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向所序說苑二十篇
을 에 云 今存者五篇
이요 餘皆亡
이라하다
臣從士大夫間得之者 十有五篇이요 與舊爲二十篇이라
向采傳記百家所載行事之迹하야 以爲此書奏之하니 欲以爲法戒라
夫學者之於道에 非知其大略之難也요 知其精微之際 固難矣라
孔子之徒三千에 其顯者七十二人이니 皆高世之材也라
向之學博矣요 其著書及建言이 尤欲有爲於世로대 忘其枉己而爲之者有矣라
子曰 道之將行也歟
도 命也
며 라하시니 豈不得之有命哉
아
令向知出此하야 安於行止하야 以彼其志로 能擇其所學하야 以盡乎精微런들 則其所至를 未可量也리라
유향劉向이 서술한 《설원說苑》 20편을 《숭문총목崇文總目》에는 “지금 남아 있는 것은 5편이고 나머지는 모두 없어졌다.”라 하였다.
내가 사대부士大夫들 사이에서 찾은 것이 15편이고, 구본舊本과 합하여 20편이 된다.
그중 빠지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으면서 의심스러운 것은 빼어놓고 그 편목에 서문을 써서 이렇게 말한다.
유향이 전기傳記와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기재된 행사行事의 자취를 채집하여 이 책을 만들어 천자天子에게 올렸으니, 이는 전범典範과 감계鑑戒로 삼으려고 해서이다.
그러나 그가 골라 모은 것이 더러 사리事理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 때문에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배우는 사람이 도道에 있어서 그 대략적인 것을 아는 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정심精深하고 미묘微妙한 부분을 아는 게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공자孔子의 문도門徒 3천 명 중에 드러난 사람이 72명인데 모두 세상에서 뛰어난 재주가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안씨顔氏의 아들은 아마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라 하여 안회顔回만을 칭찬하였고, 안회가 죽었을 때에는 또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안회도 부자夫子를 칭송하여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다.” 하였고, 자공子貢도 “부자께서 성性과 천도天道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가 없다.” 하였다.
그러니 그 정심하고 미묘한 부분은 참으로 알기 어려운 지가 오래되었다.
이러므로 취사선택하는 사이에 실수가 없을 수 없다.
그 때문에 “배운 뒤에야 부족함을 안다.” 하였으니, 이 말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유향劉向은 학문이 넓고 그가 저술한 책과 건의한 말은 더더욱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려고 한 것이었으나, 자신은 바르지 않으면서 남을 바르게 하려 한다는 것을 잊고 있는 점이 있다.
어찌 남의 의견을 따른 것은 그리도 많고 자기의 말을 한 것은 적은가.
옛 성현聖賢이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하는 데에 도道가 있고 얻는 데에 명命이 있다.” 하였다.
그 때문에 공자孔子는 찾아간 나라에서 반드시 그 나라의 정사政事를 들었는데, 이를 자공子貢은 “부자夫子께서 요구하여 들은 것이 아니다.”라 하였으니, 어찌 구하는 데에 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공자께서 “도道가 장차 행해지는 것도 명命이며, 도道가 장차 폐해지는 것도 명命이다.” 하셨으니, 어찌 얻는 데에 명命이 있는 것이 아닌가.
가령 유향이 이 도리를 따라 나갈 줄을 알아, 나오고 그치는 것을 천명天命이라 편안히 여기면서 저와 같은 좋은 뜻으로 배운 바를 잘 선택하여 정심하고 미묘한 도리를 다 알았더라면 그가 이른 경지를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孔子는 “옛날의 배우는 사람들은 자기를 수양修養하는 공부를 하였다.”고 하셨고, 맹자孟子는 “군자君子가 〈깊이 나아가기를 도道로써 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아 얻고자 해서이니, 스스로 깨달아 얻었다면 가까운 좌우에서 취할 적에 그 근원을 만난다.” 하셨다.
그러니 어찌 자신이 아닌 외물外物을 추구하는 일을 급하게 여기겠는가.
유향의 잘잘못이 이와 같으니 이 또한 배우는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
그 때문에 서론敍論에서 이 점을 드러내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잘 고찰하여 선택할 줄을 알게 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유향이 여러 차례 참소를 당하는 곤경을 겪었으나 그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이는 〈얻은 부귀를〉 잃을까 근심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니, 훌륭한 뜻이 있는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사관史館에서 서적을 편교編校하는 신臣 증공曾鞏은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