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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子直解

오자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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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起本傳
吳起者 衛人也 好用兵하다
嘗學於曾子하고 事魯君이러니 齊人攻魯한대 魯欲將吳起 吳起取齊女爲妻하여 而魯疑之
吳起於是欲就名하여 遂殺其妻하여 以明不與齊也하니 魯卒以爲將하여 將而攻齊하여 大破之하다
魯人或惡吳起曰
起之爲人 猜忍人也
其少時 家累千金이러니 游仕不遂하여 遂破其家한대
鄕黨笑之어늘 吳起殺其謗己者 三十餘人하고 而東出衛郭門하니이다
與其母訣할새 齧臂而盟曰 起不爲卿相이면 不復入衛라하고 遂事曾子러니
居頃之 其母死로되 起終不歸어늘 曾子薄之하여 而與起絶이라
起乃之魯하여 學兵法하여 以事魯君이러니 魯君疑之어늘 起殺妻以求將하니이다
夫魯 小國이어늘 而有戰勝之名이면 則諸侯圖魯矣리이다
어늘 而君用起하시면 則是棄衛라하니 魯君疑之하여 謝吳起하다
吳起 於是하고 欲事之
文侯問李克曰
吳起 何如人哉 李克曰
貪而好色이나 然用兵 라도 不能過也리이다
於是 魏文侯以爲將하여 擊秦하여 拔五城하다
起之爲將 與士卒最下者 同衣食하며 臥不設席하고 行不騎乘하고 親裹贏糧하여 與士卒分勞苦러라
卒有病疽者어늘 起爲吮之러니 卒母聞而哭之하다
人曰
卒也어늘 而將軍自吮其疽하니 何哭爲
母曰
非然也
往年 吳公吮其父하여 其父戰不旋踵하고 遂死於敵이러니 吳公 今又吮其子하니 妾不知其死所矣
是以哭之라하다
文侯以吳起善用兵하고 廉平하여 盡能得士心이라하여 乃以爲西河守하여 以拒秦韓魏하다
文侯旣卒 起事其子武侯하다
武侯浮西河而下할새 中流 顧而謂吳起曰
美哉乎
山河之固
魏國之寶也로다 起對曰
在德이요 不在險하니이다
三苗氏 左洞庭이요 右彭로되 德義不修어늘 禹滅之하시고 夏桀之居 左河濟 右泰華 伊闕在其南하고 羊腸在其北이로되 修政不仁이어늘 湯放之하시고 殷紂之國 左孟門이요 右太行이며 常山在其北하고 大河經其南이로되 修政不德이어늘 武王殺之하시니
由此觀之컨대 在德이요 不在險하니 若君不修德이면 舟中之人 盡爲敵國也리이다
武侯曰
하다
卽封吳起하여 爲西河守하여 甚有聲名이라
魏置相할새 相田文한대 吳起不悅하여 謂田文曰
請與子論功 可乎 田文曰
하다
起曰
將三軍하여 使士卒樂死하여 敵國不敢謀 子孰與起 文曰
不如子로라
起曰
治百官하고 親萬民하고 實府庫 子孰與起 文曰
不如子로라
起曰
守西河而秦兵不敢東鄕하고 韓趙賓從 子孰與起 文曰
不如子로라
起曰
此三者 子皆出吾下어늘 而位加吾上 何也 文曰
主少國疑 大臣未附하고 百姓不信하니 方是之時 屬之於子乎
屬之於我乎
起黙然良久 曰 屬之子矣리라
文曰
此乃吾所以居子之上也라하니 吳起乃自知弗如田文하다
田文旣死 公叔爲相하여 尙魏公主하여 而害吳起
公叔之僕曰
易去也니이다
公叔曰
奈何 其僕曰
吳起 爲人 節廉而自喜名也
君因先與武侯言曰 夫吳起 賢人也어늘 而侯之國小하고 又與彊秦壤界하니 臣竊恐起之無留心也하노이다
武侯卽曰 奈何 君因謂武侯曰 試延以公主하여
起有留心이면 則必受之 無留心이면 則必辭矣리니 以此卜之하소서하고 君因召吳起而與歸하여 卽令公主怒而輕君하소서
吳起見公主之賤君也하면 則必辭하리이다
於是 吳起見公主之賤魏相하고 果辭魏武侯하니 武侯疑之而弗信也하다
吳起懼得罪하여 遂去하여 卽之楚하다
楚悼王 素聞起賢이러니 至則相楚하니 明法審令하고 捐不急之官하고 廢公族疏遠者하여 以撫養戰鬪之士하니 要在彊兵하여
破馳說之言하다
於是 南平百越하고 北幷陳蔡하고하고 西伐秦하다
諸侯患楚之彊이나 故楚之貴戚 盡欲害吳起하다
及悼王死 宗室大臣 作亂而攻吳起하니 吳起走之王尸而伏之하다
擊起之徒 因射刺吳起라가 幷中悼王하다
悼王旣葬 太子立하여 乃使으로 盡誅射吳起而幷中王尸者하니 坐射起而夷宗死者 七十餘家러라
太史公曰
世俗所稱師旅 皆道孫子十三篇하고 吳起兵法 世多有로되 故弗論하고 論其行事所施設者
語曰 能行之者 未必能言이요 能言之者 未必能行이라하니
吳起說武侯以形勢不如德이나 然行之於楚 以刻暴少恩으로 亡其軀하니 悲夫


오기吳起전기傳記
오기吳起나라 사람이니, 용병用兵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증자曾子에게 배우고 나라 군주를 섬겼는데, 나라 사람이 나라를 공격하자 나라에서는 오기吳起를 장수로 삼고자 하였으나 오기吳起나라 여자를 취하여 아내로 삼았으므로 나라에서는 이를 의심하였다.
오기吳起는 이에 자기 명예를 이루고자 해서 마침내 그 아내를 죽여 나라를 돕지 않을 것을 밝히니, 나라에서는 끝내 오기吳起를 장수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를 공격해서 크게 격파하였다.
나라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오기吳起를 미워하여 말하기를
오기吳起란 사람은 시기하고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가 젊었을 적에 그의 집은 천금千金이 있는 부잣집이었는데 돌아다니며 벼슬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여 마침내 그 가산을 탕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마을 사람들이 비웃으니, 오기吳起는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 30여 명을 죽이고 동쪽으로 나라 성문을 나갔습니다.
오기吳起는 자기 어머니와 결별하면서 팔뚝을 깨물어 맹세하기를 ‘내가 경상卿相이 되지 못하면 다시는 나라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하고, 마침내 증자曾子사사師事하였습니다.
얼마 있다가 그 어머니가 죽었으나 오기吳起가 끝내 돌아가지 않자, 증자曾子가 그를 나쁘게 여겨 오기吳起와 절교하였습니다.
오기吳起는 이에 나라에 와서 병법兵法을 배워 나라 군주를 섬겼는데, 나라 군주가 그를 의심하자 오기吳起는 자기 아내를 죽이고 장수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나라는 약소국인데 전쟁하여 승리했다는 소문이 있게 되면 제후諸侯들이 나라를 도모할 것입니다.
나라와 나라는 형제의 나라인데 군주께서 오기吳起를 등용하시면 이는 나라를 버리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나라 군주는 오기吳起를 의심하여 그를 사절하였다.
오기吳起는 이에 문후文侯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섬기고자 하였다.
문후文侯이극李克에게 묻기를
오기吳起는 어떠한 사람인가?”라고 하자, 이극李克이 대답하기를
오기吳起는 명예를 탐하고 여색을 좋아하나 용병술用兵術사마양저司馬穰苴라도 그보다 낫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문후文侯가 그를 장수로 삼아서 나라를 공격하여 다섯 개의 을 함락하였다.
오기吳起는 장수가 되었을 적에 사졸士卒 중에 가장 낮은 자와 의식衣食을 함께하며 누울 때에는 자리를 펴지 않고 다닐 때에는 말을 타거나 수레를 타지 않았으며, 직접 식량과 꾸러미를 싸서 사졸士卒들과 노고를 나누었다.
병졸 중에 등창을 앓는 자가 있자 오기吳起가 그를 위하여 종기를 빨아주었는데, 병졸의 어머니가 이 말을 듣고 곡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의 아들은 병졸인데 장군將軍이 직접 그 종기를 빨아주었으니, 무엇 때문에 곡을 한단 말이오?”하였다.
이에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해에 오공吳公이 그 아비의 종기를 빨아주어 그 아비가 싸움터에서 발걸음을 되돌리지 않고 싸우다가 마침내 에게 죽었는데, 오공吳公이 지금 또다시 그 자식의 종기를 빨아주었으니, 저는 그 자식이 죽을 곳을 알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곡을 하는 것입니다.”하였다.
문후文侯오기吳起용병用兵을 잘하고 청렴하고 공평해서 사졸士卒의 마음을 잘 얻는다 하여, 마침내 서하수西河守로 삼아 나라‧나라‧나라를 막게 하였다.
문후文侯가 죽자, 오기吳起가 그의 아들 무후武侯를 섬겼다.
무후武侯서하西河에 배를 띄워 내려갈 적에 중류中流에서 오기吳起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아름답다.
산하山河의 견고함이여!
이는 나라의 보배로다.”하자, 오기吳起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라를 지킴은 에 달려있고 산천山川의 험함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옛날 삼묘씨三苗氏가 살던 곳에는 왼쪽에 동정호洞庭湖가 있고 오른쪽에 팽려호彭蠡湖가 있었으나 를 닦지 않으므로 임금이 하였고, 나라 걸왕桀王이 살던 곳은 왼쪽에 황하黃河제수濟水가 있고 오른쪽에 태산泰山화산華山이 있으며 이궐伊闕이 그 남쪽에 있고 양장羊腸이 그 북쪽에 있었으나 정사를 닦음에 하지 못하므로 임금이 추방하였고, 나라 주왕紂王의 나라는 왼쪽에 맹문孟門이 있고 오른쪽에 태행산太行山이 있으며 상산常山이 그 북쪽에 있고 대하大河(黃河)가 그 남쪽을 경유하였으나 정사를 닦음에 이 없으므로 무왕武王이 죽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관찰하건대 나라를 지킴은 에 달려있고 산천山川의 험함에 달려있지 않으니, 만약 군주께서 을 닦지 않으시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적국敵國이 될 것입니다.”
이에 무후武侯가 말하기를
“좋은 말이다.”라고 동의하였다.
무후武侯가 즉시 오기吳起를 봉하여 서하수西河守로 삼아 매우 명성이 있었다.
나라에서 정승을 둘 적에 전문田文을 정승으로 삼자, 오기吳起가 기뻐하지 아니하여 전문田文에게 말하기를
“그대와 함께 을 논하기를 청하여도 되겠는가?”라고 하니, 전문田文이 대답하기를
“좋다.”하였다.
오기吳起가 말하기를
삼군三軍을 거느려서 사졸士卒들로 하여금 결사적으로 싸우는 것을 좋아하게 하여 적국敵國이 감히 도모하지 못함은 그대가 나만 한가?”라고 물으니, 전문田文이 대답하기를
“그대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오기吳起가 말하기를
백관百官을 다스리고 만민萬民을 친애하고 부고府庫를 충실히 함은 그대가 나만 한가?”라고 물으니, 전문田文이 대답하기를
“그대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오기吳起가 말하기를
서하西河를 지켜 나라 군대가 감히 동쪽을 향해 오지 못하게 하고 나라와 나라가 손님처럼 따름은 그대가 나만 한가?”라고 물으니, 전문田文이 대답하기를
“그대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오기吳起가 말하기를
“이 세 가지는 그대가 모두 나의 밑에 있는데 지위가 내 위에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물으니, 전문田文이 대답하기를
“군주가 어리고 나라가 의심스러운데 대신大臣이 따르지 않고 백성百姓들이 믿지 않으니, 이러한 때에 국정을 그대에게 맡기겠는가?
나에게 맡기겠는가?”하였다.
오기吳起가 묵묵히 한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그대에게 맡기겠다.”라고 하였다.
전문田文이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내가 그대의 위에 있게 된 이유이다.”라고 하니, 오기吳起가 마침내 전문田文만 못함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전문田文이 죽자 공숙公叔이 정승이 되어서 나라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어 오기吳起를 해치려 하였다.
공숙公叔의 마부가 말하기를
오기吳起는 제거하기가 쉽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숙公叔이 말하기를
“어째서인가?”라고 물으니, 그 마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오기吳起는 인품이 절제하고 청렴하고 스스로 명예를 좋아합니다.
(公叔)께서는 먼저 무후武侯와 말씀하기를 ‘오기吳起는 현명한 사람인데 임금님의 나라가 작고 또 강한 나라 영토와 경계가 되었으니, 오기吳起가 이 나라에 오래 머물 마음이 없을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무후武侯가 ‘어째서인가?’라고 물을 것이니, 그러면 께서는 무후武侯에게 말씀드리기를 ‘공주를 끌어들여 시험하십시오.
오기吳起가 머물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공주를 받을 것이요 머물 마음이 없으면 반드시 사양할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점치십시오.’ 하고, 께서는 오기吳起를 불러 함께 집으로 돌아와서 즉시 공주公主로 하여금 성내어 을 무시하게 하십시오.
오기吳起는 공주가 을 천대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공주公主를 사양할 것입니다.”
이에 오기吳起공주公主나라 정승을 천대하는 것을 보고 과연 무후武侯에게 공주를 사양하니, 무후武侯오기吳起를 의심하고서 믿지 않았다.
오기吳起는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떠나서 즉시 나라로 갔다.
도왕悼王은 평소 오기吳起의 어짊을 들었는데, 오기吳起가 오자 나라에 정승을 시키니, 오기吳起을 밝히고 명령을 살피며 급하지 않은 관원을 제거하고 공족公族에 소원한 자들을 폐기廢棄하여 전투하는 군사를 어루만지고 기르게 하니, 요점은 군대를 강하게 함에 있었다.
그리하여 유세하며 종횡縱橫을 말하는 자들을 축출하였다.
이에 나라는 남쪽으로 백월百越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나라와 나라를 겸병하고 삼진三晉을 물리치고 서쪽으로 나라를 정벌하였다.
제후諸侯들은 나라의 강성함을 염려하였으나 나라의 귀척貴戚들은 모두 오기吳起를 살해하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도왕悼王이 죽자, 종실宗室대신大臣들이 을 일으켜 오기吳起를 공격하니, 오기吳起는 왕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엎드려 있었다.
오기吳起를 공격하는 무리들이 오기吳起를 활로 쏘고 창으로 찌르다가 함께 도왕悼王의 시신까지 맞혔다.
도왕悼王을 장례한 다음 태자太子가 즉위하여 마침내 영윤令尹으로 하여금 오기吳起를 쏘다가 함께 왕의 시신을 맞힌 자를 모두 죽이게 하니, 오기吳起를 쏘다가 죄에 걸려 종족宗族이 망하여 죽은 자가 70여 집안이었다.
태사공太史公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세속에서 말하는 사려師旅(군대의 운용)는 모두 《손자孫子》 13편을 말하고 오기吳起병법兵法도 세상에 많이 있으나 짐짓 논하지 않고 그 행한 일과 시행한 것만을 논한다.
속담에 이르기를 ‘행하기를 잘하는 자가 반드시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고 말을 잘하는 자가 반드시 행하기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니,
손자孫子방연龐涓을 계책함이 현명하였으나 형벌을 당하기 전에 일찍 환란을 구원하지 못하였고,
오기吳起무후武侯에게 형세形勢(지형)가 만 못함을 가지고 설득하였으나 나라에서 정사를 행할 적에 각박하고 포악하여 은혜가 적어 그 몸을 망쳤으니, 슬프다.”


역주
역주1 魯衛兄弟之國 : 魯나라의 시조인 周公 旦과 衛나라의 시조인 康叔 封은 文王의 아들로 兄弟間이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역주2 魏文侯 : 전국시대 魏나라 임금으로 이름이 斯인데, 韓氏‧趙氏와 함께 晉나라의 卿으로 있다가 B.C. 403년 趙籍‧韓虔과 함께 諸侯가 되니, 세상에서는 이들의 나라인 韓‧魏‧趙를 三晉이라 칭하였다.
역주3 司馬穰苴 : 본래의 성은 田氏인데, 춘추시대 齊 景公의 장수로 大司馬가 되었기 때문에 司馬穰苴라 부른다. 그는 用兵術이 뛰어난 명장으로, 저서로 兵法書인 《司馬法(司馬兵法)》이 있다. 《史記 권64 司馬穰苴列傳》
역주4 : 려
역주5 從橫 : 合從과 連衡으로 諸侯들끼리 연합함을 이르는데, 후에 楚‧燕‧齊‧韓‧魏가 연합하여 강성한 秦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合從, 六國이 秦나라를 섬기는 것을 連衡이라 하였다. 合從과 連衡은 合縱과 連橫으로도 표기한다.
역주6 三晉 : 晉나라를 나누어 가진 韓‧魏‧趙 세 나라를 가리킨다.
역주7 令尹 : 春秋時代부터 戰國時代 초기에 걸쳐 楚나라에 있었던 執政大臣의 官名이다.
역주8 孫子籌策龐涓……不能蚤救患於被刑 : 孫子는 孫臏으로 春秋時代의 兵法家인 孫武의 후손인데, 龐涓과 함께 鬼谷子에게 兵法을 배웠다. 龐涓은 魏나라의 장수가 되자, 孫臏의 재능을 시기하여 불러다가 모함하고 죄를 加하여 발을 자르니, 이 때문에 이름을 臏이라 하였다. 孫臏은 齊나라로 도망하여 軍師가 되었으며, 龐涓과 馬陵에서 싸우면서 매복을 설치하여 魏軍을 大破하고 龐涓을 자살하게 하였다.

오자직해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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