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子之繫易曰
이라하니 斯固所以敎天下後世爲文者之
也
라
然而
에 顔淵子貢以下
로 齊魯間之秀傑也
요 或云
이라하여늘
蓋天生賢哲
에 各有獨稟
하니 譬則泉之溫
과 과 石之結綠
과 金之指南
이라
人於其間
에 以獨稟之氣
로 而又必之專一
하야 以致其至
하니 之於音
과 之於占
과 之於射
와 於御
와 之於醫
와 과 은 彼皆以天縱之智
로 加之以專一之學
하야 而獨得其解
니라
孔子沒而游夏輩各以其學授之諸侯之國이나 已而散逸不傳하니라
漢興
하야 招亡經
하고 求學士
에 而
輩
가 始乃稍稍出
하야 而
之文
이 號爲
하니라
魏晉宋齊梁陳隋唐之間
에 文日以靡
하고 氣日以弱
하니 矣
어든 而況於穿札乎
아
昌黎韓愈首出而振之
하고 柳柳州又從而和之
하니 於是始知非六經不以讀
이요 이라
於是歐陽公脩
가 從
으로 偶得韓愈書
하야 手讀而好之
하니 而天下之士
가 始知通經博古爲高
하고 而一時文人學士
가 하니라
蘇氏父子兄弟
와 及曾鞏王安石之徒
가 其間材旨小大
와 音響緩亟
은 雖屬不同
이나 而要之
컨대 於孔子所刪六藝之遺
는 則共爲
之者也
라
由今觀之
컨대 譬則世之走
於千里之門
이라가 而中及二百里三百里而輟者有之矣
나 謂
則非也
라
世之
가 往往謂文章與時相高下
라하고 而唐以後
는 且薄不足爲
라하니 噫
라
其間工不工은 則又係乎斯人者之稟과 與其專一之致否何如耳니라
如所云
이면 則必
之尙
이요 之陳
이니 而
의 之設
은 皆
也已
라
孔子之所謂其旨遠
은 卽不詭於道也
요 其辭文
은 卽道之燦然若
也
니라
已振詩聲
하고 復揭文軌
하야 而曰吾左吾史與漢矣
라하고 已而又曰 吾
라하니라
以予觀之
컨대 特所謂詞林之雄耳
니 其於古六藝之遺
에 豈不
而互相
已乎
아
予於是手掇韓公愈, 柳公宗元, 歐陽公脩, 蘇公洵軾轍, 曾公鞏, 王公安石之文하야
而稍爲批評之하야 以爲操觚者之券하고 題之曰八大家文抄라하니라
之八君子者
가 不敢遽謂盡得古六藝之旨
요 而予所批評
도 亦不敢自以得八君子者之深
이나 要之大義所揭
에 이 或於道不相
已
리라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에 대한 총서總叙
공자孔子께서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그 뜻은 심원深遠하고 그 문사文辭는 우아優雅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천하 후세에 문장을 배우는 자들을 가르치신 절실한 말씀이다.
그러나 공자 문하門下에서 수업한 제자弟子 중에 안연顔淵과 자공子貢 이하가 모두 노魯나라와 제齊나라의 뛰어난 인걸人傑이었고, 혹자는 “몸소 육예六藝를 통달한 자가 70여 인이었다.”고 하였는데,
모두 문학文學의 과목科目에 끼지 못하였고, 낀 사람은 겨우 자유子遊와 자하子夏 두 사람뿐인 것은 어째서인가?
대체로 하늘이 현명賢明하고 슬기로운 사람을 낼 때에는 각각 독특獨特한 기질氣質을 부여賦與하기 때문이니, 비교하자면 샘에 뜨거운 샘이 있고, 불에 차가운 불이 있고, 돌에 결록結綠(美玉)이 있고, 금속金屬에 지남철指南鐵이 있는 것과 같다.
사람은 그 사이에서 독특하게 받은 기질을 또 반드시 전일專一하게 수련修鍊하여 그 극치에 도달하니, 영륜伶倫이 음률音律에, 비조裨竈가 점술占術에, 양유기養由基가 활쏘기에, 조보造父가 수레몰이에, 편작扁鵲이 의술醫術에, 의료宜遼가 구슬놀이에, 혁추奕秋가 바둑에 정통한 것은 저들이 모두 천부天賦의 재지才智를 타고난 사람들로 전일하게 학습學習하여 홀로 그 이치를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진실로 이로 인해 당시에 명성을 독점하고 후세에 이름을 전한 것이니, 다른 사람이 서로 우열을 겨룰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공자孔子가 서거逝去한 뒤에 자유子游와 자하子夏 등이 각각 자기들이 배운 것을 제후諸侯 나라에 전傳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모두 흩어져 없어지고 전해지지 않았다.
진秦나라가 경서經書를 불태우고 학사學士들을 묻어 죽이자 육예六藝의 뜻이 거의 중단中斷되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서 없어진 경서經書를 구하고 학사學士들을 초치招致하자, 조조鼂錯‧가의賈誼‧동중서董仲舒‧사마천司馬遷‧유향劉向‧양웅揚雄‧반고班固 등이 비로소 점차 진출進出하여, 서경西京(西漢)의 문장文章이 고아高雅하고 순정純正하다고 일컬어졌다.
최인崔駰과 채옹蔡邕 이하 사람들도 문장이 씩씩하고 힘이 있어 뛰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육예의 뜻은 점점 사그라져 없어졌다.
위魏, 진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 수隋, 당唐 사이에는 문장이 날로 화려해지고 기세가 날로 유약柔弱해졌으니, 강한 쇠뇌에서 발사된 화살도 끝에 이르러 힘이 다하면 노魯나라에서 생산된 얇은 비단도 뚫을 수 없는데, 더구나 갑옷을 뚫을 수 있겠는가.
창려昌黎 한유韓愈가 처음 나와서 화려하고 유약해진 문풍文風을 진작振作시키고, 유유주柳柳州(柳宗元)가 또 뒤따라 호응呼應(和)하니, 이에 비로소 육경六經이 아니면 읽지 말아야 하고 선진先秦과 양한兩漢의 글이 아니면 보지 말아야 할 줄을 알았다.
그들이 지은 서書‧논論‧서敍‧기記‧비명碑銘‧송頌‧변辯 등 여러 편篇에는 진실로 일가一家의 문장을 독창獨創한 것이 많다.
그러나 대체로 모두 육예六藝(六經)의 유지遺旨를 찾아서 서로 오르내리며 도운 것들이다.
정원貞元 이후로 당唐나라도 문운文運이 중간에 쇠퇴하였고, 그 쇠퇴한 문풍文風이 계속 흘러내려 전란戰亂이 끊이지 않던 오대五代 때에 미쳐서는 천하에 고문古文을 짓는 이가 매우 드물었다.
송宋나라가 일어난 지 백 년 뒤에 하늘이 문운文運을 열어주었다.
이에 구양공歐陽公 수脩가 수주隋州 고가古家에 버려진 고서古書 속에서 우연히 한유의 글을 발견하여 손수 읽어보고는 좋아하니, 천하의 선비들이 비로소 경학經學에 통달하고 고사古事에 해박한 것을 고상함으로 여길 줄을 알았고, 당시의 문인文人 학사學士들이 성대하게 구양공에게 귀의歸依하여 떨쳐 일어났다.
소씨蘇氏 부자 형제와 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 등은 재지材旨(재주와 지취旨趣)의 대소大小와 음향音響(시문詩文의 성조聲調)의 완급緩急은 비록 같지 않으나, 요컨대 공자孔子께서 산정刪定한 육예의 유지에 대해서는 모두 익히고 자세히 열람閱覽한 자들이다.
지금 세상에서 보기에, 비교하자면 세상에는 준마駿馬를 달려 천 리 밖의 문門으로 가다가 200리나 300리에 미쳐 중지하는 자가 있으나, 이를 일러 북쪽[薊]으로 가면서 수레의 끌채를 남쪽[越]으로 틀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세상에 글을 쓰는 자들은 이따금 ‘문장은 시대에 따라 높아지기도 낮아지기도 한다.’고 하면서 당唐나라 이후의 문장에 대해서는 또 ‘천박淺薄하여 배울 가치가 없다.’고 하니, 아!
이는 문장은 다만 도道와 함께 서로 성쇠盛衰할 뿐이니, 시대는 논論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 사이에 문장이 정교精巧하고 정교하지 못한 것은 또 그 사람의 품성稟性과 전일하게 힘을 쓴 것이 어떠하냐에 달렸을 뿐이다.
가령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반드시 태갱太羹과 현주玄酒만을 숭상하고 모자茅茨와 토궤土簋만을 진설陳設해야 하니, 삼대三代 이후로 명당明堂, 옥대玉帶, 운뢰雲罍, 희준犧樽을 진설하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공자孔子께서 이른바 ‘그 뜻이 심원深遠하다.’는 것은 곧 도道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고, ‘그 문사文辭가 우아優雅하다.’는 것은 바로 도道가 찬란하여 마치 일월성신日月星辰이 하늘에 촘촘히 퍼져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진실로 복희伏羲(庖犧) 이래로 변역하지 않은 인문人文의 법통法統이니, 어찌 세인世人의 말과 같겠는가?
우리 명明나라 홍치弘治‧정덕正德 사이에 이몽양李夢陽이 북방北方에서 우뚝이 일어나니, 재지才智가 걸출傑出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미 시詩로써 명성을 떨치고, 다시 문장文章의 궤범軌範을 제시提示하며 말하기를 “나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사기史記》‧《한서漢書》의 문장을 본받았다.” 하고, 또 “나는 황초黃初와 건안建安 때의 시詩를 본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는 단지 사림詞林에 뛰어난 자일 뿐이니, 그가 옛 육예六藝의 유지遺旨에 대해 어찌 깊이 빠져 방탕하고 참람하게 표절剽竊한 자가 아니겠는가?
나(茅坤)는 이에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구양수歐陽脩,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의 문장을 손수 뽑아
약간의 비평批評을 붙여 글을 쓰는 자들의 필독서必讀書로 삼고서, 그 제목題目을 ‘八大家文抄’라고 하였다.
그리고 팔가八家마다 각각 인引을 붙이고, 이하와 같이 조목을 나누어 서술하였다.
이 여덟 군자가 옛 육예六藝의 뜻을 다 얻었다고 감히 말할 수 없고, 나의 비평 또한 감히 여덟 군자의 깊은 뜻을 다 얻었다고 할 수 없으나, 요컨대 대의大義를 드러낸 것을 명백明白하게 지적하여 서술敍述한 것이니 혹 도道와 서로 어긋나지 않을 듯하다.
그러므로 삼가 써서 세상에 나를 아는 이들에게 질정質正을 구하노라.
만력萬曆 기묘己卯(1579) 중춘仲春에 귀안歸安 녹문鹿門 모곤茅坤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