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故未形無名之時
는 則爲萬物之始
요 及其有形有名之時
는 라
道
는 以無形無名
으로 始成萬物
이로되 은 以始以成
하여 而
하니 玄之又玄也
라하니라
1.5 此兩者
는 同出而異名
으로 이니 玄之又玄
이 衆妙之門
이라
注
[注]兩者
는 始與
也
라 同出者
는 同出於玄也
요 異名
은 所施不可同也
니
玄者는 冥也니 默然無有也며 始母之所出也로 不可得而名라
故不可言同名曰玄
이로되 而言
謂之玄者
는 取於不可得而謂之然也
라
謂之然
이면 則不可以定乎一玄
이니 而已
하면 則是名
이요 則失之遠矣
라
제1장은 《노자老子》를 유명하게 만든 “도道는 〈문자로〉 표현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은 〈문자로〉 규정하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구절은 동아시아 전통 사상의 형이상학形而上學과 언어철학言語哲學, 존재론存在論 등 매우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논의되었고, 존재와 언어의 문제, 삶과 깨달음의 경지 등과 관련하여 인식론이나 경험적 차원에서도 논의되었다.
일반적으로 20세기에 ‘도道’는 우주의 궁극적 근원, 근본 실체, 우주적 원리 등등으로 규정지어져 왔다. 특히 서구 형이상학적 전통에 자극되어 ‘도道’는 동아시아 전통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으로 논의되었다.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이 모두 왕필王弼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여겨지지만 왕필의 논의는 이와 다소 차이가 있다.
우선 《노자老子》에서는 도道가 말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왕필은 도道를 문자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지만 상象을 통해 드러낼 수 있고, 결국 언言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즉 언言(문자적 표현)과 의意(의도, 뜻)의 문제로 이해한 것이다. 특히 그것은 유가 경전 등에 담긴 언어와 그 의미에 관한 이해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말이 뜻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가 하는 ‘언의지변言意之辨’으로 논의되었다.
이러한 논쟁의 맥락에서 보면 《노자老子》의 첫 구절에서 ‘가도可道’와 ‘불가도不可道’는 궁극적 실재를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점이 아니라 경전經典의 말과 그 말에 담긴 뜻의 관계에 대한 논의이다. 왕필의 입장은 언言이 의意를 다 드러낼 수 없다고 보았지만 이러한 긴장 관계는 상象을 통해 극복된다. 즉 경전經典에 담긴 성인의 의意는 언言을 통해 상象을 얻고, 상象을 통해 의意를 얻는 방식으로 긍정된다. 이렇게 해서 왕필王弼은 성인聖人의 의意, 경전經典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오로지 상수象數에 집착하던 한대역학漢代易學을 비판하면서 언言을 중시하며 이를 통해 상象을 해석하는 의리역義理易을 주창한 사실과 통한다.
왕필은 《주역약례周易略例》 〈명상明象〉에서 “상象은 의意를 드러내는 것이고, 언言은 상象을 밝히는 것이다. 의意를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은 상象만 한 것이 없고, 상象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은 언言만 한 것이 없다. 언言은 상象에서 생기므로 언言을 찾아서 상象을 보고, 상象은 의意에서 생기므로 상象을 찾아서 의意를 본다.……그러므로 언言은 상象을 밝히는 수단이니 상象을 얻으면 언言을 잊고, 상象은 의意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니 의意를 얻었으면 상象을 잊어야 하는 것이다.[부상자夫象者 출의자야出意者也 언자言者 명상자야明象者也 진의막약상盡意莫若象 진상막약언盡象莫若言 언생어상言生於象 고가심언이관상故可尋言以觀象 상생어의象生於意 고가심상이관의故可尋象以觀意……고언자소이명상故言者所以明象 득상이망언得象而忘言 상자象者 소이존의所以存意 득의이망상得意而忘象]”라고 하였는데, 이 논의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왕필王弼은 상象을 통해 언言을 다시 긍정한 것이다. 따라서 언言에 집착하는 훈고訓詁를 반성하고, 성인聖人의 의意를 추구하려는 의리義理의 입장에서 나온 의미로 보아야 한다. 현대철학의 존재와 언어, 언어와 실재라는 맥락과는 분명 다르다.
“무명無名은 만물의 시작이요, 유명有名은 만물의 어미이다.”라는 문장 또한 수많은 해석을 낳았다. 이는 구체적으로 제40장의 “천하天下의 만물萬物은 유有에서 생겨나고 유有는 무無에서 생겨난다.[천하만물天下萬物 생어유生於有 유생어무有生於無]”와 관련되는데, 동양철학東洋哲學의 우주발생론宇宙發生論에 대한 독특한 이해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특히 무無를 강조하는 귀무貴無와 유有를 긍정하는 숭유崇有의 입장이 대립한 위진시대魏晉時代에 왕필은 귀무貴無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는 ‘유생어무有生於無’를 그대로 긍정하는 논리를 펴지 않고 ‘생生’을 ‘시始’로 바꾸어 이해하고, 유有와 무無의 관계는 ‘미형무명지시未形無名之時’와 ‘유형유명지시有形有名之時’의 관계로 대체하였다. 즉 천지天地 이전의 무無로부터의 창생蒼生을 긍정하지 않고 천지天地 안에서 만물萬物이 형성形成되는 과정過程으로 파악한 것이다.
오히려 ‘유생어무有生於無’가 우주논적宇宙論的 차원의 논쟁으로 본격화되는 것은 불교佛敎가 수용되던 시기에 불교의 용어가 《노자老子》의 철학적哲學的 용어用語들로 번역되면서부터이다.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철학적哲學的 개념槪念들에 의존하여 불경佛經을 해석하는 격의불교格義佛敎에서 공空과 색色은 처음에 《노자老子》의 무無와 유有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노자老子》의 유무有無는 보다 풍부한 철학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다른 한편 ‘유생어무有生於無’는 예술藝術의 영역에서 새로운 작품 창작의 이론과 실제에 관련하여 다양한 의미로 재해석되기도 하였다. 흰 여백의 종이 위에 산수山水가 그려지는 과정을 ‘유생어무有生於無’의 과정으로 파악하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제1장은 동아시아의 철학哲學과 종교宗敎, 예술藝術에 커다란 의미意味와 상상력想像力을 제공해준 문장文章이라 말할 수 있다.
도道는 〈문자로〉 표현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은 〈문자로〉 규정하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注
〈문자로〉 표현된 도와 〈문자로〉 규정된 이름은 〈구체적 사태를 가리키는〉 지사指事나 〈아주 구체적인 형태를 가리키는〉 조형造形에 해당하므로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문자로〉 표현할 수 없고 〈문자로〉 규정할 수 없다.
무명無名은 만물의 시작이요, 유명有名은 만물의 어미이다.
注
따라서 〈만물이〉 아직 형체가 없고 이름이 없는 때가 만물의 시작이요, 〈만물이〉 형체가 있고 이름이 있는 때에는 〈도道가 만물을〉 자라게 하고 길러주며 형통케 하고 성장케 하니 〈만물의〉 어미가 된다.
이는 도가 형체가 없고 이름이 없는 상태에서 만물을 시작하고 이루어주지만, 만물은 〈그 도에 의해〉 시작되고 이루어지면서도 그 소이연所以然을 알지 못하니 신비하고 또 신비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으면 그 신묘함을 보고,
注
만물은 지극히 작은 것에서 시작한 뒤에 성장하고, 무無에서 시작한 뒤에 생장한다.
따라서 늘 욕심이 없어 그 마음을 텅 비워내면 그 시작하는 만물의 신비를 볼 수 있다.
注
무릇 유有가 이롭게 되려면 반드시 무無를 써야 한다. 욕심의 뿌리인 〈마음은〉 도에 나아간 뒤에야 가지런해진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있으면 마치고 〈돌아가는〉 만물의 끝을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나와 이름을 달리한 것으로, 함께 일컬어 ‘신비하다’고 하는데, 신비하고 또 신비한 것이 뭇 신비함이 나오는 문이다.
注
양자兩者란 ‘시始’와 ‘모母’이다. ‘함께 나왔다[동출同出]’는 것은 ‘함께 현玄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이름이 다르다[이명異名]’는 것은 〈‘시始’와 ‘모母’가〉 하는 일이 다르다는 뜻이다.
그래서 머리 쪽에 있으면 ‘시始’라 일컫고, 끝 쪽에 있으면 ‘모母’라고 일컫는다.
‘현玄’은 깊고 어두운 것이니, 고요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무유無有]이며 ‘시始’와 ‘모母’가 나오는 곳으로서 〈이러한 현玄에 대해〉 ‘이름[명名]’을 붙일 수 없기 때문에 함께 ‘현玄’이라고 이름을 붙여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함께 일컬어 현玄이라 한다.[동위지현同謂之玄]’고 말한 것은 그렇게 〈이름을〉 붙여 일컬을 수 없다는 데서 취한 것이다.
그렇게 〈이름을〉 붙일 수 없다면 ‘현玄’이라는 하나의 〈글자로〉 확정할 수 없으니, 만약 ‘현玄’이란 하나의 〈글자로〉 확정하면 이것은 곧 이름이요 〈본래의 뜻을〉 크게 잃은 것이다.
그래서 ‘신비하고 또 신비하다.[현지우현玄之又玄]’고 〈형용하는 의미로 중복하여〉 말한 것이다.
뭇 신비함이 모두 같은 현玄에서 나오니, 이 때문에 ‘뭇 신비함이 나오는 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