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成帝時
에 論次兵書
하여 分
四種
하여 共五十三家
로되 而三略亦不載焉
이라
史稱張良이 少匿下邳할새 與父老遇於圯橋하여 出書一編하고 曰 讀此면 則爲王者師라하고 遂去어늘 旦日視之하니 乃太公兵法也라
通鑑綱目
에 亦曰 張良與沛公遇於留
하니 良
以太公兵法
沛公
한대 公善用之
하여 常用其策
이라
與他人言이면 輒不省한대 良曰 沛公은 殆天授라하고 遂不去라하니라
云 太公兵法一帙三卷
이라하고 唐李靖亦云 張良所學
은 太公六韜三略
이 라하니라
然則三略은 本太公書어늘 而黃石公或推演之하여 以授子房하니 所以兵家者流 至今因以爲黃石公書也리라
素書者는 晉亂에 有盜發子房塚하여 於枕中獲之하니 上有秘戒호되 不許傳於不神不聖之人이라하고 又摘取書中數語하여 以證子房之事라
且曰 自漢以來로 章句文辭之學熾하여 而知道之士極少하니
如
等
은 雖號爲一時賢相
이나 至於先
大道
하여는 曾未知其髣髴
하니
今觀素書
하면 原始章
에 首論道德仁義
하니 本三略下卷中文
이어늘 因而推廣之耳
라
下文의 賢人君子는 明於盛衰之道하고 通乎成敗之數하고 審乎理亂之勢하고 達乎去就之理라
故로 潛居抱道하여 以待其時하나니 若時至而行이면 則能極人臣之位하고 得機而動이면 則能成絶代之功이라
及能有其有者는 安하고 貪人之有者는 殘하고 舍己以敎人者는 逆하고 正己以化人者는 順이라하니
其後五章
도 亦是雜取古書中語
하여 而
換字樣
하여 聯屬之
하니 非秦漢以前古書
라
黃石公은 言其用故로 云 道德仁義禮不可無一焉이라하니 此其深於斯道者之言也라하니라
素書果出於子房塚中이면 而隋唐以來로 名儒碩士何故無一言及之리오
今亦未敢必以爲然일새 姑明其大槩하여 係於三略直解下하여 以俟知者焉하노라
《삼략三略》의 ‘三’은 상上‧중中‧하下의 3권卷이고 ‘略’은 모략謀略이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삼략三略》은 황석공黃石公의 책이니, 흙다리[圯橋]에서 장자방張子房에게 준 것이다.”라고 한다.
살펴보건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이르기를 “장량張良과 한신韓信이 병법兵法을 차례로 엮은 것이 모두 182가家였는데, 삭제해서 중요하게 쓸 수 있는 것만을 뽑아 35가家를 정하여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모두 《삼략三略》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고,
한漢 성제成帝 때에 임굉任宏이 병서兵書를 논하여 차례로 엮으면서 권모權謀‧형세形勢‧음양陰陽‧기교技巧의 네 종류로 나누어서 모두 53가家를 취하였는데, 여기에도 《삼략三略》이 기재되지 않았다.
역사서에 칭하기를 “장량張良은 젊어서 하비下邳에 숨어 지낼 적에 부로父老(老人)와 흙다리에서 만났는데, 노인은 책 한 권을 내놓으면서 ‘이 책을 읽으면 왕자王者의 스승이 된다.’라 하고 마침내 떠나갔는데, 아침에 보니 바로 《태공병법太公兵法》이었다.” 한다.
《통감강목通鑑綱目》에도 또한 이르기를 “장량張良과 패공沛公이 유留 땅에서 처음 만났는데, 장량張良이 여러 번 《태공병법太公兵法》을 가지고 패공沛公을 설득하자 패공沛公이 항상 그 계책을 사용하였다.
장량張良이 다른 사람에게 병법兵法을 말하면 번번이 살펴보지 않으니, 장량張良이 말하기를 ‘패공沛公은 아마도 하늘이 나에게 주었는가 보다.’라고 하고, 마침내 떠나가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이르기를 “《칠록七錄》에 《태공병법太公兵法》은 1질 3권이다.”라고 하였고, 당唐나라 이정李靖 또한 말하기를 “장량張良이 배운 것은 태공太公의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이다.”하였다.
그렇다면 《삼략三略》은 본래 태공太公의 책인데 황석공黃石公이 혹 확대하고 부연해서 장자방張子房(張良)에게 준 것이니, 이 때문에 병가兵家의 부류들이 지금까지 황석공黃石公의 책이라고 하는가 보다.
송宋나라의 장상영張商英은 또 말하기를 “《소서素書》는 바로 황석공黃石公이 장자방張子房에게 전수해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삼략三略》을 이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한 자들이 잘못한 것이다.
《소서素書》라는 것은 진晉나라의 난亂에 도둑이 장자방張子房의 무덤을 발굴하여 베개 속에서 얻었으니, 위에 비밀스런 경계가 있었는바, ‘신묘하지 못하고 성스럽지 못한 사람에게 전함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하였고, 또 책 속의 몇 마디 말을 뽑아 취하여 장자방張子房의 일을 증명하였다.
또 말하기를 “한漢나라 이래로 장구章句와 문사文辭의 학문이 치성하여 도道를 아는 인사人士가 지극히 적었다.
예컨대 제갈량諸葛亮, 왕맹王猛, 방교房喬, 배도裴度 등은 비록 한 시대의 어진 재상으로 이름났으나 선왕先王의 대도大道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그 방불髣髴한 모습도 알지 못하였으니,
이 책이 이 때문에 도道를 알지 못하고 신묘하지 못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소서素書》를 보면 〈원시原始〉章에서 첫 번째로 도道‧덕德‧인仁‧의義‧예禮를 논하였으니, 본래 《삼략三略》 하권下卷 가운데의 글인데, 따라서 미루어 넓혔을 뿐이다.
아랫글에서 “현인賢人과 군자君子는 성쇠盛衰의 도道에 밝고 성패成敗의 수數를 통달하고 치란治亂의 형세를 살피고 거취去就의 이치를 통달하였다.
그러므로 은거하여 도道를 간직해서 때를 기다리니, 만약 때가 와서 행하면 인신人臣의 지위를 지극히 하고 기회를 얻어 동動하면 절대絶代의 공功을 이룬다.
이 때문에 그 도道가 충분히 높고 이름이 후세에 드리워진다.”라고 하였고,
또 “능히 자신이 소유할 만한 것을 소유하는 자는 편안하고, 남이 소유한 것을 탐하는 자는 쇠잔하고, 자기 몸을 버리고 남을 가르치는 자는 거스르고, 자기 몸을 바루어 남을 교화시키는 자는 순하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삼략三略》의 전문全文을 다소 바꾸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뒤 5장章 또한 옛 책 가운데의 말을 뒤섞어 취하여 글자 모양을 바꾸어서 연결하였으니, 진秦‧한漢 이전의 옛 책이 아니다.
더구나 장상영張商英의 말은 대부분 허무맹랑함에 가깝다.
그가 말하기를 “비록 유有이나 무無인 것을 도道라 하고,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것을 신神이라 하고, 유有이나 무無가 된 것을 성聖이라 하고, 무無이나 유有가 된 것을 현賢이라 한다.”라고 하였고,
또 “노자老子는 그 체體를 말하였기 때문에 ‘예禮는 충신忠信이 박해져서 난亂의 첫 번째가 된다.’고 하였고,
황석공黃石公은 그 용用을 말하였기 때문에 ‘도道‧덕德‧인仁‧의義‧예禮에 한 가지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 도道에 깊은 자의 말이다.”라고 하였다.
《소서素書》가 과연 장자방張子房의 무덤에서 나왔다면, 수隋‧당唐 이래로 유명한 학자와 큰 선비가 무슨 연고로 한마디 말씀도 언급함이 없었겠는가.
이 때문에 송宋나라 선정先正(先代의 현인賢人)인 정자程子‧주자朱子와 선배들이 모두 논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또한 감히 반드시 옳다고 할 수가 없으므로, 우선 그 대략을 밝혀 《삼략직해三略直解》의 아래에 달아서 아는 자를 기다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