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1)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西京以來 獨稱太史公遷 以其馳驟跌宕하고 悲慨嗚咽하여 而風神所注 往往於點綴指次 獨得妙解하니 譬之覽仙姬於瀟湘洞庭之上 可望而不可近者
累數百年而得韓昌黎 然彼固別開門戶也
又三百年而得歐陽子
予覽其所序次當世將相學士大夫墓誌碑表 與五代史所爲梁唐二紀 及他名臣雜傳하니 蓋與太史公略相上下者
然歐陽子所與友人論文書 絶不之及 何也
又如奏疏箚子 當其善爲開陳하고 分別利害하여 一切感悟主上하얀 於漢可方晁錯賈誼 於唐可方魏徵陸贄
宋仁廟嘗諭庭臣曰 歐陽脩 何處得來오하니 殆亦由此
序記書論 雖多得之昌黎 而其姿態橫生하여 別爲韻折하여 令人讀之 하니
予所以獨愛其文하여 妄謂世之文人學士得太史公之逸者 獨歐陽子一人而已라호되
而世之人或予信하며 或不予信하고 又或訾其間不免俗調處하니
嗟乎
抑誠有之라도 太史公之傳仲尼弟子與循吏處 抑豈能與刺客同工哉
觀之日月 猶有 可知之矣
予讀唐書五代史別有鈔하고 今錄其文集行世者하되 首上皇帝書疏六首하고 次箚子幷狀五十三首하고 次表啓二十二首하고 次書二十五首하고 次論三十五首하고 次序三十一首傳二首하고 次記二十五首하고 次神道碑銘墓誌銘四十七首하고 次墓表祭文行狀二十三首하고 次頌賦他雜著一十首하여 釐爲三十二卷하노라
姪桂 嘗以予酷愛歐陽公敍事當不讓太史公遷하고 且前曰 歐陽公 撰五代史 當時將相 特竝齷齪하여 不足數
況兵戈之後 禮崩樂壞 故其文章所表見止此하니
假令同太史公하여之書하여 傳次春秋戰國及先秦楚漢之際 豈特是而已哉
譬之컨댄 一人焉 入天子圖書之藏하여 而陳周彛漢鼎犧樽雲罍하여 以相博古하고
一人焉 特入富人者之室하여 所可指次者 陶埴菽食而已라하야늘 予唯唯러라
嗟乎
世之欲覽歐陽子之全인댄 必合予他所批注唐書五代史而讀之라야 斯得之矣
歸安 鹿門 茅坤하노라


구양문충공문초歐陽文忠公文抄》의 서문
서한西漢 이래로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만을 유독 일컫는 것은 그 문장文章이 거침없이 치닫고 비분해 오열하듯 하여 정신을 쏟는 곳에 왕왕 문장을 엮고 서술함에 있어 오묘한 경지를 홀로 얻었기 때문이니, 비유하자면 소상瀟湘, 동정호洞庭湖 가에서 선희仙姬를 만났을 때 멀리서 볼 수는 있고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수백 년이 지나서 한창려韓昌黎(韓愈)가 나타났으나 그는 문호를 따로 열었다.
그리고 또 3백 년이 지나 구양자歐陽子가 나타났다.
나는 그가 당대의 장상將相학사學士대부大夫 등의 묘지墓誌비표碑表를 찬술한 것과 《오대사五代史》에서 두 시대의 본기本紀 및 기타 명신의 잡전雜傳 등을 찬술한 것을 읽어보았더니, 태사공과 거의 고하高下를 겨룰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구양자가 벗에게 보내 글을 논한 편지에서는 이러한 글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주소奏疏차자箚子 같은 글들은 자신의 뜻을 잘 개진하고 이해利害를 분별하여 오로지 임금을 감오感悟시키는 것으로 말하자면, 나라에서는 조조晁錯가의賈誼에 비길 만하고 나라에서는 위징魏徵육지陸贄에 비길 만하다.
인종仁宗이 일찍이 조정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구양수처럼 뛰어난 사람을 어디에서 얻겠는가?” 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같은 글들도 비록 한창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으나, 그 자태가 거침없이 나와 특유의 운치와 문란文瀾을 이루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창삼탄一唱三歎’에 여운이 끊이지 않게 한다.
내가 그래서 그의 글을 유독 좋아하여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세상의 문인 학사들 중 태사공의 뛰어난 경지를 얻은 이는 오직 구양자 한 사람뿐이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중 어떤 이는 나를 믿고, 어떤 이는 나를 믿지 못하며, 또 어떤 이는 구양자의 문장 중 속조俗調를 면치 못한 곳을 헐뜯기도 하였다.
아아!
그러한 곳이 참으로 있다 하더라도, 태사공이 중니仲尼제자弟子순리循吏에 대한 열전列傳을 쓴 곳에서 어찌 〈자객열전刺客列傳〉을 쓸 때와 같은 투로 글을 쓸 수 있었겠는가?
해와 달에도 오히려 포이抱珥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당서唐書》‧《오대사五代史》를 읽고 따로 초본鈔本을 만들었는데, 이제 세상에 간행되어 있는 그 문집을 초록하되 황제에게 올린 6편을 첫머리에 싣고, 다음으로 차자箚子 53편을 싣고, 다음으로 22편을 싣고, 다음으로 25편을 싣고, 다음으로 35편을 싣고, 다음으로 31편과 2편을 싣고, 다음으로 25편을 싣고, 다음으로 신도비명神道碑銘묘지명墓誌銘 47편을 싣고, 다음으로 묘표墓表제문祭文행장行狀 23편을 싣고, 다음으로 와 기타 잡문雜文 10편을 실어, 이를 정리하여 32권으로 만들었다.
아!
조카 는 일찍이 내가 구양공歐陽公서사敍事가 응당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에 못지않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고 여기고, 또 나아와 말하기를 “구양공이 《오대사五代史》를 찬술하였는데, 당시 장상將相들은 모두 기국器局이 작은 사람들이라 말할 것이 못 되었습니다.
더구나 전쟁이 일어난 뒤로 예악禮樂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그 문장에서 표현한 바가 이런 정도에 그쳤던 것입니다.
가사 태사공과 같이 석실石室의 책을 뽑아서 춘추전국시대 및 시대의 사실을 기록했다면 어찌 이런 정도에 그쳤겠습니까.
비유하자면 한 사람은 천자의 도서와 완염琬琰이 보관되어 있는 창고에 들어가 주이周彛한정漢鼎희준犧樽운뢰雲罍 등을 늘어놓고서 고대의 기물器物들을 박람하고,
한 사람은 단지 부자의 방에 들어가 손으로 가리켜 볼 수 있는 것이 질그릇과 곡식뿐인 것과 같습니다.” 하기에 내가 “그렇다 그렇다.” 하였다.
아!
세상에서 구양자歐陽子 저술의 전모를 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책 외에 내가 비주批注한 《당서唐書》‧《오대사五代史》를 합하여 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귀안인歸安人 녹문鹿門 모곤茅坤은 적노라.


역주
역주1 歐陽文忠公文抄引 : 引은 文體의 일종으로 짧은 序文이라 할 수 있다. 곧 서문의 시초 격인데, 唐 나라 이후로 유행하였다.
역주2 一唱三歎 餘音不絶 : 《禮記》 〈樂記〉에 “淸廟의 瑟은 붉은 絃으로 되어 있고 소리가 느릿하여서 한 사람이 선창하면 세 사람이 화답하여 餘音이 있다.[清廟之瑟 朱弦而疏越 壹倡而三嘆 有遺音者矣]” 하였다. 詩文이 매우 뛰어남을 뜻한다.
역주3 抱珥 : 태양 양쪽에 생기는 반원형의 기운으로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라 한다. 《呂氏春秋 明理》
역주4 石室 : 돌로 지은 집과 금으로 만든 상자라는 ‘石室金匱’의 준말로, 漢나라의 藏書閣을 뜻한다. 司馬遷의 《史記》 〈自序〉에 “석실금궤의 책을 뽑아 서술하고 편집했다.” 하였다.
역주5 琬琰 : 周나라 때 弘璧과 함께 西序에 보관되어 있던 寶玉이다. 《書經》 〈周書 顧命〉에 “옥을 5중으로 하며 보물을 진열하니, 적도와 대훈과 홍벽과 완염은 서서에 있고, 대옥과 이옥과 천구와 하도는 동서에 있다.[越玉五重 陳寶 赤刀 大訓 弘璧 琬琰 在西序 大玉 夷玉 天球 河圖 在東序]”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50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81, 1332호(두산위브파빌리온)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