開州에 있는 남만南蠻의 괴수 염조칙冉肇則이 반란을 일으켜 군대를 거느리고 기주夔州를 침략하니, 조군왕趙郡王 이효공李孝恭이 그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이정李靖이 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습격하여 염조칙冉肇則의 진영을 격파하였으며, 뒤에 또 험한 곳에 복병을 설치하고 적진에 다가가서 염조칙冉肇則을 참수하고 5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고조高祖는 몹시 기뻐하여 공경公卿들에게 이르기를 “짐朕이 들으니, ‘공功이 있는 자를 부리는 것이 잘못을 저지른 자를 부리는 것만 못하다.’ 하더니, 이정李靖이 과연 그 공을 나타냈다.” 하였다.
인하여 칙서勅書를 내려 이정李靖을 위로하기를 “경이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공적이 특별히 드러났다.
내 멀리 공의 지극한 정성을 보고 매우 가상하게 여기노니, 앞으로 부귀를 근심하지 말라.” 하였다.
또 손수 이정李靖에게 칙명하기를 “지난번의 일은 내 허물하지 않을 것이니, 옛 일은 내 잊은 지 오래이다.” 하였다.
무덕武德 4년에 이정李靖이 또다시 열 가지 계책을 아뢰어 소선蕭銑을 도모하니, 고조高祖가 그의 말을 따라 이정李靖에게 행군총관行軍總管을 제수하고 겸하여 이효공李孝恭의 행군장사行軍長史를 임시로 맡게 하였다.
고조高祖는 이효공李孝恭이 전쟁의 경험이 없다 하여 삼군三軍의 임무를 한결같이 이정李靖에게 맡겼다.
이해 8월에 이정李靖이 기주夔州에 군대를 집결시켰는데, 소선蕭銑은 때마침 가을장마가 져서 강물이 범람하고 삼협三峽의 길이 험하여 틀림없이 이정李靖이 전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마침내 군대를 휴식시키면서 대비하지 않았다.
9월에 이정李靖이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전진하여 장차 삼협三峽으로 내려가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군대를 정지하여 강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릴 것을 청하였다.
이정李靖은 말하기를 “군대는 신속함을 귀하게 여기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 군대가 처음 집결함에 소선蕭銑이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만약 강물이 불어난 형세를 틈타 갑자기 적의 성城 아래에 이르면 병법兵法에 이른바 ‘빠른 우레에 미처 귀를 가리지 못한다.’는 것이니, 이는 병가兵家의 상책上策이다.
비록 저들이 우리가 침공해 오는 것을 안다 할지라도 별안간에 군대를 징발하면 적의 소집에 응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이렇게 되면 반드시 사로잡힐 것이다.” 하였다.
이효공李孝恭이 그의 말을 따라 진군하여 이릉夷陵에 이르렀다.
소선蕭銑의 장수 문사홍文士弘이 정예병 수만을 거느리고 청강淸江에 주둔해 있었는데, 이효공李孝恭이 이를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자 이정李靖이 만류하기를 “문사홍文士弘은 소선蕭銑의 용맹한 장수이고 장병들이 모두 날래고 용맹합니다.
지금 새로이 형문荊門을 잃고 병력을 총동원하여 출전하였으니, 패전을 구원하는 군대여서 당해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우선 남쪽 강안에 정박하여 저들과 예봉을 다투지 말고, 적의 사기가 쇠진하기를 기다린 뒤에 분발하여 공격하면 틀림없이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이효공李孝恭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이정李靖을 남겨두어 진영을 지키게 하고서 자신은 병력을 이끌고 적과 회전하였는데, 이효공李孝恭이 과연 패하여 강의 남안南岸으로 도망하였다.
적이 배를 버리고 크게 노략질하여 사람마다 모두 무거운 짐을 지고 가자, 이정李靖은 적의 군대가 혼란한 것을 보고 군대를 풀어 격파하여 적선 400여 척을 포획하고, 참수한 자와 익사한 자가 거의 1만 명에 이르렀다.
이효공李孝恭이 이정李靖을 보내어 경무장한 군대 5천 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서 강릉江陵에 이르러 성 아래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문사홍文士弘이 이미 패하자, 소선蕭銑은 매우 두려워하여 비로소 강남江南 지방의 군대를 징발하였으나 과연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이효공李孝恭이 대군을 이끌고 뒤이어 전진하였으며, 이정李靖이 또 적의 용장인 양군무楊君茂와 정문수鄭文秀를 격파하여 갑졸甲卒 4천여 명을 포획하고 다시 군대를 무장하여 소선蕭銑을 성 안에 가두어 포위하였다.
다음날 소선蕭銑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항복을 청하자, 이정李靖이 즉시 그 성으로 들어가 점거하였는데, 호령號令이 엄숙하였으며 군중軍中에 사사로움이 없었다.
이때 장수들이 모두 이효공李孝恭에게 청하기를 “소선蕭銑의 장수로서 우리 관군과 항거하다가 전사한 자는 죄상이 이미 무거우니, 그들의 집을 적몰籍沒하여 장병들에게 상賞으로 줄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이정李靖이 반대하기를 “왕자王者의 군대는 불쌍한 백성들을 위문하고 포학한 자를 정벌함에 대의大義가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이미 핍박을 받아 전쟁터로 내몰렸으니, 항거하고 싸운 것이 어찌 그들의 소원이겠습니까.
또 개는 그 주인이 아닌 사람을 향하여 짖는 것이니, 반역과 같은 죄로 취급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괴통蒯通이 한漢 고조高祖에게 큰 죽음[大戮]을 면한 이유입니다.
지금 새로 형주荊州와 영郢 지방을 평정함에 마땅히 관대함을 넓혀서 원근의 마음을 위로해야 하니, 항복했는데도 그 집을 적몰하는 것은 도탄에 빠진 자를 구원하는 의리가 아닐 듯합니다.
이렇게 되면 다만 이로부터 이남 지역의 성城과 진鎭이 각각 굳게 수비하고 항복하지 않을까 두려우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마침내 적몰하려던 계획을 중지하니 강한江漢 지역이 이 말을 듣고 다투어 항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정李靖은 공로로 상주국上柱國에 제수되고 영강현공永康縣公에 봉封해졌으며, 물건 2,500가지를 하사받고, 조칙으로 검교형주자사檢校荊州刺史에 임명되어 황제의 명을 받아 마음대로 관작官爵을 제수하게 하였다.
이에 오령五嶺을 넘어 계주桂州에 도착한 다음 사람을 보내어 길을 나누어 백성들을 부르고 위무하니, 남만南蠻의 큰 수령首領인 풍앙馮盎과 이광도李光度, 영진장寧眞長 등이 모두 자제를 보내어 와서 배알하였다.
이정李靖은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그들에게 관작官爵을 제수하니, 무릇 회유한 자가 96주州에 호구戶口가 60여 만이었다.
황제는 우대하여 위로하고 영남도무위대사嶺南道撫慰大使와 검교계주총관檢校桂州總管을 제수하였다.
16년에 보공석輔公祏이 단양丹陽에서 배반하였으므로 명하여 이효공李孝恭을 원수元帥로 삼고 이정李靖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이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이적李勣과 임괴任瑰‧장진주張鎭州‧황군한黃君漢 등 일곱 명의 총관總管이 모두 그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군대가 서주舒州에 주둔하였는데, 보공석輔公祏은 장수 풍혜량馮惠亮을 보내어 수군 3만을 거느려 당도當塗에 주둔하게 하고, 진정통陳正通과 서소종徐紹宗은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2만을 거느려 청림산靑林山에 주둔하게 하였다.
또 인하여 양산梁山에 쇠사슬을 연결하여 장강長江의 길을 차단하고 각월성却月城을 축조하였는데 길이가 10여 리에 뻗혀서 풍혜량馮惠亮과 의각지세犄角之勢를 이루게 하였다.
이효공李孝恭이 제장諸將들을 모아 회의하자, 모두들 말하기를 “풍혜량馮惠亮과 진정통陳正通이 모두 막강한 병력을 보유하고 우리와 싸우지 않을 계책을 도모하니, 성책城柵이 이미 견고하여 끝내 함락시킬 수가 없습니다.
곧바로 단양丹陽으로 향하여 저들의 소굴을 습격할 것을 청하오니, 단양丹陽이 이미 격파되면 풍혜량馮惠亮이 스스로 항복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효공李孝恭이 이 의논을 따르려 하자, 이정李靖이 반대하며 말하였다.
“보공석輔公祏의 정예병이 비록 수군과 육군 두 군대에 있으나, 저가 통솔한 군대도 또한 모두 굳세고 용맹합니다.
풍혜량馮惠亮 등의 성책城柵도 오히려 공격하여 함락할 수가 없는데, 보공석輔公祏이 이미 석두성石頭城을 확보하였으니 어찌 쉽게 함락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 군대가 단양丹陽에 이르러 열흘이나 한 달을 지체하면 앞으로는 보공석輔公祏을 평정하지 못하고 뒤로는 풍혜량馮惠亮이 근심이 될 것이니, 이는 앞과 뒤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어 만전萬全의 계책이 아닐 듯합니다.
풍혜량馮惠亮과 진정통陳正通은 모두 백전百戰을 겪은 적들이니, 반드시 야전野戰을 꺼리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보공석輔公祏을 위해 계책을 세우느라 신중을 지키고 싸우지 아니하여 우리 군대를 지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 만약 그 성책城柵을 공격하면 바로 적이 예상하지 않은 곳을 공격하는 것이니, 적을 멸망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오직 이번 일에 달려있습니다.”
이정李靖은 마침내 황군한黃君漢 등을 거느리고 먼저 풍혜량馮惠亮을 공격하여 고전苦戰 끝에 격파하니, 적의 사상자와 익사한 자가 1만여 명이었다.
이정李靖이 경무장한 군대를 거느리고 먼저 단양丹陽에 이르니, 보공석輔公祏이 크게 두려워하여 먼저 괴뢰 장수인 좌유선左遊仙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회계會稽를 수비하여 원조하는 형세로 삼았다.
그런 다음, 보공석輔公祏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좌유선左遊仙에게 가려 하였는데, 오군吳郡에 이르러 풍혜량馮惠亮‧진정통陳正通과 함께 서로 뒤이어 사로잡히니, 강남江南 지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이에 동남도행대東南道行臺를 설치하고 이정李靖을 행대병부상서行臺兵部尙書로 제수하였으며, 물건 1,000가지와 노비奴婢 100명과 말 100필을 하사하였다.
이해에 행대行臺가 폐지되자, 또다시 이정李靖을 검교양주대도독부장사檢校揚州大都督府長史로 임명하였다.
단양丹陽 지방이 연이어 병란兵亂을 만나서 백성들이 피폐하자 이정李靖이 이를 진무鎭撫하니, 오吳‧초楚 지방이 편안해졌다.
8년에 돌궐突厥이 태원太原을 침략하자 이정李靖을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삼아서 강회江淮의 군대 1만을 거느리고 장근張瑾과 함께 태곡太谷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때 여러 군대가 싸워 승리하지 못하였으나 이정李靖의 군대만이 홀로 온전하였다.
이정李靖은 얼마 후 검교안주대도독檢校安州大都督이 되었다.
고조高祖는 매번 말하기를 “이정李靖은 바로 소선蕭銑과 보공석輔公祏의 고황膏肓이니 옛날의 명장인 한신韓信과 백기白起,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이 어찌 그에게 미치겠는가.” 하였다.
9년에 돌궐突厥의 막하돌설莫賀咄設이 변경을 침략하자, 이정李靖을 불러 영주도행군총관靈州道行軍總管에 임명하였다.
힐리가한頡利可汗이 경양涇陽으로 침입하자, 이정李靖은 군대를 거느리고 행군 속도를 배가하여 빈주豳州로 달려가서 적의 돌아가는 길을 차단하였는데, 이윽고 오랑캐와 화친하여 파병罷兵하였다.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제수하고 전후의 공을 함께 기록하여 실봉實封 400호戶를 하사하였다.
정관貞觀 2년(628)에 본관本官으로 검교중서령檢校中書令을 겸하였으며, 3년에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전직하였다.
돌궐突厥의 여러 부족이 이반離叛하자, 조정에서는 장차 돌궐을 점령할 것을 도모하여 이정李靖을 대주도행군총관代州道行軍總管으로 삼아 정예 기병 3천을 거느리고 마읍馬邑으로부터 저들이 예상하지 않은 곳으로 출동하여 곧바로 악양령惡陽嶺을 향하여 압박하게 하였다.
힐리가한頡利可汗은 이정李靖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당군唐軍이 갑자기 몰려온 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 서로 말하기를 “당군唐軍이 만약 온 병력을 동원하여 오지 않았다면 이정李靖이 어찌 감히 외로운 군대로 이곳에 왔겠는가.” 하고는 하루에도 여러 번 놀라 동요하였다.
이정李靖은 정탐하여 이 사실을 알고는 은밀히 간첩을 시켜서 적의 심복心腹을 이간질시켜 힐리가한頡利可汗과 친한 강소밀康蘇密이 와서 항복하도록 하였다.
4년에 이정李靖이 적의 본거지인 정양定襄으로 진격하여 대파하고, 수隋나라의 제왕齊王 양간楊暕의 아들인 양정도楊正道와 양제煬帝의 소후蕭后를 사로잡아 경사京師로 보내니, 힐리가한頡利可汗은 겨우 단신으로 도망하였다.
이정李靖은 공功으로 대국공代國公에 진봉進封되었고 물건 600가지와 명마名馬와 보기寶器를 하사받았다.
태종太宗은 일찍이 말하기를 “옛날에 이릉李陵은 보병步兵 5천을 이끌고서 흉노匈奴로 진격하여 자신이 흉노에게 항복함을 면치 못했으나, 오히려 그의 이름이 죽백竹帛(역사책)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경卿은 3천 명의 정예 기병으로 오랑캐 소굴에 깊이 들어가서 정양定襄을 수복하여 위엄이 북적北狄에 떨쳤으니, 이는 고금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지난날 위수渭水의 치욕恥辱을 충분히 복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였다.
당唐나라에서 정양定襄을 격파한 뒤로 힐리가한頡利可汗이 크게 두려워하고, 후퇴하여 철산鐵山을 보전하고는 사자를 보내어 입조入朝하여 사죄하고 온 나라를 들어 내부內附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또다시 이정李靖을 정양도행군총관定襄道行軍總管으로 삼아, 가서 힐리가한頡利可汗을 맞이해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힐리가한頡利可汗은 비록 겉으로는 조회할 것을 청하였으나 속으로는 유예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해 2월에 태종太宗이 홍려경鴻臚卿 당검唐儉과 장군 안수인安修仁을 보내어 힐리가한頡利可汗을 위무하였다.
이정李靖은 힐리가한頡利可汗의 속뜻을 헤아려 알고 장군 장공근張公謹에게 이르기를 “조사詔使가 저곳에 이르러 오랑캐들이 반드시 스스로 안심하고 있을 것이니, 우리가 마침내 정예기병 1만을 선발하여 20일 동안의 양식을 싸 가지고 군대를 이끌고 백도白道로부터 습격을 하겠다.” 하였다.
장공근張公謹이 만류하기를 “조칙으로 저들의 항복을 허락하여 외교관이 저곳에 가 있으니, 토벌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니, 한신韓信이 제齊나라를 격파한 방법이 이것이다.
당검唐儉과 같은 무리를 어찌 아까워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군대를 독려하여 급히 진격해서 음산陰山에 이르러 척후하는 병력 1천여 장막을 만났는데, 이들을 모두 사로잡아 데리고 갔다.
힐리가한頡利可汗은 당唐나라의 사자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관병官兵(唐軍)이 들이닥칠 줄을 예상하지 못하였다.
이정李靖이 군대를 거느리고 적의 아장牙帳 15리까지 이르러서야 오랑캐는 비로소 이러한 사태를 깨달았다.
힐리가한頡利可汗은 위엄을 두려워하고 먼저 도망하니, 인하여 부중部衆이 궤멸되어 흩어졌다.
이정李靖이 1만여 명의 수급을 베고 남녀 10여 만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어 힐리가한頡利可汗의 아내인 수隋나라 의성공주義成公主를 죽이니, 힐리가한頡利可汗은 천리마千里馬를 타고 장차 도망하여 토욕혼吐谷渾에게 의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서도행군총관西道行軍總管인 장보상張寶相이 이를 사로잡아 바쳤다.
얼마 후 돌리가한突利可汗이 도망와서 마침내 정양定襄과 상안常安의 땅을 평정하니, 국경을 개척한 것이 음산陰山으로부터 북으로 대막大漠에 이르렀다.
태종太宗은 처음에 이정李靖이 힐리가한頡利可汗을 격파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모시는 신하에게 이르기를 “짐이 들으니 ‘군주가 걱정하면 신하가 욕을 당해야 하고,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어야 한다.’ 하였다.
지난번 국가가 처음 창건됨에 태상황太上皇께서 백성들 때문에 돌궐突厥에게 신하를 칭하시니, 짐은 일찍이 가슴 아파하고 머리 아파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기필코 흉노匈奴를 멸망시키려 하여 앉아도 자리가 편안하지 못하고 음식을 먹어도 맛이 달지 않았다.
이제 잠시 한 군대를 동원하여 가는 곳마다 승전하지 않음이 없어서 선우單于가 변방으로 와 항복을 청하니, 예전의 수치를 설욕하였다.” 하고는, 이에 천하天下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 5일 동안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온언박溫彥博이 이정李靖의 공을 시기하여 이정李靖의 군대가 기강紀綱이 없어서 오랑캐의 진귀한 보화寶貨를 어지러운 군대의 손에 흩어지게 만들었다고 모함하였다.
태종太宗이 이정李靖에게 크게 꾸짖음을 가하니, 이정李靖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오랜 뒤에 태종太宗은 이정李靖에게 이르기를 “수隋나라 장수 사만세史萬歲가 돌궐突厥의 달두가한達頭可汗을 격파하여 공을 세웠으나 상을 받지 못하고 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짐은 그렇지 않아서 마땅히 공의 죄를 용서하고 공의 공훈을 기록하겠다.” 하고는, 명하여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가加하고 비단 1,000필을 하사하고 진짜 식읍食邑을 더하여 전과 합해 500호가 되게 하였다.
얼마 안 있다가 태종太宗은 이정李靖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어떤 사람이 공을 모함하였는데 이제 짐은 그것이 모함임을 깨달았으니, 공은 이것을 생각하지 말라.” 하고는, 비단 2,000필을 하사하고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제수하였다.
이정李靖은 성질이 침착하고 후중厚重하여 매양 재상宰相들과 참여하여 의논할 적에 성실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8년에 이정李靖에게 명하여 기내도대사畿內道大使를 삼아 풍속을 살피게 하였는데, 얼마 후 발이 아픈 병 때문에 표문表文을 올려 치사致仕를 청하였는바, 말이 매우 간곡하였다.
태종太宗이 중서시랑中書侍郎 잠문본岑文本을 보내어 이정李靖에게 이르기를 “짐이 보건대 예로부터 몸이 부귀한 지위에 있으면서 능히 만족함을 알고서 그치는 자가 매우 적었다.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을 막론하고, 자신을 스스로 알지 못하여 재주가 비록 감당하지 못하나 억지로 관직에 머물고자 하고, 비록 질병이 있으나 오히려 억지로 출사하였는데, 공은 능히 대체大體를 아니 매우 가상할 만하다.
짐은 이제 다만 공의 평소 뜻을 이루어줄 뿐만 아니요, 공을 한 시대의 모범으로 삼고자 한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우대하는 조서를 내리고 특진特進을 더 제수하여 집에 있으면서 요양할 것을 허락하고, 물건 1,000가지와 상승마尙乘馬 2필을 하사하였으며, 녹사祿賜와 국관國官과 부좌府佐를 모두 옛날처럼 지급하되, 병환이 만약 조금 나으면 3일이나 2일마다 문하성門下省과 중서성中書省에 이르러 정사를 다스리게 하였다.
9년 정월에 이정李靖에게 영수장靈壽杖을 하사하였으니.
얼마 안 있다가 토욕혼吐谷渾이 변경을 침략하자, 태종太宗은 모시는 신하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정李靖을 장수로 삼으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정李靖은 마침내 정승인 방현령房玄齡을 찾아가 뵙고 말하기를 “제가 비록 나이가 늙었으나 진실로 한번 출전할 만합니다.” 하니,
태종太宗은 크게 기뻐하고 즉시 이정李靖을 서해도행군대총관西海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 후군집侯君集과 형부상서刑部尙書 임성왕任城王 이도종李道宗, 양주도독涼州都督 이대량李大亮, 우위장군右衛將軍 이도언李道彥, 이주자사利州刺史 고증생高甑生 등 다섯 명의 총관總管을 통솔하여 정벌하게 하였다.
9년에 당唐나라 군대가 복사성伏俟城에 주둔하니, 토욕혼吐谷渾이 들의 풀을 태워버려서 당唐나라의 군마를 굶주리게 하고는 후퇴하여 대비천大非川을 확보하고 있었다.
제장諸將들이 모두 말하기를 “봄풀이 아직 나오지 않아서 말이 이미 수척하니, 적에게 달려가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러나 오직 이정李靖은 계책을 결단하고 전진하여 적의 지경으로 깊이 들어가서 마침내 적석산積石山을 넘어 전후로 수십 차례 싸워서 적을 살상한 것이 매우 많았으며, 토욕혼吐谷渾의 나라를 대파하였다.
토욕혼吐谷渾의 무리가 마침내 그들의 가한可汗을 죽이고 항복해 오자, 이정李靖은 대령왕大寧王 모용순慕容順을 다시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처음에 이주자사利州刺史 고증생高甑生이 염택도총관鹽澤道總管이 되어 약속한 시기보다 뒤늦게 도착하였으므로 이정李靖이 경미하게 책망하였는데, 고증생高甑生은 이로 인해 이정李靖에게 감정을 품었다.
고증생高甑生은 이때 광주도독부廣州都督府의 장사長史인 당봉의唐奉義와 함께 이정李靖이 모반謀反한다고 고발하였으므로 태종太宗이 법관法官에게 명하여 이 일을 조사하게 했는데, 고증생高甑生 등이 끝내 무망죄誣罔罪로 처벌을 받았다.
이정李靖은 마침내 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고 빈객賓客들을 사절하여 비록 친척이라도 함부로 나아가 뵙지 못하였다.
11년에 다시 위국공衛國公을 봉하고 복주자사濮州刺史를 제수하였으며, 이어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으나 이 준례가 끝내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14년에 이정李靖의 아내가 죽자 조칙을 내려 분묘의 제도를 한漢나라의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의 고사에 따라 궁궐을 축조하도록 하되, 돌궐突厥 안에 있는 철산鐵山과 토욕혼吐谷渾 안에 있는 적석산積石山의 모습을 본떠서 특별한 공적을 표하게 하였다.
17년에 명하여 이정李靖과 조군왕趙郡王 이효공李孝恭 등 24명의 화상畵像을 그려 능연각凌煙閣에 봉안奉安하게 하였다.
18년에 황제가 그의 집에 가서 문병하고, 이어 비단 500필을 하사하고 위국공衛國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승진시켰다.
태종太宗이 장차 요동遼東을 정벌하려 할 적에 이정李靖을 불러 대궐에 들어오게 해서 황제 앞에 자리를 하사하고 말하기를 “공公이 남쪽으로 오회吳會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사막沙漠을 소탕하고 서쪽으로 모용慕容을 평정하였는데, 오직 동쪽에 있는 고려高麗가 복종하지 않고 있으니 공의 의향은 어떠한가.” 하였다.
이정李靖이 대답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성상의 위엄에 의지하여 작은 공효功效를 드러냈으니, 이제 노년老年에 썩은 뼈로서 오직 이번 출정을 하려고 합니다.
폐하께서 만약 버리지 않으신다면 노신老臣의 병이 기필코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태종太宗은 그의 파리하고 노쇠함을 가엾게 여겨 출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23년(649)에 이정李靖이 집에서 죽으니, 나이가 79세였다.
책명冊命하여 사도司徒와 병주도독竝州都督을 추증追贈하고 반검班劍 40명과 우보羽葆와 고취鼓吹를 지급하였으며, 소릉昭陵에 모셔 장례하고 시호諡號를 경무景武라 하였다.
아들 덕건德謇이 뒤를 이어 벼슬이 장작소장將作少匠에 이르렀다.
《구당서舊唐書》 권67 〈이정전李靖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