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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詩正義(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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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本

二十卷

今行於世, 款式不具列.

南宋石經殘本

高宗御書, 在今杭州府學.
碑存十石, 每石四列, 列四十五行, 行十八字, 惟末石三列.
碑內不分卷第, 其周南․召南․小雅․大雅下, 亦無第一第二等字, 小序皆連經文, 每篇另起, 每章連接,
凡篇後幾章幾句, 及風․雅․頌後, 摠計章句, 皆無之. 末石有秦檜跋語.
第一石, 周南起, 至‘報我不述’止, 第二石, ‘送子涉淇’起, 至‘靑靑子佩’止,
第三石, ‘悠悠我思’起, 至‘維子之故羔裘豹’止, 第四石, ‘褎自我人究究’起, 至‘輾轉伏枕’止,
第五石, ‘采蘩祁祁’起, 至‘我有嘉賓中心’止, 第六石, ‘好之鍾鼓旣設’起, 至‘我獨居憂’止,
第七石, ‘毛取其血膋’起, 至‘經營四方何草’止, 第八石, ‘不元何人不矜’起, 至‘于時言言于’止,
第九石, ‘入覲以其介圭’起, 至‘薄言駉者有驒有’止, 第十石, ‘駱有駵有雒’起, 至末.
字體小楷書, 凡遇避諱字, 皆本字缺筆. 如筐作, 貞作, 殷作, 桓作, 竟作竞, 恒作𢘆, 佶作, 慇作, 又作, 徵作, 楨作, 朗作, 姞作, 敬作, 禎作, 是也.
經文大率與今本同, 唯䲭鴞‘予尾脩脩’, 竹竿‘遠兄弟父母’, 園有桃‘不知我者謂我士也驕’․‘不知我者謂我士也罔極’,
椒聊‘碩大且篤’, 鶴鳴‘它山之石’, 烈祖‘來假來饗’, 皆與唐石經同.
今書中已詳載唐刻, 故附存其目於此, 以見南宋時經猶爲善本, 攷古者宜所寶貴矣.

經注本이라

自召南鵲巢箋‘爵位故以興焉’, 爵字起, 至邶風之二子乘舟 ‘二章 章四句’止, 分卷同唐石經, 有杭州黃松石廣仁義學印章.
每行大字, 計卄四, 注夾行, 每行字二十及卄一二三, 不等.
云 “毛詩二十四卷, 張紹文書, 其注或羨或脫或不同.”
又云 “昔議者以太和石本, 授寫非精, 時人未之許.” 書中 凡淵․民․世字, 皆缺筆, 避唐諱, 察字缺筆, 避家諱也.
今攷經文, 如日月篇‘乃如人之兮’, 谷風篇‘不以我能慉’, 非誤倒, 卽誤衍, 又‘昔育恐育鞫’, 脫下育字.
毛傳‘育鞫’之育, 訓長, 鄭箋‘昔育’之育, 訓穉, 云‘昔幼穉時, 恐至長老窮匱’ 無下育字, 則與傳箋正義不合, 此經文之誤也.
傳文如草蟲篇‘阜螽蠜螽也’, 今所傳各本, 無下螽, 與爾雅․說文合, 正義亦引定本云‘作蠜螽者 衍字’.
采蘋篇‘藻聚藻也’下, 有‘沈曰蘋浮曰藻’六字, 與物理不合, 是據釋文所引韓詩增入也.
羔羊篇‘曰古者素絲以英裘’, 乃作黃裘, 其譌不辨自明, 此傳文之誤也.
箋文如采蘋篇‘蘋之言實也’, 實, 乃賓之譌, 行路篇‘不以角乃以味’, 味, 乃咮之譌,
野有死麕篇‘動其佩飾’下, 衍‘悅音稅也’四字, 終風篇‘然而己不能得而止之’, 脫‘不能得而止之’六字, 此箋文之誤也.
其餘乖異甚多, 均無足采, 惟甘棠箋‘重煩勞百姓’, 較今本少不字,
與漢書司馬相如傳‘’合, 是條差爲可取, 今此記槩, 不錄入. 餘詳嚴杰蜀石殘本毛詩考證.

宋小字本 二十卷

分卷, 與‘唐石經’同. 以隋唐著錄考之, 鄭箋元第如此, 每半葉十三行, 每行大小皆二十四字.
第一卷第一行, 題‘毛詩卷第一’, 第二行, 題‘唐 國子博士 兼大子中允 贈齊州刺史 吳縣開國男 陸德明釋文附’,
第三行, 題‘周南關雎詁訓傳第一’, 以下, 題‘毛詩國風’, 以下, 題‘鄭氏箋’.
第二卷以後, 無‘唐國子’云云一行, 餘悉同前. 段玉裁云 “南宋光宗時刻也”.

重刻

二十卷

分卷, 與‘唐石經’同. 乾隆四十八年, 武英殿仿‘宋本’. 款式不具列.

注疏本

七十卷

分經注本第一卷爲五, 第二卷爲三, 第三卷爲三, 第四卷爲四, 第五卷爲三, 第六卷爲四, 第七卷爲三,
第八卷爲三, 第九券爲四, 第十卷爲三, 第十一卷爲二, 第十二卷爲三, 第十三卷爲二, 第十四卷爲三,
第十五卷爲三, 第十六卷爲五, 第十七卷爲四, 第十八卷爲五, 第十九卷爲四, 第二十卷爲四, 共七十卷,
以‘正義序’及‘唐志’考之, 非孔疏四十卷之舊也.
每半葉十行, 每行大十八字, 小二十三字, 經作大字, 注․釋文․正義, 皆小字雙行在其下,
‘釋文’首, 加 ‘○’隔之, ‘正義’首, 加疏字, 圍其外隔之, 首列‘毛詩正義序’, 次‘鄭譜序’, 次‘周南召南譜’,
第一卷第一行, 題‘附釋音毛詩注疏卷第一’, 其下, 側注‘一之一’, 行末, 題云‘一’, 餘卷皆然,
第二行第三行, 題‘唐 國子祭酒 上護軍 曲阜縣 開國子 孔穎達奉勅撰’, 餘卷無.
第四行, 題‘周南關雎詁訓傳第一’, 以下, 題‘毛詩國風’, 以下, 題‘鄭氏箋’, 卽以‘釋文․正義’, 各繫其下.
第二卷第二行, 題’詩國風 鄭氏箋 孔穎達疏’. 共爲一行, 每空二字, 以後各卷, 大略同前.
, 卽此書, 其源出於所云建本, 有音釋․注疏, 遞加脩改, 至明正德時.
山井鼎云 “與正德刊本略似.” 不知其似二而實一也, 是爲各本注疏之祖.

七十卷

用‘十行本’重雕, 分卷同山井鼎所云也. 明御史李元陽, 僉事江以達刊. 今行於世, 款式不具列.
明監本注疏 七十卷
用‘閩本’重雕, 分卷同山井鼎所云‘’也. 今行於世, 款式不具列.
用‘明監本’重雕, 分卷同山井鼎所云‘’也. 今行於世, 款式不具列.


한 판본은 둘이다.

지금 세상에 사용되고 있으니 격식은 다 열거하지 않는다.
송 고종宋 高宗(1127~1162)의 어서御書인데, 지금 항주부학杭州府學에 소장되어 있다.
비석碑石은 10개가 보존되어 있는데, 비석마다 4열이고, 열마다 45행이며, 행마다 18자인데, 마지막 비석만은 3열이다.
비석 안에는 권의 차제를 나누지 않았고, 주남周南소남召南소아小雅대아大雅의 아래에도 역시 제일第一제이第二 등의 글자가 없다. 소서小序는 모두 경문經文에 이어져 있고, 마다 따로 시작되며 매장每章은 이어져 있다.
모든 편의 끝에 몇 장, 몇 구와 의 끝에 장구章句를 총계한 것이 모두 없다. 마지막 비석에는 진회秦檜발문跋文이 있다.
첫 번째 비석은 주남周南에서 시작하여 ‘보아불술報我不述’에서 끝나며, 두 번째 비석은 ‘송자섭기送子涉淇’에서 시작하여 ‘청청자패靑靑子佩’에서 끝나며,
세 번째 비석은 ‘유유아사悠悠我思’에서 시작하여 ‘유자지고고구표維子之故羔裘豹’에서 끝나며, 네 번째 비석은 ‘수자아인구구褎自我人究究’에서 시작하여 ‘전전복침輾轉伏枕’에서 끝나며,
다섯 번째 비석은 ‘채번기기采蘩祁祁’에서 시작하여 ‘아유가빈중심我有嘉賓中心’에서 끝나며, 여섯 번째 비석은 ‘호지종고기설好之鍾鼓旣設’에서 시작하여 ‘아독거우我獨居憂’에서 끝나며,
일곱 번째 비석은 ‘모취기혈료毛取其血膋’에서 시작하여 ‘경영사방하초經營四方何草’에서 끝나며, 여덟 번째 비석은 ‘불원하인불긍不元何人不矜’에서 시작하여 ‘우시언언우于時言言于’에서 끝나며,
아홉 번째 비석은 ‘입근이기개규入覲以其介圭’에서 시작하여 ‘박언경자유탄유薄言駉者有驒有’에서 끝나며, 열 번째 비석은 ‘낙유유유락駱有駵有雒’에서 시작하여 끝에까지 이르렀다.
글자의 서체書體해서체楷書體의 작은 글씨인데, 무릇 피휘避諱할 글자를 만나면 모두 본자本字에서 일부의 획을 생략하였다. 예컨대 ‘’자는 으로 쓰고, ‘’자는 으로 쓰고, ‘’자는 으로 쓰고, ‘’자는 으로 쓰고, ‘’자는 으로 쓰고, ‘’자는 𢘆으로 쓰고, ‘’자는 으로 쓰고, ‘’자는 으로 쓰기도 하고 또 으로 쓰고, ‘’자는 으로 쓰고, ‘’자는 으로 쓰고, ‘’자는 으로 쓰고, ‘’자는 으로 쓰고, ‘’자는 으로 쓰고, ‘’자는 으로 쓴 것들이 이것이다.
경문經文은 대체로 금본今本과 같은데, 〈빈풍 시효豳風 䲭鴞〉의 ‘여미수수予尾脩脩’와 〈위풍 죽간衛風 竹竿〉의 ‘원형제부모遠兄弟父母’와 〈위풍 원유도魏風 園有桃〉의 ‘부지아자 위아사야교不知我者 謂我士也驕’ 및 ‘부지아자 위아사야망극不知我者 謂我士也罔極’과
당풍 초료唐風 椒聊〉의 ‘석대차독碩大且篤’과 〈소아 학명小雅 鶴鳴〉의 ‘타산지석它山之石’과 〈상송 열조商頌 烈祖〉의 ‘내격래향來假來饗’만은 모두 ≪당석경唐石經≫과 같다.
지금 이 책에 당석각본唐石刻本의 내용을 자세하게 수록하였으므로 여기에 그 목록을 붙여서 남송南宋 때에도 ≪당석경唐石經≫이 오히려 선본善本임을 나타냈으니, 옛것을 상고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의당 보배롭고 귀한 것이다.

합각合刻한 판본은 셋이다.

소남 작소召南 鵲巢작위고이흥언爵位故以興焉’의 자에서 시작하여 〈패풍 이자승주邶風 二子乘舟〉의 ‘이장 장사구二章 章四句’에서 끝난다, 을 나눈 것은 ≪당석경唐石經≫과 같으며, ‘항주황송석 광인의학杭州黃松石 廣仁義學’이라는 인장印章이 있다.
행마다 큰 글씨로 썼는데 합계가 24자이다. 는 두 줄로 썼는데 행마다 글자 수는 20이나 21, 22, 23자로 균등하지 않다.
조공무晁公武가 “모시毛詩 24장소문張紹文이 썼는데, 그 의 글은 혹 넘치기도 하고 혹 빠지기도 하고 혹 같지 않기도 하다.”라고 하고,
또 “옛날 비판하는 자들이 태화연간太和年間석본石本은 베껴 쓴 것이 정밀하지 아니하여 당시의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그 글 가운데 모든 자는 모두 일부 획을 생략하였는데 나라의 휘자諱字를 피한 것이고, 자도 일부 획을 생략하였는데 자기 가문家門휘자諱字를 피한 것이다.
이제 경문經文의 내용을 살펴보니, 예컨대 〈패풍 일월邶風 日月〉의 〈‘내여지인혜乃如之人兮’를〉 ‘내여인지혜乃如人之兮’로 하고 〈패풍 곡풍邶風 谷風〉의 〈‘불아능휵不我能慉’을〉 ‘불이아능휵不以我能慉’으로 하였는데, 이는 착오로 도치된 것이 아니면 착오로 글자를 더한 것이며, 또 〈곡풍谷風〉의 ‘석육공육국昔育恐育鞫’은 아래의 자를 빠뜨렸다.
모전毛傳에서 ‘육 국育 鞫’의 자를 으로 풀이하고, 정전鄭箋에서 ‘석육昔育’의 자를 로 풀이하여 “옛날 어렸을 때에 늙어서 궁핍할까 걱정한 것이다.”라고 하고, 아래의 자가 없다. 그렇다면 정의正義와 부합하지 않으니 이는 경문經文의 오류이다.
전문傳文의 경우는 〈소남 초충召南 草蟲〉에 ‘부종번종야阜螽蠜螽也’라고 한 것으로 말하면 지금 전해지는 각본에는 아래의 ‘’자가 없이 ‘부종 번야阜螽 蠜也’라고 하였으니 ≪경전석문經典釋文≫․≪설문해자說文解字≫와 부합하고, 정의正義정본定本을 인용하여 ‘번종蠜螽이라 쓴 것은 연자衍字이다.’라고 하였다.
소남 채빈召南 采蘋〉의 ‘조취조야藻聚藻也’의 아래에 ‘침왈빈 부왈조沈曰蘋 浮曰藻’의 6가 있는데 물리物理에 부합하지 않으니, 이는 ≪경전석문經典釋文≫에서 인용한 ≪한시韓詩≫를 근거로 더 삽입한 것이다.
소남 고양召南 羔羊〉의 ‘왈고자소사이영구曰古者素絲以英裘’에서 영구英裘를 도리어 황구黃裘로 썼으니, 잘못을 분별하지 않아도 절로 분명하니, 이는 전문傳文의 오류이다.
전문箋文의 경우는 〈소남 채빈召南 采蘋〉 ‘빈지언실야蘋之言實也’의 자는 바로 ‘’자의 잘못이고, 〈소남 행로召南 行路〉 ‘불이각내이미不以角乃以味’의 자는 바로 ‘’자의 잘못이며,
소남 야유사균召南 野有死麕〉 ‘동기패식動其佩飾’의 아래에는 ‘열음세야悅音稅也’ 4를 더하였고, 〈패풍 종풍邶豐 終風〉의 ‘연이이불능득이지지然而已不能得而止之’에는 ‘불능득이지지不能得而止之’ 6가 빠졌으니, 이는 전문箋文의 오류이다.
나머지는 어긋나고 괴이한 것이 매우 많아 똑같이 채록하기에 부족하고, 〈소남 감당召南 甘棠〉의 중번로백성重煩勞百姓’은 금본今本과 비교해보면 ‘’자가 빠져 있지만
한서漢書≫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의 ‘지금 농사철이므로 백성을 번거롭게 하는 것을 신중히 하여야 합니다.[방금전시 중번백성方今田時 重煩百姓]’와 부합하니, 이 조항條項은 조금이나마 취할 수 있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대강만 기재하므로 기록해 넣지 않는다. 나머지는 엄걸嚴杰()의 ≪촉석잔본蜀石殘本≫과 ≪모시고증毛詩考證≫에 자세하다.
을 나눈 것은 ≪당석경唐石經≫과 같다. 의 기록으로 고찰해보면 정현 전鄭玄 箋의 원래 차제가 이와 같은데, 면마다 13행이고 행마다 대소大小의 글자가 모두 24자이다.
11에 ‘모시권제일毛詩卷第一’이라 쓰고, 2에 ‘당 국자박사唐 國子博士 겸태자중윤 증제주자사兼太子中允 贈齊州刺史 오현개국남 육덕명석문부吳縣開國男 陸德明釋文附’라 쓰고,
3에 ‘주남관저고훈전제일周南關雎詁訓傳第一’이라 쓰고, 그 다음엔 ‘모시국풍毛詩國風’이라 쓰고, 그 다음엔 ‘정씨전鄭氏箋’이라 썼다.
2 다음엔 ‘당국자唐國子……’의 한 행이 없고, 나머지는 모두 앞 권과 같다. 단옥재段玉裁는 “남송 광종南宋 光宗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을 나눈 것은 ≪당석경唐石經≫과 같다. 청 고종淸 高宗 건륭乾隆 48년(1783)에 무영전武英殿에서 ≪송본宋本≫을 모사模寫하였다. 격식은 다 열거하지 않는다.

에〉 합각合刻한 판본은 넷이다.

합각合刻한 판본을 나누어 1을 5로, 2을 3으로, 3을 3으로, 4을 4로, 5을 3으로, 6을 4로, 7을 3으로,
8을 3으로, 9을 4로, 10을 3으로, 11을 2로, 12을 3으로, 13을 2로, 14을 3으로,
15을 3으로, 16을 5로, 17을 4로, 18을 5로, 19을 4로, 20을 4권으로 만들어 모두 70권이니,
모시정의서毛詩正義序〉와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로 고찰해보면 공영달孔潁達 40권의 구본舊本이 아니다.
면마다 10행이고 행마다 큰 글자는 18자이고 작은 글자는 23자인데, 경문經文은 큰 글씨로 쓰고, 그 아래에 와 ≪경전석문經典釋文≫과 정의正義를 모두 작은 글씨로 두 줄로 썼다.
경전석문經典釋文≫의 첫머리에는 ‘○’을 더하여 구분하고, 정의正義의 첫머리에는 ‘’자를 더하고 밖에 테두리를 쳐 구분하였다. 첫머리에는 ‘모시정의서毛詩正義序’를 쓰고 다음에는 정현鄭玄의 ‘시보서詩譜序’를, 그 다음에는 ‘주남소남보周男召南譜’를 썼다.
11에는 ‘부석음모시주소권제일附釋音毛詩注疏卷第一’을 쓰고, 그 아래에 한쪽으로 ‘일지일一之一’을 하고, 행의 끝에는 ‘’을 썼다. 나머지 권도 모두 이와 같다.
23에는 ‘당 국자좨주唐 國子祭酒 상호군 곡부현上護軍 曲阜縣 개국자 공영달봉칙찬開國子 孔穎達奉勅撰’을 썼는데, 나머지 권에는 없다.
4에는 ‘주남관저고훈전제일周南關雎詁訓傳第一’을 쓰고, 다음에는 ‘모시국풍毛詩國風’을 쓰고, 그 다음에는 ‘정씨전鄭氏箋’을 쓰고, 바로 ≪경전석문經典釋文≫과 정의正義를 각각 그 아래에 이어놓았다.
22에는 ‘모시국풍 정씨전毛詩國風 鄭氏箋 공영달소孔穎達疏’를 썼다. 모두 한 줄로 쓰면서 2자씩을 띄어 썼는데, 그 다음의 각권各卷대략大略 앞의 형식과 같다.
일본日本산정정山井鼎이 말한 ‘송판宋版’이 바로 이 책이니, 그 근원은 ≪간정구경삼전연혁례刊正九經三傳沿革例≫에서 말한 ‘건본建本’에서 나온 것인데, ‘음석音釋’과 ‘주소注疏’가 번갈아 수정되어 정덕正德(무종武宗, 1506~1521) 때까지 이르렀다.
산정정山井鼎이 “〈이는〉 정덕간본正德刊本과 대략 비슷하다.”라고 하였는데, 두 인듯 하지만 실제 하나임을 모른 것이니, 이것이 〈에〉 합각合刻각본주소各本注疏시조始祖가 된다.
십행본十行本≫을 저본으로 하여 중각重刻한 것인데, 권을 나눔은 산정정山井鼎이 말한 가정본嘉靖本과 같다. 어사 이원양御史 李元陽첨사 강이달僉事 江以達이 간행하였다. 지금 세상에 사용되고 있으므로 격식은 다 열거하지 않는다.
민본閩本≫을 저본으로 하여 중각重刻한 것인데, 을 나눔은 산정정山井鼎이 말한 만력본萬曆本과 같다. 지금 세상에 사용되고 있으므로 격식은 다 열거하지 않는다.
명감본明監本을 저본으로 하여 중각重刻음한 것인데, 을 나눔은 산정정山井鼎이 말한 숭정본崇禎本과 같다. 지금 세상에 사용되고 있으므로 격식은 다 열거하지 않는다.


역주
역주1 唐石經 : 唐 文宗(826~839) 大和年間(827~835)의 石刻本이다.
역주2 孟蜀石經殘本 : 宋 太宗(976~996) 淳化年間(990~995)에 汴京에서 석각된 본이다.
역주3 晁公武 : 南宋의 이름난 目錄學者이며 藏書家이다. 字는 子止이며 1105년에 출생하여 1180년까지 살았다.
역주4 方今田時 重煩百姓 : 漢 景帝 때 唐蒙이 夜郞西와 僰中을 정략하고자 巴․蜀의 군사 1千 명과 군수물자 수송인력 1萬 명을 넘게 차출하여 巴蜀의 백성들이 크게 원망하자 司馬相如를 보내 위로하면서 내린 勅書의 내용 중 일부이다.
역주5 相臺岳氏本 : 남송의 문학가인 岳珂(1183~1243)가 校刻한 본이다.
역주6 十行本 : 南宋 때 목판본으로 간행된 ≪十三經注疏≫인데, 면마다 10행으로 쓰여 있어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역주7 日本山井鼎所云宋版 : 日本 江戶時代의 학자인 山井鼎이 ≪七經孟子考文≫에서 한 말이다.
역주8 沿革例 : 南宋의 岳珂가 相臺書塾에서 만든 ≪刊正九經三傳沿革例≫로, 古籍整理를 위한 교감원칙과 방법들을 설명한 것이다.
역주9 閩本注疏 : 南宋 때 福建省 建寧과 建陽 等地에서 刻印된 것으로 ‘建本’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역주10 嘉靖本 : 明의 世宗(1507~1566) 嘉靖年間(1521~1566)에 간행된 본이다.
역주11 萬歷本 : 明의 神宗(1563~1620) 萬曆年間(1573~1619)에 간행된 판본이다.
역주12 汲古閣毛氏本注疏 : 明의 말엽에 毛晋(1599~1659)이 간행한 판본이다.
역주13 崇禎本 : 明의 毅宗(1611~1644) 崇禎年間(1628~1644)에 간행한 판본이다.

모시정의(1) 책은 2019.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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