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易正義十卷, 魏王弼‧韓康伯注, 唐孔穎達等正義.
毛詩正義七十卷, 漢毛公傳, 鄭玄箋, 唐孔穎達等正義.
春秋左傳正義六十卷, 晉杜預注, 唐孔穎達等正義.
有宋十行本注疏者하니 卽南宋岳珂九經三傳沿革例에 所載建本附釋音注疏也라
其書刻于宋南渡之後러니 由元入明하여 遞有修補하니 至明正德中하여 其板猶存이라
此後有閩板하니 乃明嘉靖中에 用十行本重刻者요 有明監板하니 乃明萬曆中에 用閩本重刻者요 有汲古閣毛氏板하니 乃明崇禎中에 用明監本重刻者라 輾轉翻刻하여 訛謬百出이라
明監板已燬하니 今各省書坊通行者는 唯有汲古閣毛本이로되 此本漫漶하여 不可識讀이요 近人修補에 更多訛舛이라
元家所藏十行宋本은 有十一經하여 雖無儀禮爾雅나 但有蘇州北宋所刻之單疏板本하니 爲賈公彦邢昺之原書로되 此二經은 更在十行本之前이라
元이 舊作十三經注疏校勘記할새 雖不專主十行本單疏本이나 而大端은 實在此二本이라
嘉慶二十年에 元至江西하니 武寧盧氏宣旬이 讀余校勘記하고 而有慕于宋本이요 南昌給事中黃氏中傑도 亦苦毛板之朽하여 因以元所藏十一經으로 至南昌學堂重刻之하고 且借校蘇州黃氏丕烈所藏單疏二經重刻之하며
近鹽巡道胡氏稷도 亦從吳中하여 購得十一經하니 其中에 有可補元藏本中所殘缺者라
於是에 宋本注疏 可以復行於世하니 豈獨江西學中所私哉아
今重刻宋板에 凡有明知宋板之誤字라도 亦不使輕改하고 但加圈於誤字之旁하고 而別據校勘記하여 擇其說하여 附載於每卷之末하여 俾後之學者로 不疑于古籍之不可據하니 愼之至也라
其經文注文은 有與明本不同하니 恐後人習讀明本하여 而反臆疑宋本之誤라
故로 盧氏亦引校勘記하여 載於卷後하니 愼之至也라
竊謂士人讀書는 當從經學始요 經學은 當從注疏始라
空疏之士
와 高明之徒
로 讀注疏
에 不終卷而思臥者
는 是不能潛心
索
하여 終生不知有聖賢諸儒經傳之學矣
라
我朝經學最盛하여 諸儒論之甚詳하니 是又在好學深思實事求是之士 由注疏而推求尋覽之也라
二十一年秋에 刻板初成이어늘 藏其板於南昌學하여 使士林書坊으로 皆可就而印之라
學中因書成에 請序於元하니 元謂聖賢之經은 如日月經天하고 江河行地하니 安敢以小言冠玆卷首리오
惟記刻書始末於目錄之後하고 復敬錄欽定四庫全書十三經注疏各提要於各注疏之前하여 俾束身修行之士로 知我大淸儒學이 遠軼前代하니 由此로 潛心敦品하고 博學篤行하여 以求古聖賢經傳之本源이요 不爲虛浮孤陋兩途所誤云爾라
太子少保光祿大夫江西巡撫兼提督 揚州阮元은 謹記하노라
《주역정의周易正義》 10권:위魏나라 왕필王弼과 한강백韓康伯의 주注, 당唐나라 공영달孔穎達 등의 정의正義.
《상서정의尙書正義》 20권:한漢나라 공안국孔安國의 전傳, 당唐나라 공영달孔穎達 등의 정의正義.
《모시정의毛詩正義》 70권:한漢나라 모공毛公의 전傳, 정현鄭玄의 전箋, 당唐나라 공영달孔穎達 등의 정의正義.
《주례주소周禮注疏》 42권:한漢나라 정현鄭玄의 주注, 당唐나라 가공언賈公彦의 소疏.
《의례주소儀禮注疏》 50권:한漢나라 정현鄭玄의 주注, 당唐나라 가공언賈公彦의 소疏.
《예기정의禮記正義》 63권:한漢나라 정현鄭玄의 주注, 당唐나라 공영달孔穎達 등의 정의正義.
《춘추좌전정의春秋左傳正義》 60권:진晉나라 두예杜預의 주注, 당唐나라 공영달孔穎達 등의 정의正義.
《춘추공양전주소春秋公羊傳注疏》 28권:한漢나라 하휴何休의 주注, 당唐나라 서언徐彦의 소疏.
《춘추곡량전주소春秋穀梁傳注疏》 20권:진晉나라 범녕范甯의 주注, 당唐나라 양사훈楊士勛의 소疏.
《논어주소論語注疏》 20권:위魏나라 하안何晏 등의 주注, 송宋나라 형병邢昺의 소疏.
《효경주소孝經注疏》 9권:당唐나라 현종명황제玄宗明皇帝의 어주御注, 송宋나라 형병邢昺의 소疏.
《이아주소爾雅注疏》 10권:진晉나라 곽박郭璞의 주注, 송宋나라 형병邢昺의 소疏.
《맹자주소孟子注疏》 14권:한漢나라 조기趙岐의 주注, 송宋나라 손석孫奭의 소疏.
이상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는 모두 460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오대회요五代會要》에 “후당後唐 장흥長興 3년(932)에 처음으로 석경石經의 문자文字에 의거하여 구경九經을 판각했다.” 하였으니, 경서經書의 목판을 판각한 것은 실로 이때에 시작되었다.
양송兩宋(北宋과 남송南宋)에 이르러서는 판각본이 점점 많아졌다.
송宋나라 때에는 십행본十行本 주소注疏가 있었으니, 바로 남송南宋 악가岳珂의 《구경삼전연혁례九經三傳沿革例》에 실려 있는 음석音釋이 붙은 건본建本(建陽 판각본板刻本) 주소注疏이다.
이 책은 송宋나라가 남천南遷한 뒤에 판각하였는데 원元나라를 거쳐 명明나라에 들어와서 번갈아 수보修補함이 있었는바, 명明나라 정덕正德 연간(1506~1521)까지도 이 판각본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 때문에 십행본十行本이 여러 본本들 중에 가장 오래된 책이 된 것이다.
이 뒤에 민판閩板이 있었으니, 바로 명明나라 가정嘉靖 연간(1522~1566)에 십행본十行本을 사용하여 중각重刻한 것이고, 명明나라 감판監板(國子監 판板)이 있었으니, 바로 명明나라 만력萬曆 연간(1573~1619)에 민본閩本을 사용하여 중각한 것이고, 급고각汲古閣 모씨毛氏(毛晉)의 판본板本이 있었으니, 바로 명明나라 숭정崇禎 연간(1628~1643)에 명明나라 감본監本을 사용하여 중각重刻한 것인바, 이곳저곳에서 이리저리 판각하여 여러 가지 오류가 많이 나왔다.
명明나라 감판監板은 이미 불타 없어졌으니, 지금 각 성省의 서점에서 통행되는 것으로는 오직 급고각汲古閣의 모본毛本이 있는데, 이 판본은 흐려서 판독할 수가 없고 근래 사람들이 수보修補한 것은 또 오류가 많다.
나의 집에 소장된 송宋나라 때의 십행본十行本은 십일경十一經만 있어 비록 《의례儀禮》와 《이아爾雅》가 없으나 다만 소주蘇州에서 북송北宋 때 판각한 단소본單疏本(疏만 있는 본本)이 있으니, 이는 가공언賈公彦과 형병邢昺의 원 책인데 이 두 경서經書는 또 십행본十行本 이전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예전에 《십삼경주소교감기十三經注疏校勘記》를 지을 적에 오로지 십행본十行本과 단소본單疏本만을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대체는 실로 이 두 본本에 있었다.
가경嘉慶 20년(1815)에 내가 강서江西에 이르니, 무령武寧에 있는 노선순盧宣旬 씨가 나의 《교감기校勘記》를 읽고서 송본宋本을 흠모하였고, 남창南昌의 급사중給事中으로 있는 황중걸黃中傑 씨도 모판毛板이 노후老朽한 것을 애통하게 여기고는 인하여 내가 소장한 십일경十一經을 가지고 남창南昌의 학당에서 중각重刻하고, 또 소주蘇州의 황비열黃丕烈 씨가 소장한 단소본單疏本 두 경經(《儀禮》와 《이아爾雅》)을 빌려다가 교정하여 중각重刻하였다.
근래에 염순도鹽巡道 호직胡稷 씨도 오중吳中에서 십일경十一經을 구입하였는데, 이 가운데에는 나의 소장본所藏本 중에 빠진 것을 보충할 만한 것들이 있었다.
이에 송본宋本의 주소注疏가 다시 세상에 통행하게 되었으니, 어찌 다만 강서江西의 학당 안에서만 사사로이 간직할 수 있겠는가.
책을 판각하는 자의 가장 큰 병통은 자기의 억견으로 옛 책을 고치는 것이다.
지금 송판宋板을 중각重刻하면서 무릇 송판宋板의 오자誤字를 분명히 알더라도 곧바로 고치지 않고, 다만 오자誤字의 옆에 권점圈點을 가하고서 별도로 《교감기校勘記》에 의거하여 그 말을 가려 뽑은 뒤에 매권의 끝에 수록하여 후세의 배우는 자들이 옛 전적을 의거할 수 없다고 의심하지 않게 하였으니, 신중함이 지극한 것이다.
그리고 경문經文과 주문注文은 명본明本과 똑같지 않은 것이 있는데, 후인들이 명본明本을 익숙히 읽어서 도리어 송본宋本이 잘못되었다고 억측할까 염려되었다.
그러므로 노씨盧氏가 또한 《교감기校勘記》를 인용하여 책 뒤에 실었으니, 신중함이 지극한 것이다.
내 삼가 생각하건대 사인士人들이 책을 읽음은 마땅히 경학經學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경학經學은 마땅히 주소注疏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부박浮薄한 선비와 고명高明한 무리들은 주소注疏를 읽으면 한 권을 다 읽기도 전에 염증을 내어 누울 것을 생각하니, 이는 잠심潛心하여 깊이 연구하지 못해서 종신토록 여러 성현聖賢과 학자들의 경전經傳의 학學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주소注疏의 여러 뜻에 있어서는 또한 옳고 그름이 있다.
우리 조정은 경학經學이 가장 성하여 여러 학자들이 매우 자세히 논하였으니, 이는 또 학문을 좋아하고 깊이 생각하며 실사구시實事求是하는 선비들이 주소注疏를 통하여 미루어 찾고 연구해서 찾아봄에 달려 있는 것이다.
가경嘉慶 21년(1816) 가을에 판각이 처음 이루어졌는데, 이 판각을 남창南昌의 학당에 보관하고 있으면서 사림士林과 서점書店으로 하여금 모두 가져다가 인쇄하게 하였다.
학당에서는 책이 이루어지자 나에게 서문序文을 청하였는데, 내가 생각건대 성현聖賢의 경전은 해와 달이 하늘을 순행하고 강하江河가 땅에 흘러가는 것과 같으니, 어찌 감히 하찮은 말을 책머리에 쓸 수 있겠는가.
다만 이 책을 판각한 시말始末을 목록의 뒤에 기록하고, 다시 흠정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의 각 제요提要를 각 주소注疏의 앞에 공경히 기록해서 몸을 단속하여 행실을 닦는 선비들로 하여금 우리 대청大淸의 유학이 이전 세대를 크게 뛰어넘음을 알게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잠심하여 품행을 돈독히 하며 널리 배우고 행실을 돈독히 해서 옛 성현聖賢의 경전의 본원本源을 찾아야 할 것이요, 허황됨과 고루함의 두 길에 그릇되는 바가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태자소보太子少保 광록대부光祿大夫 강서순무겸제독江西巡撫兼提督 양주揚州 완원阮元은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