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京以來로 獨稱太史公遷은 以其馳驟跌宕하고 悲慨嗚咽하여 而風神所注에 往往於點綴指次에 獨得妙解하니 譬之覽仙姬於瀟湘洞庭之上에 可望而不可近者라
予覽其所序次當世將相學士大夫墓誌碑表와 與五代史所爲梁唐二紀와 及他名臣雜傳하니 蓋與太史公略相上下者라
又如奏疏箚子는 當其善爲開陳하고 分別利害하여 一切感悟主上하얀 於漢可方晁錯賈誼요 於唐可方魏徵陸贄라
宋仁廟嘗諭庭臣曰 歐陽脩를 何處得來오하니 殆亦由此라
序記書論
은 雖多得之昌黎
나 而其姿態橫生
하여 別爲韻折
하여 令人讀之
에 하니
予所以獨愛其文하여 妄謂世之文人學士得太史公之逸者는 獨歐陽子一人而已라호되
而世之人或予信하며 或不予信하고 又或訾其間不免俗調處하니
抑誠有之라도 太史公之傳仲尼弟子與循吏處에 抑豈能與刺客同工哉아
予讀唐書五代史別有鈔하고 今錄其文集行世者하되 首上皇帝書疏六首하고 次箚子幷狀五十三首하고 次表啓二十二首하고 次書二十五首하고 次論三十五首하고 次序三十一首傳二首하고 次記二十五首하고 次神道碑銘墓誌銘四十七首하고 次墓表祭文行狀二十三首하고 次頌賦他雜著一十首하여 釐爲三十二卷하노라
姪桂 嘗以予酷愛歐陽公敍事當不讓太史公遷하고 且前曰 歐陽公이 撰五代史에 當時將相이 特竝齷齪하여 不足數온
假令同太史公
하여 抽
之書
하여 傳次春秋戰國及先秦楚漢之際
면 豈特是而已哉
아
譬之
컨댄 一人焉
은 入天子圖書
之藏
하여 而陳周彛漢鼎犧樽雲罍
하여 以相博古
하고
一人焉은 特入富人者之室하여 所可指次者가 陶埴菽食而已라하야늘 予唯唯러라
世之欲覽歐陽子之全인댄 必合予他所批注唐書五代史而讀之라야 斯得之矣라
서한西漢 이래로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만을 유독 일컫는 것은 그 문장文章이 거침없이 치닫고 비분해 오열하듯 하여 정신을 쏟는 곳에 왕왕 문장을 엮고 서술함에 있어 오묘한 경지를 홀로 얻었기 때문이니, 비유하자면 소상瀟湘, 동정호洞庭湖 가에서 선희仙姬를 만났을 때 멀리서 볼 수는 있고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수백 년이 지나서 한창려韓昌黎(韓愈)가 나타났으나 그는 문호를 따로 열었다.
그리고 또 3백 년이 지나 구양자歐陽子가 나타났다.
나는 그가 당대의 장상將相‧학사學士‧대부大夫 등의 묘지墓誌‧비표碑表를 찬술한 것과 《오대사五代史》에서 양梁‧당唐 두 시대의 본기本紀 및 기타 명신의 잡전雜傳 등을 찬술한 것을 읽어보았더니, 태사공과 거의 고하高下를 겨룰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구양자가 벗에게 보내 글을 논한 편지에서는 이러한 글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 주소奏疏와 차자箚子 같은 글들은 자신의 뜻을 잘 개진하고 이해利害를 분별하여 오로지 임금을 감오感悟시키는 것으로 말하자면, 한漢나라에서는 조조晁錯‧가의賈誼에 비길 만하고 당唐나라에서는 위징魏徵‧육지陸贄에 비길 만하다.
송宋 인종仁宗이 일찍이 조정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구양수처럼 뛰어난 사람을 어디에서 얻겠는가?” 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서序‧기記‧서書‧논論 같은 글들도 비록 한창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으나, 그 자태가 거침없이 나와 특유의 운치와 문란文瀾을 이루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창삼탄一唱三歎’에 여운이 끊이지 않게 한다.
내가 그래서 그의 글을 유독 좋아하여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세상의 문인 학사들 중 태사공의 뛰어난 경지를 얻은 이는 오직 구양자 한 사람뿐이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중 어떤 이는 나를 믿고, 어떤 이는 나를 믿지 못하며, 또 어떤 이는 구양자의 문장 중 속조俗調를 면치 못한 곳을 헐뜯기도 하였다.
그러한 곳이 참으로 있다 하더라도, 태사공이 중니仲尼의 제자弟子와 순리循吏에 대한 열전列傳을 쓴 곳에서 어찌 〈자객열전刺客列傳〉을 쓸 때와 같은 투로 글을 쓸 수 있었겠는가?
해와 달에도 오히려 포이抱珥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당서唐書》‧《오대사五代史》를 읽고 따로 초본鈔本을 만들었는데, 이제 세상에 간행되어 있는 그 문집을 초록하되 황제에게 올린 서書‧소疏 6편을 첫머리에 싣고, 다음으로 차자箚子와 장狀 53편을 싣고, 다음으로 표表‧계啓 22편을 싣고, 다음으로 서書 25편을 싣고, 다음으로 논論 35편을 싣고, 다음으로 서序 31편과 전傳 2편을 싣고, 다음으로 기記 25편을 싣고, 다음으로 신도비명神道碑銘‧묘지명墓誌銘 47편을 싣고, 다음으로 묘표墓表‧제문祭文‧행장行狀 23편을 싣고, 다음으로 송頌‧부賦와 기타 잡문雜文 10편을 실어, 이를 정리하여 32권으로 만들었다.
조카 계桂는 일찍이 내가 구양공歐陽公의 서사敍事가 응당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에 못지않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고 여기고, 또 나아와 말하기를 “구양공이 《오대사五代史》를 찬술하였는데, 당시 장상將相들은 모두 기국器局이 작은 사람들이라 말할 것이 못 되었습니다.
더구나 전쟁이 일어난 뒤로 예악禮樂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그 문장에서 표현한 바가 이런 정도에 그쳤던 것입니다.
가사 태사공과 같이 석실石室의 책을 뽑아서 춘추전국시대 및 진秦‧초楚‧한漢 시대의 사실을 기록했다면 어찌 이런 정도에 그쳤겠습니까.
비유하자면 한 사람은 천자의 도서와 완염琬琰이 보관되어 있는 창고에 들어가 주이周彛‧한정漢鼎‧희준犧樽‧운뢰雲罍 등을 늘어놓고서 고대의 기물器物들을 박람하고,
한 사람은 단지 부자의 방에 들어가 손으로 가리켜 볼 수 있는 것이 질그릇과 곡식뿐인 것과 같습니다.” 하기에 내가 “그렇다 그렇다.” 하였다.
세상에서 구양자歐陽子 저술의 전모를 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책 외에 내가 비주批注한 《당서唐書》‧《오대사五代史》를 합하여 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