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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法直解

사마법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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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칠서총평武經七書總評 무경칠서武經七書에 대한 총평總評
○愚按 하고 하니 一以奮武威하고 一以昭文德이니 雖聖人이나 亦不免於不用也
내가 살펴보건대, 황제黃帝치우蚩尤의 난을 평정할 적에 처음으로 군법軍法을 만들고 정전井田을 따라 대오(군대)의 수를 정하였으니, 한편으로는 무위武威를 떨치고 한편으로는 문덕文德을 밝힌 것으로,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군대를 사용함을 면치 못한 것이다.
是以 하고 하고 하고 하고 하고 費之擧하시니 由是言之하면 兵其可廢乎
이 때문에 나라는 삼묘三苗를 정벌한 군대가 있었고 나라는 감호甘扈의 정벌이 있었으며, 탕왕湯王명조鳴條의 정벌이 있었고 무왕武王목야牧野의 전투가 있었으며, 주공周公동산東山전역戰役이 있었고 공자孔子내이萊夷를 물리치고 비읍費邑의 성곽을 허문 조처가 있었던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말하면 군대를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
成周之世 其法盡美
성주成周의 세대에는 그 법이 극진히 아름다웠다.
有事則選將於卿하고 徵兵於農이라가 事平則將歸于朝하고 兵散于野
전쟁할 일이 있으면 장수를 가운데에서 선발하고 군대를 농군에서 소집하였다가, 일이 평정되면 장수는 조정으로 돌아가고 병사들은 들로 해산하였다.
在廷 無跋扈之臣하고 在郊 無暴橫之卒하니 是何也 由能合文武兵農而一者也
그러므로 조정에는 발호하는 신하가 없고 교외에는 횡포하는 병사가 없었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능히 , 병사와 농군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春秋之時 尙能敎民以義하고 齊民以禮하고 撫民以信而後 用之러니
춘추春秋 때에는, 환공桓公 문공文公 같은 군주와 이오夷吾자범子犯 같은 신하들도 오히려 백성들을 로 가르치고 백성들을 로 가지런히 하고 백성들을 으로 어루만진 뒤에야 백성들을 전쟁에 동원하였다.
下迨戰國하여는 하고 任用之徒하여 日尋干戈以相征伐하여 毒生民하고 麋爛萬姓이라
그런데 아래로 전국戰國시대에 이르러는, 나라는 무졸武卒을 두고 나라는 기격技擊을 두고 나라는 예사銳士(정예병)를 두었으며, 백기白起왕전王翦, 염파廉頗이목李牧의 무리를 임용하여 날마다 창과 방패를 찾아 서로 공격해서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치고 많은 백성들을 죽게 하였다.
爭地以戰者 則殺人盈野하고 爭城以戰者 則殺人盈城하니 於是乎文自文, 武自武하고 兵自兵, 農自農이라
땅을 다투어 싸우는 자는 사람을 죽인 것이 들에 가득하고, 을 다투어 싸우는 자는 사람을 죽인 것이 에 가득하니, 이에 〈가 분리되어〉 이고 가 되었으며, 병사는 병사이고 농군은 농군이 되었다.
漢置하여之術 粗備
나라는 남군南軍북군北軍 두 군대를 두어 중요한 곳(중앙)에서 가벼운 곳(지방)을 제어하는 방법이 대강 갖추어졌었다.
7이 반란을 일으켰을 적에 주아부周亞夫에게 명하여 36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병 속의 물을 지붕 위에서 쏟아내듯 일사천리로 아래로 내려가서 3개월이 못 되어 평정하였으니, 진실로 〈훌륭한 군제軍制가 있는〉 이유에서였다.
하니 初焉甚善이러니 其後 하여 兵壞於內하고 藩鎭盛於外하니 終唐之世하여 以迄하여 其弊 不可救止
이씨李氏나라는 서위西魏후주後周의 옛 제도를 인습하여 부병제府兵制를 세우니, 처음에는 매우 좋았는데, 그 뒤에 장열張說이 이것을 파괴하고 이임보李林甫가 또다시 파괴하여 군대는 안에서 파괴되고 번진藩鎭은 밖에서 강성하니, 나라가 끝나 오대五代에 이르도록 그 폐해를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監前之失하여等兵權하고 而用하여 爲將하여 하여 小其名而崇其勢하고 略其細而求其大하고 久其官而責其成하여 隆之以恩하고 厚之以誠하고 富之以財
조씨趙氏나라는 예전의 잘못을 거울삼아 석수신石守信 등의 병권兵權을 거두고 곽진郭進이한초李漢超 등을 장수로 등용하여 서산西山을 통제하고 관남關南진수鎭守해서 그 명칭을 작게 하고 권세를 높이며 세세한 것을 생략하고 큰 것을 찾으며 관직을 오래 맡기고 성공을 책임지워 은혜를 높게 하고 정성을 후하게 하고 재물을 풍부히 주었다.
養士少而蓄力多하고 操術簡而收功博하니 可謂得任將之術, 治兵之道矣
그러므로 병력을 조금 기르고도 힘을 쌓은 것이 많고, 방법을 잡은 것이 간략하면서도 공을 거둔 것이 많았으니, 장수를 임명하는 방법과 군대를 다스리는 방도를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
이나 止可以戒殘唐五代之覆車 而烏可比隆之盛哉
그러나 이것은 다만 쇠망한 나라와 오대五代시대의 전복된 수레를 경계 삼았을 뿐이니, 어찌 성주成周의 훌륭함에 높음을 견줄 수 있겠는가.
전연澶淵의 맹약에 한 명의 방숙方叔에게 명하고 한 명의 위청衛靑을 선임하고 한 명의 이정李靖에게 맡겨서 정예병을 통솔하여 거란契丹의 군대를 격파하지 못하고, 수고롭게도 취화翠華가 멀리 행차하였다.
其後承平日久 專事因循하여 하고 北不能禦女眞之强暴
그 뒤에 태평성대가 오래 계속되자 오직 인순因循(姑息)을 일삼아서 서쪽으로는 이계천李繼遷의 침략과 모멸을 제거하지 못하고, 북쪽으로는 여진女眞의 강포함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雖曰設武擧 而不知所擧者何人이며 雖曰修武備 而不知所備者何事
비록 무거武擧(武科)를 설치했다 하나 무거武擧에서 선발한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비록 무비武備를 닦았다 하나 닦은 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馴致至於하여 狂胡憑陵於郡縣하고 戍馬馳騖於郊畿
점점 쇠약해져서 정강靖康 연간에 이르러는 미친 오랑캐가 군현郡縣에서 능멸하고 변방을 지키는 군마軍馬교외郊外경기京畿에서 치달렸다.
之謨謀하고之妖術하여 欲用六甲法, 하여 生擒이러니 旣而作法無效하여 欺衆下城南走
이강李綱충사도种師道의 훌륭한 계책을 물리치고 곽경郭京유효갈劉孝竭의 요망한 방법을 믿어서, 육갑법六甲法육정역사六丁力士북두신병北斗神兵천관대장天關大將을 사용하여 알리불斡离不나라의 장군을 생포하려 하였는데, 이윽고 술법을 시행하였으나 효험이 없어 사람들을 속이고 에서 내려와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金虜四登城 守兵披靡而散하니 嗚呼痛哉
이에 나라의 오랑캐가 사방으로 들어와 에 오르자, 수비하는 군대가 이리저리 흩어졌으니, 아! 애통하다.
南渡之初 志在恢復이러니 及李綱竄而하고 하여 復仇討賊之計 不聞하고 割地講和之 蠭起
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한 초기에는 강토를 수복收復할 마음이 있었는데, 이강李綱이 귀양 가자 종택宗澤이 죽고 진회秦檜가 정승이 되자 악비岳飛가 죽어서, 원수를 보복하고 역적을 토벌하는 계책을 듣지 못하고, 땅을 떼어 강화講和하자는 의논이 일어났다.
典樞機者 醉生而夢死하고 執兵柄者 鳥竄而鼠伏하여
추기樞機(국가의 기무)를 맡은 자가 흐리멍덩한 채 세월을 보내며 병권을 잡은 자가 새처럼 도망하고 쥐처럼 숨었다.
坐使氈裘腥羶之氣 充滿關河淮濟之間이라
그리하여 마침내 털방석과 갖옷의 비린내 나는 오랑캐의 기운이 관하關河회수淮水제수濟水의 사이에 충만하게 되었다.
孝宗淳熙二年 試進士擧할새 蜀人楊甲 對言호되 恢復之志不堅者二 其一 策士之始 及於兵者 不過一言이라
효종孝宗 순희淳熙 2년에 진사進士를 뽑을 적에 땅 사람 양갑楊甲대책對策하면서 말하기를 “회복恢復하는 뜻이 견고하지 못한 이유가 두 가지이니, 하나는 선비들을 뽑을 초기에 병사兵事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한마디에 지나지 않습니다.
是以 談兵革爲諱하고 論兵革爲迂也라하니라
이 때문에 병혁兵革(전쟁)을 말하는 것을 기휘忌諱하고 병혁兵革을 논하는 것을 우활迂闊하다 합니다.”라고 하였다.
夫旣以兵革爲迂而諱之하니 宜乎終宋之世而不振焉이라
이미 병혁兵革을 우활하다 하여 기휘忌諱하였으니, 나라가 망할 때까지 떨치지 못한 것이 당연한 것이다.
元氏乃爲失計하여 名城而不守하고 棄武備而不修하며 禁漢人南人하여 不得執弓矢, 操刀兵하니 而所謂七書者 又孰得而聞之리오
나라는 마침내 실책을 하여 유명한 을 허물어 지키지 않고 무비武備를 버려 닦지 않았으며, 한인漢人(漢族)과 남쪽 지방 사람들은 활과 병기를 잡지 못하게 금하였으니, 이른바 ‘무경칠서武經七書’라는 것을 또 누가 얻어서 들을 수 있었겠는가.
抑不審天生 民竝用之하니 誰能去兵이리오
그러나 하늘이 오재五材를 냄에 사람들이 함께 쓰는 것을 살피지 못하였으니, 누가 을 버릴 수 있겠는가.
경신년庚申年 말엽에 노예가 한번 고함치자 중원中原이 따라 흙처럼 무너지고 와해되었다.
我朝混一海宇 內立五府하여 以統十二都司하고 十二都司控制管軍衛所하여 無事則屯田積穀하여 完城固守하고 有事則選將練兵하여 禦敵制勝하니 此卽寓兵於農之法이라
우리 조정(明나라)이 해내海內를 통일하자, 안으로 5를 세워서 12도사都司를 통솔하고 12도사都司관군위소管軍衛所를 통제하여, 일이 없으면 둔전屯田하여 군량을 비축하고 을 완전히 보수하여 굳게 수비하며, 일이 있으면 장수를 선발하고 병사를 훈련시켜 적을 막고 승리하게 하였으니, 이는 군대를 에 붙여둔 이다.
洪武丁丑歲 太祖高皇帝 俾軍官子孫으로 演習弓馬하고 講讀武書하여 慣熟通曉者 臨期試用하니 誠持盈守成之首務 安不忘戰之要道也
홍무洪武 정축년丁丑年(1397)에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군관軍官의 자손들로 하여금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고 무서武書(兵書)를 강독하게 하여, 병서兵書에 깊이 통달한 자들을 시기에 맞추어 시험해서 등용하니, 진실로 가득함을 유지하고 성공을 지키는 첫 번째 일이요, 국가가 편안하여도 전쟁을 잊지 않는 중요한 방도이다.
學者其可不體之而盡其心乎
배우는 자가 어찌 체득하여 그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欲盡心而爲學인댄 當以仁義忠恕爲本이요於詐謀詭計하여 以力相尙이니 曷不觀夫
마음을 다하여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인의仁義충서忠恕를 근본으로 삼을 것이요, 권모술수의 속임수에 익숙하여 서로 힘을 숭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어찌 두우杜郵백기白起음릉陰陵항적項籍, 두 대에 걸쳐 장수가 된 조괄趙括과 3대에 걸쳐 장수가 된 왕리王離를 보지 않았는가.
以仁義忠恕爲本하여 必若而後 吁盛矣
인의仁義충서忠恕를 근본으로 삼아서 반드시 등우鄧禹조빈曹彬과 같이 한 뒤에야 옳을 것이니, 아! 거룩하다.
역주
역주1 武經七書總評 : 明나라 本 武經七書直解에는 《孫子》, 《吳子》, 《司馬法》, 《尉繚子》, 《李衛公問對》, 《三略》, 《六韜》의 순서로 엮어져 있는데, 《六韜》의 맨 끝부분에 이 總評이 붙어 있다. 따로 제목이 없어 ‘武經七書總評’이라 假題하였다.
역주2 黃帝平蚩尤之亂 始制軍法 : 黃帝는 黃帝 軒轅氏로 伏羲‧神農과 함께 三皇으로 일컬어지는 신화적 인물이다. 처음으로 방패와 창을 만들었으며 指南車라는 수레를 만들어 蚩尤와 阪泉에서 싸워 승리하고 蚩尤를 죽였다 한다. 蚩尤는 고대 九黎族의 우두머리라 한다.
역주3 因井田而定卒伍之數 : 井田은 옛날 농지를 井자 모양으로 구획한 것이다. 周나라는 900畝의 농지를 井자 모양으로 구획하여 각각 100묘가 되게 하고, 한가운데에 있는 것을 公田이라 하고 나머지 여덟 구역을 私田이라 하여 여덟 농가에 나누어주었다. 여덟 농가에서 公田을 함께 경작해서 그 수입을 나라에 바치게 하였는데, 이에 따라 병사를 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4 虞有三苗之師 : 虞나라는 舜임금의 나라 이름이며, 三苗는 苗族으로 舜임금 당시 자주 배반하여 《書經》 〈虞書 舜典〉에 “三苗의 군주를 三危로 멀리 귀양보냈다.[竄三苗于三危]”라고 보이며, 그 후 禹王에게 명하여 토벌한 일이 〈虞書 大禹謨〉에 보인다.
역주5 夏有甘扈之征 : 甘扈는 有扈氏의 남쪽 교외인 甘 땅을 이른다. 《書經》 〈夏書 甘誓〉에 “甘 땅에서 크게 싸울 적에 마침내 六卿을 불렀다.[大戰于甘 乃召六卿]”라고 보이는데, 이는 夏王 啓가 복종하지 않는 有扈氏를 토벌한 것이라 한다. 啓는 禹王의 아들이다.
역주6 湯有鳴條之伐 : 湯王은 夏나라의 폭군인 桀王을 추방하고 商나라를 일으킨 군주로 성은 子이고 이름은 履이며 天乙이라고도 칭한다. 명재상인 伊尹을 얻어 商王朝를 세우고 夏의 禹王, 周의 文王‧武王과 함께 三王으로 알려져 있다. 鳴條는 桀王과 결전한 지명으로, 河南省 安邑의 서쪽에 있었다.
역주7 武有牧野之戰 : 武는 周나라 왕조를 일으킨 武王으로 성은 姬이고 이름은 發이며 文王의 아들이다. 文王의 뒤를 이어 즉위하고 殷나라의 폭군인 紂王과 牧野에서 싸워 승리하니, 紂王은 스스로 불타 죽었다. 牧野는 지금의 河南省 淇縣 남쪽에 있었다.
역주8 周公有東山之役 : 周公은 이름이 旦으로 文王의 아들이고 武王의 아우인데, 武王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善政을 베풀었다. 武王은 殷나라를 멸망하고 紂王의 아들 武庚을 殷나라의 古都에 봉한 다음, 아우인 管叔‧蔡叔‧霍叔으로 하여금 武庚을 감시하게 하였다. 武王이 죽고 어린 成王이 즉위하여 周公이 섭정하자, 管叔과 蔡叔 등은 ‘周公이 어린 成王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武庚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니, 周公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정벌하였다. 東山은 동쪽으로 정벌하던 산으로 《詩經》 〈豳風 東山〉은 바로 周公이 東征하고 돌아오면서 군사들의 노고를 읊은 내용이다.
역주9 孔子有却萊墮(휴)費之擧 : 萊는 萊夷로, 殷‧周時代 지금의 山東반도 동북쪽에 있던 오랑캐 이름이며, 費는 春秋時代 魯나라에 있었던 땅으로 季孫氏의 食邑이었다. 孔子는 B.C. 500년 魯 定公을 모시고 齊 景公과 함께 夾谷에서 회맹하였는데, 유사시에 대비하여 옷 속에 무장을 하고 무사들을 대동하였다. 齊나라에서는 孔子는 禮는 잘 알지만 軍事에는 白面書生이라 하여, 포로로 잡은 萊夷들을 동원해서 魯나라의 군주와 신하를 협박하고 땅을 할양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孔子는 이러한 기미를 알고 대동한 武士들을 동원하여 萊夷를 물리치고 완강히 저항하니, 齊 景公은 잘못을 사과하고 그동안 魯나라에서 빼앗아간 땅을 되돌려주었다.
당시 魯나라에는 孟孫氏‧仲孫氏‧叔孫氏의 세 집안이 권력을 독단하고 魯나라를 차지하여 魯나라 군주는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孔子는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제자인 仲由를 季孫氏의 家臣으로 삼아 季孫氏의 食邑인 費의 城을 허물고 여기에 보관되어 있던 병기와 갑옷을 환수하였다.
역주10 : 휴
역주11 齊桓晉文之爲君 夷吾子犯之爲臣 : 齊桓과 晉文은 齊 桓公과 晉 文公으로 모두 春秋時代 霸者들이다. 桓公은 이름이 小白으로 명재상인 管仲을 등용,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패자가 되었는바, 孔子는 《論語》 〈憲問〉에서 “管仲이 桓公을 도와 諸侯의 霸者가 되게 하여 한 번 천하를 바로잡았다.[管仲相桓公 霸諸侯 一匡天下]”라고 칭찬하였다. 文公은 이름이 重耳로 19년의 망명생활 끝에 狐偃과 趙衰 등의 賢臣을 등용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듦으로써 齊 桓公의 뒤를 이어 패자가 되었다. 여기에 宋 襄公과 秦 穆公, 楚 莊王을 합하여 五霸라 칭하였다.
夷吾는 管仲의 이름인데 字로 행세하였다. 管仲은 정치와 경제, 군제에도 밝아 그의 저서인 《管子》에 이러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子犯은 狐偃의 字인데, 文公의 외숙으로 晉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역주12 魏置武卒……秦置銳士 : 武卒은 武勇이 있는 병사이고 技擊은 용맹과 힘으로 적을 공격함을 이른다. 《荀子》 〈議兵〉에 “齊나라의 技擊은 魏나라의 武卒을 당해내지 못하고, 魏나라의 武卒은 秦나라의 精銳兵을 당해내지 못하고, 秦나라의 정예병은 齊 桓公과 晉 文公의 節制 있는 군대를 당해내지 못하고, 齊 桓公과 晉 文公의 절제 있는 군대는 湯王과 武王의 仁義를 행하는 군대를 대적하지 못한다.[齊之技擊 不可以遇魏之武卒 魏之武卒 不可以直秦之銳士 秦之銳士 不可以當桓文之節制 桓文之節制 不可以敵湯武之仁義]”라고 보인다.
역주13 起翦頗牧 : 白起와 王翦, 廉頗와 李牧으로, 모두 戰國時代 말기의 명장들이다. 白起는 秦나라의 장수로 많은 戰功을 세우고 武安君에 봉해졌으며, 王翦은 始皇帝의 장수로 趙와 楚를 차례로 멸망시켜 秦나라의 천하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廉頗와 李牧은 趙나라의 장수로, 廉頗는 여러 차례 戰功을 세우고 강한 秦軍을 맞아 잘 싸웠으며, 李牧은 북쪽 변경을 수비하면서 匈奴와 東胡를 대파하였다.
역주14 : 도
역주15 南北二軍 : 南軍과 北軍의 두 군대로 모두 前漢時代 禁衛軍이다. 南軍은 長安의 未央宮을 수위하였는데, 未央宮이 남쪽에 있었으므로 南軍이라 칭하였으며, 北軍 역시 宮門 안을 宿衛하였다. 《舊唐書》 〈職官志 3〉에 “漢나라는 南軍과 北軍을 두어 京師(長安)를 수위하게 하니, 南軍은 지금의 여러 衛와 같고 北軍은 지금의 羽林軍과 같다.” 하였다.
역주16 居重馭輕 : 重은 도성을, 輕은 지방을 가리킨 것으로, 중앙에 병력을 집중하여 지방이나 변경을 쉽게 통제함을 이른다.
역주17 七國之叛……不三月而平之 : 周亞夫는 漢나라의 개국공신인 周勃의 아들로 文帝‧景帝 때의 명장이다. 高祖 劉邦은 漢나라 왕조를 세운 다음 皇室을 견고히 하기 위하여 친족들을 크게 봉하였는데, 景帝 때에 이르러 제후들을 통제하기 어렵게 되자, 晁錯의 건의로 이들의 영지를 차츰 축소하니, 吳王 濞, 楚王 戊 등이 趙‧齊‧膠西‧膠東‧濟南 등과 연합하여 7개국이 반란을 일으켰다. 周亞夫는 景帝의 명에 따라 36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이들을 토벌하여 모두 평정하였다.
역주18 李唐……而立府兵 : 李唐은 李氏 唐나라란 뜻으로 隋나라 말기 李淵이 일으킨 唐나라를 가리키며, 西魏는 원래 北朝의 魏(北魏)로, 姓이 拓跋氏였는데 뒤에 元氏로 고쳤다. 拓跋氏는 鮮卑族의 일파로 대대로 북쪽 지역에 거주하였는데 孝文帝(拓跋宏)가 洛陽으로 遷都하였다. 그 후 孝武帝(拓跋恪)가 즉위하였는데, 高歡이 권력을 독단하자 서쪽으로 달아나 宇文泰에게 의지하고 長安에 도읍하니 이것을 西魏라 하고, 高歡이 세운 孝靜帝(拓跋見善)는 鄴으로 천도하니 이것을 東魏라 하였다. 그 후 宇文泰의 아들 宇文覺이 西魏를 찬탈하고 國號를 北周라 하니 이것을 또 後周라 칭하였으며, 高歡의 아들 高洋이 西魏를 찬탈하고 國號를 北齊라 칭하였다.
역주19 張說壞之 李林甫又壞之 : 《新唐書》 권50 〈兵志〉에 “府兵制가 처음 파괴된 것은 張說이 군대를 모집하여 보충하고 彍騎라 이름함에 연유하였으며, 또다시 파괴된 것은 折衝의 여러 府에 교대할 병사가 없으므로 李林甫가 마침내 魚書(임명장)를 내려주고 지방에서 도성으로 올려 보내는 것을 정지시켜 다만 병사의 숫자만 남아 있을 뿐, 六軍의 宿衛兵이 모두 시장의 장사꾼이어서 다시는 갑옷을 입지 않았으니, 이 두 차례의 파괴를 거쳐 府兵制가 땅을 쓴 듯이 사라지게 되었다.”라고 보인다.
역주20 五代 : 唐나라 말기 계속된 혼란 속에 있었던 다섯 왕조로 後梁의 朱全忠, 後唐의 李存勖, 後晉의 石敬瑭, 後漢의 劉知遠, 後周의 郭威이다. 北宋의 太祖 趙匡胤은 後周의 대장군으로 있다가 혁명을 일으켜 宋나라를 개국하였다.
역주21 趙宋 : 趙匡胤의 北宋을 가리킨다. 南朝의 宋나라와 구분하기 위하여 앞에 성씨를 붙여 구별한 것으로, 李淵의 唐나라를 李唐이라 칭하는 경우와 같다.
역주22 石守信 : 浚儀 사람으로 後周에서 벼슬하여 洪州防禦使로 있었는데, 宋 太祖가 즉위하자 歸德軍節度使가 되어 李筠을 토벌, 평정하였다. 뒤에 兵權을 내놓고 여러 번 中書令이 되었으며, 檢校太師로 魏國公에 봉해졌는바, 시호는 武烈이다. 《宋史 권250 石守信列傳》
역주23 郭進李漢超 : 郭進은 博野 사람으로 後周에서 潞州團練使를 지냈으며, 宋 太祖가 澤潞 지역을 토벌할 적에 澤潞防禦使로 山西巡檢이 되어 曹彬 등과 함께 太原에 들어가 큰 功을 세우고 石嶺關에서 契丹軍을 대파하였다.
李漢超는 雲中 사람으로 北宋 초기 關南兵馬都監이 되고 太宗 때에 應州觀察使가 되었는데 정치를 잘하여 칭송이 높았다.
역주24 控扼西山 鎭守關南 : 控扼은 控制와 같으며, 西山은 北京市 서쪽에 있는 여러 산의 총칭이다. 關南은 北宋 때에 瓦橋‧益津‧淤口 세 관문 이남 지역을 지칭하였는데, 대략 지금의 河北省 白洋淀 이동의 大淸河 유역 이남에서 河間縣 일대에 해당된다.
역주25 成周 : 周公이 成王을 보필하여 周나라가 가장 흥왕했을 때를 이른다.
역주26 澶淵之盟……總銳師以破契丹(거란)之衆 : 澶淵은 湖澤의 이름으로 河北省 濮陽縣 서남쪽에 있다. 北宋 眞宗 때에 契丹이 대거 침입하자, 재상인 寇準은 眞宗을 모시고 출정하여 승리하였으나 전쟁을 싫어하는 眞宗과 신하들의 건의로 契丹과 澶淵에서 맹약을 하였는데, 契丹軍의 퇴각만을 고대하여 수많은 歲幣를 契丹에 주는 조건으로 맹약하였다. 이 때문에 北宋은 많은 歲幣로 국력이 크게 쇠진하였다.
方叔은 周 宣王 때의 명장으로 흉노족인 玁狁을 정벌하였고, 衛靑은 漢 武帝 때의 명장으로 흉노족 정벌에 큰 공을 세웠으며, 李靖은 唐 太宗 때의 명장으로 많은 戰功을 세우고 突厥族을 토벌하였는데, 당시 北宋에는 이러한 명장들을 등용하여 契丹을 토벌하지 못했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27 總銳師以破契丹 : 거란
역주28 翠華 : 푸른 일산으로 帝王의 儀仗이기 때문에 帝王의 수레를 가리킨다.
역주29 西不能滅繼遷之侵侮 : 繼遷은 李繼遷으로 西夏 사람인데 李繼捧의 族弟이다. 李繼捧이 北宋에 귀순하였으나 李繼遷은 西夏로 도망하여 군대를 일으키니, 서부 지역 사람들이 많이 귀부하여 점점 강대해졌다. 太宗‧眞宗 때에 관작을 하사하여 회유하였으나 자주 배반하고 宋나라 지역을 침공하였으며 스스로 왕을 칭하였는데, 아들 德明이 즉위하여 황제로 추존되었다.
역주30 靖康 : 北宋 欽宗의 연호이다. 이때 女眞族인 金나라의 공격을 받고 수도 開封(汴京)이 함락되었으며, 徽宗과 欽宗이 차례로 잡혀가고 高宗이 즉위하여 臨安으로 천도함으로써 南宋이 되었는데, 이를 ‘靖康의 변’이라 한다.
역주31 李綱种師道 : 李綱과 种師道는 南宋 高宗 때의 名臣으로, 金나라가 침입하였을 때 대항해 싸울 것을 주장한 사람들이다. 《宋史 권335 种師道列傳》, 《宋史 권358 李綱列傳》
역주32 郭京劉孝竭 : 郭京은 北宋 때 易數를 통달했다고 스스로 말하던 요망한 사람이다. 靖康 연간에 龍衛의 병사였는데, 어떤 好事者가 “그가 六甲法을 잘 시행하니, 金나라 군대를 막게 하면 金나라의 粘罕과 斡离不 두 장수를 사로잡고 金軍을 소탕할 수 있다.”고 하였는바, 六甲法은 병사 7,777명을 사용하는 방술이었다. 朝廷에서는 그의 말을 믿어 郭京을 成忠郞으로 임명하고 黃金과 비단을 주어 군대를 모집하게 하였는데, 다만 태어난 햇수(干支)가 六甲法에 맞는 자를 모집하여 10일 만에 숫자를 다 채웠으나 얻은 자가 모두 市井의 잡배들이었다. 郭京은 즉시 이들을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金나라 군대가 함성을 지르며 뛰쳐나오자 병사들이 대부분 패하여 죽으니, 郭京은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劉孝竭 역시 郭京과 함께 술수를 부린 사람으로 보인다. 《宋史 권353 列傳》, 《宋史紀事本末 권13 金人南侵》
역주33 六丁力士……天關大將 : 六丁은 六十甲子 가운데 丁卯‧丁丑‧丁亥‧丁酉‧丁未‧丁巳로, 術書에 이 여섯 종류의 力士(神將)가 있다 하며, 北斗神兵과 天關大將도 모두 당시 郭京 등이 명칭을 붙인 병사와 장군들의 칭호이다.
역주34 斡离不 : 金 太宗의 아들로 斡魯補라고도 칭하며 또 다른 이름은 宗望이라고도 하였는데, 江南 지방에서는 二太子로 불리었다. 北宋을 침략하는 계책을 세워 粘罕과 함께 北宋의 도성인 汴京을 함락하고 徽宗과 欽宗을 차례로 사로잡아 북쪽으로 가서 五國城에 유치하니, 五國城은 바로 우리나라의 會寧이다.
역주35 (人)[入] : 저본에는 ‘人’으로 되어 있으나, 文理에 맞게 ‘入’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6 宗澤 : 北宋의 義烏 사람으로 字는 汝霖이다. 元祐 연간에 進士에 及第하였는데 文武兼全한 재주가 있어 부임하는 州郡마다 명성이 있었다. 金나라의 침공으로 徽宗과 欽宗이 북쪽으로 잡혀가자 副元帥로서 潞州에 있다가 들어와 구원하여 여러 번 戰功을 세웠다. 뒤에 知開封府事와 東京留守가 되었는데, 북쪽 오랑캐들이 宗爺爺라고 칭호하면서 감히 다시는 東京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20여 차례 上疏하여 잡혀간 두 皇帝를 되돌아오게 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번번이 저지당하자, 울분으로 병을 이루어 “黃河를 건너가야 한다.[過河]”라고 세 번 외치고는 죽었다. 시호는 忠簡이고 저서로는 《宗忠簡集》이 있으며, 《宋名臣錄》에 기록되어 있다.
역주37 秦檜相而岳飛亡 : 秦檜는 南宋 高宗 때의 정승으로 金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고 主戰論者인 岳飛를 살해함으로써 천고의 小人이 되었다.
岳飛는 당시 명장으로 金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主和論者인 秦檜에게 죽임을 당하여 천고의 충신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岳飛는 중국에서 삼국시대 關羽와 함께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역주38 (義)[議] : 저본에는 ‘義’로 되어있으나, 文理에 따라 ‘議’로 바로잡았다.
역주39 : 휴
역주40 五材 : 다섯 가지 재료로 일반적으로 金‧木‧水‧火‧土를 가리킨다. 그러나 《六韜》 〈龍韜 論將〉에는 “이른바 五材라는 것은 勇‧智‧仁‧信‧忠이다.” 하였는데, 《直解》에 “이른바 장수의 다섯 가지 재능이란 용맹과 지혜와 인자함과 성실함과 충성이니, 용맹한 자는 과감하기 때문에 범할 수가 없고, 지혜로운 자는 계책이 많기 때문에 어지럽힐 수가 없고, 인자한 자는 측은해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고, 성실한 자는 진실하기 때문에 속일 수가 없고, 충성스러운 자는 자기 마음을 다하기 때문에 두 마음이 없는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五材는 확실하지 않으나 金으로 만든 병기를 가리킨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다만 太公이 말한 ‘장수의 다섯 가지 재능’ 역시 하늘이 내고 사람들이 쓰는 것이므로 함께 소개하였다.
역주41 庚申之季……土崩瓦解矣 : 庚申年은 元나라 때로 보이나 어느 해인지 자세하지 않으며, 甿隷는 賤民으로 역시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元 順帝 至正 11년(1351) 白蓮會 소속인 劉福通 등이 潁州에서 起兵하면서 紅巾을 머리에 써 紅巾賊으로 불렸으며, 그 후 사방에서 元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이 봉기하여 결국 망하게 되었는바, 至正 10년은 庚寅, 11년은 辛卯이다. ‘庚申’은 ‘庚辛’의 오자인 듯하다.
역주42 : 뉴
역주43 杜郵之白起 : 杜郵는 옛 지명으로 杜郵亭이라고 칭하는데, 지금의 陝西省 咸陽市 동쪽에 있었다. 白起는 戰國時代 말기 秦나라 장수로 趙나라 장수 趙括을 죽이고 항복한 趙나라 병사 40만을 長平에 묻어 죽였는데, 정승인 應侯 范睢와의 반목으로 결국 秦 昭王으로부터 劍을 하사받고 杜郵에서 자결하였다.
역주44 陰陵之項籍 : 陰陵은 지금의 安徽省 定遠 서북쪽에 있었던 지명이다. 項羽는 이름이 籍인데, 楚나라 장수 項燕의 손자로 秦나라 말기 봉기하여 襄城에서 항복한 秦나라의 병사 20만 명을 묻어 죽이고, 秦나라의 도성 咸陽에 들어가 始皇帝의 무덤을 발굴하고 秦王 子嬰을 죽였으며 阿房宮을 불태우는 등 포악한 짓을 자행하였는데, 결국 垓下에서 漢 高祖 劉邦과 싸우다가 陰陵에서 길을 잃고 끝내 자결하였다. 여기서는 사람을 많이 살상하면 白起나 項羽처럼 제명에 죽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역주45 再世爲將之趙括 三世爲將之王離 : 趙括은 趙나라의 명장인 馬服君 趙奢의 아들로, 秦나라의 명장인 武安軍 白起에게 패하여 죽었고, 王離는 王翦의 손자로, 秦나라 말기 楚나라의 項羽에게 패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趙括과 王離는 모두 명장의 후손으로서 선대가 오랫동안 장군이 되어 많은 사람을 죽인 인과응보로 역시 패망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46 鄧禹曹彬 : 鄧禹는 後漢 光武帝의 장수이고, 曹彬은 北宋의 太祖 趙匡胤의 장수이다. 이들은 장수가 되어 여러 번 출전하였으나 살상을 자행하지 않았는데, 모두 복록을 누리고 자손들도 번성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마법직해 책은 2019.05.09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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