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로 夫子曰
이라하시니 하여 爲惡則易
하고 爲善則難
이라
하여 衣冠必正
하고 容色必肅
하여 하고 하며 하여 을 니라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四者는 修身之要也라
禮與非禮
를 初學
이 難辨
이니 必須窮理而明之
하여 但於
에 力行之
면 則
矣
리라
하니 若
에 居處恭
하며 執事敬
하며 與人忠
이면 則是名爲學
이니 니라
衣服
은 라 禦寒而已
요 飮食
은 라 救飢而已
요 居處
는 라 不病而已
니
必須
이 아 아 아 아 아 好宴樂乎
아 아하여 어든 則
然後
에야 吾心所好
하여 而
리라
則當
하고 則當擇言簡重
하여 이면 則
이니 言簡者近道
니라
非
이어든 하며 非先王之
이어든 하며 非先王之
이어든 不敢行
이니 此當
者也
니라
鄕人會處
에 若設
等戲
어든 則當不寓目
하여 하고 어든 則
요 하여 或尊長强留
하여 不能避退
어든 則雖在座
나 而整容淸心
하여 며 當宴飮酒
에 요 니라
이니 며 言笑
는 當簡重
이니 不可喧譁以過其節
이며 이니 니라
每日
에 하여 아 아 아하여 하고 하여 孜孜毋怠
하여 니라
배우는 자는 반드시 진실한 마음으로 도를 향하여 세속의 잡된 일로 자신의 뜻을 어지럽히지 않은 뒤에야 학문을 함에 기초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부자(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충忠과 신信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셨으니, 주자께서 이를 해석하여 말씀하시기를, “사람에게 충과 신이 없으면 하는 일이 모두 진실함이 없어서 악을 저지르기는 쉽고 선을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를 중심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고 하셨으니, 반드시 충과 신을 중심으로 삼고 용감하게 공부에 착수한 뒤에야 성취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면재勉齋 황간黃幹의 이른바 “마음을 진실하게 하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공부하라.”는 두 마디 말씀이 그 뜻을 다하였다고 할 것이다.
[출전] ○ 주충신主忠信 : 주충신主忠信은 《논어論語》 〈학이學而〉를 비롯하여 세 곳에 보인다. 그중 〈학이學而〉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군자가 중후하지 못하면 위엄이 없으니 배움도 견고하지 못하다. 충과 신을 기준으로 삼으며 자기만 못한 사람을 사귀지 말며 과실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君子不重 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해설] 이 문장은 비로소 배우는 사람들이 배움을 완성하기 위해 지켜야 할 몸가짐과 마음가짐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다. 배우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우선 신중하고 조심성 있는 태도이다. 신중하지 않고 경거망동하면, 학문이 진척되지 못하고 경건성과 성실성을 실천하지 못하여 삶이 깊어지지 못하고 가볍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감명을 줄 수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배우는 사람들이 학문을 완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내용은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충忠과 신信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이다. 충忠이란 자기 마음을 다하는 것이고[盡己之謂忠] 신信이란 성실誠實히 하는 것[以實之謂信]을 이른다. 따라서 충과 신은 모두 진실성, 곧 거짓 없는 마음가짐과 거짓 없는 태도를 의미한다. 결국 충과 신은 본질적으로는 같은 의미이며, 진실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대하는 대상이 자신일 경우에는 충忠이고, 그 대상이 남일 경우에는 신信으로 달리 표현되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거짓 없는 태도를 최고의 가치로 강조했던 까닭은 협력을 중시하는 전통 사회의 특성상 공동체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구성원 간의 신뢰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항상 반드시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서 의관을 반드시 바르게 하고, 얼굴빛을 반드시 엄숙하게 하여 두 손을 모으고 무릎 꿇고 앉으며, 걸음걸이를 편안하고 조심스럽게 하며, 언어를 신중히 하여 일동일정一動一靜을 가볍고 소홀히 여겨 구차스럽게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된다.
[해설] 근면한 생활 태도와 함께 단정하고 신중한 몸가짐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다. 앞 문단에서 강조한 정직함[忠信]이 농업경제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전통 사회의 심리적 지지 기반이었다면 부지런함은 그런 심리적 기초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직접 농경에 종사하지 않는 학자계층일수록 나태해지기 쉽다. 그 때문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는 부지런함을 실천하고, 몸가짐과 말을 삼감으로써 항상 신중하게 행동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몸과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방법은 구용九容보다 더 친절한 것이 없고, 배움을 진보시키고 지혜를 더하는 방법은 구사九思보다 더 친절한 것이 없다.
이른바 구용이라는 것은, 발의 움직임을 무겁게 하고,[가볍게 거동하지 않음이다. 어른 앞에서 종종걸음으로 걸을 적에는 이 조목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
손 모양을 공손히 하고,[손을 함부로 늘어뜨리지 않음이다. 일이 없을 때는 마땅히 단정히 손을 모으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눈 모양을 단정히 하고,[눈동자를 안정시켜 마땅히 시선을 바르게 할 것이요, 흘겨보거나 훔쳐보아서는 안 된다.]
입은 꼭 다물고,[말을 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가 아니면 입은 항상 움직이지 않는다.]
목소리는 조용히 하고,[마땅히 형기를 가다듬어 구역질을 하거나 트림을 하는 따위의 잡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머리는 곧게 세우고,[마땅히 머리를 바르게 세우고 몸을 곧게 해야 하며 기울여 돌리거나 한쪽으로 치우치게 해서는 안 된다.]
숨쉬기는 조용하게 하고,[호흡을 고르게 하여 소리가 나게 해서는 안 된다.]
서 있는 모양은 덕스럽게 하고,[똑바로 서고 치우치지 않아서 엄숙하게 덕스러운 기상을 지녀야 한다.]
얼굴 모양을 장엄하게 하는 것이요. [얼굴빛을 단정히 하여 태만한 기색이 없어야 한다.]
이른바 구사라는 것은, 볼 때는 분명하게 볼 것을 생각하고,[사물을 볼 때 시선에 가리는 바가 없으면 분명하여 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
들을 때는 분명히 들을 것을 생각하고,[들을 때 막히는 바가 없으면 분명하여 듣지 못하는 것이 없다.]
얼굴빛은 온화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얼굴빛을 온화하고 부드럽게 하여 화를 내거나 사나운 기색이 없어야 한다.]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일신의 태도가 단정하고 씩씩하지 않음이 없게 한다.]
말은 진실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한 마디 말이라도 진실하지 않음이 없게 한다.]
일은 경건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한 가지 일이라도 경건하고 삼가지 않음이 없게 한다.]
의심이 나면 질문할 것을 생각하고,[마음속에 의심이 있으면 반드시 선각자에게 나아가 자세히 물어서 모르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분할 때는 환난을 생각하고,[분이 나면 반드시 징계하여 이치로써 스스로 이겨 내야 한다.]
얻을 것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는 것이다. [재물을 마주했을 때는 반드시 의義와 이利를 분명히 구분하여, 의에 부합된 뒤에야 취한다.]
항상 구용과 구사를 마음속에 붙잡아 두어 자기 몸을 단속하여 잠깐 동안이라도 놓아 버리지 말 것이요, 또 이것을 앉는 자리의 귀퉁이에 써 붙여 놓고 때때로 눈을 붙여 보아야 할 것이다.
[출전] ○ 구용九容 : 원래 《예기禮記》 〈옥조玉藻〉에서 군자의 몸가짐을 표현한 내용인데 그중에서 아홉 가지를 따로 뽑아서 구용九容이라 한 것이다. 원래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군자의 용모는 우아하여 존중할 대상을 보면 몸가짐을 정돈하고 삼간다. 발의 움직임을 무겁게 하고, 손 모양을 공손히 하고, 눈 모양을 단정히 하고, 입은 꼭 다물고, 목소리는 조용히 하고, 머리는 곧게 세우고, 숨쉬기는 조용하게 하고, 서 있는 모양은 덕스럽게 하고, 얼굴빛을 장엄하게 하고, 앉을 때는 시동처럼 하고 평소 거처할 때와 제사에서 고유할 때는 온화한 용모를 지닌다.[君子之容舒遲 見所尊者齊遫 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 坐如尸 燕居告溫溫]”
○ 구사九思 : 《논어論語》 〈계씨季氏〉에서 공자가 말한 군자가 때에 따라 지니는 아홉 가지 생각을 구사九思로 정리한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에게는 아홉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으니 볼 때는 분명하게 볼 것을 생각하고, 들을 때는 분명히 들을 것을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 말은 진실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일은 신중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의심이 나면 질문할 것을 생각하고, 분할 때는 환난을 생각하고, 얻을 것을 보면 의리를 생각해야 한다.[孔子曰 君子有九思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
○ 부지부조不知不措 : 《중용中庸》 20장章에 나오는 내용이다.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우면 잘하지 못하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으며,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으면 알지 못하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으며,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으며, 분변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변하면 분변하지 못하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으며, 실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실행하면 독실하지 못한 것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有弗學 學之 弗能 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 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 弗措也 有弗辨 辨之 弗明 弗措也 有弗行 行之 弗篤 弗措也]”
[해설] 유학에서 말하는 학문의 목표는 단순하게 정보나 지식을 배워서 암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유학의 학문의 목표는 배워서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성인이 되는 학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곧 학문을 하여 인仁을 터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仁을 터득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몸과 마음을 경건한 상태로 유지함으로써 인仁을 상실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리를 잘 분별하고 따져서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구용九容과 구사九思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행위 지침은 서로 중복되는 내용이 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지적‧도덕적 수준에 따라 강조점이 구분된다. 즉 몸가짐을 단속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예기禮記》의 구용九容을 제시하고 있으며, 학문 탐구를 위해서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구사九思를 제시하고 있다. 곧 구용이 군자의 용모를 묘사한 다음 그것을 본받도록 권하는 모방의 단계에 머무는 소극적인 행위 지침이라면, 구사는 스스로 생각하여 올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게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배움을 진보시키는 데 창조적인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한 적극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는 네 가지 조목은 몸을 수양하는 요점이다.
예와 예가 아닌 것을 처음 배우는 이가 분별하기 어려우니, 반드시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밝혀서 다만 이미 아는 부분을 힘써 실천한다면 생각함이 반을 넘을 것이다.(절반은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출전] ○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 《논어論語》 〈안연顔淵〉에서 안연이 인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조목을 여쭙자 공자가 대답해 준 내용으로 사물四勿이라고 한다. “안연이 인에 대해 여쭙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 되니, 하루라도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인으로 돌아간다. 인을 실천하는 것은 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서 말미암는 것이겠는가!’ 안연이 다시 말했다. ‘청컨대 그 조목을 여쭙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 것이다.’ 안연이 말했다. ‘제가 비록 불민하지만 이 말을 일삼겠습니다.’[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 사과반의思過半矣 : 《주역周易》 〈계사하繫辭下〉에서 단사彖辭만 보고서도 하나의 괘卦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절반은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인 말로, 원래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지혜로운 사람은 단사만 보면 생각이 반은 지날 것이다.[知者觀其彖辭 則思過半矣]”
[해설] 이른바 사물四勿(네 가지 하지 말아야 할 행위)을 통해서 자신을 수양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사물이란 《논어論語》에서 공자가 안연에게 일러 준 인仁을 이루는 구체적인 조목으로,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는 네 가지 수양 방법이다. 인仁을 이루는 방법은 우선 예禮를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공자가 안연에게 예의 실천을 강조한 것을 보면 예를 배워서 실천하는 것이 배움의 일차적인 목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유학에서 말하는 예禮란 성인聖人의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행동 양식을 표현한 것이다. 즉 성인聖人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예禮에 속하며, 따라서 유학에서 배움의 대상은 예禮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는 성인의 일생 동안에 나타난 모든 행동 양식이기 때문에 너무 복잡하고 다양하다. 따라서 초학자는 예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예를 배워야 한다고 물러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지닐 수도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조목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예이고 무엇이 예에 어긋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사실 여기서 저자는 아무리 초학자라 하더라도 조금은 예를 알고 있을 것이므로, 이미 알고 있는 예를 실천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며 오히려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초학자들의 학문에 대한 두려움이나 소극적 태도를 일소에 부치고 있다는 점에서 정곡을 찌르는 탁월한 방법론이라고 할 만하다.
학문을 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 속에 있으니, 만약 평소 생활할 때에 거처함을 공손히 하고, 일을 집행하기를 공경히 하고, 남과 함께 할 때 진실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학문이라 하는 것이니, 책을 읽는 것은 이 이치를 밝히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출전] ○ 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 《논어論語》 〈자로子路〉에서 제자 번지가 인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대답해 준 말이다. “번지가 인에 대해 여쭙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평소 생활할 때에 자신을 공손히 하고, 일을 집행할 때 신중히 처리하고, 남과 함께 할 때 진실해야 할 것이니 이런 태도는 비록 오랑캐 나라에 가더라도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樊遲問仁 子曰 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
[해설]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현상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책을 읽는 목적이 오로지 책 속의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유학에서의 학문의 목표는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를 습득하고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도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유학에서의 학문의 목표란 궁극적으로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그 방법은 예를 배우고 실천하여 인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예란 성인聖人의 일거수일투족이므로 그것은 평소 생활할 때에는 공손하게 거처하고, 공경하게 일을 집행하며, 남과 함께 할 때 진실한 생활 태도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학에서는 평소의 생활 태도가 이러한 사람이라면, 그것을 학문하는 것이라고 이름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며, 책을 읽는 것 역시 이 이치를 밝히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저자는 예란 배움의 구체적인 대상이며, 동시에 기본적으로는 일상생활 속에서 마땅한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며 그 방법이 바로 책을 읽는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독서인 계층이 흔히 빠질 수 있는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의복은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움을 추구해서는 아니 되고 추위를 막을 정도면 그만이요, 음식은 달고 맛있기를 추구해서는 아니 되고 굶주림을 면할 정도면 그만이요, 거처는 편안함을 추구해서는 아니 되고 병들지 않을 정도면 그만이다.
오직 학문하는 힘과 마음을 수양하는 올바른 방법과 몸가짐을 단속하는 법칙은 날마다 부지런히 힘써, 스스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해설] 배움을 추구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이 문단에 의하면 배우는 사람은 물질적인 욕망을 최소한으로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 때문에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의식주에 대한 욕망도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운 것을 추구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면, 상당수의 사람들은 “나의 육체가 필요로 하는 먹이(구체적으로는 의‧식‧주 등을 마련하는 데 필요한 돈)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오늘날 현대인들의 실정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중학교 과정의 공부를 하고,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고등학교 과정의 공부를 하며, 취업을 하고 직업을 갖기 위해 대학교 과정을 공부하고 노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취업을 하고 직업을 갖는다는 것이 생계유지뿐 아니라 자아실현과 사회적 역할 분담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에게 있어서의 직업이란 결국 나의 육체가 먹고 입고 거주하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하여 하는 것이고 공부나 노력은 바로 이러한 일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육체는 물질이며 다른 물질을 먹어야만 유지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이 속성을 욕심이라고 한다. 그리고 물질적 존재인 육체가 가지는 욕구는 채우면 채울수록 더 커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의복은 추위를 막는 제 기능을 충족시키면 그만인데, 물질적 가치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면,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더 호사스럽고 사치스러운 의복에 욕심을 내게 된다. 음식이나 거주지도 마찬가지이다. 굶주림을 면하고, 거주지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욕구는 새로운 맛을 탐하여 더 달고 맛있는 음식을 바라고, 더 호화스럽고 사치스런 집을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물질들은 물질로서의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누구나 똑같이 공유할 수 없다. 즉 남이 차지하면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사회는 이러한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서로 투쟁하는 장소로 되어 있으며, 우리 모두 이 속에서 경쟁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학문의 목적도 주로 남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유학에서 말하는 삶은 이와 같은 육체를 중심으로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삶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학에서는 육체적 삶이 아닌 인간의 정신적 삶에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구체적인 본질과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근거는 천명天命이다. 이 천명天命을 인간존재의 본질로 지칭할 때 그것을 ‘성性’이라 하며, 기타 우주 만물의 근거로 지칭할 때 그것을 ‘이理’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학에서 말하는 진정한 삶이란 본성本性 즉, 천명天命을 따르는 삶이며, 따라서 나의 육체는 단지 천명天命을 실천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런데 인간의 삶이란 또한 정신적 요소에 의해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삶은 육체적 요소, 즉 기질에 의해 제약되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하늘로부터 착한 본성, 즉 천명을 부여받고 태어나지만 바로 이 기질의 제약에 의해 선善‧악惡의 구별이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하늘에서 부여받은 착한 본성을 온전히 실현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우선 가장 먼저 기질의 제약을 제거해야 한다. 바로 이 기질의 제약을 제거하기 위한 가장 바람직하고 절실한 방법이 바로 예禮를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는 배움의 대상 역시 우선 예禮로 나타난 것이며, 예禮를 배워서 실천하는 것이 유학의 일차적인 목표인 것이다. 그런데 예禮는 성인聖人의 일생 동안에 나타난 모든 행동 양식이기 때문에 너무 복잡하고 다양하며, 예禮는 모든 구체적인 행동 규범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스러운 행동을 속박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예禮를 배우고 익혀서 실천하는 단계에는 아직도 육체적인 삶을 영위하기 때문에, 육체가 필요로 하는 의‧식‧주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으며, 남과의 경쟁에서 남보다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고 높은 자리에 앉고 싶은 욕망이 마음속에 남아 있으나 그것이 예禮가 아니므로 억제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물질적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그러나 학문이 더욱 진전되어 도道를 터득하고 덕德을 밝히고 성性을 인식하는 단계에 이르면, 육체적 요소가 주체가 되는 삶에서 성性이 주체가 되는 삶으로 바뀐다. 이렇게 되면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집착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육체적 욕구와 예禮 사이에서 일어나던 마음의 갈등이 사라진다.
그리고 유학의 인간관과 세계관에서 바라볼 때, 나의 마음은 곧 하늘의 마음이며 천지 만물 전체를 살려 가려는 마음이다. 따라서 나의 마음을 따라 실천하면 그 결과는 천지 만물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형태로 나타나고 인간사회에는 모든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형태로 나타나므로 그것이 그대로 예禮이며 법도가 된다. 내가 예禮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하기만 하면 그것이 그대로 예禮가 되고 진리가 되므로 절대 자유를 누리게 된다.
한편 물질적 욕망에 대한 자제력의 발휘는 군자로서의 자질을 함양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정신적 수양 방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자제력의 발휘가 요구되지 않는 피치자에 대한 통치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봉건 사회의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일종의 노블리티였다고 할 수 있다.
자기의 사욕을 이기는 공부가 일상생활 속에서 가장 절실하다.
이른바 기己라는 것은 내 마음이 좋아하는 것이 천리天理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반드시 내 마음이 여색을 좋아하는가, 이익을 좋아하는가, 명예를 좋아하는가, 벼슬하기를 좋아하는가, 편안하게 지내기를 좋아하는가, 잔치하고 즐기기를 좋아하는가, 진귀한 보배를 좋아하는가를 조사하고 살펴서, 여러 가지 좋아하는 것이 만일 이치에 부합하지 않거든, 일절 통렬히 끊어서 싹이나 맥을 남겨 두지 않은 뒤에야 내 마음이 좋아하는 것이 비로소 의리에 부합되어서 이겨야 할 사욕이 없게 될 것이다.
[출전] ○ 극기克己 : 자신의 사욕을 이긴다는 뜻으로 원래 《논어論語》 〈안연顔淵〉에서 안연이 인仁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 된다.[克己復禮 爲仁]”라고 말한 데서 비롯된 구절이다.
[해설] 극기克己란 원래 논어의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나온 말이다. 극기복례의 기己는 극복의 대상이 되는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을 뜻하며 예禮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가치 내지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규범을 의미한다. 따라서 극기복례는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개개인의 사익을 충족시키려는 욕망을 억제하고 자신의 행위를 공동체 전체의 공익 내지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규범에 부합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행위를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나와 남을 구분하게 되고 또,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과 경쟁하게 되며, 극한에 이르게 되면 다툼이 벌어지게 된다. 현시대 세계 각국의 크고 작은 분쟁이나 갈등 상황 역시 이익을 추구하는 데서 빚어진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자신의 이익이 침해받는 것도 용인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당한 주장으로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점에서는 기己와 예禮의 차이가 크지 않다. 기己든 예禮든 모두 인간 욕망의 각기 다른 측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개인의 사욕에 해당하는 기己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기만이 차지하고 싶다는 이기적 욕구라면, 예禮는 자신이 바라는 욕구를 다른 사람들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함께 하고 싶다는 욕망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은 것은 마음을 수양하는 데 가장 해롭다.
일이 없으면 마땅히 고요히 앉아서 마음을 보존하고, 사람을 만날 때는 마땅히 말을 가려서 간략히 하고 신중히 하여, 때에 맞은 뒤에 말하면 말이 간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말이 간략한 자가 도에 가깝다.
[출전] ○ 시연후언時然後言 : 《논어論語》 〈헌문憲問〉에서 공자가 공명고와 대화하는 가운데 나온다. “공자께서 공명고에게 공숙문자에 관해 물었다. ‘사실입니까? 선생(공숙문자)께선 말도 않고 웃지도 않고 재물을 취하지도 않는다니.’ 공명고가 대답했다. ‘말을 전한 사람이 과장한 것입니다. 선생(공숙문자)께서는 말할 때가 된 뒤에야 말하는지라 사람들이 그가 말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며, 즐거운 뒤에야 웃는지라 사람들이 그가 웃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며, 도리에 맞은 뒤에 재물을 취하는지라 사람들이 그가 취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을 뿐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런가요?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子問公叔文子於公明賈曰 信乎 夫子不言 不笑 不取乎 公明賈對曰 以告者過也 夫子時然後言 人不厭其言 樂然後笑 人不厭其笑 義然後取 人不厭其取 子曰 其然 豈其然乎]”
[해설]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함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말재주를 천시하는 경향은 유학의 경우 특히 두드러진다. 이를테면 《논어論語》 〈학이學而〉에서도 “말을 교묘히 하는 자치고 어진 사람이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고 했다. 이때의 말은 꼭 필요한 말이 아니라 진실을 왜곡하는 교묘한 구변을 뜻한다. 말을 교묘하게 잘하고 얼굴빛을 보기 좋게 잘 꾸미는 것은 인仁의 상태가 아니다. 그 때문에 도리어 말을 잘 못하는 것이 인仁에 가깝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인仁은 만물일체萬物一體를 실천하는 것이므로 남과 나를 구별하지 않고 남을 나처럼 여기는 마음의 상태이다. 말을 잘하고 얼굴빛을 잘 꾸며서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은 남과 나를 구별하여 내가 남보다 잘 되려고 하는 욕심에 기인하기 때문에, 남을 나처럼 여기는 인자仁者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이 간략한 자가 도에 가깝다고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선왕의 법도에 맞는 옷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아니하며, 선왕의 법도에 맞는 말이 아니면 감히 말하지 아니하며, 선왕의 덕행이 아니면 감히 행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마땅히 몸을 마칠 때까지 가슴속에 넣어 두어야 할 것이다.
[출전] ○ 非先王之法服~不敢行 : 《효경孝經》 경經1장章에 나오는 내용이다. “선왕의 법도에 맞는 옷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아니하며, 선왕의 법도에 맞는 말이 아니면 감히 말하지 아니하며, 선왕의 덕행이 아니면 감히 행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법도가 아니면 말하지 않으며 도리가 아니면 행하지 않아서 입에는 가릴만한 말이 없고, 몸에는 가릴만한 행실이 없어서 말이 천하에 가득 차더라도 말로 인한 과실이 없고 행동이 천하에 가득 차더라도 원망이나 미움을 받는 일이 없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진 뒤에야 종묘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경대부의 효이다.[非先王之法服不敢服 非先王之法言不敢道 非先王之德行不敢行 是故 非法不言 非道不行 口無擇言 身無擇行 言滿天下無口過 行滿天下無怨惡 三者備矣然後 能守其宗廟 蓋卿大夫之孝也]”
○ 복응服膺 : 《중용中庸》 8장章에 공자가 안연을 칭찬한 내용 중에 나온다. “안회의 사람됨은 중용을 선택하여 한 가지 선을 얻으면 그것을 받들고 가슴속에 지녀서 잃어버리지 않는다.[子曰 回之爲人也 擇乎中庸 得一善則拳拳服膺而弗失之矣]”
[해설] 《효경孝經》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선왕이 제정한 복식과 행위와 말을 본받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원칙과 규칙을 중시하는 유학의 특성상 이처럼 이미 검증받은 것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배움을 추구하는 이는 한결같이 도를 향하여 외물에 의해 이김을 당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외물 중에서 바르지 못한 것은 마땅히 일절 마음에 두지 않아야 한다.
고을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만일 장기나 바둑, 저포 같은 놀이를 벌여 놓았거든 마땅히 눈을 붙여 보지 말고 뒷걸음질쳐 물러 나고, 만일 기생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만나면 반드시 피해 가야 할 것이요, 만일 고을의 사람이 많이 모이는 상황을 만나 혹 존장이 억지로 만류하여 피해 물러갈 수 없으면, 비록 그 자리에 있을지라도 용모를 단정히 하고 마음을 맑게 하여 간사한 소리와 음란한 색으로 하여금 나를 침범함이 있지 않게 할 것이며, 잔치를 만나 술을 마실 때에는 빠지도록 취해서는 안 되고, 술기운이 무젖으면 그만 마시는 것이 옳다.
모든 음식은 마땅히 알맞게 먹어야 할 것이니, 뜻대로 실컷 먹어서 기를 손상시키지 말 것이며, 말과 웃음은 마땅히 간략하고 신중히 해야 할 것이니, 시끄럽게 떠들면서 절도를 넘어서지 말 것이며, 행동거지는 마땅히 편안하고 조심스럽게 해야 할 것이니, 거칠고 경솔하게 하여 몸가짐을 잃어서는 안 된다.
[출전] ○ 박혁博奕 :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보인다. “종일토록 배불리 먹으면서 마음 쓰는 곳이 없다면 환난이 닥칠 것이다. 장기나 바둑이 있지 아니한가? 그것이라도 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다.[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
○ 저포樗蒲 : 《포박자抱朴子》 〈외편外篇‧백리百里〉에 보인다. “어떤 경우는 바둑이나 저포 놀이를 하면서 정무를 돌보지 않는 경우가 있다.[或有圍棋樗浦而廢政務者矣]”
[해설] 완물상지玩物喪志라는 말이 있다.
은殷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紂는 성격이 포악하고 백성들에게 재화와 보물들을 거두어들여 호화로운 궁전을 세우고 유흥에 빠져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다. 주周나라의 서백西伯(은을 섬긴 서쪽 여러 민족 가운데 우두머리) 창昌은 겉으로는 주를 섬기었으나 머지않아 은이 망할 것을 예견하고 주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창이 죽고 발(發 : 무왕)이 뒤를 이어 기원전 1051년 드디어 은의 수도를 목표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 보고를 받은 폭군 주는 감옥에 가득 찬 죄인들을 풀어 70만 대군을 편성하여, 주의 군사를 목야牧野에서 맞아 결전을 치르기로 하였으나, 이미 민심을 잃은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군사는 없었다. 순식간에 대오가 무너지고 쫓기던 주왕은 궁전에 스스로 불을 지르고 죽었다. 주나라를 세운 무왕은 건국의 공신들을 각지의 제후로 봉하고 더불어 먼 나라에도 사신을 보내어 자기의 문덕과 무공을 전하고 신하로서 자신을 왕으로 섬길 것을 요구하였다. 어느 날 서방의 먼 곳에 자리잡은 여旅나라의 사신이 와서 큰 개 한 마리를 헌상했다. 무왕은 이 진기한 선물을 기쁘게 받고 사자에게 큰 선물을 내렸다. 이것을 본 태보太保 소공召公이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사람을 가지고 놀면 덕을 잃고, 물건을 가지고 놀면 뜻을 잃습니다.[玩人喪德 玩物喪志] 《서경書經》 〈여오旅獒〉” 이 말을 듣고 무왕은 은나라의 멸망을 교훈 삼아 큰 개는 물론 헌상품을 모조리 제후와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치에 전념했다.
일체의 잡기를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절대 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잡기는 여색이나 도박, 술 따위에 집중되어 있는데 대체로 물욕에 이끌려 가는 태도를 부정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외물에 지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주체심을 상실하고 외물의 유혹에 끌려가는 수동적인 태도는 학문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이 있으면 사리대로 일을 처리하고, 책을 읽을 때는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이치를 궁구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조용히 앉아 이 마음을 거두어들여서, 〈마음으로 하여금〉 고요하고 고요하여 어지럽게 일어나는 잡념이 없게 하며, 정신을 바짝 차려서 어두워지는 실수가 없게 하는 것이 옳으니, 이른바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한다는 것이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출전] ○ 경이직내敬以直內 : 《주역周易》 〈곤괘坤卦‧문언전文言傳〉에 나오는 말이다. “군자는 경敬으로써 내심內心을 바로잡고 의義로써 밖을 바로잡는다. 경敬과 의義가 확립되면 덕이 외롭지 않게 된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 또 이 내용이 성리학의 수양 방법으로 중시되면서 《근사록近思錄》 〈위학류爲學類〉를 비롯하여 여러 성리학 문헌에 빈번하게 인용되고 있다. “군자는 경을 중심으로 삼아 내심을 바로잡고 의를 지킴으로써 밖을 바로잡는다. 경이 확립되면 내심이 바르게 되고 의가 드러나면 밖이 바르게 된다.[君子主敬以直其內 守義以方其外 敬立而內直 義形而外方]”
[해설] 경을 통해서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경敬은 흔히 주일무적主一無適(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다른 곳에 돌리지 않음)으로 표현되는데 일종의 정신적 긴장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내면을 수양하는 방법이다. 즉 한 곳에만 마음을 기울일 뿐이지, 동시에 다른 곳에다가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허튼 생각을 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마음에 생각을 집중시켜서 생각이 이리저리로 뻗쳐 나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이며, 이러한 방식으로 오래도록 수양을 지속해 나가면 저절로 천리에 밝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학의 경敬은 불교의 묵조선黙照禪이나 도가의 좌망坐忘이 무념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는 달리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도덕 원리에 집중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마땅히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 겉과 속이 한결같게 하여야 할 것이니, 깊숙한 곳에 있더라도 드러난 곳에 있는 것처럼 하고, 혼자 있더라도 여럿이 있는 것처럼 하여, 이 마음으로 하여금 푸른 하늘의 밝은 해를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것처럼 하여야 한다.
[출전] ○ 청천백일靑天白日 : 청천백일靑天白日은 문자 그대로 푸른 하늘의 밝은 해를 뜻하지만 여기서처럼 성인의 모습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일례로 《근사록近思錄》 〈관성현류觀聖賢類〉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부자夫子[공자]께서는 청명함을 몸에 지니고 있음이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았다. 그 때문에 명쾌함을 극진히 할 수 있었다.[夫子淸明在躬 猶靑天白日 故極其明快]”
[해설] 참된 학문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지적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조심스럽게 행동하더라도 혼자 있을 때에는 함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배우는 사람은 이와 같은 병통을 극복하여 혼자 있을 때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와 다름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진실성이야 말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진실성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문하는 사람은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가야 되는 것이다.
항상 한 가지라도 의롭지 못한 일을 행하거나,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하지 않겠다는 뜻을 가슴속에 두고 있어야 한다.
[출전] ○ 行一不義 殺一不辜而得天下 不爲 : 《맹자孟子》 〈공손추상公孫丑上〉에서 백이伯夷, 이윤伊尹, 공자孔子에게 같은 점이 있느냐는 공손추公孫丑의 질문에 맹자孟子가 대답한 내용이다. “백 리의 영토를 얻어서 그곳을 다스리면 모두 제후들을 조공케 하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지만 한 가지라도 의롭지 못한 일을 행하고,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모두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같다.[得百里之地而君之 皆能以朝諸侯 有天下 行一不義 殺一不辜 而得天下 皆不爲也 是則同]”
[해설] 원칙과 이상을 기준으로 정치 이론을 펼치는 유학儒學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공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불의不義한 방법으로 이룬 것이라면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맹자孟子는 공자孔子의 문하에서는 제나라 환공이나 진나라 문공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여 패업을 이룬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또 공자의 문하에서는 오척동자도 오패를 일컫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다는 동중서董仲舒의 말 또한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敬을 실천함으로써 근본을 확립하고,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선을 밝히고, 힘써 행함으로써 그 진실을 실천하여야 하니, 이 세 가지는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사업이다.
[출전] ○ 居敬以立其本 窮理以明乎善 : 문자는 다소 다르지만 《근사록近思錄》 〈위학류爲學類〉에 같은 내용이 나온다. “경을 중심으로 삼아 근본을 확립하고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앎을 증진시킨다.[主敬以立其本 窮理以進其知]”
[해설] 거경居敬, 궁리窮理, 역행力行을 더없이 강조하고 있다. 거경은 경을 실천한다는 뜻으로 주자학의 학문 수양 방법의 하나이다. 늘 한 가지를 주로 하고 다른 것으로 옮김이 없이, 정신적인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는 뜻이며, 심신이 긴장되고 순수한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덕성德性을 함양함을 이른다. 그러나 그것은 내면적인 집중만이 아니고 외면적으로도 엄숙한 태도라야 한다. 궁리는 이치를 궁구한다는 뜻인데, 이른바 격물치지格物致知이며, 그 방법으로서는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辨‧독행篤行을 들었다. 그리고 이때의 이치는 일상생활 속에서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거경과 궁리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또 사람의 두 발과 같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인仁을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역행이란 말할 것도 없이 이 두 가지를 힘써 실천한다는 뜻이다.
“생각에 부정함이 없다.”는 것과 “공경하지 아니치 말라.”는 오직 이 두 구절만은 일생토록 받아 쓰더라도 다하지 않을 일이니, 마땅히 이것을 벽에 써 붙여서 잠깐 동안이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출전] ○ 사무사思無邪 : 《시경詩經》 〈노송魯頌‧경駉〉에 나오는 구절로 원래의 뜻은 말을 모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시詩에 대한 논평과는 관련이 없다. “정강이가 흰 말도 있고 두 눈이 흰 말도 있으니 수레에 묶음에 건장하고 또 건장하다. 생각함에 부정함이 없으니 말을 생각하면 말이 가는구나.[有驔有魚 以車祛祛 思無邪 思馬斯徂]” 그런데 《논어論語》 〈위정爲政〉에서 공자가 《시경詩經》 전체를 한 마디로 규정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이로 인해 시詩를 통해서 성정性情을 올바르게 함양한다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시경 삼백 편을 한 마디 말로 덮어 말한다면 생각에 부정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 무불경毋不敬 :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의 첫 문장에 나온다. “공경하지 아니치 말며, 엄숙히 생각하는 듯이 하며, 말을 찬찬히 조심스럽게 하며, 백성들을 편안히 할 수 있을 것이다.[毋不敬 儼若思 安定辭 安民哉]”
[해설] 사무사思無邪는 시詩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고 무불경毋不敬은 예禮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공자는 아들 백어伯魚에게 시와 예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이유는 시를 통해서 성정을 바르게 함양할 수 있고 예를 통해서 자신을 확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항陳亢이 백어伯魚에게 물었다. “그대는 또한 달리 들은 것이 있는가?” 백어伯魚가 대답하였다. “없었다. 일찍이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종종걸음을 걸어 뜰을 지나는데, ‘시詩를 배웠느냐?’하고 물으시기에 ‘못 배웠습니다.’고 대답하였더니, ‘시詩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 하시므로 내가 물러나 시詩를 배웠다. 다른 날에 또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종종걸음을 걸어 뜰을 지나는데 ‘예禮를 배웠느냐?’고 물으시기에 ‘못 배웠습니다.’고 대답하였더니, ‘예禮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 없다.’ 하시기에 내가 물러나 예禮를 배웠다. 이 두 가지를 들었다.[陳亢 問於伯魚曰子亦有異聞乎 對曰未也 嘗獨立 鯉趨而過庭 曰學詩乎 對曰未也 不學詩 無以言 鯉退而學詩 他日 又獨立 鯉趨而過庭 曰學禮乎 對曰未也 不學禮 無以立 鯉退而學禮 聞斯二者]”
매일 자주 스스로 점검하되 마음을 보존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학문이 진전되지 않음이 있었던가, 행실을 힘쓰지 않음이 있었던가 반성하여, 있으면 그것을 고치고 없으면 더 힘써서, 부지런히 힘써서 게을리 하지 말아서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다.
[출전] ○ 有則改之 無則加勉 : 《논어論語》 〈학이學而〉의 집주集註에 보인다. “증자는 이 세 가지로써 날마다 자신을 반성하여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 노력하여 스스로를 다스림에 진실하고 절실함이 이와 같았으니 학문하는 근본을 터득했다고 일컬을 만하다.[曾子以此三者 日省其身 有則改之 無則加勉 其自治誠切如此 可謂得爲學之本矣]”
○ 폐이후이斃而後已 : 죽은 다음에 그만둔다는 뜻으로, 죽을 때까지 인仁을 추구한다는 것이 본래의 뜻이다. 출전인 《논어論語》 〈태백泰伯〉에는 사이후이死而後已로 되어 있다. “증자께서 말씀하셨다. 선비는 관대하고 굳세지 않아서는 아니 되니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을 자신의 짐으로 여기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다음에야 그만두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해설] 죽은 다음에야 그만둔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서 강조하는 배움은 요즘처럼 일정 과정을 마치고 그만두는 방식의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다. 따라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평생 동안 스스로 반성하고 또 실천함으로써 지속되어야만 하는 기나긴 자기 수양의 과정이 곧 배움이기 때문이다.
1
지신장 제3
395
2
지신장 제3
324
3
지신장 제3
556
4
지신장 제3
284
5
지신장 제3
624
6
지신장 제3
273
7
지신장 제3
243
8
지신장 제3
238
9
지신장 제3
398
10
지신장 제3
205
11
지신장 제3
191
12
지신장 제3
592
13
지신장 제3
280
14
지신장 제3
184
15
지신장 제3
206
16
지신장 제3
149
17
지신장 제3
250
18
지신장 제3
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