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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1)

대학연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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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製重刊大學衍義序
惟古之君天下者 必有其要然後 能使家齊國治而天下平焉하나니
惟大學一書 乃古人修身治天下之要道
宋儒眞德秀 推衍其義하여 綱擧目張하여 本末具備하니 眞可爲後世人君之鑑戒也
恭惟我 首定家邦하사 하시고 卽命儒臣하사 러시니 曁我 하시니
雖不得目覩宮墻所書하나 而訓章 具存하여 載諸寶冊하니 深思皇祖垂訓惓惓之意하여 罔敢怠忘호라
比居藩邸 面承之敎러니 稍長 卽命하시고
且命就講官하여 講解大學衍義하사 曰 此書 於人 深有裨益이니 汝遵予言하여 力爲進學하라
學不負人이라 在用功專與不專耳라하시니
러니 不幸皇天 降割하여 하시니 言猶在耳로되 追念何及이리오
近日輔臣 請以是書進講할새 特於五月十三日 始命經筵日講官하여 輪直講讀하여 以資朕學하노니
夫眞氏之撰是書也 首書帝王爲治之序하니 蓋統言之
次則論堯‧舜以下諸君之學하니 夫學則心志通明하여 事至物來 無所不達이라
故務學 爲君人之首事
至論格物致知之要 先明道術하여 本之天理人倫하니 理明則人慾하고 倫序則綱常하여 而異端之差 王覇之異 有不足辨矣
次辨人材 欲以聖賢之觀人 帝王之知人으로 爲法하니 則君子小人之不同道 忠直邪媚之不同科 較然可知
次審治體 以昭禮樂刑政之序하고 察民情 以明撫虐向背之機
誠意正心之要 其論崇敬畏‧戒逸欲 爲詳하고 修身之要 謹言行‧正威儀 爲主하고
而齊家之要 則所謂重妃匹‧嚴內治‧定國本‧敎戚屬者 無有不備焉하니
總而言之 皆本於修身하니
格致誠正 皆所以修其身也 身修則敎成於家矣
然其中謹言行‧正威儀二語 尤爲親切하니 蓋君身 萬化之原이라
一言一動 關繫匪輕하니 自廳政臨朝 至於祭祀燕享之時 不可毫髮忽慢이니
言行謹而威儀正이면 則四海 從焉하며 臣民 化焉하고 否則니라
然言行 不可以僞爲 威儀 不可以矯飾이라
要在意誠心正而身自修耳니라
嗚呼 眞西山 撰述此書하여 其所以望於後之君天下者 不旣深哉
其不及治國平天下者 擧而措之 率是道耳니라
朕德不逮 覽是書 惕然于懷하노니
自惟下作生民之主하고 上承昊天明命하여 苟不留心大學이면 則無以盡君道之所當爲者 非但愧居君師之位
豈不有負於天이며 有負於祖宗哉리오
讀是書 則知前代治亂之由 皆本於學與不學耳
學則聖賢之道 爲治本末之序 如指諸掌하여 修齊之功 治平之效 未有不得焉이요 如不學이면 則慾盛理微하여 凡百有害于身于家于國于天下者 罔知戒止하여 危亡之勢 未有能逃之者矣니라
是道也 乃堯‧舜‧禹‧湯‧文‧武之道 非孔子之私言이며 亦非德秀之臆說也
覽是書 見刻寫 未精일새 特命하여 重刊以遺來世하노니
書刻 可觀이면 庶使讀之者 不至於厭斁焉이니
刊成 用序諸首하여 以申朕勉强向學之意云하노라
하노라


대학연의大學衍義중간重刊에 즈음하여 쓴 어제御製 서문序文
의 생각에, 옛날 천하에 임금 된 이들은 를 일으켜 치세治世를 이루는 데 있어 반드시 그 요체가 있은 뒤에야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천하가 평안해지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직 《대학大學》이라는 책이 바로 옛사람들이 자신을 수양하고 천하를 다스렸던 중요한 방도였다.
나라의 유학자 진덕수眞德秀가 이 뜻을 추론推論하고 부연敷衍하여 이 제시되고 이 나열되어서 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진실로 후세 임금의 감계鑑戒가 될 만하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께서 먼저 나라를 안정시켜서 궁전을 낙성하고는 바로 유신儒臣에게 명을 내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궁전의 회랑 벽에 써서 그림을 대신하게 하셨는데, 그 뒤 우리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 때에 북경北京으로 도읍을 옮기셨다.
짐은 종친으로서 스스로를 돌아볼 때 나이가 어리고 우매함에도 천지天地조종祖宗의 보살핌을 받아 황형皇兄무종武宗의 명으로 들어와서 대통大統을 이었다.
비록 궁전 회랑 벽에 써 있는 글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가르침이 담겨 있는 글이 모두 남아 보책寶冊에 실려 있으니, 황조皇祖(太祖 고황제高皇帝)께서 간곡하게 훈계하신 뜻을 깊이 생각해볼 때 감히 게을리하거나 잊을 수가 없다.
짐이 예전에 잠저潛邸에 거처할 때 황고皇考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는데, 조금 장성하자 곧바로 전각으로 나가 독서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강관講官에게 나아가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해하도록 명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책은 사람에게 매우 도움이 되니 너는 내 말을 따라 힘써 학문에 정진하도록 하라.
학문은 사람을 저버리지 않으니, 공부를 전일하게 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하셨다.
짐은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가르침을 받았는데 불행하게도 하늘이 재앙을 내려 황고皇考께서 돌아가셨으니, 아직도 그 말씀이 귓가에 맴돌지만 황고를 추념追念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근일에 내각內閣보신輔臣들이 이 책을 진강進講하자고 청하기에 특별히 5월 13일에 경연의 일강관日講官에게 처음으로 명을 내려 돌아가며 숙직하면서 강독하게 함으로써 짐의 학문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진덕수眞德秀가 이 책을 저술할 때 ‘역대 성왕聖王치세治世를 이룩해갔던 단계[帝王爲治之序]’를 맨 먼저 기록하였는데, 이는 총괄적으로 말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임금과 임금 이하 여러 임금들의 학문을 논하였는데, 학문을 하면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서 사물을 접할 때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학문에 힘쓰는 것은 임금 된 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사물의 원리를 깊이 연구하여 지성知性의 힘을 극대화하는 핵심적인 방법들[格物致知之要]’을 논한 항목에서는 ‘를 분명히 밝힘[明道術]’이라는 항목을 먼저 제시하고 그 근본을 천리天理인륜人倫에 두었으니, 천리가 분명해지면 인욕人慾이 없어지고 인륜이 질서 잡히면 강상綱常이 바르게 되어 이단의 오류, 왕도王道패도霸道의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없게 된다.
다음으로 ‘인재를 구별하는 방법들[辨人才]’을 논한 항목에서는 성현이 인재를 가려내는 방법과 역대 성왕聖王이 인재를 알아보았던 사례들을 으로 삼고자 하였으니, 이렇게 하면 군자와 소인은 가 같지 않고 충직한 사람과 간사한 사람은 등급이 같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치국의 강령을 살핌[審治體]’을 논한 항목에서는 예악禮樂형정刑政의 순서를 밝혔고, ‘여론을 살피는 방법[察民情]’을 논한 항목에서는 백성들을 어루만지느냐 학대虐待하느냐에 따라 백성들이 지지하느냐 이반하느냐의 기미를 밝히고 있다.
‘생각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체[誠意正心之要]’를 논한 항목에서는 ‘공경함과 두려워함을 존숭함[崇敬畏]’과 ‘안일과 욕심을 경계함[戒逸欲]’을 논한 부분이 상세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요체[修身之要]’를 논한 항목에서는 ‘언행을 삼감[謹言行]’과 ‘위의를 바르게 함[正威儀]’을 위주로 하였다.
그리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요체[齊家之要]’를 논한 항목에서는 이른바 ‘배필을 중히 여김[重妃匹]’, ‘궁위宮闈와 환관에 대한 단속을 엄히 함[嚴內治]’, ‘국본을 정함[定國本]’, ‘외척을 교화함[敎戚屬]’ 등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이 조목들은 모두 자신을 수양하는 것에 근본을 두고 있다.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이 모두 자신을 수양하는 방법이니, 자신이 수양되면 교화가 집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언행을 삼감[謹言行]’, ‘위의를 바르게 함[正威儀]’이라는 두 마디 말이 더욱 직접적이고 절실한데, 임금의 몸은 모든 교화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그 관계됨이 가볍지 않으니, 정사政事를 보고 조회朝會에 임하는 때로부터 제사祭祀를 지내고 연향燕享하는 때에 이르기까지 털끝만큼도 소홀히 하거나 태만해서는 안 된다.
언행이 삼가지고 위의가 바르게 되면 온 천하가 임금을 따르게 되고 신민臣民들이 교화되며, 그렇지 않으면 임금이 내리는 명령이 임금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반대가 되어 백성들이 따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언행을 거짓으로 행할 수는 없는 것이며 위의를 꾸며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체는 생각이 성실해지고 마음이 바르게 되어 자신이 저절로 수양되느냐에 달려 있다.
아, 서산西山 진덕수眞德秀가 이 책을 저술하여 후세의 천하에 임금 된 이들에게 바란 것이 참으로 깊지 않은가.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에 관한 항목까지 언급하지 않은 것은, 나라와 천하에 시행할 때 이상의 도리를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짐은 덕이 부족하기에 이 책을 볼 때마다 마음에 두려움이 생긴다.
스스로 생각해볼 때 아래로는 백성들의 주인이 되고 위로는 하늘의 밝은 명을 받들고서 진실로 《대학》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임금이 당연히 행해야 할 도리를 다할 수 없게 되니, 임금의 지위에 있는 것이 부끄러운 정도에서 그칠 문제가 아니다.
어찌 하늘을 저버리는 일이 되지 않겠으며, 조종祖宗을 저버리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이 책을 읽어보면 전대前代치세治世난세亂世의 원인이 모두 학문을 하였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근본을 두고 있을 뿐임을 알게 된다.
학문을 하면 성현의 도와 치세를 이룩하는 본말의 순서가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는 것처럼 분명하여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공효와 나라를 잘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결과가 얻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학문을 하지 않으면 인욕人慾은 커지고 천리天理는 희미해져서 자신과 집안과 나라와 천하에 해가 되는 온갖 것들에 대해 경계하고 금지할 줄 모르게 됨으로써 위망危亡의 형세를 피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아, 이 는 바로 임금‧임금‧우왕禹王탕왕湯王문왕文王무왕武王의 도이지 공자孔子의 개인적인 말이 아니며 진덕수眞德秀억설臆說도 아니다.
짐은 이 책을 볼 때 판각板刻과 글씨가 하지 않음을 보았기 때문에 특별히 사례감司禮監에 명하여 이 책을 중간重刊하여 후세에 남겨 주노라.
글씨와 판각이 볼만하면 아마도 이 책을 읽는 자들이 싫증을 낼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간행이 이루어짐에 첫머리에 서문을 써서 향학向學을 권면하는 짐의 뜻을 밝히는 바이다.

가정嘉靖 6년(1527) 6월 초하루에 서문을 쓴다.


역주
역주1 興道致治 : 《孟子》 〈盡心 上〉에 “선비는 곤궁해도 大義를 잃지 않고 영달해도 道理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곤궁해도 大義를 잃지 않기 때문에 선비가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영달해도 道理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망하지 않는다.[士窮不失義 達不離道 窮不失義 故士得己焉 達不離道 故民不失望焉]”라는 내용이 보인다. 朱熹는 《孟子集註》에서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의 지조를 잃지 않는다는 말이다. ‘백성들이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평소에 그가 道를 일으켜 治世를 이루기를 바랐는데 이제 과연 그 소망대로 되었다는 말이다.[得己 言不失己也 民不失望 言人素望其興道致治 而今果如所望也]”라고 하였는데, ‘興道致治’는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역주2 太祖高皇帝 : 1328~1398(재위 1368~1398). 明나라의 초대 황제 洪武帝 朱元璋이다. ‘太祖’는 묘호이며 ‘高皇帝’는 시호이다.
역주3 落成宮殿 : 1368년(洪武1) 9월 초하루에 太廟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9월 30일에 새로 內三殿이 완성되자, 이름을 각각 奉天殿, 華蓋殿, 謹身殿으로 명명하고 좌우의 누각을 文樓와 武樓로 명명하였다. 三殿의 뒤에 궁궐을 지었는데, 앞에 있는 궁을 乾淸宮이라 하고 뒤에 있는 궁을 坤寧宮이라 하였다. 이어 6宮을 차례로 나란히 세웠는데, 건축 양식이 꾸밈없이 매우 소박하였다. 《明史紀事本末 卷14 開國規模》
역주4 取大……繪畫 : 明나라 太祖는 궁궐이 완성되자 博士 熊鼎類에게 명하여 옛사람들의 행실이나 事蹟 가운데 鑑戒가 될 만한 것들을 벽에 쓰라 명하고, 또 侍臣에게 명하여 궁전 양쪽 회랑 벽에 《大學衍義》를 쓰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전대의 궁실에 보면 그림을 많이 그려놓았는데 나는 이를 써서 朝夕으로 관람하고자 한다. 이것이 어찌 단청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前代宮室 多施繪畫 予用此備朝夕觀覽 豈不愈於丹靑乎]”라고 하였다 한다. 《明史紀事本末 卷14 開國規模》
역주5 太宗文皇帝 : 1360~1424(재위 1402~1424). 明나라 3대 황제 永樂帝 朱棣이다. ‘太宗’은 묘호이며 ‘文皇帝’는 시호로, 묘호는 후에 成祖로 개칭되었다. 太宗은 1402년(建文4)에 조카인 2대 황제 建文帝(惠帝)를 내몰고 제위에 올랐다. 儒學과 朱子學 관련 도서들을 편찬하였는데, 특히 《永樂大典》의 편찬은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역주6 遷都北京 : 太宗 永樂帝는 南京에서 北京으로 천도하여 宮城인 紫禁城을 세우는 등 수도를 재건했다. 북경의 새 궁전은 1420년(永樂18)에 완공되었으며 1421년(永樂19) 새해 첫날 북경이 정식으로 명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역주7 朕以……大統 : ‘朕’은 明나라 11대 황제 嘉靖帝 朱厚熜(1507~1566, 재위 1521~1566)을 가리킨다. 묘호는 世宗이다. 憲宗의 손자이며 興獻王 朱祐杬의 아들이다. ‘宗人’은 종친이라는 뜻이다. 세종이 즉위 전에 당시 황제였던 武宗의 사촌동생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종친이라고 한 것이고, 16세의 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沖昧라고 한 것이다. 武宗은 명나라 10대 황제 朱厚照이다. 武宗은 묘호이며, 시호는 毅帝, 연호는 正德이다. 자식이 없었으므로 제위는 1521년에 사촌인 世宗이 계승했다.
역주8 皇考 : 世宗의 생부인 興獻王 朱祐杬을 가리킨다. 세종이 즉위한 뒤 흥헌왕의 존칭 문제를 의논할 때 신하들이 禮敎에 의거하여 孝宗을 皇考로 하고 본래의 생부는 숙부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세종은 부모를 바꿀 수 없다고 하여 흥헌왕의 존호를 興獻帝라 하고 皇考로 높였다.
역주9 出閣讀書 : 황태자가 8세 이상이 되면 殿閣을 정하여 그곳으로 나가서 翰林 등을 侍讀官과 侍講官으로 삼아 經史의 글을 배우는 의식을 말한다. 《翰林記 卷10 東宮出閣講書》
역주10 拜稽受敎 : ‘拜稽’는 ‘再拜稽首’의 준말로, 무릎을 꿇고 拜禮를 행할 때 절을 두 번 한 뒤에 다시 머리를 땅에 대고 조아려 고도의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하가 임금과 禮를 행할 때에는 모두 계단을 내려가 再拜稽首한다. 군신 사이가 아닌데도 稽首하는 것은 지극한 공경을 표할 때 하는 것으로, 禮를 성대하게 한 것이다. 《禮經釋例 卷1 周官九拜解》
역주11 親輿上賓 : ‘親輿’는 어버이의 板輿라는 뜻이다. ‘上賓’은 上帝의 손님이 되었다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말한다.
역주12 內閣 : 明‧淸代의 중앙 관서로, 처음에는 황제의 顧問을 맡다가 나중에는 국가 기밀 사무에 참여하는 등 권위가 강화되었다. 최고책임자를 首輔라고 하였는데, 황제를 도와 정책을 세우고 公事의 문서를 살피며 詔令을 작성하는 등 재상의 직책에 해당하는 임무를 맡았다.
역주13 其所……從矣 : 《대학》 傳9章에 “堯임금과 舜임금이 仁으로 천하를 통솔하자 백성들이 따라서 仁해졌고, 桀王과 紂王이 暴惡으로 천하를 통솔하자 백성들이 따라서 포악해졌다. 임금이 명하는 것이 임금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반대가 되면 백성들은 따르지 않는 법이다.[堯舜帥天下以仁 而民從之 桀紂帥天下以暴 而民從之 其所令反其所好 而民不從]”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14 司禮監 : 明代에 설치된 관서로, 환관의 24衙門 가운데 으뜸이었다. 提督‧掌印‧秉筆‧隨堂 등의 직함을 가진 환관들을 두었다. 提督은 皇城 안에서의 의례나 형률 등을 관장하고, 掌印은 내외의 章奏 등을 처리하였으며 秉筆은 章奏 문서를 처리하였다. 英宗 때의 환관 王振이 권력을 專斷한 이후에는 조정에서의 실권이 首輔를 능가하였다. 《中國歷代官制詞典 司禮監》
역주15 嘉靖六年六月朔旦에 序하노라 : 저본에는 ‘에’와 ‘하노라’가 없으나, 문맥을 살펴 보충하였다.
역주16 : 저본에는 ‘朝’로 되어 있으나, 朝鮮의 避諱이므로 바로잡았다. 이하도 동일하다.

대학연의(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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