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爲子當孝, 爲臣當忠, 爲夫婦當別, 爲兄弟當友, 爲少者當敬長, 爲朋友當有信
이니 皆於
에 요 非
하여 希覬奇效者也
라
余慙
요 而
恐初學
이 하고 且無堅固之志而
이면 則
하고 라
故
로 하여 하고 名曰擊蒙要訣
이라하여 欲使學徒觀此
하고 하여 하고 而余亦
하여 欲以自警省焉
하노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學問이 아니면 사람 구실을 하면서 살아갈 수 없다.
이른바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정상에서 벗어나거나 〈일상생활과 벗어나〉 별도로 존재하는 일이 아니다.
단지 아버지가 되어서는 마땅히 자식子息을 사랑하고 자식이 되어서는 마땅히 부모父母를 사랑하며 신하臣下가 되어서는 마땅히 임금에게 충성하며 부부 사이에서는 마땅히 내외를 구별하고 형제兄弟간에는 마땅히 서로 우애하고 어린 사람이 되어서는 마땅히 어른을 공경하고 친구親舊 사이에는 마땅히 신의를 지키는 것이므로, 모두 일상생활 속에서 일에 따라 각각 그 마땅함을 얻는 것일 뿐이요 현묘玄妙한 곳에 관심을 집중시켜서 기이한 효력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배우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 식견識見이 어둡게 된다.
그 때문에 반드시 독서讀書를 통해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밝힌 뒤에 조예造詣가 올바름을 얻어서 실천함이 중도中道에 부합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학문이 일상생활 속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학문은〉 고원高遠해서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학문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 버리고 스스로 포기함을 편안히 여기니 어찌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출전] ○ 暴棄 : 포暴는 해친다는 뜻이고 기棄는 버린다는 뜻으로 원래 《맹자孟子》 〈이루상離婁上〉에서 맹자가 “스스로를 해치는 자와는 함께 좋은 말을 나눌 수 없으며 스스로를 버리는 자와는 함께 훌륭한 행위를 할 수 없다. 말만 하면 예의를 비난하는 사람을 스스로 해치는 자라고 일컫고 ‘나는 인과 의를 실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스스로 버리는 자라고 일컫는다.[自暴者不可與有言也 自棄者不可與有爲也 言非禮義 謂之自暴也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고 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 모색茅塞 : 《맹자孟子》 〈진심하盡心下〉에 나오는데 잡초가 자라나 길을 막는다는 뜻으로 사람의 마음에 욕심이 가득한 것을 비유했다. “산속의 작은 길은 사람들이 삽시간만 다니면 길이 되고 한동안 다니지 않으면 풀이 자라나 길을 막는다.[山徑之蹊間 介然用之而成路 爲間不用 則茅塞之矣]”
내가 해산海山의 남쪽에 거처를 정하자, 한 두 명의 학도學徒들이 서로 따라와 배우기를 요청했다.
내가 스승이 될 만한 자질이 없는 것이 부끄러울 뿐 아니라 초학자初學者들이 학문의 올바른 방향을 알지 못하고 또 견고한 뜻 없이 대충대충 배우고서 더 가르쳐 주기를 요구하면 피차간에 도움됨이 없고 도리어 남의 비웃음을 살까 두려웠다.
그 때문에 간략하게 책 한 권을 써서 뜻을 세우고, 몸을 가다듬고, 어버이를 봉양하고,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거칠게나마 서술하여 이름을 《격몽요결擊蒙要訣》이라고 하여 학도들이 이를 보고 마음을 깨끗하게 씻고 새롭게 출발하여 그날로 공부에 착수하게 하고 나 또한 오랫동안 그럭저럭 옛것을 답습하는 태도를 근심했는데, 이로써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고자 한다.
【교감】丁丑년 늦은 겨울에 德水李氏 珥는 書한다.
[해설] 간결한 서문이지만 유학이 지향하는 학문관을 잘 드러내 주는 부분이다. 학문의 목적은 경험적 지식을 축적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실천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란 다름 아닌 자慈, 효孝, 충忠, 별別, 우友, 경敬, 신信과 같은 일상생활 속의 도리이다. 따라서 학문이 높다거나 낮다는 평가도 모두 이와 같은 인간의 도리를 제대로 실천하느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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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몽요결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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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몽요결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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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몽요결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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