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鑑一書
는 하야 上下數千百載
의 興亡治亂
이 瞭然在目
하니 誠史學之綱領也
라
後之君子 固嘗節其繁而取其要矣나 其間에 詳者는 猶失之泛하고 略者는 又失之疎하니 學者病焉이라
의 江氏家塾
에 有通鑑節要
하니 詳略適宜
하야 於兩漢, 隋, 唐
엔 則精華畢備
하고 於六朝五代
엔 則首末具存
이라
其後에 建寧公黙이 游晦庵先生門할새 嘗以此書質之하니 先生이 深加賞嘆이라
復取此書하야 附益而潤色之하야 增入諸史表志序贊하고 參以名公議論音注하야 簡嚴明白하고 得失曉然하니 以爲庭下訓이라
客有過之曰 善則善矣나 與其襲珍以私於家론 孰若鋟梓以公於世오하니 主人笑曰 少微先生이 養高林泉하야 名動京闕이라
皇帝三使人聘之호되 終不能移其囂囂樂道之志하시고 凡著書立言에 亦惟自明其心이요 非欲求知於人也라
先世有書에 惟恐人知어시늘 余得其書하고 顧乃恐人不知耶아
客固請이어늘 予嘉其言하야 以贊其請하니 主人曰 諾다
朔
에 迪功郞新邵武郡南尉巡捉私茶鹽礬私鑄銅器兼催綱江鎔
은 謹序
하노라
《자치통감資治通鑑》 한 책은 기전체紀傳體를 바꾸어 편년체編年體로 만들어서 상하 수천 년 동안의 흥망興亡과 치란治亂이 환하게 눈앞에 나와 있으니, 진실로 역사학歷史學의 강령綱領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편질編帙이 매우 많아 두루 보기가 쉽지 않다.
후세의 군자君子들이 진실로 일찍이 번다한 것을 줄여 요점을 취했으나 그 사이에 상세한 것은 오히려 너무 많아서 문제이고 간략한 것은 또 너무 소략해서 문제였으니, 배우는 자들이 병통으로 여겼다.
소미선생少微先生 강씨江氏의 가숙家塾에 《통감절요通鑑節要》가 있는 바, 상세하고 간략함이 적당하여 양한兩漢과 수隋‧당唐에 있어서는 정화精華가 다 구비되었고 육조六朝와 오대五代에 있어서는 본말本末이 모두 나와 있다.
평점評點을 찍어 강령綱領을 들고 표제標題하여 요점을 뽑으니, 식자들이 보배로 여겼다.
그 후 건녕공建寧公 묵黙이 회암선생晦庵先生(朱熹)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할 적에 일찍이 이 책을 가지고 질정하니, 주선생朱先生은 크게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사우士友들이 다투어 서로 전하여 기록해서 더욱더 소중하게 여겼다.
지금 남산주인南山主人 연淵은 학문에 힘쓰고 행실을 깨끗이 닦아 전대前代의 업적을 빛나게 하였다.
그가 다시 이 책을 취하여 더 보태고 윤색潤色해서 여러 역사책의 표表와 지志, 서序와 찬贊을 더 넣고 명공名公들의 논평과 음주音注를 더 넣어서 간결하고 명백하며 득실得失이 분명하니, 이것을 가정家庭에서 가르치는 책으로 삼았다.
객이 그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좋기는 좋으나 소중하게 잘 간직하여 집에 사사로이 두는 것이 어찌 판각板刻하여 세상에 공공연히 전하는 것만 하겠는가.” 하니, 주인이 웃으며 말하기를 “소미선생少微先生은 산림山林에서 고상한 뜻을 길러 명성이 서울의 대궐에 진동하였다.
그리하여 황제皇帝가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초빙하였으나 끝내 스스로 만족하게 여겨 도道를 즐거워하는 뜻을 바꾸지 못하였고, 무릇 책을 짓고 글을 씀에 또한 자신의 마음을 밝힐 뿐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구하고자 하지 않았다.
선대先代에 책을 지을 적에 행여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하셨는데, 내가 그 책을 얻고는 도리어 사람들이 알지 못할까 두려워한단 말인가.” 하였다.
객이 굳이 판각板刻할 것을 청하므로 내(江鎔)가 그 말을 가상히 여겨 그 청을 도와 권하니, 주인이 “그렇게 하겠다.” 하였다.
가희嘉熙 정유년丁酉年(1237) 양월良月(10월) 초하루에 적공랑迪功郞 신소무군남위新邵武郡南尉 순착사다염반사주동기巡捉私茶鹽礬私鑄銅器 겸최강兼催綱 강용江鎔은 삼가 서序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