朕觀諸兵書
호니 無出孫武
요 하니 夫用兵
에 識虛實之勢
면 則無不勝焉
이니라
原注
朕觀諸家兵書호니 無出孫武子요 孫武子十三篇은 無出虛實二字라
今諸將中에 但能言備實擊虛로되 及其臨敵하여는 則鮮識虛實者는 蓋不能致人而反為敵所致故也라
原注
今諸將中에 但能言備敵之實而擊其虛로되 及其臨敵對陣하여는 則少有能識虛實者하니 蓋不能致敵之來而反爲敵人所致故也라
先教之以奇正相變之術然後에 語之以虛實之形이 可也니 諸將은 多不知以奇為正, 以正為奇하나니
原注
可先敎之以自己奇正互相變易之術然後에 告之以敵人虛實之形이 則可也라
今之諸將은 多不知以奇爲之正, 以正爲之奇하나니 且安識敵之形虛却是實, 實却是虛哉잇가
策之而知得失之計하고 作之而知動靜之理하고 形之而知死生之地하고 角之而知有餘不足之處라하니 此則奇正在我하고 虛實在敵歟아
原注
孫子謂策之而知得失之計하고 作之而知動靜之理하고 形之而知死生之地하고 角之而知有餘不足之處라하니
以此觀之면 則奇與正은 在我하고 虛與實은 在敵歟아
敵實則我必以正하고 敵虛則我必以奇니 茍將不知奇正이면 則雖知敵虛實이나 安能致之哉잇가
臣奉
에 但教諸將以奇正
이니 然後
에 虛實自知焉
이리이다
原注
奇正者는 所以致敵之虛實也니 若敵實이면 則我必用正하고 敵虛면 則我必用奇니
苟爲將者 不知用奇正之術이면 則雖知敵人之虛實이나 亦安能致其來而破之리잇고
臣奉詔旨에 但敎諸將以奇正之術이니 然後에 敵之虛實을 自然知焉이리이다
使敵勢常虛하고 我勢常實이니 當以此法으로 授諸將하여 使易曉耳니라
千章萬句 不出乎致人而不致於人而已니 臣當以此教諸將호리이다
原注
以奇爲正者는 敵意吾用奇兵與彼戰이면 則吾却以正兵之法擊之니
正兵之法은 六步七步乃止齊焉하고 六伐七伐乃止齊焉하여 見利勿取하고 佯北勿追하며 進無速奔하고 退無遽走하여 絶而成陣하고 散而成行이니 此正兵之法也라
以正爲奇者는 敵意吾用正兵與彼戰이면 則吾却以奇兵之法擊之니
奇兵之法
은 驚前掩後
하고 衝東擊西
하여 雷動風飛
하고 霆
電擊
하여 使敵莫測
이니 此奇兵之法也
라
使敵之勢常虛하여 不能測我用奇用正之術이면 則我之勢常實而爲勝이니 當以此法으로 授諸將하여 使之易曉耳라
兵書千章萬句 不出致人而不致於人而已니 臣當以此法으로 敎諸將호리이다
蓋致人則佚하고 致於人則勞니 若用奇正而不能致人이면 亦何益於勝哉리오
朕置瑤池都督하여 以隷安西都護하니 番漢之兵을 如何處置오
原注
朕今置瑤池都督하여 以隷屬安西都護하니 番漢之兵을 將如何處置오
由此로 常習戰鬪하니 若我恩信撫之하고 衣食周之면 則皆漢人矣리이다
原注
天之生人에 圓首方足하고 飢食渴飮이 一而已矣니 本無番漢之分別이라
然이나 所處之地 邊遠荒漠하여 五穀罕熟하여 必以射獵而生이라
由此로 常習戰闘之事하니 若我以恩信撫恤之하고 衣食周救之면 則皆爲漢人矣리이다
陛下置此都護
하시니 臣請收漢戍卒
하여 處之內地
하여 減
糧饋
하오니
但擇漢吏有熟番情者하여 散守堡障이면 此足以經久요 或遇有警이면 則漢卒出焉이니이다
原注
陛下今置此安西都護하시니 請收漢卒하여 移處內地하여 減省漢卒之糧饋니 兵家所謂治力之法也라
但選擇漢吏有習熟番人之情者하여 散守塞外之堡障이면 此足以經久요 或遇邊境有警急이면 則命漢卒하여 出焉이니이다
原注
太宗이 因李靖言兵家治力之法이라 故로 又問孫子所言治力은 其說如何오
以近待遠하고 以佚待勞하고 以飽待飢는 此略言其概耳니이다
原注
軍爭篇所言以己之近
으로 待敵之遠來者
하고 以己之佚
로 待敵之勞倦者
하고 以己之飽
로 待敵之飢餓者
는 此略言其治力
大槪耳
니이다
善用兵者는 推此三義而有六焉하니 以誘待來하고 以靜待躁하고 以重待輕하고 以嚴待懈하고 以治待亂하고 以守待攻이니이다
反是
면 則力有弗迨
하여 非治
之術
이니 安能臨兵哉
잇가
原注
善能用兵者는 推此三義而又有六焉하니 以我之引誘而待彼之來하고 以我之閒靜而待彼之躁하고 以我之持重而待彼之輕하고 以我之戒嚴而待彼之懈하고 以我之整治而待彼之亂하고 以我之守固而待彼之攻이니이다
反此면 則力有所不及하여 非治力之術이니 又安能臨人之兵哉잇가
今人習孫子者는 但誦空文하고 鮮克推廣其義하니 治力之法을 宜徧告諸將하라
原注
今人習讀孫子書者 但能誦其空文하고 少能推廣其義하니 治力之法을 宜徧告諸將知之하라
舊將老卒이 凋零殆盡하고 諸軍新置는 不經陣敵하니 今教以何道為要오
原注
朕之舊將老卒은 凋零幾盡하고 諸軍은 皆新置하여 不曾經歷戰陣對敵하니 今敎以何道爲緊要오
臣常教士에 分為三等호되 必先結伍法하고 伍法旣成이어든 授之軍校니 此一等也니이다
原注
臣常敎士에 須分爲三等호되 必先使結伍法하니 五人爲一伍라
軍校之法은 以一為十하고 以十為百이니 此一等也니이다
授之裨將하면 裨將이 乃總諸校之隊하여 聚為陣圖하니 此一等也니이다
原注
軍校敎成하여 授之裨將이면 裨將이 乃總諸軍校之隊하여 聚而爲陣圖하니 此爲一等이니이디
大將이 察此三等之教하여 於是大閱하여 稽考制度하고 分別奇正하여 誓衆行罰이어든 陛下臨高觀之하시면 無施不可하리이다
原注
稽考陣圖行伍器仗章號之制度하고 分別孰爲之奇, 孰爲之正하여 誓戒衆士하여 以行罰而懲戒有罪者어든 陛下臨高觀望之하시면 無施設而不可焉이리이다
原注
太宗
靖必先結伍之說
하고 又云 伍法有數家
하며 誰者爲要緊
고
臣按春秋左氏傳云
라하고 又司馬
曰
人為伍
라하고 尉繚子
에 有束伍令
하고
原注
臣按春秋左傳云 周桓王이 奪鄭伯政한대 莊公不朝어늘 王伐之하니
之陣
호되 先(徧)[偏]後伍
하여 伍承彌縫
하여 以敗王師
라하니이다
古者에 車十五乘을 爲一偏하니 蓋先車而後伍하여 以伍承車之隙하여 而彌縫其闕漏也라
按司馬法中에 無此一句하니 恐是司馬穰苴書中語也라
謂五人爲伍하여 共一符하여 收於將吏之所호되 亡伍而得伍면 當之하고 得伍而不亡이면 有賞하고 亡伍不得伍면 身死家殘이라
尺籍者는 書其斬首之功於一尺之板이요 伍符는 伍伍相承也라
臣酌其法하여 自五人而變為二十五人하고 自二十五人而變為七十五人하니 此則步卒七十二人, 甲士三人之制也니이다
原注
臣酌量其法
하여 自五人而變爲二十五人
하니 二十五人
은 蓋
數也
라
自二十五人而變爲七十五人하니 七十五人은 蓋十五伍數也니이다
舍車
騎
면 則二十五人
이 當八馬
하니 此則五兵五當之制也
니이다
原注
舍車(爲)[用]騎
면 則二十五人
이 可以當八馬
하니 此則
也
니이다
是則諸家兵法에 唯伍法為要하니 小列之하면 五人이요 大列之하면 二十五人이요 參列之하면 七十五人이며 又五參其數하여 得三百七十五人하니 三百人為正이요 六十人為奇라
此則百五十人을 分爲二正하고 而三十人을 分爲二奇하니 蓋左右等也니이다
穰苴所謂五人為伍하고 十人為隊니 至今因之하니 此其要也니이다
原注
小列之하면 止是五人이요 大列之하면 則爲二十五人이니 五伍數也라
又五參其數하여 得三百七十五人하니 謂五箇五伍數也라
三百人爲正이 舊本에 作二百人爲正하니 傳寫之誤니 如上文卒字를 誤作半字之類라
餘十五人은 則每車甲士三人이니 五車共一十五人也라
此則百五十人
을 分爲二正
하고 三十人
을 分爲二奇
니 라
左二正에 用一百五十人하고 二奇에 用三十人하며 右二正에 亦用一百五十人하고 二奇에 亦用三十人하여 共三百六十人也라
是小列之하면 七十五人이 爲一正이요 十五人이 爲一奇며 大列之하면 三百人이 爲一正이요 六十人이 爲一奇也라
穰苴所謂五人爲一伍하고 十人爲一隊니 至今皆因之하니 此其要法也니이다
朕與李勣論兵에 多同卿說이나 但勣은 不究出處爾라
原注
朕與
論兵法
에 多同卿說
이나 但世勣
은 不窮究其出處爾
라
大陣包小陣하고 大營包小營하여 隅落鉤連하고 曲折相對하니 古制如此하니이다
原注
大列之하면 爲九軍이요 小列之하면 每一軍이 又分爲九軍也라
九九八十一小陣이요 八十一小營이니 自外觀之하면 只是一陣이로되 而分爲八軍하여 與中軍으로 共爲九軍也라
旣曰 大陣包小陣
하고 大營包小營
이라하니 此所以
이 相鉤相連
하고 一曲一折
이 皆相對
하니 古之法制如此
하니이다
故로 外畫之方하고 內環之圓하니 是成六花니 俗所號爾니이다
原注
故로 外畫之方은 八陣之舊也요 內環之圓은 六花之變法也니
其形象
이 하니 乃俗所號爾
니이다李靖의 六花陣
原注
○愚按 八陣九軍者는 方陣也요 六花陣은 卽七軍이니 七軍者는 圓陣也라
方陣則內外俱方하고 圓陣則內外俱圓하니 所謂中心零者를 大將握之하여 四面八向이 皆取準焉이어늘 今云 外畫之方하고 內環之圓은 何也오
蓋外畫之方者는 開方法이니 必取其地之方하여 而見其步也요 內環之圓者는 結伍法이니 必取其形之圓하여 以見其兵也니 非以外六軍爲方陣하고 而中一軍爲圓陣也라
若然이면 中軍이 與外六軍으로 方圓之形不同하니 又何以取準乎아
方生於步하고 圓生於奇하니 方은 所以矩其步요 圓은 所以綴其旋이라
步定綴齊
면 則變
不亂
이니 八陣為六
은 武侯之舊法焉
이니이다
原注
方은 所以矩其步요 矩는 所以爲方之器也니 矩其步하여 使之方也라
圓은 所以綴其旋이요 綴은 聯屬也니 綴其旋하여 使之圓也라
是以로 步數는 定於地하니 地體方故로 步數亦如之요
步數之法定하고 行綴之法齊면 則千變萬化而不至於亂이니 八陣而爲六陣은 乃諸葛武侯之舊法焉이니이다
原注
○愚按八陣은 卽九軍이니 九軍者는 九九八十一小陣也라
故로 壘石爲文에 縱橫八行하니 是八八六十四小陣也니 比八陣하면 減去一十七小陣也라
晉桓溫見之하고 所以爲常山蛇勢라하니 卽九軍陣法也라
七軍은 是每軍七陣이니 七陣은 七七四十九小陣也라
其大陣包小陣하고 大營包小營하여 隅落鉤連하고 曲折相對가 與八陣無異耳라
畫方以見步
하고 點圓以見兵
하여 步教足法
하고 兵教手法
하여 手足便利
하면 乎
인저
原注
步敎以足法하고 兵敎以手法하여 手足便利하면 則思過半乎인저
吳起云 絕而不離하고 却而不散이라하니 此步法也니
孫子曰 地生度하고 度生量하고 量生數하고 數生稱하고 稱生勝하니
勝兵은 若以鎰稱銖하고 敗兵은 若以銖稱鎰이라하니 皆起於度量方圓也니이다
原注
敎士는 猶似布碁於盤하니 若無所畫之路면 碁安用之而爲勝負矣리잇고
孫子에 有曰 地生度하고 度生量하고 量生數하고 數生稱하고 稱生勝이니 勝兵은 若以鎰稱銖하고 敗兵은 若以銖稱鎰이라하니이다
原注
○愚按 李靖外方內圓은 多是說步手法이요 非以六陣分於外方內圓之形也니 學者宜詳之니라
原注
爲將者 不度量地之遠近, 形之廣狹이면 則何以能制其節乎아
善戰者는 其勢險하고 其節短하여 勢如彍弩하고 節如發機니이다
原注
善戰者는 其勢欲險하고 其節欲短하여 勢如引滿之弩하고 節如發動之機하니이다
臣修其術하여 凡立隊는 相去各十步하고 駐隊는 去師隊二十步하여 每隔一隊하여 立一戰隊니이다
前進은 以五十步為節하며 角一聲에 諸隊皆散立호되 不過十步之內하고 至第四角聲하여 籠鎗跪坐어든 於是鼓之하면 三呼三擊하고 三十步至五十步하여 以制敵之變이니이다
馬軍은 從背出호되 亦以五十步로 臨時節止하여 前正後奇하여 觀敵如何하며 再鼓之하면 則前奇後正하여 復邀敵來하여 伺隙擣虛하니 此六花大率皆然也니이다
原注
臣修孫武勢險節短之術하여 凡立隊는 相去各用十步하고 駐隊는 去師隊各用二十步하여 每隔一隊하여 又立一戰隊라
師隊는 疑卽前所謂跳盪騎兵也요 戰隊는 疑卽前所謂戰鋒隊에 步騎相半者也라
前進은 止以五十步爲節하며 角一聲에 諸隊皆分散而立호되 各不過十步之內하고 至第四角聲하면 則籠鎗跪坐하니
於是에 鼓之하면 三呼而三擊하고 三十步至五十步하여 以制敵之變이라
馬軍은 從背出호되 亦以五十步로 臨時節止하여 前用正하고 後用奇하여 觀敵人動靜如何하고 於是에 再鼓之하면 則前以奇하고 後以正하여 復邀敵人之來하여 伺其隙而擣其虛하니 此六花陣이 大率皆如此也니이다
曹公新書云 作陣對敵에 必先立表하고 引兵就表而陣호되 一部受敵이어늘 餘部不進救者는 斬이라하니 此何術乎아
原注
曹公新書에 有云 作陣對敵에 必先立表하고 使將吏引兵하여 各就表而布陣호되
一部受敵
이어늘 其餘部分
不進救者
는 皆斬
이라하니 此何等術乎
아
古人善用兵者는 教正하고 不教奇하여 驅衆을 若驅群羊하여 與之進하고 與之退호되 不知所之也하니이다
曹公은 驕而好勝하니 當時諸將에 奉新書者 莫敢攻其短하니이다
原注
靖對曰 曹公謂臨敵立表
는 非也
니 此但敎戰時法耳
니이다
驅衆을 如驅群羊하여 與之前進하고 與之後退하여 衆不知其所往也니이다
曹公은 驕而好勝이라 當時諸將奉行新書者 莫敢攻其所短이니이다
臣竊觀陛下所製破陳樂舞
하니 前出四表
하고 後綴八
하여 左右折旋
하여 趨步金鼓
에 各有其節
하니 此卽八陣圖四頭八尾之制也
니이다
人間은 但見樂舞之盛하니 豈有知軍容如斯焉이리잇가
原注
臣竊觀陛下所製破陳樂舞하니 前面은 出四表하고 後面은 綴八旛하여 左右曲折旋轉하여 趨步走驟金鼓에 各有其節次하니 卽八陣圖四頭八尾制度也니이다
人間은 但見樂舞之盛如此하니 豈有知軍容如斯盛焉이릿가
昔漢高帝定天下하고 歌云 安得猛士兮여 守四方고하니 蓋兵法은 可以意授요 不可以語傳이라
朕為破陣樂舞
에 唯卿
曉其表矣
니 後世
에 其知我不茍作也
리라
原注
昔
云 大風起兮
여 雲飛揚
이라하니 此一句
는 喩天下之亂也
요
威加海內兮여 歸故鄕이라하니 此一句는 言以武功定天下也요
安得猛士兮여 守四方고하니 思得人而用之하여 以修武備也니
蓋兵法은 可以意授하여 使之神融而意會也요 不可只以言傳人이라
朕爲破陣樂舞에 唯卿已曉其言意之表矣니 後世에 其知我不苟且而作也리라
原注
方色五旗는 謂東方은 靑이요 南方은 赤이요 西方은 白이요 北方은 黑이요 中央은 黃이 是也라
臣參用古法하니 凡三隊合이면 則旗相倚而不交하고 五隊合이면 則兩旗交하고 十隊合이면 則五旗交하니이다
原注
臣參用古人之法하니 凡三隊合而爲一이면 則旗相倚而不交하고 五隊合而爲一이면 則兩旗相交하고 十隊合而爲一이면 則五旗皆交니이다
吹角하여 開五交之旗하면 則一復散而為十하고 開二交之旗하면 則一復散而為五하고 開相倚不交之旗하면 則一復散而為三하니이다
原注
吹角一聲에 開五交之旗하면 則一復散而爲十隊하고 開二交之旗하면 則一復散而爲五隊하고 開相倚不交之旗하면 則一復散而爲三隊니이다
原注
三令五申之하여 使三散而三合하여 復歸於正이면 則四頭八尾를 乃可敎焉이니 此隊法所宜也니이다
曹公有戰騎, 陷騎, 遊騎하니 今馬軍은 何等比乎아
臣按新書云 戰騎居前하고 陷騎居中하고 遊騎居後라하니 如此면 則是各立名號하여 分爲三類爾니이다
原注
曹公有戰騎, 陷騎, 遊騎하니 今曰馬軍은 於三者에 何等比乎아
臣按曹公新書云 戰騎常居於前하고 陷騎常居於中하고 遊騎常居於後라하니 如此면 則是各立名號하여 分之爲三類耳니이다
大抵騎隊八馬는 當車徒二十四人하고 二十四騎는 當車徒七十二人하니 此古制也니이다
原注
大抵騎隊는 每八馬當車徒二十四人하니 三八二十四라
二十四騎 當車徒七十二人하니 七十二人은 三箇二十四니
據曹公하면 前後及中을 分為三覆하고 不言兩廂은 舉一端言也니이다
後人이 不曉三覆之義하여 則戰騎를 必前하니 於陷騎遊騎에 如何使用이리잇고
臣熟用此
하여 回軍轉陣
이면 則遊騎當前
하고 戰騎當後
하고 陷騎
而分
하니 皆曹公之術也
니이다
原注
據曹公하면 前後及中을 分而爲三覆하니 不言兩廂軍은 擧一端而言也니이다
後人이 不曉曹公三覆之義하여 則戰騎必居前이면 於陷騎, 遊騎二隊에 如何使用이릿고
臣熟用此法하여 若回軍轉陣이면 則遊騎一隊當前하고 戰騎一隊當後하고 陷騎一隊는 臨變而分하니 皆曹公之術也니이다
此則車步無騎하여 謂之左右拒라하니 言拒禦而已요 非取出奇勝也니이다
原注
此則止用車步하여 無騎兵하니 謂之左右拒者는 言其但用之拒禦而已요 非欲出奇取勝也니이다
臣均其術
하여 一馬當三人
하고 車步稱之
하여 混為一法
하여 用之在人
하니 敵安知吾車果何出
이며 騎果何來
며 徒果何從哉
잇가
或潛九地하고 或動九天하여 其知如神은 唯陛下有焉이니 臣何足以知之리잇가
原注
臣均用其術하여 以一馬로 當三人하고 車與徒又稱之하여 三者를 混爲一法하여 用之在乎人하니 敵安知吾車果何自而出이며 騎果何自而來며 徒果何自而從이릿고
或潛如九地之深
하고 하여 其知謀如神之妙
하여 不可測度
은 唯陛下有焉
이니 臣何足以知此道
리잇고
太公書云 地方六百步, 或六十步에 表十二辰이라하니 其術如何오
原注
十二辰次는 卽子玄枵, 丑星紀, 寅析木, 卯大火, 辰壽星, 巳鶉尾, 午鶉火, 未鶉首, 申實沈, 酉大梁, 戌降婁, 亥陬訾是也라
每部占地二十步之方하여 橫以五步立一人하고 縱以四步立一人하면 凡二千五百人이라
原注
橫則以五步立一人하고 縱則以四步立一人하면 凡二千五百人이니
分東西南北中央하여 爲五方하여 四隅空地四處하니 此卽所謂陣間容陣者也니이다
武王伐紂에 虎賁이 各掌三千人하고 每陣六千人하여 共三萬之衆이니 此太公畫地之法也니이다
原注
周武王이 將伐紂할새 使虎賁之士로 各掌三千人하고 每一陣에 用六千人하여 五陣에 共用三萬之衆하니 此太公畫地敎士之法也라
前云 太公以四萬五千人으로 勝紂七十萬衆은 臨戰之時에 總諸侯之衆而言也요
此言每陣六千人하여 共三萬衆은 乃敎閱之數니 據畫地之法而言也라
原注
○愚按 尙書小序云 戎車三百輛이요 虎賁三百人이라한대 注曰 戎車는 馳車요 革車는 輜車也요 虎賁은 百夫之長也라하니라
以虎賁爲百夫之長者는 其意謂每戎車一乘에 甲士三人이요 步卒七十二人이요 又二十五人이 將重車在後하여 凡百人也라
戎車
百輛
이면 共該三萬人
이니 以虎賁爲百夫長
이면 三萬人
이 共該三百人矣
라
且每車一乘에 甲士三人이면 (二)[三]百乘에 共用九百人이 皆虎賁之士也니 何獨以百夫長言之리오
只以書序三百人言之하면 每一虎賁之士 掌三千人인댄 三百人이 共掌九十萬衆이니 又太多矣라
前云 太公以四萬五千人으로 勝紂七十萬衆이라하고 今又云 止用三萬之衆이라하니라
且以革車三百輛言之하면 則一乘에 除將重車二十五人하여 共該七千五百人外에 餘止有戰士二萬二千五百人이니 不幾於太少乎아
且
選車士
에 取年四十已下
의 長七尺五寸以上
으로 走能逐奔馬
하고
及馳而乘之하여 前後左右上下周旋하며 能束縛旌旗하고 力能彀八石弩하며 射前後左右에 皆便習者하여 名曰 武車之士라하고
選騎士에 亦取年四十以下의 長七尺五寸以上으로 壯健捷疾이 超絶倫等하여
能馳騎彀射하고 前後左右周旋進退하며 越溝塹하고 登丘陵하며 冒險阻하고 絶大澤하며
書小序에 但云 戎車三百輛이요 虎賁三百人하니 是止言車與徒而已니 豈虎賁三千人이 兼車之甲士及騎士而言歟아
書曰 予有臣三千호니 同心同德이라하여 與孟子之言合하니 當以孟子爲是니라
各占地四百步하여 分為東西兩廂하고 空地一千二百步로 為教戰之所하니
臣常教士三萬할새 每陣五千人하고 以其一為營法하며
五為方圓曲直銳之形
하여 每陣五變
하여 凡二十五
而止
하니이다
原注
大閱엔 地每方에 用一千二百步하니 其義六陣이니이다
東廂三陣은 三四一千二百步요 西廂三陣은 三四一千二百步라
臣
敎士三萬
할새 每一陣
에 用五千人
하고 以其一陣
으로 爲下營之法
하니이다
方曰義
니 義
는 爲秋爲金
이요 圓曰智
니 智
는 爲冬爲水
요 爲夏爲火
라
每一陣을 皆以方, 圓, 曲, 直, 銳之形으로 五變之하면 五五二十五變而止니이다
本因五方色하여 立此名하니 方圓曲直銳는 實因地形使然이니이다
其實은 兵形象水하여 因地制流하니 此其旨也니이다
原注
本因五方靑赤黃白黑之色하여 立此名耳니 方圓曲直銳는 實因地形하여 使之如此니이다
故로 強名之五行焉이요 文飾之術數相生相尅之義니이다
相生者는 金生水, 水生木,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也요 相尅者는 金尅木, 木尅土, 土尅水, 水尅火, 火尅金也라
其實
은 形象水
하니 水因地而制流
하여 以爲方圓斜直之形
하고 兵亦因地
하여 而爲方圓曲直銳之形
이니 此五行陣之旨義也
니이다
牝牡之法은 出於俗傳하니 其實은 陰陽二義而已니이다
原注
牝牡之法은 出於世俗所傳하니 其實은 只是陰陽二義而已니이다
臣按 范蠡云 後則用陰하고 先則用陽하며 盡敵陽節하고 盈吾陰節而奪之라하니 此兵家陰陽之妙也니이다
原注
臣按范蠡書云 後則用陰하고 先則用陽이라하니 是는 兵以先爲陽하고 後爲陰也니이다
盈吾陰節而奪之者는 是盛吾後軍之陰氣하여 而乘彼陽氣之衰而奪之也니
范蠡
는 越人
이니 漢藝文志云 范蠡二篇
이라하니 今不及見也
로라范蠡
范蠡又云 設右為牝이요 益左為牡라하니 早晏以順天道니 此則左右早晏이 臨時不同하여 在乎奇正之變者也니이다
原注
牝은 獸之雌者요 牡는 獸之雄者니 以牝喩陰하고 以牡喩陽也라 早는 日初出時也요 晏은 日將入時也라
言或早或晩에 要順天道而已니 此則左右早晏이 臨時各有不同하여 在乎奇正之相變者也라
左右者는 人之陰陽이요 早晏者는 天之陰陽이요 奇正者는 天人相變之陰陽이니 若執而不變이면 則陰陽俱廢니 如何守牝牡之形而已릿가
原注
或早而用牝하고 或晏而用牡하며 或牡而示之牝하고 或牝而示之牡이니
若執左右早晏而不變通이면 則天人之陰陽俱廢하리니 如何守牝牡之形而已리잇고
故로 形之者는 以奇示敵하니 非吾正也요 勝之者는 以正擊敵하니 非吾奇也라
其正如山하고 其奇如雷하여 敵雖對面이나 莫測吾奇正所在하나니 至此면 夫何形之有哉리잇가
原注
故로 形之者는 以奇兵示敵하니 非吾之正兵也요 勝之者는 以正兵擊敵하니 非吾之奇兵也니
兵伏者는 不止山谷이요 草木之中伏藏도 所以爲伏也라
敵人이 雖在對面이나 莫能測度吾奇正之所在하니 至此면 夫何形之有哉잇가
太宗問牝牡方圓伏이어늘 而靖止對以牝牡伏하고 而不及方圓者는 以前에 已見於五行陣歟인저
存之는 所以能廢之也니 若廢而不用이면 詭愈甚焉이리이다
原注
存其名은 所以能廢之也니 若更廢而不用이면 詭詐愈甚焉이리이다
假之以四獸之陣과 及天地風雲之號하고 又加商金, 羽水, 徵火, 角木之配하니 此皆兵家自古詭道니
存之면 則餘詭不復增矣요 廢之면 則使貪使愚之術을 從何而施哉잇가
原注
假借之以龍, 虎, 鳥, 蛇四獸之名과 及天, 地, 風, 雲之號하고 又加商金, 羽水, 徵火, 角木之配하니
商은 西方之音也라 故로 屬金하고 羽는 北方之音也라 故로 屬水하고 徵는 南方之音也라 故로 屬火하고 角은 東方之音也라 故로 屬木하니
此皆自古以來兵家詭道니 存之면 則餘詭不復增加矣요 若廢此詭道면 則使貪使愚之術을 從何而施布焉이릿고
貪者는 急趨其利하고 愚者는 不顧其死하여 皆可以詭道使之라
昔에 光武는 以孤軍으로 當王莽百萬之衆호되 非有刑法臨之하니 此何由乎아
如陳勝吳廣
이 敗秦師
하니 豈勝廣刑
이 能加於秦乎
잇가
光武之起는 蓋順人心之怨莽也요 況又王尋王邑이 不曉兵法하고 徒誇兵衆하니 所以自敗니이다
原注
兵家之勝敗는 情狀萬殊하여 不可以一事而推究也니이다
且如陳勝吳廣敗秦師에 豈勝廣之刑法이 能加於秦師乎잇가
蓋百姓怨秦暴虐하여 爭奮出擊故로 廣勝因之而勝也니라
은 皆楚人
이니 秦二世元年
에 起兵於
하여 勝自立爲楚王
하고 以廣爲假王
하니라
王莽은 簒國之大賊이요 又更變漢家之制度하여 人人切齒하니 此光武所以因而取勝이니라
又況王尋, 王邑이 不曉兵法하고 徒誇兵士之衆하니 所以自取其敗니이다
王尋, 王邑은 皆王莽將也니 更始元年에 蕭王이 於昆陽에 擊敗之하여 殺王尋하니라
臣按 孫子曰 卒未親附而罰之면 則不服하고 已親附而罰不行이면 則不可用이라하니
此는 言凡將先有愛結於士然後에 可以嚴刑也니 若愛未加而獨用峻法이면 鮮克濟焉이니이다
原注
臣按孫子書
에 有曰 士卒未親附而驟罰之
면 則不心服
하고 이라하니
此言凡爲將者 先有恩愛結於士卒然後에 可以嚴刑而罰之니
尚書云 威克厥愛하면 允濟요 愛克厥威하면 允罔功은 何謂也오
原注
尙書胤征篇에 有言 威勝厥愛하면 信事之有濟也요 愛勝其威하면 信功之無成也라하니 此言은 何謂也오
原注
恩愛를 施設於先하고 威刑을 施設於後하니 不可相反是也니이다
原注
若刑先加於前하고 而以恩愛救之於後면 無益於事矣리이다
原注
尙書之言은 所以愼戒其終이요 非所以作謀於事之始也라
原注
○愚謂愛與威는 闕一不可하니 愛設於先하고 威設於後는 此常理也라
若
出自卑賤
하여 擢之行伍之中
하여 加之大夫之上
한대 士卒未附
하고 百姓不信
이라
旣行에 士卒次舍와 井竈飮食과 問疾醫藥을 身附循之하고 悉取將軍之資糧하여 享士卒하고 身與士卒로 平分糧食하며
最
弱者
하여 三日而後勒兵
한대 病者皆求行
하여 爭奮出
하여 爲之赴戰
하니 晉師聞之
하고 爲罷去
하고 燕師聞之
하고 渡水而解
라
於是에 追擊之하여 遂取所亡封內故境하고 而引兵歸하니
故로 當愛則愛하고 當威則威하여 愛與威竝行而不相悖 可也라
若尙書의 威克厥愛允濟者는 欲其嚴明之勝於姑息也요 愛克厥威允罔功也者는 恐其姑息之勝於嚴明也라
夫軍旅上威하니 嚴明勝이면 信能濟事요 姑息勝이면 信無成功이라
威與愛 始終不可廢하니 非以愛作謀於始하고 以威愼戒其終也니라
하여 以謂
通不戮於漢
이라하더니 既而
오 江漢歸順
이라
朕由是思하니 古人有言曰 文能附衆이요 武能威敵이라하니 其卿之謂乎인저
原注
卿平蕭銑之時에 諸將이 皆欲籍僞臣家貲하여 以賞賚士卒호되
卿獨不肯從
하여 以謂
라하더니 旣而
오 江漢之間
이 率皆歸順
이라
朕由是思惟하니 古人有言曰 文能親附士衆하고 武能威服敵人이라하니 其卿之謂乎인저
銑은 梁之後니 爲羅川令이라가 隋恭帝義寧元年에 起兵巴陵하여 自稱梁王이러니
漢光武平赤眉하고 入賊營中하여 按行한대 賊曰 蕭王이 推赤心於人腹中이라하니
原注
漢光武平赤眉賊樊崇等하고 入其營中하여 按行한대 賊皆喜曰 蕭王이 推赤心於人腹中이라하니
更始二年에 收銅馬, 鐵脛, 五幡, 大彤, 尤來, 大鎗時에 按行賊營할새 而賊有此言也니 赤眉字恐誤라
臣頃討突厥할새 總番漢之衆하여 出塞千里호되 未嘗戮一揚干, 斬一莊賈하고 亦推赤誠하여 存至公而已矣니이다
陛下過聽하시고 擢臣以不次之位하시니 若於文武엔 則何敢當이리잇가
原注
臣
이 頃
征討突厥
할새 總率番漢之衆
하여 出塞千里
호되 未曾戮一揚干, 斬一莊賈也
요 亦不過推赤誠
하여 存至公而已矣
니이다
陛下過聽
하시고 擢臣以不次之位
하시니 若於文武全才
엔 則何
當之
리잇고
魯襄公三年에 盟於鷄津할새 揚干이 亂行於曲梁이어늘 魏絳戮其僕하고 莊賈는 田穰苴監軍이니 期而後至어늘 穰苴斬之하니라
昔에 唐儉使突厥이러니 卿因擊而敗之한대 人言卿以儉爲死間이라하니
原注
昔
에 朕遣鴻臚卿唐儉
하여 使突厥
이러니 卿因擊而敗之
한대 人言卿以唐儉爲
이라하니
故로 臣因縱兵擊之하니 所以去大患이요 不顧小義也니이다
原注
臣與唐儉으로 比肩事主하니 料儉說이 必不能柔服突厥之心이라
故로 臣因其懈而縱兵擊之하니 所以去突厥之大患이요 不顧唐儉之小義也니이다
原注
○按貞觀四年에 李靖, 李世勣이 襲破突厥한대 頡利竄于鐵山하니 衆尙十餘萬이라
遣執失思力하여 入見하고 謝罪求朝한대 上遣鴻臚卿唐儉等하여 慰撫之하고 又詔李靖하여 將兵迎之러니
靖引兵하여 與世勣會白道하여 謀曰 頡利雖敗나 其兵猶盛하니 若走度磧北이면 則難圖矣라
今詔使至彼하여 虜必自寬하리니 若選萬騎襲之면 不戰可擒矣리라
張公謹曰 詔書許降
하여 使者在彼
하니 奈何擊之
리오 靖曰 此
는 也
니 唐儉輩
를 何足惜
이리오하고 遂勒兵夜發
한대 世勣繼之
라
頡利見儉來하고 大喜러니 靖前鋒去牙帳七里하여 頡利始知之하고 乘千里馬先走하니 其衆遂潰라 唐儉脫身得歸하다
世勣軍磧口하니 酋長皆帥衆降하여 虜五萬餘口而還하니
臣嘗著論其末하여 云 水能載舟요 亦能覆舟하나니 或用間以成功하고 或憑間以傾敗라하니이다
若束髮事君하여 當朝正色하여 忠以盡節하고 信以竭誠이면 雖有善間이나 安可用乎잇가
原注
臣嘗著論其篇末하여 云 水能乘載其舟요 亦能傾覆其舟라
若自束髮以事君하여 當朝而正色하여 忠以盡臣之節하고 信以竭心之誠하니
忠者는 盡己之謂요 節者는 有操守而不可奪也요 信者는 以實之謂요 誠者는 眞實無妄之謂라
兵貴為主요 不貴為客하며 貴速이요 不貴久는 何也오
孫子曰 遠輸則百姓貧이라하니 此는 為客之弊也요 又曰 役不再籍하고 糧不三載라하니 此는 不可久之驗也니이다
原注
孫子云
이라하니 此
는 越境而師
하여 爲客之弊也
요
臣較量主客之勢하면 則有變客為主, 變主為客之術하니이다
原注
臣較量主客之勢하면 則有變客而爲主하고 變主而爲客之術이라
因糧於敵은 是變客為主也요 飽能饑之하고 佚能勞之는 是變主為客也니이다
故로 兵不拘主客遲速하고 唯發必中節이 所以為宜니이다
原注
敵飽를 吾能使之饑하고 敵佚을 吾能使之勞는 此變主而爲客이라
故로 兵은 不拘爲主爲客, 在遲在速하고 唯發必中其節이니 所以爲得宜也니이다
昔에 越伐吳할새 以左右二軍으로 鳴鼓而進한대 吳分兵禦之어늘 越以中軍으로 潛涉不鼓하여 襲敗吳師하니 此變客為主之驗也니이다
石勒
이 與姬澹戰
할새 澹兵遠來
어늘 勒遣孔萇為前鋒
하여 逆擊澹軍
이라가 孔萇退
한대 澹來追
어늘
勒以伏兵夾擊之하여 澹軍大敗하니 此는 變勞為佚之驗也니 古人如此者多하니이다
原注
後趙石勒이 與姬澹戰할새 澹兵遠來어늘 勒遣其將孔萇하여 爲前鋒하여 迎擊澹軍이라가 孔萇退走한대 而澹率衆來追어늘
原注
太公六韜書中에 言守禦之器具耳니 非攻戰之所施也니이다
六韜軍用篇云 三軍拒守에 木螳螂劍刃扶胥는 廣二丈이 百二十具니 一名行馬요
狹路微徑에 張鐵蒺藜하니 芒高四寸이요 廣八寸이요 長六尺以上이 千二百具라하니 皆守禦之器也라
“짐朕이 여러 병서兵書를 살펴보니 《손무자孫武子》를 벗어날 것이 없고, 《손무자》 13편篇은 허虛‧실實을 벗어남이 없으니, 용병用兵에 허虛‧실實의 형세를 알면 이기지 못함이 없다.
原注
“짐朕이 제가諸家의 병서兵書를 보니 《손무자孫武子》를 벗어날 것이 없고, 《손무자》 13편은 허虛‧실實 두 가지에서 벗어날 것이 없다.
용병用兵에 허虛‧실實의 형세를 안다면 가는 곳마다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지금 여러 장수들 중에는 다만 실實한 곳을 방비하고 허虛한 곳을 공격한다고 말하나 적군敵軍을 맞아 허虛‧실實을 아는 자가 드문 것은, 적을 오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적에게 끌려가기 때문이다.
경卿은 여러 장수들을 위하여 모두 그 긴요함을 말하라.”
原注
“지금 여러 장수들 중에는 다만 적의 견실堅實한 곳을 방비하고 적의 허약虛弱한 곳을 공격한다고 말하나 적진敵陣을 상대하게 되면 허虛‧실實을 아는 자가 적으니, 이는 적이 오도록 만들지 못하고 도리어 적에게 끌려가기 때문이다.
경卿은 여러 장수들에게 그 긴요한 부분을 모두 말하여 그 허虛‧실實을 알게 하라.”
‘여하如何’ 두 글자는 아마도 연문衍文인 듯하다.
“먼저 기奇와 정正을 서로 변역變易하는 방법을 가르친 뒤에 허虛‧실實의 형세를 말해주는 것이 옳으니, 여러 장수들은 대부분 기병奇兵을 정병正兵으로 만들고 정병正兵을 기병奇兵으로 만들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 또 어찌 허虛가 바로 실實이고 실實이 바로 허虛임을 알겠습니까.”
原注
“먼저 우리의 기奇와 정正을 서로 변역變易하는 방법을 가르친 뒤에 적의 허虛‧실實의 형세를 말해주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여러 장수들은 대부분 기병奇兵을 정병正兵으로 만들고 정병正兵을 기병奇兵으로 만들 줄을 모르니, 또 어찌 적의 형세가 허虛한 것이 바로 실實이고 실實한 것이 바로 허虛한 것임을 알겠습니까.”
“‘계책하여 득得‧실失의 계산을 알고, 격동시켜 동動‧정靜의 이치를 알고, 형체를 드러내어 죽고 사는 땅을 알고, 다투어 유여有餘하고 부족한 곳을 안다.’ 하였으니, 이는 기奇와 정正이 나에게 있고, 허虛와 실實이 적에게 있는 것인가?”
原注
“《손자孫子》에 이르기를 ‘계책計策하여 득得‧실失의 계산을 알고, 적을 격동시켜 동動‧정靜의 이치를 알고, 형체를 드러내어 죽고 사는 땅을 알고, 다투어 유여有餘하고 부족한 곳을 안다.’ 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관찰하면, 기奇와 정正은 나에게 있고, 허虛와 실實은 적에게 있는 것인가?”
책策, 작作, 형形, 각角은 《손자孫子》에 자세히 보인다.
“기奇와 정正은 적의 허虛와 실實을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적이 실實하면 우리가 반드시 정병正兵으로 대응하고, 적이 허虛하면 우리가 반드시 기병奇兵으로 대응하여야 하니, 장수가 만일 기奇와 정正을 알지 못한다면, 비록 적의 허虛‧실實을 안다 한들 어찌 적을 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臣은 조명詔命을 받듦에 다만 여러 장수들에게 기奇와 정正을 가르칠 뿐이니, 이렇게 한 뒤에는 허虛와 실實을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原注
“기奇와 정正은 적의 허虛와 실實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니, 만약 적이 실實하면 우리가 반드시 정병正兵을 사용하고, 적이 허虛하면 우리가 반드시 기병奇兵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만일 장수 된 자가 기奇와 정正을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비록 적의 허虛‧실實을 안다 한들 어찌 적이 오도록 만들어서 격파할 수 있겠습니까.
신臣이 조명詔命을 받듦에 다만 여러 장수들에게 기奇와 정正의 방법을 가르칠 뿐이니, 그런 뒤에는 적의 허虛와 실實을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기병奇兵을 정병正兵으로 만든다.’는 것은 적이 우리를 기병奇兵이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정병正兵으로 공격하는 것이고,
‘정병正兵을 기병奇兵으로 만든다.’는 것은 적이 우리를 정병正兵이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기병奇兵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적의 형세가 항상 허虛하고 우리의 형세가 항상 실實하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이 방법을 여러 장수들에게 가르쳐주어서 쉽게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병서兵書의 수많은 장절章節과 수많은 글귀는 적을 오게 하고 적에게 끌려가지 않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신臣은 마땅히 이것을 가지고 여러 장수들을 가르치겠습니다.”
原注
“‘기병奇兵을 정병正兵으로 만든다.’는 것은 적이 우리가 기병奇兵을 사용하여 적과 싸울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도리어 정병正兵의 법으로 적을 공격하는 것이다.”
정병正兵의 법은 6보步와 7보步에 마침내 멈추어 정제整齊하고, 여섯 번 치고 일곱 번 치고서 마침내 멈추어 정제整齊해서, 이익을 보고서도 취하지 않고 거짓으로 패하는 적을 추격하지 않으며, 전진할 때에 급히 달려가지 않고 후퇴할 때에 급히 패주하지 않아서, 끊겼다가 다시 진영陣營을 이루고 흩어졌다가 다시 항렬行列을 이루는 것이니, 이것은 정병正兵의 법이다.
“‘정병正兵을 기병奇兵으로 만든다.’는 것은 적이 우리가 정병正兵을 사용하여 적과 싸울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도리어 기병奇兵의 방법으로 적을 공격하는 것이다.”
기병奇兵의 법은 앞을 놀라게 하고 뒤를 습격하며, 동쪽을 충돌하고 서쪽을 공격하여 우레처럼 진동하고 바람처럼 날아가며, 벼락이 치고 우레가 치듯이 하여, 적으로 하여금 측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기병奇兵의 법이다.
“적의 형세를 항상 허虛하게 만들어 우리가 정병正兵을 쓰고 기병奇兵을 쓰는 방법을 측량하지 못하게 하면 우리의 형세가 항상 실實하여 승리하게 되니, 마땅히 이 법을 가지고 여러 장수들에게 가르쳐주어서 쉽게 알도록 할 뿐이다.”
“병서兵書의 수많은 장절章節과 수많은 글귀는 적을 오게 하고 적에게 끌려가지 않음에 벗어나지 않으니, 신臣이 마땅히 이 방법을 가지고 여러 장수들에게 가르치겠습니다.”
적을 오게 하면 편안하고 적에게 끌려가면 수고로우니, 만약 기奇와 정正을 사용하면서 적을 오게 하지 못한다면, 또한 승리에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짐朕이 요지도독瑤池都督을 설치하여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켰으니, 번番‧한漢의 군대를 어떻게 조처해야 하는가?”
原注
“짐朕이 이제 요지도독瑤池都督을 설치하여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켰으니, 번番‧한漢의 군대를 장차 어떻게 조처해야 하는가?”
정관貞觀 14년(640)에 고창高昌을 멸망시키고 이 땅을 서주西州로 만들어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하였다.
“하늘이 사람을 낼 적에 본래 번番‧한漢의 분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땅이 멀고 황폐한 사막이어서 반드시 활을 쏘아 사냥하는 것으로 살아갑니다.
이 때문에 항상 전투戰鬪를 익히니, 만약 우리가 은혜와 신의로 오랑캐들을 어루만지고 옷과 밥을 주어 구휼하면 모두 한인漢人이 될 것입니다.
原注
“하늘이 사람을 낼 적에 머리가 둥글고 발이 네모지며, 굶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는 것이 똑같으니, 본래 번番‧한漢의 분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랑캐들은 거처하는 지역이 먼 변방의 황폐한 사막이어서 오곡五穀이 성숙하는 경우가 적으므로 반드시 활을 쏘아 사냥하는 것으로 살아갑니다.
이 때문에 항상 전투戰鬪하는 일을 익히니, 만약 우리가 은혜와 신의로 오랑캐들을 어루만져 구휼하고 옷과 밥을 주어 구호한다면 모두 한인漢人이 될 것입니다.”
폐하陛下께서 이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하셨으니, 신臣은 청컨대 수자리 사는 한병漢兵들을 거두어 내지內地에 거주시켜 군량을 수송하는 일을 줄이소서.
이는 병가兵家에 이른바 ‘힘을 다스리는 방법’이란 것입니다.
다만 한병漢兵 중에 번족番族의 실정에 익숙한 자를 가려서 이들을 흩어 보장堡障을 지키게 하면 충분히 오래갈 수 있고, 혹 경보가 있으면 한병漢兵들을 출동시키는 것입니다.”
原注
“폐하陛下께서 이제 이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하셨으니, 청컨대 한병漢兵들을 거두어 내지內地에 옮겨 살게 해서 한병漢兵들의 군량 수송을 줄여야 할 것이니, 이는 병가兵家에 이른바 ‘힘을 다스리는 방법’이란 것입니다.
다만 한인漢人의 관리 중에 번인番人의 실정에 익숙한 자를 가려서 이들을 흩어 변방 밖의 보장堡障을 지키게 하면 충분히 오래갈 수 있고, 혹 변경에 위급한 경보를 만나면 한병漢兵들에게 명하여 출격하게 하는 것입니다.”
“손자孫子가 말한 ‘힘을 다스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原注
태종太宗은 이정李靖이 병가兵家의 ‘힘을 다스리는 방법’을 말하였으므로, 손자孫子가 말한 ‘힘을 다스린다.’는 것은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를 또 물은 것이다.
“가까운 군대로써 멀리 온 적을 상대하고, 편안한 군대로써 수고로운 적을 상대하고, 배부른 군대로써 굶주린 적을 상대한다는 것은 그 대략을 간략히 말했을 뿐입니다.
原注
“《손자孫子》 〈군쟁軍爭〉에서 말한 ‘우리의 가까운 군대로써 멀리 온 적을 상대하고, 우리의 편안한 군대로써 피로에 지친 적을 상대하고, 우리의 배부른 군대로써 굶주린 적을 상대한다.’는 것은 그 힘을 다스리는 대략을 간략히 말했을 뿐입니다.”
용병用兵을 잘하는 자는 이 세 가지 뜻을 미루어 여섯 가지를 갖추니, 유인술로 끌려오는 적을 상대하고, 고요함으로 시끄러움을 상대하고, 신중함으로 경솔함을 상대하고, 엄격함으로 해이함을 상대하고, 다스려짐으로 혼란함을 상대하고, 수비로 공격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하면 힘이 미치지 못하여 힘을 다스리는 방법이 아니니, 어떻게 적의 군대와 마주하여 싸울 수 있겠습니까.”
原注
“용병用兵을 잘하는 자는 이 세 가지 뜻을 미루어 또 여섯 가지 전술을 갖추니, 우리의 유인하는 군대로 끌려오는 적을 상대하고, 우리의 한가롭고 고요한 군대로 시끄러운 적을 상대하고, 우리의 신중한 군대로 경솔한 적을 상대하고, 우리의 엄격하고 경계하는 군대로 해이한 적을 상대하고, 우리의 정돈되고 다스려진 군대로 혼란한 적을 상대하고, 우리의 굳게 수비하는 군대로 적의 공격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하면 힘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 힘을 다스리는 방법이 아니니, 또한 어떻게 적군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람들 중에 《손자孫子》를 익히는 자들은 다만 빈 글을 외울 뿐이요 그 뜻을 미루어 넓히는 자가 적으니, 힘을 다스리는 방법을 마땅히 여러 장수들에게 두루 말해주라.”
原注
“지금 사람들 중에 《손자孫子》의 책을 익히고 읽는 자들은 다만 그 빈 글을 외울 뿐이요 뜻을 미루어 넓히는 자가 적으니, 힘을 다스리는 방법을 마땅히 여러 장수들에게 두루 말해주어 알게 하라.”
“옛 장수와 늙은 병사들이 거의 노쇠하여 다 없어지고 새로 설치한 여러 군대들은 적진敵陣을 마주하여 전투한 경험이 없으니, 지금 병사들을 가르침에 무슨 방도를 요점으로 삼아야 하는가?”
原注
“짐朕의 여러 장수와 늙은 병사들은 영락零落하여 거의 다 없어지고, 여러 군대들은 모두 새로 설치하여 일찍이 적진敵陣을 대해서 싸운 경험이 없으니, 지금 병사들을 가르침에 무슨 방법을 요긴한 것으로 삼아야 하는가?”
“신臣이 항상 병사들을 가르칠 적에 나누어 세 등급을 만들되, 반드시 먼저 오법伍法을 결성하게 하고, 오법伍法이 이루어지고 나면 군교軍校에게 가르쳐주었으니, 이것이 한 등급입니다.
原注
“신臣이 항상 병사들을 가르칠 적에 모름지기 세 등급으로 나누되, 반드시 먼저 오법伍法을 결성하게 하였으니, 다섯 명을 1오伍라 합니다.
오법伍法이 이루어지고 나면 이것을 군교軍校에게 가르쳐주었으니, 이것이 한 등급이 됩니다.”
군교軍校의 법法은 1오伍를 10오伍로 만들고 10오伍를 100오伍로 만드는 것이니, 이것이 한 등급입니다.
原注
“군교軍校의 법法은 1오伍를 10오伍로 만들고 10오伍를 100오伍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10오伍를 모아 하나를 만들고 100오伍를 모아 열로 만듦을 이른다.
이것을 비장裨將에게 가르쳐주면 비장裨將이 여러 군교軍校의 부대를 총괄하여 모아서 진도陣圖를 만드니, 이것이 한 등급입니다.
原注
“군교軍校의 가르침이 이루어져 이것을 비장裨將에게 가르쳐주면, 비장裨將이 여러 군교軍校의 부대를 총괄하여 모아서 진도陣圖를 만드니, 이것이 한 등급이 됩니다.”
대장大將이 이 세 등급의 가르침을 살펴서 이에 크게 열병閱兵하여 제도를 상고하고 기奇‧정正을 분별하여 병사들과 맹세하고 벌을 시행하거든, 폐하陛下께서 높은 곳에 임하시어 관찰하시면 베푸시는 곳마다 불가함이 없을 것입니다.”
原注
“대장大將이 된 자가 이 세 등급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서 이에 크게 열병閱兵합니다.”
크게 열병閱兵한다는 것은 비장裨將이 가르친 병사들을 총괄하여 사열하는 것이다.
“진도陣圖의 항오行伍와 기장器仗과 장호章號(휘장과 칭호)의 제도를 상고하고, 어느 것이 기병奇兵이 되고 어느 것이 정병正兵이 되는지를 분별하여, 병사들에게 맹세하고 경계하여 형벌을 행해서 죄가 있는 자를 징계하거든, 폐하陛下께서 높은 곳에 임어臨御하여 관망하시면 베푸시는 곳마다 불가함이 없을 것입니다.”
“오법伍法은 몇 가家가 있으며, 어느 것이 요긴함이 되는가?”
原注
태종太宗은 이정李靖이 “반드시 먼저 오법伍法을 결성하여야 한다.”는 말을 듣고, 또 “오법伍法은 몇 가家가 있으며, 어느 것이 요긴함이 되는가?” 하고 물은 것이다.
“신臣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살펴보니, 이르기를 ‘편偏(전차)을 먼저 하고 오伍(보병)를 뒤에 하였다.’ 하였고, 또 《사마법司馬法》에 이르기를 ‘5명을 오伍로 만든다.’ 하였고, 《울료자尉繚子》에 〈속오령束伍令〉이 있고,
한漢나라 제도에 척적尺籍과 오부伍符가 있었는데, 후세에 부적符籍을 종이로 만들었습니다.
原注
“신臣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살펴보니, 이르기를 ‘주周 환왕桓王이 정백鄭伯의 정사政事를 빼앗자, 정백鄭伯인 장공莊公이 조회朝會하지 않으니, 환왕桓王이 그를 정벌征伐하였다.
이때 장공莊公은 자원子元의 소청所請에 따라 좌우左右 두 거拒를 만들고 중군中軍으로 장공莊公을 받들어 어리진魚麗陣을 만들되, 편偏을 먼저 하고 오伍를 뒤에 하여, 오伍가 미봉彌縫을 이어서 왕王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하였습니다.”
옛날에 전거戰車 15승乘을 1편偏으로 만들었으니, 전거戰車를 앞에 두고 항오行伍를 뒤에 하여 항오行伍로써 전거戰車의 빈틈을 이어서 그 공간을 미봉彌縫한 것이다.
“또 《사마법司馬法》에 ‘5명을 오伍로 만든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사마법司馬法》 가운데에는 이 한 구句가 없으니, 아마도 사마양저司馬穰苴의 병서兵書 가운데의 말인 듯하다.
“《울료자尉繚子》에는 〈속오령束伍令〉이 있습니다.”
여기에 이르기를 “5명을 오伍로 만들어 한 부符(신표)를 함께 사용해서 장수와 관리의 처소에 모아 보관하되, 〈전투 중에〉 자기의 오伍(대원)를 잃고서 적의 오伍를 노획하였으면 공과功過를 상쇄하고, 적의 오伍를 노획하고서 자기의 오伍를 잃지 않았으면 상이 있고, 자기의 오伍를 잃고 적의 오伍를 노획하지 못했으면 몸이 죽고 집안이 망한다.” 하였다.
“한漢나라 제도에 또 척적尺籍과 오부伍符가 있었습니다.”
척적尺籍은 적의 머리를 벤 공功을 한 자쯤 되는 판자에 쓰는 것이고, 오부伍符는 오伍와 오伍가 서로 계승하는 것이다.
《사기史記》 〈풍당열전馮唐列傳〉에 이르기를 ‘농가의 자제들이 어찌 척적尺籍과 오부伍符를 알겠습니까.’ 한 것이 이것이다.
“후세에 부적符籍을 모두 종이로 만들었습니다.
신臣이 이 법을 참작하여 5명에서 바꾸어 25명으로 만들고, 25명에서 바꾸어 75명으로 만들었으니, 이는 보병步兵 72명에 갑사甲士 3명인 제도입니다.
原注
“신臣이 이 법을 참작하여 헤아려서 5명에서 바뀌어 25명이 되게 하였으니, 25명은 5개의 오수伍數입니다.
그리고 25명에서 바뀌어 75명이 되게 하였으니, 75명은 15개의 오수伍數입니다.
이는 옛날에 전거戰車 한 대에 보졸步卒이 72명이고 갑사甲士가 3명인 제도입니다.”
수레를 버리고 기병騎兵을 쓰면 보병 25명이 여덟 필의 기마騎馬를 상대하니, 이는 다섯 가지 병기가 다섯 명을 당當하는 제도입니다.
原注
“수레를 버리고 기병騎兵을 쓰게 되면 25명이 여덟 필의 기마騎馬를 상대할 수 있으니, 이는 《사마법司馬法》에 다섯 가지 병기가 다섯 명을 당當하는 제도입니다.”
이는 제가諸家의 병법兵法에 오직 오법伍法이 중요함이 되는 것이니, 작게 나열하면 5명이고 크게 나열하면 25명이며, 3배로 나열하면 75명이고, 또 그 수를 5배로 하여 375명을 얻으니, 300명은 정병正兵이 되고 60명은 기병奇兵이 됩니다.
이는 150명을 나누어 두 정병正兵을 만들고 30명을 나누어 두 기병奇兵을 만드니, 좌우左右가 똑같습니다.
사마양저司馬穰苴가 이른바 ‘다섯 사람이 오伍가 되고 열 사람이 대隊가 된다.’는 것이니, 지금까지도 인습하고 있는바, 이것이 그 요점입니다.”
原注
“제가諸家의 병법兵法 중에 오직 오법伍法을 결성하는 것이 긴요함이 되는 것입니다.
작게 나열하면 다만 5명이고 크게 나열하면 25명이 되니, 25명은 다섯 오수伍數입니다.
3배로 나열하면 75명이 되니, 세 개의 다섯 오수伍數를 이릅니다.
또 그 수를 5배로 하여 375명을 얻으니, 다섯 개의 다섯 오수伍數를 이릅니다.
5×70은 350명이 되고, 5×5는 25명이 되니, 모두 375명입니다.”
‘300명을 정병正兵으로 만든다.’는 것이 옛 본에는 ‘200명을 정병正兵으로 만든다.’고 되었으니, 이는 전사傳寫의 오류로, 윗글의 ‘졸卒’자를 잘못하여 ‘반半’자로 쓴 것과 같은 따위이다.
“300명은 정병正兵으로 만들고, 60명은 기병奇兵으로 만듭니다.”
나머지 15명은 전거戰車 한 대마다 갑사甲士가 3인人이니, 전거戰車 다섯 대에 모두 15명이 필요하다.
360명을 나누어 기奇‧정正으로 만든다는 것은 병사만을 말하고 장수를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150명을 나누어 두 정병正兵을 만들고 30명을 나누어 두 기병奇兵을 만드는 것이니, 좌우左右가 똑같음을 취한 것입니다.”
왼쪽의 두 정병正兵에 150명을 사용하고 두 기병奇兵에 30명을 사용하며, 오른쪽의 두 정병正兵에도 150명을 사용하고 두 기병奇兵에도 30명을 사용하여, 모두 360명이다.
이것을 작게 나열하면 75명이 한 정正이 되고 15명이 한 기奇가 되며, 크게 나열하면 300명이 한 정正이 되고 60명이 한 기奇가 되는 것이다.
“사마양저司馬穰苴가 이른바 ‘다섯 명이 1오伍가 되고 열 명이 1대隊가 된다.’는 것인바, 지금 모두 이것을 인습하니, 이것이 요점입니다.”
“짐朕이 이적李勣(李世勣)과 병법兵法을 논할 적에 대부분 경卿의 말과 같았으나, 이적李勣은 출전出典을 구명究明하지 않았을 뿐이다.
경卿이 만든 육화진법六花陣法은 어느 방법에서 나온 것인가?”
原注
“짐朕이 이세적李世勣과 병법兵法을 논할 적에 대부분 경卿의 말과 같았으나, 다만 이세적李世勣은 출전出典을 구명究明하지 않았을 뿐이다.
경卿이 만든 육화진법六花陣法은 과연 어느 방도에서 나온 것인가?”
“신臣의 진법陣法은 제갈량諸葛亮의 팔진법八陣法에서 근본한 것입니다.
큰 진陣이 작은 진陣을 포함하고 큰 영營이 작은 영營을 포함하여 귀퉁이가 서로 연결되고 곡절曲折이 상대하니, 옛 제도가 이와 같습니다.
原注
“신臣의 육화진법六花陣法은 제갈량諸葛亮의 팔진법八陣法에서 근본한 것입니다.
큰 진陣이 작은 진陣을 포함하고 큰 영營이 작은 영營을 포함합니다.”
크게 진열하면 9군軍이 되고 작게 진열하면 1군軍마다 또 나뉘어 9군軍이 되는 것이다.
9×9로 81개의 작은 진陣이 되고 81개의 작은 영營이 되니, 밖에서 보면 다만 한 진陣이나, 나누어 8군軍이 되어서 중군中軍과 더불어 모두 9군軍이 되는 것이다.
“이미 ‘큰 진陣이 작은 진陣을 포함하고 큰 영營이 작은 영營을 포함한다.’고 말하였으니, 이 때문에 네 귀퉁이가 서로 연결되고 한 구비와 한 꺾임이 모두 상대하는 것이니, 옛날의 법제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신臣이 진도陣圖를 만들 적에 이것을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밖에 그린 것은 네모지고 안에 있는 고리의 모양은 둥글어서 이것이 여섯 잎의 꽃이 되니, 세속에서 육화진六花陣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原注
“신臣이 만든 진도陣圖는 실로 그 법을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밖에 그린 네모진 모습은 팔진八陣의 옛 법이고 안에 고리 모양의 둥근 모습은 육화진六花陣의 변한 법입니다.
그 형상이 여섯 개로 나온 꽃 모양이므로 육화六花라 이름하였으니, 바로 세속에서 호칭하는 것입니다.”
原注
○내가 살펴보건대, 팔진八陣과 구군九軍은 방진方陣이고, 육화진六花陣은 바로 칠군七軍이니 칠군七軍은 원진圓陣이다.
방진方陣은 안과 밖이 모두 네모지고 원진圓陣은 안과 밖이 모두 둥그니, 이른바 중심의 빈 곳을 대장大將이 장악하여 사면四面과 여덟 방향이 모두 기준을 취한다는 것인데, 이제 ‘밖에 그은 것은 네모지고 안의 고리 모양은 둥글다.’고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밖에 그린 것이 네모짐은 개방법開方法이니 반드시 땅의 네모짐을 취하여 그 보법步法을 나타낸 것이요, 안에 고리 모양의 둥근 것은 오법伍法을 결성한 것이니 반드시 형체의 둥긂을 취하여 그 군대를 나타낸 것이니, 밖의 육군六軍을 방진方陣이라 하고 가운데 일군一軍을 원진圓陣이라 한 것이 아니다.
만약 밖에 있는 육군六軍을 방진方陣이라 하고 가운데에 있는 일군一軍을 원진圓陣이라 한다면, 중군中軍이 밖에 있는 육군六軍과 네모지고 둥근 형체가 똑같지 않으니, 또 어떻게 기준을 취할 수 있겠는가.
“안은 둥글고 밖은 네모지게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네모진 것은 보법步法에서 생겨났고 둥근 것은 기奇에서 생겨났으니, 네모진 것은 구矩(曲尺)로 그 걸음을 네모지게 하는 것이요, 둥근 것은 그 돎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걸음의 수는 땅에서 정해지고 항렬의 연결은 하늘에 응합니다.
보법步法이 정해지고 항렬의 연결이 가지런해지면 변화가 어지럽지 않으니, 팔진八陣이 육진六陣이 됨은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옛 법입니다.”
原注
“경卿이 ‘안의 고리 모양은 둥글고 밖에 그린 것은 네모지다.’라고 한 것은 무슨 말인가?”
“네모진 것은 보법步法에서 생겨났고 걸음[步]은 반드시 네모지니 꺾어 돌면 구矩(曲尺)에 맞습니다.
둥근 것은 기奇에서 생겨났고 기奇는 반드시 둥그니, 둥글면 규規(걸음쇠)에 맞습니다.
네모진 것은 구矩로 그 걸음[步]을 네모나게 하는 것이요, 구矩는 네모진 것을 만드는 기구이니, 그 걸음을 〈ㄱ자 모양으로〉 꺾어서 네모지게 하는 것입니다.
둥근 것은 그 돎을 연결하는 것이요 철綴은 연결이니, 그 돎을 연결하여 둥글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걸음의 수는 땅에서 정해지니, 땅의 형체가 네모지기 때문에 걸음 수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항렬의 연결은 하늘에 응하니, 하늘의 형체는 둥글기 때문에 항렬의 연결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보수步數의 법法이 정해지고 항렬을 연결하는 법이 가지런해지면 천만 번 변화하여도 혼란함에 이르지 않아서 팔진八陣이면서 육진六陣이 되니, 이것이 바로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옛 법입니다.”
原注
○내가 살펴보건대, 팔진八陣은 바로 구군九軍이니, 구군九軍은 9×9로 81개의 작은 진陣이다.
제갈무후諸葛武侯는 촉蜀 땅이 험하고 좁으므로 줄여서 여섯 개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돌을 쌓아 문양文樣을 만들 적에 종縱과 횡橫을 여덟 줄로 하였으니, 이는 8×8로 64개의 작은 진陣이니, 팔진八陣에 비하면 17개의 작은 진陣이 줄어든 것이다.
진晉나라 환온桓溫이 이것을 보고 “상산常山에 있는 뱀의 형세이다.” 하였으니, 바로 구군九軍의 진법陣法이다.
지금 “팔진八陣이 육진六陣이 된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뜻이다.
이정李靖의 육화진六花陣은 바로 칠군진七軍陣이다.
칠군七軍은 매군每軍마다 칠진七陣이니 칠진七陣은 7×7로 49개의 작은 진陣이 된다.
큰 진陣이 작은 진陣을 포함하고 큰 영營이 작은 영營을 포함하여, 우락隅落(귀퉁이)이 서로 연결되고 곡절曲折이 상대하니, 팔진八陣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네모지게 그려서 보법步法을 나타내고 둥글게 점을 찍어서 병기兵器를 나타내어, 보법步法은 걷는 법을 가르치고 병기兵器는 손으로 놀리는 법을 가르쳐서 손과 발이 편리하면 아는 것이 절반을 넘을 것이다.”
原注
“밖에 네모지게 그은 것은 보법步法을 나타낸 것이요, 안에 둥글게 점을 찍은 것은 병기兵器를 나타낸 것이다.
보법步法은 발로 걷는 법을 가르치고 병기兵器는 손으로 놀리는 법을 가르쳐서 손과 발이 편리하면 아는 것이 거의 절반을 넘을 것이다.”
“오기吳起가 이르기를 ‘끊어져도 떨어지지 않고 퇴각하여도 흩어지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이 보법步法입니다.
병사들을 교련教練함은 바둑판에 바둑알을 펼쳐놓는 것과 같으니, 만약 그은 줄이 없으면 바둑을 어디에 놓겠습니까.
손자孫子가 말하기를 ‘땅은 도度를 낳고 도度는 양量을 낳고 양量은 수數를 낳고 수數는 칭稱을 낳고 칭稱은 승리를 낳으니,
승리하는 군대는 일鎰로써 수銖를 다는 것과 같고, 패배하는 군대는 수銖로써 일鎰을 다는 것과 같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도度와 양量, 방方과 원圓에서 생긴 것입니다.”
原注
“오기吳起의 글에 이르기를 ‘끊겨도 서로 떨어지지 않고 퇴각하여도 흩어지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보법步法입니다.
병사들을 교련教練함은 마치 바둑판에 바둑알을 펼쳐놓는 것과 같으니, 만약 그은 줄이 없으면 바둑알을 어디에 놓아서 승부를 결정하겠습니까.
손자孫子가 말하기를 ‘땅은 도度를 낳고 도度는 양量을 낳고 양量은 수數를 낳고 수數는 칭稱을 낳고 칭稱은 승리를 낳으니, 승리하는 군대는 일鎰(900g)을 가지고 수銖(0.9g)를 다는 것과 같고, 패배하는 군대는 수銖를 가지고 일鎰을 다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도度와 양量, 방方과 원圓의 법에서 생긴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原注
○내가 살펴보건대, 이정李靖의 ‘밖은 네모지고 안은 둥글다.’는 말은 대부분 보법步法과 수법手法을 말한 것이요, 육진六陣을 밖은 네모지고 안은 둥근 형태로 나눈 것이 아니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거리의 멀고 가까움과 지형地形의 넓고 좁음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절節을 만들 수 있겠는가.”
原注
장수 된 자가 땅의 멀고 가까움과 지형地形의 넓고 좁음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절節(節度)을 만들 수 있겠는가.”
“용렬한 장수는 그 절節을 아는 자가 적습니다.
전투를 잘하는 자는 그 세勢(기세 또는 형세)가 험하고 그 절節이 짧아서, 기세는 줄을 가득 당겨놓은 쇠뇌와 같고 절節은 발동하는 기아機牙와 같습니다.
原注
“용렬하고 평범한 장수는 그 절節을 아는 자가 적습니다.
전투를 잘하는 자는 그 기세를 험하게 하고자 하고 그 절節을 짧게 하고자 하여, 기세는 가득 당겨놓은 쇠뇌 줄과 같고 절節은 발동하는 기아機牙와 같습니다.”
이 내용은 《손자孫子》 〈병세兵勢〉에 자세히 보인다.
신臣이 그 방법을 닦아서 무릇 대隊를 세울 적에는 거리가 각각 10보步씩 되게 하고, 대隊를 머물러 있게 할 적에는 사대師隊와의 거리가 20보步쯤 되게 하여, 매양 한 부대 걸러 한 전대戰隊를 세웁니다.
전진前進함은 50보를 절도로 삼으며, 첫 번째 나팔 소리에 여러 부대가 모두 흩어져 서되, 10보 안을 지나지 않으며, 네 번째 나팔 소리에 병사들이 쟁鎗을 잡고 꿇어앉거든, 이에 북을 치면 병사들이 세 번 함성을 지르고 세 번 공격하며, 30보에서 50보에 이르러 적의 변화에 따라 대응합니다.
마군馬軍(기병)은 등 뒤에서 나오되 또한 50보로 그때마다 절제節制에 따라 멈춰 서서 앞에는 정병正兵을 배치하고 뒤에는 기병奇兵을 배치하여 적이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관찰하고, 다시 북을 치면 앞에는 기병奇兵을 배치하고 뒤에는 정병正兵을 배치하여 다시 공격해 오는 적敵을 맞이해서 빈틈을 타 적의 허술한 곳을 무찌르니, 이 육화진六花陣이 대략 모두 이와 같습니다.”
原注
“신臣이 손무孫武의 ‘세勢가 험險하고 절節이 짧은 방법’을 닦아서 대隊를 세울 적에는 서로의 거리가 각각 10보쯤 떨어지게 하고, 대隊를 머물러 있게 할 적에는 사대師隊와 거리가 각각 20보쯤 되게 하여 매양 한 부대와 떨어져 있어서 또다시 한 전대戰隊를 세웁니다.”
이 말은 아마도 바로 앞에서 말한 전투에 거승車乘을 겸한다는 것인 듯하다.
사대師隊는 아마도 바로 앞에서 말한 도탕기병跳盪騎兵이고, 전대戰隊는 아마도 바로 앞에서 말한 전봉대戰鋒隊에 보병步兵과 기병騎兵이 서로 반반씩 있다는 것인 듯하다.
“전진前進할 때에는 다만 50보를 절도로 삼으며, 첫 번째 나팔 소리에 여러 부대가 모두 흩어져 서되 각각 10보 안을 지나지 않으며, 네 번째 나팔 소리에 병사들이 쟁鎗을 잡고 꿇어앉습니다.[跪坐]”
“이에 북을 치면 병사들이 세 번 함성을 지르고 세 번 공격하며, 30보에서 50보에 이르러 적의 변화에 따라 대응합니다.”
이는 바로 주방周訪이 두증杜曾의 군대를 패퇴시킬 적에 30보 안에서 매복을 출동한 것이니, 기세가 험險하고 절節이 짧은 방법이다.
“마군馬軍은 등 뒤에서 나오되 또한 50보로 때에 따라 절도에 맞추어 멈춰 서서 앞에는 정병正兵을 배치하고 뒤에는 기병奇兵을 배치하여 적의 동정動靜이 어떠한가를 관찰하고, 이에 다시 북을 치면 앞에는 기병奇兵을 배치하고 뒤에는 정병正兵을 배치하여 다시 공격해 오는 적敵을 맞이하여 빈틈을 타 허술한 곳을 무찌르니, 이 육화진六花陣이 대략 모두 이와 같습니다.”
“조공曹公의 《신서新書》에 이르기를 ‘진陣을 만들어 적敵을 상대할 적에 반드시 먼저 표表를 세운 다음, 군대를 이끌고 표表에 나아가 진陣을 치되, 한 부대가 적敵의 공격을 받는데도 남은 부대 중에 나아가 구원하지 않은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방법인가?”
原注
“조공曹公의 《신서新書》에 ‘진陣을 만들어 적敵을 상대할 적에 반드시 먼저 표表(표시기둥)를 세운 다음, 장수와 관리들로 하여금 병사들을 이끌고 각각 표表에 나아가 포진布陣하되,
한 부대가 적敵의 공격을 받는데도 남은 부대 중에 앉아서 보기만 하고 나아가 구원하지 않은 자는 모두 참형斬刑에 처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방법인가?”
“적敵을 대하여 표表를 세우는 것은 잘못이니, 이것은 다만 전투를 가르칠 때일 뿐입니다.
옛사람 중에 용병用兵을 잘한 자는 정병正兵을 가르치고 기병奇兵을 가르치지 아니하여, 무리를 몰고 가기를 양떼를 몰고 가듯이 해서 더불어 나아가고 더불어 후퇴하되, 가는 곳을 알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조공曹公은 교만하고 이기기를 좋아하였으니, 당시 여러 장수들 중에 《신서新書》를 받들어 읽는 자들이 감히 그 단점을 공격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적敵을 대하여 표表를 세우는 것은 너무 늦지 않습니까.
原注
“조공曹公이 ‘적敵을 대하여 표表를 세운다.’고 말한 것은 그 말이 잘못된 것이니, 이는 다만 전투를 가르칠 때의 법입니다.
옛사람 중에 용병用兵을 잘한 자는 다만 정병正兵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고 기병奇兵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기병奇兵은 그때그때 변화에 따라 응용하는 것이니, 어찌 일정한 법칙이 있겠습니까.
무리를 몰고 가기를 양떼를 몰듯이 해서 더불어 전진하고 더불어 후퇴하여, 병사들이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조공曹公은 교만하고 이기기를 좋아하여 당시의 여러 장수들 중에 《신서新書》를 받들어 행하는 자들이 감히 그 단점을 공격하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적진敵陣을 대하여 비로소 표表를 세운다면 또한 너무 늦지 않겠습니까.”
신臣이 폐하陛下께서 만든 파진악破陣樂의 춤을 삼가 살펴보니, 전면에는 사표四表로 나오고 뒤에는 팔번八旛(여덟 개의 깃발)으로 엮어서 좌左와 우右로 꺾어 돌아 징소리와 북소리에 따라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되 각각 그 절차節次가 있었으니, 이는 바로 팔진도八陣圖의 머리가 넷이고 꼬리가 여덟인 제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만 음악과 춤의 성대함만 볼 뿐이니, 어찌 군대의 용모가 이와 같은 줄을 아는 이가 있겠습니까.”
原注
“신臣이 폐하陛下께서 만든 파진악무破陣樂舞를 삼가 살펴보니, 전면에는 사표四表로 나오고 후면에는 팔번八旛으로 엮어서 〈춤추는 사람이〉 왼쪽과 오른쪽에서 꺾어 돌아 징소리와 북소리에 따라 종종걸음으로 달려갈 적에 각각 그 절차節次(절도)가 있었으니, 이는 바로 팔진도八陣圖의 머리가 넷이고 꼬리가 여덟인 제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만 음악과 춤의 성대함이 이와 같음만 볼 뿐이니, 어찌 군대의 용모가 이와 같이 성대함을 아는 자가 있겠습니까.”
“옛날에 한漢 고제高帝가 천하를 평정하고 노래를 짓기를 ‘어이하면 용맹한 장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까.’ 하였으니, 병법兵法은 뜻(마음)으로 전수할 수는 있으나, 말로는 전수할 수가 없다.
짐朕이 파진악破陣樂의 춤을 만들었는데, 오직 경卿만이 그 말 밖의 뜻을 깨달았으니, 후세에서는 내가 구차하게 짓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原注
“옛날 한漢 고제高帝가 천하天下를 평정하고 〈대풍가大風歌〉를 지었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큰바람이 일어나니 구름이 날도다.’ 하였으니, 이 한 구句는 천하가 혼란함을 비유한 것이요,
‘위엄이 해내海內에 가해져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였으니, 이 한 구는 무공武功으로 천하를 평정함을 말한 것이요,
‘어이하면 용맹한 장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까.’ 하였으니, 이는 인재를 얻어 등용하여 무비武備를 닦음을 생각한 것이니,
편안하여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다스려져도 혼란함을 잊지 않는 뜻이 있다.
병법兵法은 뜻으로 전수하여 정신으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알게 할 수 있고, 말만으로는 남에게 전수할 수 없다.
짐朕이 파진악破陣樂의 춤을 만듦에 오직 경卿만이 그 말 밖에 있는 뜻을 깨달았으니, 후세에 내가 구차히 이것을 짓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오방색五方色의 오기五旗가 정병正兵이 되는가?
번旛과 휘麾로 절충折衝하는 것이 기奇가 되는가?
분산하고 모아 변화함에 그 부대部隊의 수數는 어떻게 해야 마땅함을 얻는가?”
原注
“오방색五方色의 오기五旗가 정병正兵이 되는가?
번旛(깃발)과 휘麾로 절충折衝하는 것이 기병奇兵이 되는가?”
오방색五方色의 오기五旗는 동방東方은 청색靑色, 남방南方은 적색赤色, 서방西方은 백색白色, 북방北方은 흑색黑色, 중앙中央은 황색黃色인 것이 이것이다.
“군대를 분산하고 합쳐 변화함에 그 부대部隊의 수數는 어떤 방법이 마땅함을 얻는가?”
“신臣이 옛 병법兵法을 참고해보니, 무릇 세 부대가 합쳐지면 깃발이 서로 기대기만 하고 교차하지 않으며, 다섯 부대가 합쳐지면 두 깃발이 교차하고, 열 부대가 합쳐지면 다섯 깃발이 교차합니다.
原注
“신臣이 고인古人의 방법을 참고해보니, 무릇 세 부대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면 깃발이 서로 기대기만 하고 교차하지 않으며, 다섯 부대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면 두 깃발이 서로 교차하고, 열 부대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면 다섯 깃발이 모두 교차합니다.”
나팔을 불어 다섯 개를 교차한 깃발을 풀게 하면 하나가 다시 흩어져 열이 되고, 두 개가 교차한 깃발을 풀게 하면 하나가 다시 흩어져 다섯이 되고, 서로 기대기만 하고 교차하지 않은 깃발을 풀게 하면 하나가 다시 흩어져 셋이 됩니다.
原注
“나팔을 불어 첫 번째 소리에 다섯 개를 교차한 깃발을 풀게 하면 한 부대가 다시 흩어져 열 부대가 되고, 두 개가 교차한 깃발을 풀게 하면 한 부대가 다시 흩어져 다섯 부대가 되고, 서로 기대기만 하고 교차하지 않은 깃발을 풀게 하면 한 부대가 다시 흩어져 세 부대가 됩니다.”
군대는 흩어져 있으면 합치는 것을 기병奇兵으로 삼고, 합쳐져 있으면 흩어지는 것을 기병奇兵으로 삼습니다.
세 번 명령하고 다섯 번 거듭하여 세 번 해산하고 세 번 합쳐서 다시 정병正兵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해야 네 머리와 여덟 꼬리를 비로소 가르칠 수 있으니, 이는 부대部隊의 법에 마땅한 것입니다.”
原注
“군대는 흩어져 있으면 합치는 것을 기병奇兵으로 삼고, 합쳐져 있으면 흩어지는 것을 기병奇兵으로 삼습니다.
세 번 호령하고 다섯 번 거듭하여 병사들로 하여금 세 번 해산하고 세 번 합쳐서 다시 정병正兵으로 돌아오게 하면, 머리가 넷이고 꼬리가 여덟인 진법陣法을 비로소 가르칠 수 있으니, 이는 부대部隊의 법에 마땅한 것입니다.”
“조공曹公(曹操)에게는 전기戰騎와 함기陷騎와 유기遊騎가 있었으니, 지금 마군馬軍은 어느 것에 견줄 수 있는가?”
“신臣이 《신서新書》를 살펴보니, 이르기를 ‘전기戰騎가 앞에 있고 함기陷騎가 중앙에 있고 유기遊騎가 뒤에 있다.’ 하였으니, 이와 같다면, 이는 각각 명칭을 세워서 나누어 세 종류로 만든 것일 뿐입니다.
原注
“조공曹公에게는 전기戰騎와 함기陷騎와 유기遊騎가 있었으니, 지금 말하는 마군馬軍은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에 견줄 수 있는가?”
“신臣이 조공曹公의 《신서新書》를 살펴보니, 이르기를 ‘전기戰騎가 항상 앞에 있고 함기陷騎가 항상 중앙에 있고 유기遊騎가 항상 뒤에 있다.’ 하였으니, 이와 같다면, 이는 마군馬軍을 각기 명칭을 세워서 나누어 세 종류로 만든 것일 뿐입니다.”
대체로 기병대騎兵隊의 기마騎馬 8필은 거도車徒 24명을 당하고 24명의 기병騎兵은 거도車徒 72명을 당하니, 이것은 옛 제도입니다.
原注
“대체로 기병대騎兵隊는 매양 8필의 말로 거도車徒(전차병과 보병) 24명을 당하니, 3×8의 24명입니다.
24명의 기병騎兵이 거도車徒 72명을 당하니, 72명은 24를 세 번 곱한 것입니다.
거도車徒는 항상 정병正兵의 전술을 가르치고 기대騎隊는 항상 기병奇兵의 전술을 가르치니.
조공曹公의 글에 근거하면 ‘앞뒤와 중앙을 나누어 삼복三覆을 만든다.’라고만 말하고, 양상兩廂을 말하지 않은 것은 한 가지만을 들어 말한 것입니다.
후인後人들은 삼복三覆의 뜻을 깨닫지 못하여 전기戰騎를 반드시 앞에 두니, 이렇게 하면 함기陷騎와 유기遊騎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신臣이 이 방법을 익숙히 사용하여 군대를 돌리고 진陣을 돌릴 적에는, 유기遊騎가 앞을 담당하고 전기戰騎가 뒤를 담당하고 함기陷騎는 변화에 대응하여 나누었으니, 이는 모두 조공曹公의 방법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조공曹公에게 미혹되었구나.”
原注
“거도車徒는 항상 정병正兵의 전술을 가르치고 기대騎隊는 항상 기병奇兵의 전술을 가르칩니다.
조공曹公의 글에 근거하면 ‘앞뒤와 중앙을 나누어 삼복三覆(세 개의 매복)을 만든다.’라고만 말하고, 양상兩廂(좌우 양측면)의 군대를 말하지 않은 것은 한 가지만을 들어 말한 것입니다.
후인後人들은 조공曹公의 삼복三覆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전기戰騎를 반드시 앞에 두니, 이렇게 하면 함기陷騎와 유기遊騎 두 부대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신臣이 이 방법을 익숙히 사용하여 만약 군대를 돌리고 진陣을 바꾸게 되면, 유기遊騎 한 부대가 앞을 담당하고 전기戰騎 한 부대가 뒤를 담당하고 함기陷騎 한 부대는 변화에 따라 나누니, 이는 모두 조공曹公의 방법입니다.”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조공曹公에게 미혹되었구나.”
“전차병戰車兵과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세 가지는 똑같은 방법이니, 이것을 사용함이 사람에게 달려있는가?”
原注
“전차병戰車兵과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세 가지는 똑같은 방법이니, 이것을 사용함은 훌륭한 사람을 얻음에 달려있는가?”
“신臣이 《춘추春秋》를 살펴봄에 어리진魚麗陣은 편偏(전차)을 앞에 두고 오伍(보병)를 뒤에 두었다.
이는 전거戰車와 보병步兵이요 기병騎兵이 없어서 이것을 좌거左拒와 우거右拒라 말하였으니, 이는 적을 막을 뿐 기이한 계책을 내어 승리를 취하려는 것은 아님을 말한 것입니다.”
原注
“신臣이 《춘추春秋》를 살펴봄에 정鄭 장공莊公이 어리진魚麗陣의 법을 만들었는데, 편偏을 앞에 두고 항오行伍를 뒤에 둔 것은, 앞에는 전차병戰車兵을 사용하고 뒤에는 보병步兵을 사용하여 잇게 한 것입니다.
이는 다만 전거戰車와 보병步兵을 사용하여 기병騎兵이 없는 것이니, 좌거左拒와 우거右拒라 말한 것은 다만 이것을 사용하여 적의 공격을 막을 뿐 기이한 계책을 내어 승리를 취하려는 것은 아님을 말한 것입니다.”
진晉나라 순오荀吳가 북쪽의 오랑캐를 정벌할 적에 전거戰車를 버리고 항오行伍를 만들었으니, 이는 기병騎兵이 많은 것을 편리하게 여긴 것입니다.
오직 기이한 계책을 내어 승리하기를 힘쓴 것이요, 적의 공격을 막아낼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原注
“진晉나라 순오荀吳가 태원太原에서 북쪽의 오랑캐를 정벌할 적에 위서魏舒가 그에게 권해서 전거戰車를 버리고 항오行伍를 만들게 하였으니, 이는 기병騎兵이 많은 것을 편리하게 여긴 것입니다.
오직 기이한 계책을 내어서 승리를 취하려고 힘쓴 것이요, 이것을 써서 적의 공격을 막아낼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신臣이 그 방법을 고르게 사용하여 말 1필로 보병步兵 3명을 당하고 전차병戰車兵과 보병步兵을 이에 걸맞게 배치하여 뒤섞어 한 방법을 만들어 운용함이 사람에게 달려있게 하였으니, 이렇게 하면 적이 어찌 우리의 전거戰車가 과연 어디에서 나오고, 기병騎兵이 과연 어디에서 나오고, 보병步兵이 과연 어디에서 나올 줄을 알겠습니까.
혹은 구지九地에 잠겨있고 혹은 구천九天에서 동動하여 신神과 같은 지혜는 오직 폐하陛下께서 소유하고 계시니, 신臣이 어찌 이것을 알겠습니까.”
原注
“신臣이 그 방법을 고르게 사용하여 말 1필로 적의 보병步兵 3명을 당하고 전차병戰車兵과 보병步兵을 또 이에 걸맞게 배치해서 세 가지를 뒤섞어 한 방법을 만들어서 사용함이 사람에게 달려있게 하였으니, 적이 우리의 전거戰車가 과연 어디로부터 나오고, 기병騎兵이 과연 어디로부터 오고, 보병步兵이 과연 어디로부터 나올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혹은 구지九地의 깊음과 같이 조용하고 혹은 구천九天의 높음과 같이 동動하여, 신묘하고 측량할 수 없는 지모는 오직 폐하陛下께서 소유하고 계시니, 신臣이 어찌 이 방법을 알겠습니까.”
“태공太公의 병서兵書에 이르기를 ‘땅의 넓이가 600보步 혹은 60보步에 12신辰의 표表를 세운다.’ 하였으니, 그 방법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原注
“태공太公의 병서兵書에 이르기를 ‘땅의 넓이 600보步와 혹은 60보步에 12신辰(12방위)의 위치로써 표表한다.’ 하였으니, 그 방법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12신辰의 위차位次는 바로 자子는 현효玄枵, 축丑은 성기星紀, 인寅은 석목析木, 묘卯는 대화大火, 진辰은 수성壽星, 사巳는 순미鶉尾, 오午는 순화鶉火, 미未는 순수鶉首, 신申은 실침實沈, 유酉는 대량大梁, 술戌은 항루降婁, 해亥는 추자陬訾이다.
“땅을 사방 1,200보步로 그어놓으니, 이는 개방開方의 형체입니다.
매 부대마다 네모진 20보步의 땅을 점거하여, 가로로 5보步에 한 사람을 세우고 세로로 4보步에 한 사람을 세우면 모두 2,500명이 됩니다.
이것을 다섯 방위로 나누어서 빈 땅의 네 곳에 머물게 하니, 이른바 ‘진陣 사이에 진陣을 용납한다.’는 것입니다.
原注
“땅을 사방 1,200보步로 그으니, 이는 개방開方의 모습입니다.”
“한 부대마다 20보의 네모진 땅을 점거합니다.”
만약 네모진 20보라면 어찌 500명을 수용할 수 있겠는가.
“가로로는 5보에 한 사람을 세우고 세로로는 4보에 한 사람을 세우면 모두 2,500명이 됩니다.
이것을 동과 서, 남과 북, 중앙으로 나누어 오방五方을 만들고, 네 귀퉁이 빈 땅의 네 곳에 머무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진陣 사이에 진陣을 용납한다.’는 것입니다.”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정벌할 적에 호분虎賁이 각각 3천 명을 관장하였고, 매 진陣마다 6천 명씩이어서 모두 3만 명의 무리였으니, 이것은 태공太公이 땅을 그은 방법입니다.”
原注
“주周 무왕武王이 장차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려 할 적에 호분虎賁의 장사로 하여금 각각 3,000명을 관장하게 하고, 1진陣마다 6,000명을 사용하여 다섯 진陣에 모두 3만 명의 무리를 사용하였으니, 이는 태공太公이 땅을 그어 병사들을 가르친 방법입니다.”
앞에서 “태공太公이 4만 5,000명으로 주왕紂王의 70만 군대를 이겼다.”라고 한 것은 전투할 때에 제후諸侯들의 병력까지 총괄하여 말한 것이요,
여기에서 “매 진陣에 6,000명이어서 모두 3만 명의 무리이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병사들을 가르치고 사열한 수이니, 땅을 그은 방법을 근거로 하여 말한 것이다.
原注
○내가 살펴보건대, 《상서尙書》의 소서小序에 “융거戎車가 300양輛이고 호분虎賁이 300명이다.” 하였는데, 주注에 이르기를 “융거戎車는 치거馳車이고 혁거革車는 치거輜車이며, 호분虎賁은 백부百夫의 장長이다.” 하였다.
치거馳車와 혁거革車에 대한 설명은 이미 《손자孫子》에서 분변하였다.
‘호분虎賁은 백부百夫의 장長이다.’라고 한 것은 그 뜻을 생각하건대, 융거戎車 1승乘마다 갑사甲士가 3명이고 보졸步卒이 72명이고 또 25명이 중거重車를 가지고 뒤에 있어서 모두 100명인 것이다.
융거戎車가 300양輛이면 모두 3만 명이 되니, 호분虎賁을 백부장百夫長이라 하면 3만 명에 모두 300명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면 천부장千夫長 30명은 또 호분虎賁의 용사인가 보다.
또 전거戰車 1대마다 갑사甲士 3명이면 300승乘에 모두 900명을 사용하니, 이는 모두 호분虎賁의 용사勇士이니 어찌 다만 백부장百夫長을 가지고 말한 것이겠는가.
《맹자孟子》 〈진심盡心 하下〉에 이르기를 “혁거革車가 300량이고 호분虎賁이 3,000명이다.” 하였는데,
지금 이정李靖이 말하기를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정벌할 적에 호분虎賁이 각각 3,000명을 관장했다.” 하였으니,
이는 다만 《서경書經》의 서문에 ‘300명’을 가지고 말하면, 호분虎賁의 용사 1명마다 3,000명을 관장할 경우 300명이 모두 90만의 무리를 관장하게 되니, 또 너무 많게 된다.
앞에서는 “태공太公이 4만 5,000명으로 주왕紂王의 70만 군대를 이겼다.” 하였고, 지금은 또 말하기를 “다만 3만 명의 무리를 사용했다.” 하였다.
또 ‘혁거革車 300량’을 가지고 말하면, 전거戰車 한 대에 치중거輜重車를 가지고 있는 25명을 제외하여 모두 7,500명을 뺄 경우 나머지는 다만 전사戰士가 2만 2,500명이 있을 뿐이니, 너무 적지 않겠는가.
옛날에 큰 제후국諸侯國은 삼군三軍을 보유하여 병력이 모두 3만 7,500명이었는데, 주周나라는 서백西伯인데도 삼군三軍의 군대가 없단 말인가.
또 태공太公의 《육도六韜》에 이르기를 “전차병戰車兵을 선발할 적에 나이 40세 이하로 신장이 7척尺 5촌寸 이상이며, 달리기를 잘하여 달아나는 말을 쫓고
또 말을 달리면서 수레에 올라타 전후좌우와 상하로 두루 돌며 적의 깃발을 묶어 올 수 있고, 힘이 8석石의 쇠뇌를 당길 수 있으며, 앞뒤와 좌우로 활을 쏨에 모두 숙달된 자를 취하여, 이를 무거武車의 용사라 칭하고,
기병騎兵을 선발할 적에도 또한 나이 40세 이하로 신장이 7척尺 5촌寸 이상이며, 건장하고 몸의 빠름이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나서,
말을 달리며 활을 쏘고 또 전후와 좌우로 두루 돌아 전진하고 후퇴하며 참호를 넘어가고 구릉을 올라가며 험한 곳을 무릅쓰고 큰 늪을 건너가며
강한 적을 충돌하여 적의 큰 병력을 어지럽힐 수 있는 자를 취하여, 무기武騎의 용사라 칭한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거기車騎와 보병步兵을 뺄 수 없는 것이다.
《서경書經》의 소서小序에 다만 “융거戎車가 300량이고 호분虎賁이 300명이다.” 하였는데, 이는 다만 전거戰車와 보병步兵을 말했을 뿐이니, 아마도 호분虎賁 3,000명은 수레의 갑사甲士와 기사騎士를 겸하여 말했는가 보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태서泰誓 상上〉에 이르기를 “나는 3,000명의 신하가 있는데 마음이 같고 덕德이 같다.” 하여서 맹자孟子의 말씀과 같으니, 마땅히 《맹자孟子》를 옳은 것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경卿의 육화진六花陣은 땅을 얼마만큼 그어 만드는가?”
“크게 사열査閱할 적에는 땅의 넓이가 1,200보步이니, 그 내용이 육진六陣입니다.
각각 400보步의 땅을 점령하여 나누어 동쪽과 서쪽 두 상廂을 만들고, 빈 땅 1,200보步를 전투를 가르치는 장소로 삼습니다.
신臣이 일찍이 3만 명의 병사를 가르칠 적에 매 진陣마다 5,000명을 배치하고 그중 한 진陣을 진영陣營을 설치하는 방법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진陣은 방진方陣‧원진圓陣‧곡진曲陣‧직진直陣‧예진銳陣의 형태로 만들어서 매 진陣마다 5번 변하여 모두 25번 변하고 그쳤습니다.”
原注
“경卿의 육화진六花陣은 땅을 얼마만큼 그어 만드는가?”
“크게 사열査閱할 적에는 땅의 넓이가 사방마다 1,200보步를 사용하니, 그 내용이 육진六陣입니다.
매 진陣마다 각각 400보步를 점거하여 나누어 동쪽과 서쪽 두 상廂을 만듭니다.”
동상東廂의 세 진陣은 400보步의 3곱인 1,200보步이고, 서상西廂의 세 진陣도 400보步의 3곱인 1,200보步이다.
“중간의 빈 땅 1,200보步를 전투를 가르치는 장소로 삼습니다.
신臣이 일찍이 3만 명의 병사를 가르칠 적에 매 진陣마다 5,000명의 병사를 배치하고 그 가운데 한 진陣을 진영陣營을 설치하는 방법으로 삼았습니다.”
다섯 진陣은 방진方陣‧원진圓陣‧곡진曲陣‧직진直陣‧예진銳陣의 형태로 만드는 것이다.
네모진 것[方]을 의義라 하니 의義는 가을이 되고 금金이 되며, 둥근 것[圓]을 지智라 하니 지智는 겨울이 되고 물이 되며, 굽은 것[曲]을 인仁이라 하니 인仁은 봄이 되고 나무가 되며, 곧은 것[直]을 신信이라 하니 신信은 토土가 되고 장하長夏(한여름)가 되며, 뾰족한 것[銳]을 예禮라 하니 예禮는 여름이 되고 불이 된다.
“매 진陣마다 모두 방진方陣‧원진圓陣‧곡진曲陣‧직진直陣‧예진銳陣의 형태로 다섯 번 변하면 다섯 개의 진이 다섯 번씩 모두 25번 변하고 그칩니다.”
“본래 오방五方의 색깔을 따라서 이 이름을 지었으니, 방진方陣‧원진圓陣‧곡진曲陣‧직진直陣‧예진銳陣은 실로 지형을 따라 만든 것입니다.
모든 군대가 이 다섯 가지를 평소 익히지 않으면 어떻게 적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억지로 오행진五行陣이라 이름하였고, 술수術數에 상생相生하고 상극相剋하는 의의意義로 문식文飾하였습니다.
그 실제는 군대의 모습은 물을 형상하여 지형에 따라 흐르도록 만드니, 이것이 바로 그 요지입니다.”
原注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오행진五行陣은 그 내용이 어떠한가?”
“본래 오방五方의 청색靑色‧적색赤色‧황색黃色‧백색白色‧흑색黑色을 따라 이 이름을 지었을 뿐이니, 방진方陣‧원진圓陣‧곡진曲陣‧직진直陣‧예진銳陣은 실로 지형을 따라 이와 같게 만든 것입니다.
모든 군대가 평소에 이 다섯 가지 진법陣法을 가르치고 익히지 않으면 어떻게 이것을 사용하여 적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억지로 오행진五行陣이라 이름하였고, 술수術數의 상생相生하고 상극相剋하는 의의意義로써 문식文飾한 것입니다.”
상생相生이란 금金은 수水를 낳고 수水는 목木을 낳고 목木은 화火를 낳고 화火는 토土를 낳고 토土는 금金을 낳는 것이요, 상극相尅이란 금金은 목木을 이기고 목木은 토土를 이기고 토土는 수水를 이기고 수水는 화火를 이기고 화火는 금金을 이기는 것이다.
“그 실제는 군대의 모습이 물을 형상하였으니, 물은 땅을 따라 흘러서 네모지고 둥글고 기울고 곧은 모습을 만들고, 군대 또한 땅을 따라 방진方陣‧원진圓陣‧곡진曲陣‧직진直陣‧예진銳陣의 모습을 만드니, 이것이 오행진五行陣의 요지입니다.”
“이적李勣이 빈牝과 모牡, 방진方陣과 원진圓陣, 복병伏兵을 말하였는데, 병법兵法에 예전에도 이것이 있었는가?”
“빈牝‧모牡의 법은 세속에서 전하는 말에서 나왔으니, 그 실제는 음陰과 양陽 두 가지 뜻이 있을 뿐입니다.
原注
“이적李勣이 일찍이 빈牝과 모牡, 방진方陣과 원진圓陣, 복병伏兵을 말하였는데, 병법兵法 가운데에 옛날에도 이러한 법이 있었는가?”
“빈牝‧모牡의 방법은 세속에서 전하는 바에서 나왔으니, 그 실제는 다만 음陰과 양陽 두 가지 뜻이 있을 뿐입니다.”
신臣이 살펴보건대, 범려范蠡가 이르기를 ‘뒤에는 음陰을 쓰고 먼저는 양陽을 쓰며, 적의 양절陽節이 다하게 하고 우리의 음절陰節을 가득 채워 빼앗는다.’ 하였으니, 이는 병가兵家의 음陰과 양陽의 묘리妙理입니다.
原注
“신臣이 범려范蠡의 책을 살펴보니, 이르기를 ‘뒤에는 음陰을 쓰고 먼저는 양陽을 쓴다.’ 하였으니, 이는 군대가 앞을 양陽으로 삼고 뒤를 음陰으로 삼는 것입니다.
‘적의 양절陽節이 다하게 한다.’는 것은 적의 양기陽氣가 쇠함을 기다리는 것이요,
‘우리의 음절陰節을 가득 채워 빼앗는다.’는 것은 우리 후군後軍의 음기陰氣를 성하게 하여 적의 양기陽氣가 쇠했을 때를 틈타서 빼앗는 것이니,
이는 병가兵家의 음陰과 양陽의 미묘한 이치입니다.”
범려范蠡는 월越나라 사람이니,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범려范蠡》 2편이 있다.” 하였으나, 지금 미처 보지 못하였다.
범려范蠡는 또 말하기를 ‘오른쪽을 만드는 것을 빈牝이라 하고 왼쪽을 더하는 것을 모牡라 한다.’ 하였으니, 이른 아침과 저물녘에 천도天道를 순히 하는 것이니, 이는 왼쪽과 오른쪽, 이른 아침과 저물녘이 때에 따라 똑같지 않아서, 기奇‧정正의 변화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原注
“범려范蠡의 책에 또 이르기를 ‘오른쪽을 만드는 것을 빈牝이라 하고 왼쪽을 더하는 것을 모牡라 한다.’ 하였습니다.”
빈牝은 짐승의 암컷이고 모牡는 짐승의 수컷이니, 암컷으로 음陰을 비유하고 수컷으로 양陽을 비유한 것이요, 조早(朝)는 해가 처음 나오는 때이고 안晏은 해가 장차 들어가는 때이다.
“혹 이른 아침과 혹 저물녘에 천도天道에 순응해야 할 뿐이니, 이는 왼쪽과 오른쪽, 이른 아침과 저물녘이 때에 따라 각기 똑같지 않음이 있어서, 기奇‧정正이 서로 변화함에 달려있을 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은 사람의 음陰과 양陽이요, 이른 아침과 저물녘은 하늘의 음陰과 양陽이요, 기奇와 정正은 하늘과 사람이 서로 변하는 음陰과 양陽이니, 만약 고집하고 변화하지 않으면 음陰과 양陽이 모두 버려지니, 어떻게 빈牝‧모牡의 형체만을 지킬 뿐이겠습니까.
原注
“왼쪽과 오른쪽은 사람에게 있는 음陰과 양陽입니다.”
“이른 아침과 저물녘은 하늘에 있는 음陰과 양陽입니다.”
이른 아침은 양陽이 되고 저물녘은 음陰이 된다.
“기奇와 정正은 하늘과 사람이 서로 변하는 음陰과 양陽입니다.”
혹은 이른 아침에 빈牝을 쓰고 혹은 저물녘에 모牡를 쓰며, 혹은 모牡이면서 빈牝인 것처럼 보이고 혹은 빈牝이면서 모牡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만약 왼쪽과 오른쪽, 이른 아침과 저물녘을 고집하여 변통하지 않으면 하늘과 사람의 음陰과 양陽이 모두 버려지니, 어떻게 빈牝‧모牡의 형체만을 지킬 뿐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체를 드러내는 것은 기병奇兵으로 적에게 보여주는 것이니 우리의 정병正兵이 아니요, 승리하는 것은 정병正兵으로 적을 공격하는 것이니 우리의 기병奇兵이 아닙니다.
이것을 일러 기奇와 정正이 서로 변통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군대를 매복하는 것은 산골짝뿐만 아니라 풀 속과 나무숲에 숨어 엎드리는 것도 복병이 되는 것입니다.
정병正兵은 산과 같고 기병奇兵은 우레와 같아서, 적이 비록 얼굴을 상대하고 있더라도 우리의 기奇와 정正이 어디에 있는지를 측량하지 못하게 되니, 여기에 이른다면 어찌 형체가 있겠습니까.”
原注
“그러므로 형체를 드러내는 것은 기병奇兵으로 적에게 보여주는 것이니 우리의 정병正兵이 아니요, 승리하는 것은 정병正兵으로 적을 공격하는 것이니 우리의 기병奇兵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른바 기奇와 정正이 서로서로 변통하는 방도입니다.
군대를 매복하는 것은 산골짝에만 그치지 않고 풀 속과 나무숲 속에 몸을 숨기는 것도 복병이 됩니다.”
“적이 비록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으나 우리의 기奇와 정正이 있는 곳을 측량하지 못하니, 여기에 이르면 어찌 형체가 있겠습니까.”
태종太宗이 빈牝과 모牡, 방진方陣과 원진圓陣, 복병伏兵을 물었는데, 이정李靖이 다만 빈牝과 모牡, 복병伏兵을 대답하고, 방진方陣과 원진圓陣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방진方陣과 원진圓陣은 이전에 이미 오행진五行陣에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네 짐승의 진陣을 또 상商‧우羽‧치徵‧각角으로 형상함은 무슨 방도인가?”
原注
“용龍‧호虎‧조鳥‧사蛇 네 짐승의 진陣을 또 상商‧우羽‧치徵‧각角의 네 음音으로 형상하니, 이는 무슨 방법인가?”
“이것을 보존함으로써 이것을 폐지할 수 있으니, 만약 폐지하고 쓰지 않으면 속임수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原注
“그 명칭을 남겨둠으로써 이것을 폐지할 수 있으니, 만약 다시 폐지하고 쓰지 않으면 속임수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네 짐승의 진陣과 천天‧지地‧풍風‧운雲의 이름을 빌리고 또 상商의 금金과 우羽의 수水와 치徵의 화火와 각角의 목木의 배합을 가하였으니, 이는 모두 병가兵家들이 예로부터 속이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보존하면 남은 속임수를 다시 더하지 못할 것이요, 이것을 폐지하면 탐욕스런 자를 부리고 어리석은 자를 부리는 방법을 어떻게 베풀겠습니까.”
“경卿은 마땅히 이것을 숨겨서 밖에 누설하지 말라.”
原注
“용龍‧호虎‧조鳥‧사蛇 네 짐승의 이름과 천天‧지地‧풍風‧운雲의 칭호를 빌리고, 또 상商의 금金과 우羽의 수水와 치徵의 화火와 각角의 목木의 배합을 가하였습니다.”
상商은 서방西方의 소리이므로 금金에 속하고, 우羽는 북방北方의 소리이므로 수水에 속하고, 치徵는 남방南方의 소리이므로 화火에 속하고, 각角은 동방東方의 소리이므로 목木에 속한다.
“이는 모두 예로부터 병가兵家의 속이는 방법이니, 이것을 보존하면 남은 속임수가 다시 더 불어나지 않을 것이요, 만약 이 속이는 방도를 폐지하면 탐욕스러운 자를 부리고 어리석은 자를 부리는 방법을 어떻게 펼 수 있겠습니까.”
탐욕스러운 자는 그 이익에 급히 달려가고 어리석은 자는 그 죽음을 돌아보지 아니하여, 모두 속이는 방도로써 부릴 수 있는 것이다.
“경卿은 이 방법을 은밀히 숨겨서 밖에 전하여 누설하지 말라.”
태종太宗이 말하였다.
漢 光武帝
“형벌을 엄하게 하고 법을 준엄히 적용해서 병사들로 하여금 장수인 나를 두려워하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을 짐朕은 매우 의혹스럽게 생각한다.
옛날 광무제光武帝는 외로운 군대를 가지고 왕망王莽의 백만 군대를 상대하였는데, 형법으로 대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어째서인가?”
原注
“형벌을 엄하게 하고 법을 까다롭고 준엄하게 해서 사람(병사)들로 하여금 장수인 나를 두려워하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함을 알게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을 짐朕이 매우 의혹스럽게 생각한다.
옛날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외로운 군대를 가지고 왕망王莽의 백만 병력을 상대하였는데, 당시에 형벌로 대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이와 같이 할 수 있는가?”
“병가兵家의 승패는 정상情狀이 만 가지로 달라서 한 가지 일로 추측할 수가 없습니다.
예컨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진秦나라 군대를 패퇴시켰으니, 어찌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형벌이 진秦나라보다 더하였겠습니까.
광무제光武帝가 일어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이 왕망王莽을 원망함을 따른 것이요, 더구나 또 왕심王尋과 왕읍王邑은 병법兵法을 알지 못하고 오직 많은 병력을 과시할 뿐이었으니, 이 때문에 스스로 패한 것입니다.
原注
“병가兵家의 승패는 정상情狀이 만 가지로 달라서 한 가지 일로 미루어 연구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진秦나라 군대를 패퇴시켰으니, 어찌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형벌이 진秦나라 군대보다 더하였겠습니까.”
백성百姓들이 진秦나라의 포악한 정치를 원망하여 다투어 나와 공격하였기 때문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이것을 이용하여 승리한 것이다.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모두 초楚나라 사람이니, 진秦나라 2세 황제 원년에 기蘄 땅에서 군대를 일으켜, 진승陳勝은 스스로 초왕楚王이 되고 오광吳廣을 가왕假王으로 삼았다.
“한漢 광무제光武帝가 일어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이 왕망王莽을 원망함을 따른 것입니다.”
왕망王莽은 국가를 찬탈한 큰 역적이고, 또 한漢나라의 제도를 모두 변경해서 사람들마다 이를 갈고 있었으니, 이 때문에 광무제光武帝가 인하여 승리를 취한 것이다.
“또 더구나 왕심王尋과 왕읍王邑은 병법兵法을 알지 못하고 한갓 병사의 많음을 과시할 뿐이었으니, 이 때문에 패배를 자초한 것입니다.”
왕심王尋과 왕읍王邑은 모두 왕망王莽의 장수이니, 경시更始 원년(23)에 소왕蕭王(光武帝)이 곤양昆陽에서 이들을 격파하여 왕심王尋을 죽였다.
신臣이 살펴보건대, 《손자孫子》에 이르기를 ‘병사들이 아직 친하게 따르지 않는데 형벌을 시행하면 복종하지 않고, 이미 친하게 따르는데 형벌을 시행하지 않으면 쓸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이는 모든 장수에게 먼저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병사들과 마음이 합한 뒤에야 형벌을 엄하게 시행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니, 만약 사랑하는 정을 가하지 않고 준엄한 법만을 적용한다면 성공하는 자가 적을 것입니다.”
原注
“신臣이 《손자孫子》를 살펴보니, 이르기를 ‘병사들이 아직 친하게 따르지 않는데 갑자기 벌을 주면 병사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고, 이미 친하게 따르는데 형벌을 시행하지 않으면 병사들을 부릴 수 없다.’ 하였으니,
이는 모든 장수 된 자에게 먼저 은혜와 사랑이 있어 병사들의 마음과 합한 뒤에야 엄한 형벌로써 벌을 줄 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만약 은혜와 사랑이 가해지지 못하고 준엄한 법만을 쓴다면 성공하는 자가 적을 것입니다.”
“《상서尚書》에 이르기를 ‘위엄이 사랑을 이기면 진실로 성공하고, 사랑이 위엄을 이기면 진실로 성공하지 못한다.’ 한 것은 무슨 말인가?”
原注
“《상서尚書》 〈윤정胤征〉에 이르기를 ‘위엄이 사랑을 이기면 진실로 일이 이루어지고, 사랑이 그 위엄을 이기면 진실로 성공하지 못한다.’ 하였으니,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사랑을 앞에 베풀고 위엄을 뒤에 베풀어야 하니, 이것을 반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原注
이정李靖이 대답하였다.
“은혜와 사랑을 앞에 베풀고 위엄과 형벌을 뒤에 베풀어야 하니, 이것을 반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위엄을 앞에 가하고 사랑으로 뒤에 구휼하면 일에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原注
“만약 형벌을 앞에 가하고 은혜와 사랑으로써 뒤에 구휼하면 일에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상서尚書》는 그 끝을 삼가고 경계한 것이요, 처음에 계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손자孫子》의 법은 만대에 바뀔 수 없는 것입니다.”
原注
“《상서尚書》의 말은 그 끝을 삼가고 경계한 것이요, 일의 시작에 계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손자孫子》의 말은 만대가 지나도 삭제하여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原注
○내가 생각하건대 사랑과 위엄은 어느 한 가지도 없어서는 안 되니, 사랑을 먼저 베풀고 위엄을 뒤에 베푸는 것은 떳떳한 이치이다.
그러나 전양저田穰苴는 미천한 출신으로 대오(졸병) 가운데서 발탁되어 대부大夫의 위에 가해지자, 사졸士卒들이 따르지 않고 백성들이 믿지 않았다.
이때를 당하여 급급하게 연燕나라와 진晉나라의 군대를 막았으니, 어찌 먼저 사랑을 베풀 수가 있었겠는가.
감군監軍 장가莊賈가 약속한 시간에 늦게 오자, 그를 참형에 처하여 군영에 돌리니, 삼군三軍이 두려워하였다.
이미 출정 길을 떠나자, 전양저田穰苴는 병사들이 머무는 곳과 우물과 부엌, 음식물과 질병을 앓는 자들을 문병하고 의약품을 챙겨주어 몸소 병사들을 어루만졌으며, 장군將軍에게 지급되는 물자와 양식을 모두 취하여 사졸士卒들에게 연향宴享을 베풀고, 몸소 사졸士卒들과 공평하게 양식을 나누었다.
그리고 가장 몸이 허약한 자를 보호해서 3일 후에 군대를 무장시키자, 병석에 누워있던 자들이 모두 출전하고자 하여 다투어 나와서 싸움에 달려오니, 진晉나라 군대가 이 말을 듣고 해산하여 떠났으며, 연燕나라 군대는 이 말을 듣고 물을 건너가 해산하였다.
이에 전양저田穰苴는 추격追擊하여 마침내 경내의 잃었던 옛 강토를 수복한 다음,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이는 위엄을 앞에 가하고 사랑으로 뒤에 구휼한 것이니, 어찌 일에 무익하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사랑해야 하면 사랑하고, 마땅히 위엄을 베풀어야 하면 위엄을 베풀어서, 사랑과 위엄이 서로 병행되어 모순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이다.
《상서尚書》 〈하서夏書 윤정胤征〉의 ‘위엄이 사랑을 이기면 진실로 성공한다.’는 것은 엄명嚴明이 고식姑息을 이기게 하려는 것이요, ‘사랑이 위엄을 이기면 진실로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은 고식姑息이 엄명嚴明을 이길까 두려워한 것이다.
군대는 위엄을 숭상하니 엄명嚴明이 이기면 진실로 일을 이루고, 고식姑息이 이기면 진실로 성공이 없는 것이다.
위엄과 사랑은 시종 폐할 수 없으니, 사랑으로 처음을 계책하고 위엄으로 그 끝을 삼가고 경계하는 것이 아니다.
“경卿이 소선蕭銑을 평정할 적에 여러 장수들은 모두 위신偽臣의 집안을 적몰하여 사졸士卒들에게 상賞으로 주려 하였으나, 경卿은 홀로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괴통蒯通이 한漢 고조高祖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이윽고 강한江漢 지방이 귀순하였다.
짐朕은 이로 말미암아 생각해보니, 고인古人의 말에 이르기를 ‘문文은 사람들을 따르게 하고 무武는 적을 두렵게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아마도 경卿을 두고 말함일 것이다.”
原注
“경卿이 소선蕭銑을 평정할 적에 여러 장수들은 모두 위신偽臣의 가산을 적몰하여 사졸士卒들에게 상賞으로 주고자 하였으나,
경卿은 홀로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괴통蒯通이 한漢 고조高祖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이윽고 강한江漢 사이의 지방이 모두 다 귀순하였다.
짐朕은 이로 말미암아 생각해보니, 고인古人의 말에 이르기를 ‘문文은 병사들을 친애하여 따르게 하고 무武는 적을 위엄으로 복종시킨다.’ 하였으니, 이것은 아마도 경卿을 두고 말함일 것이다.”
소선蕭銑은 양梁나라의 후손이니, 나천령羅川令이 되었다가 수隋 공제恭帝 의녕義寧 원년(617)에 파릉巴陵에서 군대를 일으켜 스스로 양왕梁王이라고 칭하였는데.
당唐나라 무덕武德 4년(621)에 토벌을 당하여 평정되었다.
괴통蒯通의 일은 한漢 고조高祖 11년(B.C. 196)에 보인다.
“한漢 광무제光武帝가 적미赤眉를 평정하고 적賊의 진영 가운데로 들어가서 서서히 걸어가자, 적賊들이 말하기를 ‘소왕蕭王이 진심을 사람의 뱃속에 미루어 둔다.’ 하였습니다.
이는 적賊들의 마음이 본래 악한 짓을 하지 않을 줄을 먼저 헤아린 것이니, 어찌 미리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原注
“한漢 광무제光武帝가 적賊인 적미赤眉의 번숭樊崇 등을 평정하고 그들의 진영 가운데로 들어가서 서서히 걸어가자, 적賊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소왕蕭王(光武帝)이 진심을 사람(우리들)의 뱃속에 미루어 둔다.’ 하였습니다.
이는 광무제光武帝가 적賊들의 인정이 본래 악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을 미리 헤아린 것이니, 어찌 미리 염려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광무제光武帝는 풍이馮異에게 명하여 적미赤眉를 평정하게 할 적에 이미 황제를 칭하였다.
‘소왕蕭王이 적심赤心을 미루어 사람의 뱃속에 두니, 우리가 어찌 사력死力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는,
소왕蕭王이 경시更始 2년(A.D. 24)에 동마銅馬‧철경鐵脛‧오번五幡‧대동大彤‧우래尤來‧대쟁大鎗을 거두면서 적진을 서서히 행군하였을 때에 적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이니, 적미赤眉라는 글자는 오기誤記인 듯하다.
신臣이 지난번 돌궐突厥을 토벌할 적에 번병番兵과 한병漢兵의 무리를 총동원하여 변방에서 천 리를 나갔으나, 일찍이 한 명의 양간揚干을 죽이지 않고 한 명의 장가莊賈를 목 베지 않고, 또한 적심赤心(진정)을 미루어 지극히 공정함을 보존할 뿐이었습니다.
폐하께서 잘못 들으시고 신臣을 차례를 뛰어넘는 지위에 발탁하셨으니, 문文‧무武의 온전한 재주에 있어서는 신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原注
“신臣이 지난번 돌궐突厥을 토벌할 적에 번병番兵과 한병漢兵의 무리를 통솔하여 변방에서 천 리를 나갔으나, 일찍이 한 명의 양간揚干을 죽이거나 한 명의 장가莊賈를 목 베지 않았고, 또한 적심赤心을 미루어서 지극히 공정함을 보존함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폐하께서 잘못 들으시고 신臣을 차례를 뛰어넘는 지위에 발탁하시니, 문文‧무武의 온전한 재주로 말하면 신이 어찌 감히 감당하겠습니까.”
노魯 양공襄公 3년(B.C. 570)에 계진鷄津에서 회맹會盟할 적에, 양간揚干이 곡량曲梁에서 항렬行列을 어지럽히자 위강魏絳이 그의 마부馬夫를 죽였으며, 장가莊賈는 전양저田穰苴의 감군監軍이었는데 약속한 시간보다 늦게 오자 전양저田穰苴가 그를 목 베었다.
“옛날 당검唐儉이 돌궐突厥에 사신 갔었는데, 경卿이 그 틈을 타 공격하여 패퇴시키자, 사람들은 ‘경卿이 당검唐儉을 사간死間으로 삼았다.’ 하였다.
짐朕은 지금까지도 이것이 의심스러우니, 어떠한가?”
原注
“옛날 짐朕이 홍려경鴻臚卿 당검唐儉을 보내어서 돌궐突厥에 사신으로 가게 했었는데, 경卿이 그 틈을 타 돌궐突厥을 공격하여 패퇴시키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경卿이 당검唐儉을 사간死間으로 삼았다.’ 하였다.
짐朕은 지금까지도 마음에 의심스러우니, 이 일이 어떠한가?”
“신臣이 당검唐儉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군주君主를 섬겼으니, 당검唐儉의 말이 반드시 돌궐突厥을 회유하여 복종시키지 못할 줄을 헤아렸습니다.
그러므로 신臣이 이 틈을 타서 군대를 풀어 공격한 것이니, 큰 환난을 제거한 것이요 작은 의리를 돌보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검唐儉이 사간死間이 되었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신臣의 본심이 아닙니다.
原注
“신臣이 당검唐儉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군주君主를 섬겼으니, 당검唐儉의 말이 반드시 돌궐突厥을 회유하여 복종시키지 못할 줄을 헤아렸습니다.
그러므로 신臣이 적이 해이한 틈을 타서 군대를 풀어 공격하였으니, 이는 돌궐突厥의 큰 환난을 제거한 것이요 당검唐儉의 작은 의리를 돌보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臣이 당검唐儉을 사간死間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는 신臣의 본심이 아닙니다.”
原注
○살펴보건대, 정관貞觀 4년(630)에 이정李靖과 이세적李世勣이 돌궐突厥을 기습하여 격파하자, 힐리가한頡利可汗이 철산鐵山으로 도망하였는데, 병력이 아직도 10여 만이 있었다.
〈힐리가한頡利可汗은〉 집실사력執失思力을 보내어 당唐나라에 들어와 황제를 뵙고서 사죄하고 조회朝會할 것을 청하자, 황제(太宗)는 홍려경鴻臚卿 당검唐儉 등을 보내어 이를 위무慰撫하고, 또 이정李靖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힐리가한頡利可汗을 맞이하게 하였다.
힐리가한頡利可汗은 겉으로는 말을 낮추었으나, 실제로는 내심 유예猶豫하면서 적북磧北으로 달아날 것을 도모하였다.
이정李靖은 병력을 이끌고 이세적李世勣과 백도白道에 모여 상의하기를 “힐리가한頡利可汗이 비록 패하였으나 그 병력이 아직도 강성하니, 만약 도망하여 적북磧北으로 가면 우리가 도모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조사詔使가 저들의 진영에 있으므로 오랑캐들은 마음을 놓고 있을 것이니, 만약 만 명의 정예 기병騎兵을 선발하여 습격하면 싸우지 않고서도 적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장공근張公謹은 “황제皇帝가 조칙을 내려 항복하는 것을 허락해서 사자使者가 저들의 진영에 있으니, 어찌 공격한단 말인가?” 하고 반대하였으나, 이정李靖은 말하기를 “이는 한신韓信이 제齊나라를 격파한 방법이니, 당검唐儉 등을 어찌 아까워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군대를 무장시켜 밤에 출동하자, 이세적李世勣이 뒤를 이었다.
힐리가한頡利可汗은 당검唐儉이 온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는데, 이정李靖의 선봉대가 힐리가한頡利可汗의 아장牙帳에서 7리里까지 쳐들어 온 뒤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고는 천리마를 타고 먼저 도망하니, 그 무리가 마침내 궤멸되었고 당검唐儉은 몸을 빠져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정李靖은 의성공주義成公主를 죽이고 1만여 명의 수급首級을 베었으며, 남녀 10여 만을 포로로 잡았다.
이세적李世勣이 적구磧口에 군대를 주둔하니, 추장酋長들이 모두 병력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여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이에 영토를 개척한 것이 음산陰山으로부터 북쪽으로 큰 사막에 이르렀으므로 이정李靖은 노포露布(戰勝을 알리는 문서)에 이 사실을 적어서 보고하였다.
살펴보건대, 《손자孫子》에 간첩間諜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하책이었습니다.
신臣이 일찍이 그 끝에 논論을 붙이기를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엎기도 하며, 혹은 간첩間諜을 사용하여 성공하기도 하지만 혹은 간첩間諜을 사용하여 패망하기도 한다.’ 하였습니다.
만약 머리를 묶는 때(젊을 때)부터 군주君主를 섬겨 조정朝廷에서 얼굴빛을 바로잡아 충성으로 절개를 다하고 신의로써 정성을 다한다면 비록 훌륭한 첩자諜者가 있더라도 어찌 쓸 수 있겠습니까.
당검唐儉의 작은 의리를 폐하陛下께서 어찌 의심하십니까.”
原注
“살펴보건대, 《손자孫子》에 간첩間諜을 사용하는 말이 가장 하책下策이 되었습니다.
신臣이 일찍이 그 편의 끝에 글을 지어 붙이기를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또한 배를 기울게 하여 엎기도 한다.’ 하였습니다.
고인古人 중에 혹은 간첩을 사용하여 성공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컨대 진秦나라가 간첩을 시켜 조趙나라를 이간질하자, 조趙나라가 과연 염파廉頗를 등용하지 않고 조괄趙括을 등용한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혹은 간첩을 의지하여 기울고 패망한 경우가 있습니다.”
항우項羽가 사자使者의 말을 듣고서 범증范增의 계책을 따르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만약 〈댕기를 풀고〉 머리를 묶는 〈성동成童(15세)〉 때부터 군주君主를 섬겨 조정朝廷에 있으면서 얼굴빛을 바로잡아 충성으로써 신하의 절개를 다하고 신의로써 마음의 정성을 다합니다.”
충忠은 자기를 다함을 이르고, 절節은 지키는 지조가 있어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이요, 신信은 진실히 함을 이르고, 성誠은 진실하여 망령됨이 없음을 이른다.
“〈이렇게 한다면〉 비록 첩자諜者 노릇을 잘하는 자가 있더라도 어찌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컨대 조공曹公(曹操)이 장간蔣幹으로 하여금 주유周瑜를 설득하게 하였는데, 장간蔣幹은 주유周瑜를 만나보자 끝내 한마디 말도 못하고, 돌아와서 조공曹公에게 이르기를 ‘주유周瑜의 아량과 높은 운치는 말로 능히 이간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당검唐儉의 작은 의리를 폐하陛下께서 또 어찌 의심하십니까.”
‘인의仁義가 아니면 간첩間諜을 부릴 수 없다.’ 하였으니, 이 어찌 소인小人이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주공周公은 대의大義로 친척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하물며 한 사신에 있어서랴.
原注
태종太宗이 이정李靖의 말을 듣고 감탄하여 말하였다.
‘인의仁義가 아니면 간첩間諜을 부릴 수 없다.’ 하였으니, 이 어찌 자잘한 소인이 능히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주공周公은 대의大義로 친척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더구나 한 사신使臣에 있어서랴.
관숙管叔이 무경武庚을 데리고 배반하자 주공周公이 토벌하여 그를 죽였으니, 이것이 대의大義로 친척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다.
“군대는 주인이 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객客이 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신속함을 귀하게 여기고 오래 지체함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原注
“군대는 주인이 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객이 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신속함을 귀하게 여기고 오래 지체함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군대는 부득이하여 사용하는 것이니, 어찌 객이 되고 또 오래 지체할 수 있겠습니까.
손자孫子가 말하기를 ‘군량을 멀리 수송하면 백성들이 가난해진다.’ 하였으니, 이는 객이 된 폐해이며, 또 말하기를 ‘군역을 두 번 장부에 올리지 않고 군량을 3년 동안 실어 가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오래해서는 안 되는 징험입니다.
原注
“군대는 고인古人이 부득이하여 사용하였으니, 어찌 객이 되고 또 오래 지체할 수 있겠습니까.
손자孫子가 이르기를 ‘양식을 멀리 수송하면 백성이 모두 가난해진다.’ 하였으니, 이는 국경을 넘어 군대를 동원해서 객이 된 폐해이며,
손자孫子가 또 말하기를 ‘군역을 백성들에게 두 번 장부에 올려서는 안 되고 군량을 나라에서 3년 동안 실어가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이는 군대를 오랫동안 동원해서는 안 되는 징험입니다.”
신臣이 주인과 객의 형세를 비교해서 헤아려보면 객을 바꾸어 주인으로 만들고 주인을 바꾸어 객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原注
“신臣이 주인과 객의 형세를 비교하여 헤아려보면 객을 바꾸어 주인으로 만들고 주인을 바꾸어 객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적에게서 양식을 이용하는 것은 객을 바꾸어 주인으로 만드는 방법이요, 배부른 적을 굶주리게 만들고 편안한 적을 수고롭게 만드는 것은 주인을 바꾸어 객으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군대는 주인과 객, 오래 지체함과 신속함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반드시 절도에 맞게 발동하여야 하니, 이것이 마땅함이 되는 것입니다.”
原注
“주인과 객을 서로 바꾸는 방법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적의 국경에서 양식을 이용함은 이는 객을 바꾸어 주인으로 삼는 방법입니다.”
양식이 있으면 지구전을 할 수 있으므로 ‘주인’이라고 한 것이다.
“배부른 적을 우리가 굶주리게 만들고, 편안한 적을 우리가 수고롭게 만드는 것은, 이는 주인을 바꾸어 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굶주리고 수고로우면 굳게 지키기가 어려우므로 ‘객’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대는 주인과 객이 되며 오래 지체함과 신속함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반드시 그 절도에 맞게 발동하여야 하니, 이것이 마땅함을 얻음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 월越나라가 오吳나라를 정벌할 적에 좌左‧우右 두 군대를 가지고 북을 울리며 진격하자, 오吳나라 사람들이 병력을 나누어 막으므로, 월越나라에서는 중군中軍을 이끌고 은밀히 건너가 북을 치지 않고 습격하여 오吳나라 군대를 격파하였으니, 이는 객을 바꾸어 주인으로 만든 증거입니다.
原注
“옛날에 이처럼 주인과 객, 수고로움과 편안함을 바꾼 방도가 있었는가?”
“옛날 춘추시대春秋時代,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정벌할 적에 좌左‧우右 두 군대를 가지고 밤에 북을 울리며 진격하자, 오왕吳王이 군대를 나누어 막으므로, 월왕越王이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은밀히 물을 건너가서 북을 치지 않고 진격하여 기습으로 오吳나라 군대를 격파하였으니, 이는 객을 바꾸어 주인으로 만든 분명한 증거입니다.”
월越나라가 오吳나라를 정벌한 것은 노魯 애공哀公 17년(B.C. 478)에 있었다.
석륵石勒이 희담姬澹과 싸울 적에 희담姬澹의 군대가 멀리서 오자, 석륵石勒은 공장孔萇을 보내어 선봉으로 삼아서 희담姬澹의 군대를 맞아 공격하게 하였는데, 공장孔萇이 후퇴하여 달아나자 희담姬澹이 와서 추격하였습니다.
석륵石勒은 이때 복병을 좌우에 매복시켰다가 협공하여 희담姬澹의 군대를 대패시켰으니, 이는 수고로움을 바꾸어 편안함으로 만든 증거로, 옛사람 중에 이와 같이 한 자가 많습니다.”
原注
“후조後趙 석륵石勒이 희담姬澹과 싸울 적에 희담姬澹의 군대가 멀리서 오자, 석륵石勒이 장수 공장孔萇을 보내어 선봉으로 삼아서 희담姬澹의 군대를 맞아 공격하게 하였는데, 공장孔萇이 후퇴하여 달아나자 희담姬澹이 병력을 이끌고 추격하였습니다.
석륵石勒이 군대를 좌우에 매복시켰다가 협공하여 희담姬澹의 군대를 대패시켰으니, 이는 수고로움을 바꾸어 편안함으로 만든 분명한 징험입니다.
옛사람 중에 이와 같이 한 자가 매우 많습니다.”
석륵石勒이 희담姬澹과 싸운 것은 서진西晉 민제愍帝 건흥建興 4년(316)에 있었다.
“철질려鐵蒺藜와 행마行馬를 태공太公이 만든 것이라 하는데, 이것이 옳은가?”
군대는 적을 오도록 유인하여야 하니 적을 막기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태공太公의 《육도六韜》에는 수비하고 막는 도구를 말했을 뿐이니, 공격하고 싸우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原注
“
철질려鐵蒺藜와
행마行馬의 도구를
태공太公이 만들었다 하는데, 이것이 옳은가?”
鐵蒺藜
그러나 이것을 사용하여 적을 막았을 뿐입니다.
군대는 적이 오도록 유인하여야 하니, 단지 적을 막고자 할 뿐만이 아닙니다.
태공太公의 《육도六韜》 가운데에는 지키고 막는 기구를 말했을 뿐이니, 공격하고 싸울 때에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도六韜》 〈군용軍用〉에 이르기를 “삼군三軍이 적을 막고 지킬 적에 목당랑검인부서木螳螂劍刃扶胥는 넓이가 2장丈인 것이 120개이니 일명은 행마行馬라 하고,
좁은 길과 오솔길에는 철질려鐵蒺藜를 펼쳐놓으니 가시의 높이가 4촌寸이고 넓이가 8촌寸이고 길이가 6척尺 이상인 것이 1,200개이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수비하고 막는 기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