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然
이나 楊
은 非墨匹也
라 楊子之書
는 不傳
하고 略見於列子之書
하니 而已
라
墨子는 則達於天人之理하며 熟於事物之情하고 又深察春秋戰國百餘年間時勢之變하여 欲補弊扶偏하여 以復之於古라
鄭重其意하며 反復其言하여 以冀世主之一聽하니 雖若有稍詭於正者나 而實千古之有心人也라
謂孔子貴公
하며 墨子貴兼
하니 其實則一
하고 韓非
는 以儒墨竝爲世之顯學
하고
至漢世하여도 猶以孔墨竝稱하니 尼山而外에 其莫尙於此老乎인저
墨子死而墨分爲三하니 有相里氏之墨하며 有相夫氏之墨하며 有鄧陵氏之墨이라
今觀尙賢尙同兼愛非攻節用節葬天志明鬼非樂非命이 皆分上中下三篇이니 字句小異而大旨無殊라
意者컨대 此乃相里相夫鄧陵三家相傳之本이 不同이러니 後人이 合以成書라 故로 一篇而有三乎인저
墨氏弟子 網羅放失
하고 參考異同
하여 具有條理
로대 較之
하여 至今遂無可考者
컨대 轉似過之
라
乃唐以來로 韓昌黎外에 無一人能知墨子者하니 傳誦旣少에 注釋亦稀라
樂臺舊本은 久絶流傳이라 闕文錯簡을 無可校正이요 古言古字도 更不可曉하니 而墨學이 塵薶終古矣라
國朝에 鎭洋畢氏始爲之注하고 嗣是以來로 諸儒益加讎校라 塗徑旣闢에 奧窔粗窺하니 墨子之書를 稍稍可讀이라
於是에 瑞安孫詒讓仲容이 乃集諸說之大成하여 著墨子閒詁라
凡諸家之說에 是者는 從之하며 非者는 正之하고 闕略者는 補之라
至經說及備城門以下諸篇하야는 尤不易讀이어늘 整紛剔蠹하며 衇摘無遺하여
之文
은 盡還舊觀
하며 訛奪之處
는 咸秩無紊
하니 蓋自有墨子以來
로 未有此書也
라
以余亦嘗從事於此로 問序於余하니 余何足序此書哉리오 竊嘗推而論之컨대 墨子는 惟兼愛라 是以로 尙同하며
惟尙同이라 是以로 非攻하며 惟非攻이라 是以로 講求備禦之法이라
近世西學中의 光學重學은 或言皆出於墨子하니 然則其備梯備突備穴諸法은 或卽泰西機器之權輿乎인저
嗟乎
라 今天下
는 一大戰國也
니 以
一言
으로 爲主
하고 而以墨子之書
로 輔之
면 儻足以安內攘外乎
아
勿謂仲容之爲此書를 窮年兀兀徒하여 敝精神於無用也어다 光緖二十一年夏에 德淸兪樾이라
孟子가
楊朱와
墨翟을 병칭하여 논변하여 배척하였으나
楊子는
墨子에 필적할 정도는 아니었다.
楊子의 글은 전해지지 않고
列子의 글에 대략 보이니,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을 좋아하는 정도에 그친 사람이었다.
孟子
墨子는 天人의 이치에 통달하고 사물의 實情을 익숙히 알았으며, 또 춘추전국 100여 년간의 時勢의 변화를 깊이 통찰하여 낡은 것을 깁고 치우친 것을 바로 세워 옛것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 뜻을 鄭重히 하며 그 말을 반복하여 당세의 人主가 한번 들어주기를 기대하였으니, 비록 正道에서 조금 벗어난 점이 있는 듯하나 실로 千古에 남을 뜻있는 사람이다.
屍佼는 공자가 ‘公’을 귀하게 여겼고 墨子가 ‘兼’을 귀하게 여겼으니 그 사실은 똑같다고 하였으며, 韓非子는 儒家를 墨家와 아울러 세상의 顯學이라 하였으며,
漢나라 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孔子와 墨子를〉 ‘孔墨’이라 나란히 일컬었으니, 尼山(공자)을 제외하고 이 어르신보다 숭상된 분은 없으리라.
墨子가 죽고 墨家가 셋으로 나뉘었으니, 相里氏의 묵가가 있으며 相夫氏의 묵가가 있으며 鄧陵氏의 묵가가 있다.
지금 살펴보건대 〈尙賢〉‧〈尙同〉‧〈兼愛〉‧〈非攻〉‧〈節用〉‧〈節葬〉‧〈天志〉‧〈明鬼〉‧〈非樂〉‧〈非命〉이 모두 상‧중‧하 3편으로 나뉘었는데, 字句가 약간 다르더라도 大旨는 다름이 없다.
추측컨대 이는 곧 상리씨‧상부씨‧등릉씨의 세 묵가가 서로 전한 本이 같지 않았는데, 후대의 사람들이 모아서 〈하나의〉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의 편인데 세 편으로 되었을 것이다.
묵자의 제자들이 散逸된 것을 망라하고 異同을 참고하여 모두 條理가 있게 되었지만, 여덟으로 분파되어 이제 마침내 상고할 수 없게 되어버린 儒家의 경우에 비교해보더라도 더욱 심한 듯하다.
이에
唐나라 이래로
韓昌黎(
韓愈) 외에는 한 사람도 묵자를 제대로 아는 자가 없었는데,
傳誦하는 자들이 적어지자
注釋을 내는 자들도 거의 없게 되었다.
韓愈
樂臺의 舊本은 세상에 전해지지 않은 지 오래라 闕文과 錯簡을 校正할 수 없게 되었고 古言과 古字도 다시는 이해할 수 없게 되니, 墨學이 오래도록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國朝(淸)에 鎭洋의 畢氏(畢沅)가 처음으로 ≪墨子≫에 注釋을 내었고, 이를 이어서 학자들이 더욱 校正을 가하였다. 길이 열리자 深奧한 내용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되니, ≪墨子≫라는 책을 조금씩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에 瑞安의 孫詒讓 仲容이 諸說을 集大成하여 ≪墨子閒詁≫를 저술하였다.
〈그는〉 무릇 諸家의 설에서 옳은 것은 따르고 옳지 않은 것은 바로잡았으며, 빠지고 疏略한 부분은 보충하였다.
〈經說〉과 〈備城門〉 이하 편들은 더욱 읽기가 쉽지 않았는데, 어지러운 부분은 정리하고 쓸데없는 부분은 刪削하며 맥락을 남김없이 들추어내어,
旁行한 글은 모두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렸으며, 착오가 있거나 탈락된 부분은 모두 차례 지어 어지럽지 않게 하였으니, ≪墨子≫라는 책이 있은 이래로 이와 같은 책은 없었다.
나 역시 이 일에 종사하였다는 이유로 〈仲容이〉 나에게 序文을 부탁하였으니, 내 어찌 이 책에 序文을 쓸 만한 사람이겠는가? 미루어 논해보자면 墨子는 아울러 사랑[兼愛]하였는지라 같음을 숭상[尙同]하였으며,
같음을 숭상하였는지라 공격을 비난[非攻]하였으며, 공격을 비난하였는지라 敵을 防禦하는 법을 강구하였다.
근세 西學 가운데 光學과 力學이 혹자는 모두 墨子에게서 나왔다고 말하니, 그렇다면 〈備梯〉‧〈備突〉‧〈備穴〉 등의 방법들은 어쩌면 서양 기계의 시초인지도 모른다.
오호라! 지금 천하는 하나의 큰 전국시대니, 孟子의 ‘反本(근본으로 돌아감)’ 이 한마디를 主로 하고 墨子의 글로 보완한다면 혹시라도 內治를 편안히 하고 外勢를 물리치기에 족하지 않겠는가.
仲容이 이 책을 지은 것을 두고 늘그막에 오도카니 앉아 한갓 쓸데없는 데 정신을 허비했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光緖 21년(1895) 여름에 德淸 兪樾이 〈序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