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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武子直解

손무자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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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也 謀也 言國家將欲興師動衆인댄 君臣 必先定計於廟堂之上하여 校量彼我之情하여 而知其勝負也
는 처음이요 피아彼我를 헤아려 계책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장차 군대를 일으키고 병사를 동원하고자 하면 군주와 신하가 반드시 먼저 묘당廟堂(조정)의 위에서 계책을 결정하여 적과 우리의 실정을 비교하고 헤아려서 그 승부의 소재를 알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孫子以始計爲第一篇하니라
그러므로 손자孫子가 〈시계始計〉를 제1편으로 삼은 것이다.
孫子曰
손자孫子가 말하였다.
兵者 國之大事
(전쟁)이란 국가의 큰일이다.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니라
죽고 삶이 달려있는 자리이며 나라가 보존되고 멸망하는 갈림길이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原注
이요 尊稱之也
이고 는 존칭한 것이다.
齊人이니 仕於吳하고 著書十三篇하니라
손자孫子나라 사람으로 나라에서 벼슬하였고, 병서兵書 13편을 저술하였다.
首言 兵者 國家之大事
첫머리에서 말하기를 “(전쟁)이라는 것은 국가의 큰일이다.
乃六軍死生之地 一國存亡之道
바로 육군六軍이 죽고 사는 자리이며, 한 나라가 보존되고 멸망하는 갈림길이다.”라고 하였다.
死生 以戰陳言이라 故曰地 存亡 以國家言이라 故曰道
죽고 삶은 전진戰陣을 가지고 말하였으므로 (자리)라 하였고, 보존되고 멸망함은 국가로써 말하였으므로 (갈림길)라 하였다.
戰勝則兵生而國存하고 不勝則兵死而國亡하나니 爲將者 不可不審察也니라
싸워서 이기면 장병들이 살고 나라가 보존되며, 이기지 못하면 장병들이 죽고 나라가 멸망하니, 장수 된 자가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經之以五事하고 校之以計하여 而索其情이니라
그러므로 다섯 가지 일로써 다스리고 계책으로써 비교하여 그 실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原注
經者 理也
은 다스림이다.
孫子以兵爲國家之大事하니 爲主, 爲將者 當經理之以五事하고 又校量以七計하여 而搜索其彼我勝負之情耳
손자孫子을 국가의 큰일로 삼았으니, 군주가 되고 장수가 된 자가 진실로 마땅히 다섯 가지 일로써 다스리고 또 일곱 가지 계책으로써 비교하고 헤아려서, 적과 우리의 승부의 실정을 찾아야 할 뿐이다.
一曰道 二曰天이요 三曰地 四曰將이요 五曰法이라
첫 번째는 요 두 번째는 천시天時요 세 번째는 지리地利요 네 번째는 장수將帥요 다섯 번째는 법령法令(법도와 호령)이다.
原注
所謂五事也
이것은 이른바 ‘다섯 가지 일’이라는 것이다.
惟有道라야 可以伐無道 以道先之하고 天時順이라야 宜興師 以天次之하고 地利便이라야 宜戰守 地又次之하고 將得人이라야 可制勝이라 將又次之하고 法令行이면 則士用命이라 法又次之하니 五事之序也
오직 가 있어야 가 없는 자를 정벌할 수 있으므로 를 맨 앞에 놓았고, 천시天時가 순하여야 군대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천시天時가 그다음이 되었고, 지리地利가 편리하여야 싸우고 수비하기에 적당하므로 지리地利가 또 그다음이 되었고, 장수를 훌륭한 사람을 얻어야 승리할 수 있으므로 장수가 또 그다음이 되었고, 법령이 잘 시행되면 병사들이 명령을 따르므로 법령이 또 그다음이 되었으니, 다섯 가지 일의 순서이다.
道者 令民與上同意하여 可與之死하며 可與之生하여 而不畏危也
란 백성(병사)들로 하여금 윗사람과 뜻을 함께하여 함께 죽고 함께 살아서 위태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原注
道者 仁義禮樂孝悌忠信之謂
인의仁義예악禮樂, 효제孝悌충신忠信을 이른다.
爲君者 漸民以仁하고 摩民以義하며 維持之以禮樂하고 敎之以孝悌忠信하여 使民으로 知親其上, 死其長이라
군주 된 자가 백성을 으로써 스며들게 하고 백성을 로써 연마하며, 예악禮樂으로써 유지하고 효제孝悌충신忠信을 가르쳐서 백성들로 하여금 윗사람을 친애하고 상관을 위하여 죽을 줄을 알게 하여야 한다.
與君同心同德하여 上下一意하여 可與之同死하고 可與之同生이니 雖有危難이나 而不畏懼也
그러므로 군주와 마음을 함께하고 덕을 함께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한뜻이 되어서 함께 죽고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니, 비록 위험과 어려움이 있으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옛날 무왕武王은 3천 명의 신하가 있었는데 마음을 함께하고 덕을 함께하였으니, 이는 윗사람과 뜻을 함께한 것이요, 나라 주왕紂王은 억조의 백성이 있었으나 마음이 떠나고 덕이 떠났으니, 이는 윗사람과 뜻을 함께하지 않은 것이다.
순경荀卿이 말하기를 “한 사람의 군대는 상하가 한마음이 되고 삼군三軍이 힘을 함께하니, 신하가 군주를 대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할 때에 마치 자제子弟부형父兄을 호위하고 손과 발이 머리와 눈을 보호하고 가슴을 덮어주듯이 한다.” 하였으니,
斯可與同死同生也
이렇게 하여야 함께 죽고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天者 陰陽, 寒暑 時制也
천시天時, 추위와 더위를 때에 따라 제재制裁(조절)하는 것이다.
原注
陰陽寒暑 以時制之 經之以天也
, 추위와 더위를 때에 따라 제재함은 하늘[天道]로써 다스리는 것이다.
陰陽者 之屬也 寒暑者 暑雨祈寒之月이니 所謂夏不征南하고 冬不征北 是也
이란 시절과 날짜의 간지干支에 대한 고허孤虛왕상旺相의 등속이요, 추위와 더위란 무더운 장마와 크게 추운 달(시기)이니, 이른바 ‘여름에는 남쪽 지방을 정벌하지 않고 겨울에는 북쪽 지방을 정벌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이다.
昔春秋之世 歲星在越而吳伐之러니 後三十六年 越滅吳하니
옛날 춘추시대에 세성歲星나라에 있었는데, 나라가 나라를 정벌하였다가 36년 뒤에 나라가 나라를 멸망시켰다.
夫吳越之君 德均勢敵이어늘 闔廬興師하여 志欲呑滅이요 非爲拯民이라
나라와 나라의 군주는 덕이 비슷하고 형세가 비슷하였는데, 합려闔廬가 군대를 일으켰으니 그 뜻은 병탄하여 멸망시키고자 한 것이지 백성을 구제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하니 不順陰陽而敗者也
그러므로 세성歲星나라에 복을 내리고 나라에 화를 내렸으니, 이는 에 순응하지 아니하여 패망한 경우이다.
고조高祖관중關中에 들어간 해에 세성歲星동정東井에 있었는데, 나라가 멸망한 것은 어째서인가?
蓋秦始皇 信讒拒諫하고 虐害生民하고 二世胡亥 惟務弑戮하니 歲星不爲福而反爲禍也
진시황秦始皇은 참소하는 말만 믿고 간언을 물리치고 생민生民을 학대하고 해쳤으며, 이세황제二世皇帝호해胡亥는 오직 살육殺戮에 힘썼으니, 이는 세성歲星이 복이 되지 않고 도리어 화가 된 경우이다.
무왕武王갑자일甲子日에 군대를 일으켜 승리하였고, 나라 주왕紂王갑자일甲子日에 군대를 일으켜 패하였으며, 나라 유유劉裕남연南燕의 군주인 모용초慕容超를 정벌할 적에 왕망일往亡日에 싸워 승리하였으니, 이는 옛사람이 다만 사람의 일만 닦고 굳이 에 집착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故曰 天官時日 明將 不法하고 闇將 拘之라하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천관天官시일時日을 현명한 장수는 본받지 않고 어두운 장수는 구애받는다.” 한 것이다.
큰 추위와 큰 더위에는 군대를 일으키지 말아야 하니, 나라가 흉노匈奴를 정벌할 적에 날씨가 추워서 병사들의 손가락이 얼어 떨어져 나갔고, 마원馬援남만南蠻을 정벌할 적에 병사들이 전염병으로 많이 죽었으니, 이는 모두 천시天時를 따르지 아니하여 폐해를 받은 경우이다.
地者 遠近, 險易, 廣狹, 死生也
지리地利란 멀고 가까움과 험하고 평탄함과 넓고 좁음과 죽고 사는 지형이다.
原注
遠近 以地里言이요 險易, 廣狹, 死生 以地形言이라
멀고 가까움은 땅의 거리를 가지고 말하였고, 험하고 평탄함과 넓고 좁음과 죽고 사는 것은 지형地形을 가지고 말하였다.
地遠宜緩이요 地近宜速이며 地險宜用步 地易宜用騎 地廣宜用衆이요 地狹宜用寡 死地宜戰이요 生地宜守 此八者 經之以地也
땅의 거리가 멀면 마땅히 느려야 하고 땅의 거리가 가까우면 마땅히 신속하여야 하며, 지형이 험할 경우에는 마땅히 보병步兵을 써야 하고 지형이 평탄할 경우에는 마땅히 기병騎兵을 써야 하며, 땅이 넓을 경우에는 많은 병력을 써야 하고 땅이 좁을 경우에는 적은 병력을 써야 하며, 죽을 지형에서는 싸워야 하고 살 지형에서는 수비하여야 하니, 이 여덟 가지는 땅으로써 다스리는 것이다.
將者 智, 信, 仁, 勇, 嚴也
장수란 지혜와 신의와 인자함과 용맹함과 엄격함이다.
原注
智則能謀하고 信則能守하고 仁則能愛하고 勇則能戰하고 嚴則能臨이니 此五者 經之以將也
〈장수가〉 지혜로우면 능히 도모하고, 신의가 있으면 능히 지키고, 인자하면 능히 사랑하고, 용감하면 잘 싸우고, 엄격하면 잘 군림하여 통제하니, 이 다섯 가지는 장수로서 다스리는 것이다.
法者 曲, 制, 官, 道, 主, 用也니라
법령法令이란 부곡部曲(부대)과 절제節制(통제)와 관직을 맡김과 군량 수송로와 군수물자를 주관함과 사용할 물건을 계산함이다.
原注
부곡部曲을 이르고, 절제節制를 이르고, 편비偏裨의 임무를 나누어 맡김을 이르고, 는 군량의 수송로를 편리하게 함을 이르고, 는 군수물자를 주관하는 사람을 이르고, 은 사용하는 물건을 계산함을 이르니, 이 여섯 가지를 법으로써 다스리는 것이다.
張賁註云 部曲有制하고 分官有道하여 使各主其用하여 而不失其義라하니 亦通이라
장분張賁의 주에는 “부곡部曲이 통제가 있고 관원을 나누어 맡김에 방도가 있어 부림에 각각 그 쓰임을 주관하여 그 를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部曲有制 分官有道 使各主其用 而不失其義]” 하였으니, 또한 통한다.
凡此五者 將莫不聞이로되 知之者하고 不知者 不勝이라
무릇 이 다섯 가지는 장수치고 듣지 못한 자가 없으나, 이것을 아는 자는 승리하고 알지 못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校之以計하여 而索其情이니라
그러므로 계책으로써 비교하여 그 실정을 찾는 것이다.
原注
凡此五者 爲將之人 莫不聞之로되 但知彼我之情者하고 不知彼我之情者 不勝이라
무릇 이 다섯 가지는 장수 된 사람치고 듣지 못한 자가 없으나, 다만 적과 우리의 실정을 아는 자는 승리하고, 실정을 알지 못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當校量以七計하여 而搜索彼我之情耳
그러므로 마땅히 일곱 가지 계책으로써 비교하고 헤아려서 적과 우리의 실정을 찾을 뿐이다.
曰 主孰有道
군주는 누가 더 가 있으며,
原注
言兩國之主 誰爲有道
두 나라 군주 중에 누가 더 가 있는가?
有道者勝하고 無道者敗하나니
가 있는 자는 승리하고 가 없는 자는 패함을 말한 것이다.
예컨대 고조高祖관중關中에 들어갔을 적에 추호도 범함이 없으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고, 항우項羽가 관중에 들어가서 진왕秦王 자영子嬰을 죽이고 궁실을 불태우고 부녀자와 보화寶貨를 노략질하고서 동쪽으로 가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실망한 것과 같은 것이다.
漢高所以終勝이요 而項羽所以終敗也
이는 고조高祖가 끝내 승리하고 항우項羽가 끝내 패망한 이유이다.
將孰有能이며
장수는 누가 더 재능이 있으며,
原注
兩國之將 誰爲有能
두 나라 장수 중에 누가 더 재능이 있는가?
有能者勝하고 不能者敗
재능이 있는 자는 승리하고 재능이 없는 자는 패하는 것이다.
한왕漢王(高祖)은 나라의 대장 백직柏直의 이름을 듣고 말하기를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나니 어찌 우리 한신韓信을 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天地孰得이며
천시天時지리地利를 누가 얻었으며,
原注
兩國天時地利 誰得
두 나라의 천시天時지리地利를 누가 얻었는가?
得天時地利者勝하고 失天時地利者敗
천시天時지리地利를 얻은 자는 승리하고 천시天時지리地利를 잃는 자는 패하는 것이다.
하니 是失天時者也 하니 是失地利者也
조조曹操가 한겨울에 나라를 정벌하였으니 이는 천시天時를 잃은 것이요, 모용초慕容超대현산大峴山을 점거하지 않았으니 이는 지리地利를 잃은 것이다.
法令孰行이며
법령을 누가 더 잘 행하며,
原注
兩國法度號令 誰行
두 나라의 법도와 호령을 누가 더 잘 시행하는가?
法令行者勝하고 法令不行者敗하나니
법도와 호령이 행해지는 자는 승리하고, 법도와 호령이 행해지지 못하는 자는 패하는 것이다.
하고 之類 是法令行也
예컨대 위강魏絳양간楊干을 욕보이고 사마양저司馬穰苴장가莊賈를 목 벤 따위는, 이는 법도와 호령이 행해진 것이다.
若吏卒縱橫하여 不用將命하여 金之不止하고 鼓之不進이면 法令不行也
만약 관리와 병사들이 제멋대로 방종하여 장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 징을 쳐도 싸움을 그치지 않고 북을 쳐도 진격하지 않는다면, 이는 법도와 호령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다.
나라 이정李靖태종太宗에게 대답하기를 “돌궐突厥을 토벌할 적에 의 군대를 통솔하여 천 리 멀리 변방에 출전하였으나, 일찍이 한 명의 양간楊干을 욕보이거나 한 명의 장가莊賈를 목 베지 않고도 또한 적심赤心(衷心)을 미루어 지극히 공정함을 보존했을 뿐입니다.” 하였다.
夫魏絳, 穰苴 初命爲將하니 當時國家 威令不行하고 上下懈怠하니 楊干莊賈一不用命 而魏絳穰苴輒斬之하니
위강魏絳사마양저司馬穰苴가 처음 임명되어 장수가 되었는데, 당시 국가의 위엄과 법령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고 상하上下가 태만하였으니, 이 때문에 양간楊干장가莊賈가 한번 명령을 따르지 않자 위강魏絳사마양저司馬穰苴가 곧바로 목벤 것이다.
蓋不如是 則法令不行하고 軍不齊一하리니 何以取勝이리오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법도와 호령이 행해지지 않고 군대가 통일되지 않으니,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는가?
李靖 爲將日久하여 法令素行하고 上下相得하니 亦奚用殺哉리오
이정李靖은 장군이 된 지가 오래되어서 법도와 호령이 평소 행해지고 상하가 서로 친하였으니, 또한 어찌 죽일 필요가 있었겠는가.
楊干 悼公弟 特斬其僕耳
양간楊干도공悼公의 아우이니, 다만 그의 종을 목 베었을 뿐이다.
兵衆孰强이며
병력은 누가 더 강하며,
原注
兩國兵衆誰强
두 나라의 병력은 누가 더 강한가?
兵衆强者勝하고 兵衆弱者敗하나니
병력이 강한 나라는 승리하고 병력이 약한 나라는 패배하는 것이다.
예컨대 환공桓公이 병사 5만 명을 모집하여 제후의 패자覇者가 되었고, 문공文公이 병사를 불러 모집하여 선봉대 4만 명을 만들어서 자기의 소원을 이룩하였고, 목공穆公이 적진을 무찌르는 병사 3만 명을 배치하여 이웃 적국을 복종시켰으니, 이는 병력이 강하여 이긴 경우이다.
士卒孰練이며
사졸士卒이 누가 더 훈련되었으며,
原注
兩國士卒 誰爲練習
두 나라의 병사들이 누가 더 훈련되었는가?
士卒練習者勝하고 士卒不練習者敗하나니
병사들이 훈련된 나라는 승리하고 병사들이 훈련되지 않은 나라는 패하는 것이다.
辨旌旗하고 審金鼓하며 明開闔하고 知進退하며 閑馳逐하고 便弓矢하며 習擊刺 此練士之法也
깃발을 분별하고 징소리와 북소리를 살피며 열리고 닫힘을 밝히고 나아가고 물러감을 알며 달리고 쫓음을 익히고 활을 잘 쏘며, 치고 찌름을 익히는 것은, 이는 병사들을 훈련하는 방법이다.
賞罰孰明고하여
상과 벌이 누가 더 분명한가를 비교하여,
原注
兩國賞罰誰明
두 나라의 상과 벌이 누가 더 분명한가?
賞罰明者勝하고 賞罰不明者敗하나니
상과 벌이 분명한 나라는 승리하고 상과 벌이 분명하지 못한 나라는 패배하는 것이다.
司馬法曰 賞不踰時라하니 欲民速得爲善之利 罰不遷列이라하니 欲民速覩爲不善之害
사마법司馬法》에 이르기를 “은 때를 넘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백성들이 을 행한 이로움을 빨리 얻도록 한 것이요, “은 대열을 옮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백성들이 하지 못한 를 빨리 보도록 한 것이다.
항우項羽는 사람을 부릴 적에 마땅히 봉해주어야 하는 공이 있어도 도장이 닳도록 차마 주지 못하다가 끝내 패망하였으니, 이는 상을 분명히 하지 않은 것이요, 원제元帝홍공弘恭석현石顯소망지蕭望之를 핍박하여 죽였음을 알았으나 그 죄를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이는 형벌을 분명히 하지 않은 것이다.
吾以此知勝負矣로라
내가 이것을 가지고 승부勝負를 아노라.
原注
吾以此七計 校量之 則知彼我之勝負矣로라
내가 이 일곱 가지 계책(계산)을 가지고 비교하고 헤아려보면 적과 우리의 승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將聽吾計하여 用之必勝이어든 留之하고 將不聽吾計하여 用之必敗어든 去之니라
부하 장수가 나의 계책을 잘 따라서 그를 임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경우에는 머물러 있게 하고, 부하 장수가 나의 계책을 따르지 않아서 그를 임용하면 반드시 실패할 경우에는 떠나게 해야 한다.
原注
前將字 指大將而言이요
앞의 ‘’자는 대장大將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여기의 ‘’자는 편비偏裨의 장수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人君與大將 定計於廟堂之上이면 大將便當選偏裨之將而節制之
군주가 대장과 함께 묘당廟堂의 위에서 계책을 결정하면 대장은 곧바로 편비偏裨의 장수를 선발하여 절제節制하여야 한다.
言偏裨之將 聽信吾計하여 用之而戰 必能取勝이면 則留而任之하고
그러므로 말하기를 “편비偏裨의 장수가 내 계책을 따르고 믿어서 이들을 임용하여 싸워 반드시 승리할 수 있으면 머무르게 하여 임용하고,
偏裨之將 不聽吾計하여 用之而戰 必然取敗 則除而去之하여 不任也
편비偏裨의 장수가 내 계책을 따르지 않아서 이들을 임용하여 싸워 반드시 패망하게 되면 떠나게 하여 임용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옛날 마속馬謖제갈량諸葛亮절도節度를 어기자 제갈량諸葛亮이 그를 목 베었다.
將不聽吾計하여 用之必敗 去之也
이는 장수가 자신의 계책을 따르지 않는데 임용했다가 반드시 패하는 경우이니, 이러한 경우에는 떠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原注
○ 張預註 將字 作平聲讀하니 謂將者解也
장예張預의 주에 ‘’자를 평성平聲으로 읽었으니, ‘’자를 ‘장차’로 해석한 것이다.
孫子以此 解激吳王而求用하니
이는 손자孫子가 이것으로 오왕吳王을 격동시켜서 등용되기를 구했다는 것이다.
言吳王 將聽我所陳之計而用兵이면 則必勝이니 我乃留此矣 將不聽我所陳之計而用兵이면 則必敗 我乃去之他國이라하니
이것은 ‘오왕吳王이 장차 자신(孫子)이 말한 계책을 따라 용병用兵을 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내가 마침내 여기에 머물 것이요, 장차 내가 말한 계책을 따르지 않고 용병을 하면 반드시 패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내가 마침내 타국으로 떠나갈 것’임을 말한 것이다.
此非忠厚之心이니 恐失孫子本意로라
이는 충후忠厚한 마음이 아니니, 손자孫子의 본의를 잃은 듯하다.
孫子作此書하여 將欲傳之後世하여 爲衆人法耳
손자孫子는 이 책을 지어서 장차 후세에 전하여 여러 사람의 법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不應中間用此數語하여 解激吳王而求用이니 是亦何等心哉
그렇다면 중간에 이 몇 마디 말을 사용하여 오왕吳王을 격동시켜 등용되기를 구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이 무슨 마음이었겠는가?
予直取張賁註하고 而不取預言也로라
그러므로 나는 바로 장분張賁의 주를 취하고 장예張預의 말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況此篇 專言始計하니 首段 總言人君與大將 於廟堂之上 經此五事하고 校以七計하여 搜索彼我勝負之情하고
더구나 이 에는 오로지 ‘시계始計’만을 말하였으니, 첫 단락은 군주와 대장이 묘당廟堂의 위에서 이 다섯 가지 일을 다스리고 일곱 가지 계책을 비교해서 적과 우리가 승부하는 실정을 찾을 것을 총괄하여 말하였고,
第二段 言大將選用偏裨之將하여 而授之以計하고 第三段 言因利制權之道하니 是亦所謂計也
두 번째 단락은 대장이 편비偏裨의 장수를 가려 등용하여 계책을 내려주는 일을 말하였고, 세 번째 단락은 이로움을 따라 권변權變을 만드는 방도를 말하였으니, 이 또한 이른바 ‘’라는 것이다.
末段 總結上文하여 言得算多者勝하고 得算少者不勝하니 亦豈在夫計之外哉
마지막 단락은 윗글을 총결하여 계책(승산)을 얻음이 많은 자는 승리하고 계책을 얻음이 적은 자는 승리하지 못함을 말하였으니, 또한 어찌 ‘’의 밖에 있는 것이겠는가.
計利以聽이어든 乃爲之勢하여 以佐其外
계산하여 이롭고 또 편비偏裨의 장수가 믿고 따르거든 마침내 형세를 만들어 그 밖을 도와야 한다.
原注
計有所利 而偏椑之將 又皆聽信이어든 乃爲之勢하여 以佐助其外
계책에 이로운 바가 있고 편비偏裨의 장수가 또 모두 믿고 따르거든 마침내 형세를 만들어 그 밖을 돕는 것이다.
앞에서는 편비偏裨의 장수가 내 계책을 따른다고 말하였고, 여기에서는 계산하여 이로운데 편비偏裨가 따른다고 말한 것은 또한 호문互文이다.
勢者 因利而制權也
라는 것은 이로움을 따라 권변權變을 만드는 것이다.
原注
勢者 因其所利而制權變之道者也
라는 것은 그 이로운 바를 따라 권변權變의 방도를 만드는 것이다.
如韓信 知趙王陳餘不用李左車之計하니 我之所利也
예컨대 한신韓信조왕趙王진여陳餘이좌거李左車의 계책을 쓰지 않음을 알았으니, 이는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다.
乃敢遂下井하여 使萬人先行出하여 背水陣하고
이에 감히 마침내 정형井陘으로 내려가서 병사 1만 명으로 하여금 먼저 나가 배수진背水陣을 치게 하고,
又選二千人하여 人持一赤幟하고 山而望趙軍하고 戒曰
또다시 2천 명을 선발하여 사람마다 한 개의 붉은 깃발을 가지고 산속에 숨어 은밀히 나라 군영을 엿보게 하면서 경계하기를,
若趙空壁逐我어든 則疾入趙壁하여 拔趙幟하고 立漢赤幟라하고
‘만약 나라에서 성벽城壁을 비우고 우리를 추격하거든 너희는 빨리 나라 성벽城壁에 들어가서 나라 깃발을 뽑아버리고 우리 나라의 붉은 깃발을 꽂아놓아라.’ 하였다.
하니 因利制權之事也
다음날 한신韓信이 대장의 기와 북을 앞세우고 북을 치면서 정형井陘의 입구로 나갔으니, 이것은 이로움을 따라 권변權變을 만든 일이다.
兵者 詭道也
이라는 것은 속이는 방도이다.
原注
兵者 詭詐之道也
枝曳柴揚塵하고 하고 하고 皆用詭道以取勝也
이란 거짓으로 적을 속이는 방도이니, 예컨대 난지欒枝가 나무 섶을 끌고 가서 먼지가 일게 하고, 손빈孫臏이 군대로 하여금 아궁이의 수를 줄이고, 전단田單신명神明스런 스승을 세우고 소의 꼬리에 불을 붙이며, 한신韓信이 모래주머니로 유수濰水를 막은 따위와 같은 것은 모두 적을 속이는 방도를 사용하여 승리한 것이다.
已下十四事 亦皆詭道 卽因利制權之法也
이 아래 열네 가지 일은 모두 적을 속이는 방도이니, 바로 이로움을 따라 권변權變을 만드는 방법이다.
能而示之不能하며
그러므로 능하면 능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며,
原注
將本能而示敵以不能하나니
그러므로 장수가 본래 유능하면 적에게 능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趙奢救할새 三十里而止하고 令軍中曰 有以軍事諫者하리라하고 堅壁留二十八日不行하고 復益增壘하다
옛날 조사趙奢알여閼與를 구원할 적에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 도성인 한단邯鄲에서 30리쯤 떨어진 지점에서 멈추고, 군중軍中에 명령하기를 “감히 군대의 일을 가지고 간하는 자가 있으면 죽일 것이다.” 하고는, 성벽을 굳게 지켜 28일을 머무르며 행군하지 않고 다시 보루를 더욱 증축하였다.
秦 間使來入이어늘 趙奢善食遣之한대 間使還報秦將하니 秦將 大喜曰 夫去國三十里而軍不行하고 乃增壘하니 閼與 非趙地也라하다
나라의 간사間使가 들어오자 조사趙奢는 음식을 잘 먹여 보냈는데, 간사間使가 돌아가 이 사실을 나라 장수에게 보고하니, 나라 장수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라 군대가 도성에서 30리를 떠나 더 이상 행군하지 않고 도리어 보루를 증축하니, 알여閼與나라의 땅이 아니다.” 하였다.
趙奢旣以遣秦間하고 乃卷甲而趨之하여 一日一夜 至閼與하여 離城五十里而軍하고 發萬人하여 拒北山이러니
조사趙奢나라 간사間使를 보낸 뒤에 마침내 갑옷을 말아 〈무장을 가볍게 하고〉 급히 달려가서 하루 만에 알여閼與에 이르러 에서 50리쯤 떨어진 곳에 군대를 주둔하고 병사 1만 명을 출발시켜 북산北山에서 막게 하였다.
하니 初示以不能而後取勝也
나라 군대가 오자, 마침내 진군秦軍을 대파하여 진군秦軍알여閼與의 포위를 풀고 돌아가게 하였으니, 이는 처음에는 능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 뒤에 승리한 것이다.
用而示之不用하며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면 등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原注
本用其人이로되 而示敵以不用이니
본래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면 적에게는 등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예컨대 여몽呂蒙이 거짓으로 병을 칭탁稱託하자 손권孫權은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격문檄文을 보내 도성으로 돌아오게 하고 육손陸遜으로 여몽呂蒙을 대신하여 임무를 맡기고는 은밀히 여몽呂蒙을 보내어 관우關羽를 도모하게 하였으며,
나라가 군중에 명령하기를 “감히 무안군武安君이 장군이 된 것을 누설하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겠다.” 하여 이를 통해 조괄趙括을 패퇴시켰으며, 단기명段紀明선비鮮卑를 공격하고자 하면서 소환당한 것처럼 속인 것이 이것이다.
原注
○ 段 字紀明이니 武威姑臧人이라
단경段熲기명紀明이니, 무위武威 고장姑臧 사람이다.
初擧孝廉하여 爲憲陵園丞이라가 遷遼東屬國都尉러니 鮮卑犯塞어늘
처음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헌릉원憲陵園이 되었다가 요동속국도위遼東屬國都尉로 승진하였는데, 선비鮮卑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熲擊之할새 恐賊驚去하여 乃詐稱璽書召還하고 潛於還路 設伏하여 悉斬獲之하니라
단경段熲선비족鮮卑族을 공격할 적에 적이 놀라 도망할까 염려하여 마침내 거짓으로 황제의 친서에 의해 소환된다고 칭하고는, 돌아가는 길에 은밀히 매복을 설치하였다가 추격해오는 선비족鮮卑族을 모두 목 베거나 사로잡았다.
桓帝時人이니 後封新豊侯하니라
단경段熲 환제桓帝 때 사람이니, 뒤에 신풍후新豊侯에 봉해졌다.
近而示之遠하며
가까이 가서 습격하려 하면 멀리 떠나갈 것처럼 보이며,
原注
欲近襲敵인댄 必示以遠去之形이니
가까이 가서 적을 습격하려 하면 반드시 멀리 떠나가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如越與吳夾水相拒할새 越爲左右句卒하니 相去五里
예컨대 나라가 나라와 물을 끼고 서로 항거할 적에 나라가 좌우 구졸句卒을 편성하니, 서로의 거리가 5리였다.
夜爭鳴鼓而進하니 吳分兵禦之어늘
밤중에 다투어 북을 울리고 진격하니, 나라가 군대를 나누어 막았다.
나라는 마침내 은밀히 물을 건너 나라 중군中軍을 향해 습격해서 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又如岑彭 申令西擊而潛兵渡沔 是也
잠팽岑彭이 적의 서쪽 지역을 공격하라고 거듭 명령하고는 군대를 은밀히 출동시켜 면수沔水를 건너간 것이 이것이다.
岑彭 漢將이니 申令西擊山都縣할새 而潛兵渡하여 擊破秦豊하니라
잠팽岑彭나라(後漢) 장수이니, 서쪽으로 산도현山都縣을 공격한다고 거듭 명령하였다가 군대를 은밀히 출동시켜 면수沔水를 건너가 진풍秦豊을 격파하였다.
南郡人이니 據黎丘하여 號楚黎王이라하니라
진풍秦豊남군南郡 사람이니, 여구黎丘 땅을 점거하고 여왕黎王이라고 칭하였다.
遠而示之近하며
멀리 습격하려 하면 가까이 진격할 것처럼 보이며,
原注
欲遠襲敵인댄 必示以近進之形이니
멀리 적을 습격하려 하면 반드시 가까이 진격할 것처럼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예컨대 한신韓信임진臨晉에 군대를 크게 배치하고 배를 진열하여 반드시 건너갈 형세를 보이자 위표魏豹가 군대를 보내어 막으니, 한신韓信하양夏陽으로부터 나무통을 가지고 황하黃河를 건너 습격하여 나라 군대를 격파한 것이 이것이다.
利而誘之하며
이익으로 적을 유인하며,
原注
示以小利하여 誘彼來而破之
작은 이익을 보여주어 적을 유인하여 오게 해서 격파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목李牧이 오랑캐를 이익으로 유인하여 경내에 들어오게 하여 그 무리들을 대파하였고, 나라 사람이 매복을 설치한 뒤에 나무하는 자들을 가지고 땅 사람을 유인하여 패퇴시킨 것이 이것이다.
亂而取之하며
적을 혼란하게 하여 취하며,
原注
設計하여 亂其軍而襲取之
계책을 써서 적의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고 습격하여 취하는 것이다.
예컨대 사현謝玄부견苻堅비수淝水를 끼고 진을 쳤는데, 사현謝玄나라에게 “군대를 뒤로 물리면 싸우겠다.”고 말하자, 나라 군대가 후퇴하였다가 이로 인하여 혼란에 빠지니, 사현謝玄이 마침내 진군하여 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고,
풍이馮異적미赤眉와 싸울 적에 병사들로 하여금 모두 그 눈썹을 붉게 칠하여 서로 혼란스럽게 하고 마침내 적미赤眉의 군대를 격파한 것이 이것이다.
實而備之하며
적이 견실堅實하면 대비하고,
原注
敵人兵勢旣實이면 則當爲不可勝之計하여 以備之 是也
적의 군세가 이미 견실하면 마땅히 적이 우리를 이길 수 없는 계책을 내어 대비해야 하니, 예컨대 조사趙奢알여閼與를 구원할 적에 병력을 많이 집결하여 진지를 굳게 지키면서 나라 군대에 대비한 것이 이것이다.
强而避之하며
적이 강하면 피하며,
原注
敵人兵勢盛强이면 則且少避之
적의 군세가 강성하면 우선 잠시 피해야 한다.
예컨대 왕패王覇가 성문을 닫고 병사들을 휴식시켜서 주건周建소무蘇茂예봉銳鋒을 피하였고, 주아부周亞夫가 “나라 군대가 날래고 가벼우니 더불어 예봉銳鋒을 다투기 어렵다.” 하여 성벽을 굳게 지키고 수비하다가 나라 군대가 굶주리고 피곤해지기를 기다려서 출병하여 공격한 것이 이것이다.
怒而撓之하며
적장을 노하게 하여 흔들리게 하며,
原注
敵將剛忿이면 則辱之令怒하여 彼志氣撓惑이면 則不謀而輕進이라
적장의 성질이 강하고 쉽게 분노하거든 모욕을 주어서 노하게 하여 적장의 마음과 기운이 흔들리고 의혹되면 깊이 도모하지 않고 가볍게 진격한다.
可掩而擊之
그러므로 엄습하여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나라 사람이 완춘宛春을 사로잡아 나라를 노하게 한 것이 이것이다.
或曰 彼性剛忿이어든 我當撓惑之라하니 如後篇忿速可侮 是也
혹자는 말하기를 “적장의 성질이 강하고 쉽게 분노하면 우리가 마땅히 흔들어 의혹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뒤의 〈구변九變〉 편에 “분노하여 속히 싸우려 하면 모욕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 이것이다.
卑而驕之하며
말을 낮추어 적장이 교만하게 하며,
原注
卑辭厚賂하여 使彼志驕 志驕則怠而不爲備 可襲而破之
말을 낮추고 뇌물을 많이 주어 저들로 하여금 마음이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니, 마음이 교만해지면 게을러져서 대비하지 않으므로 습격하여 격파할 수 있는 것이다.
與東胡하니 東胡志驕하여 不爲之備하고 又求地於冒頓이어늘 하고
예컨대 묵특冒頓천리마千里馬연지閼氏동호東胡에게 주니, 동호東胡가 마음이 교만해져서 대비하지 않았고, 또다시 땅을 묵특冒頓에게 요구하자 묵특冒頓이 노하여 급습하여 멸망시켰으며,
월왕越王이 병력을 거느리고 나라에 조회할 적에 열사列士들에게 모두 선물을 주자, 자서子胥가 “이는 저들이 우리들에게 낚싯밥을 주어 이용하려는 것이다.” 하였는데,
나라가 뒤에 과연 나라에게 멸망당하였으며, 당공唐公 이연李淵이밀李密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말을 낮추어 추켜세우고 칭찬하자 이밀李密이 과연 교만해져 패망하였으니, 이러한 사례가 모두 이것이다.
佚而勞之하며
적이 편안하면 수고롭게 하며,
原注
敵人本佚이어든 當設計勞之
적들이 본래 편안하거든 마땅히 계책을 써서 수고롭게 해야 한다.
예컨대 나라 삼군三軍이 번갈아 출동하자 나라가 명령을 따름에 피폐하였고, 전풍田豊원소袁紹를 설득하여 밖으로는 영웅호걸과 결탁하고 안으로는 농사짓고 전투하는 방법을 가르친 뒤에 정예병을 선발하여 나누어 기병奇兵을 만들어서 적의 빈틈을 타 번갈아 출동하여 하남河南을 소요하게 하되, 저들이 오른쪽을 구원하면 그 왼쪽을 공격하고 저들이 왼쪽을 구원하면 그 오른쪽을 공격해서 조조曹操로 하여금 명령에 달려감에 피폐하게 만들고 조조曹操의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히 하지 못하게 하려 한 따위가 이것이다.
親而離之하며
적이 상하간에 친하거든 이간질시키며,
原注
敵人 上下相親이어든 當設計以離其心이니
적들이 상하간에 친하거든 마땅히 계책을 써서 그 마음을 이간질시켜야 한다.
具進이라가 及見使者하여는 則佯曰 吾以爲亞父使러니 今乃項王使也라하고 更以惡草具進한대 使者歸告項羽하니 羽由是不聽范增之計하고
예를 들면 항우項羽의 사신이 나라에 이르자 진평陳平태뢰太牢의 성찬을 장만하여 올리다가 사신을 보고는 거짓으로 말하기를 “나는 아보亞父의 사신인 줄 알았더니 지금 보니 바로 항왕項王의 사신이다.” 하고는 다시 나쁜 푸성귀 음식을 장만하여 올렸고, 사신이 돌아가 항우項羽에게 이 사실을 아뢰니, 항우項羽가 이로 말미암아 범증范增의 계책을 듣지 않은 것과 같다.
응후應侯가 사람을 시켜 조왕趙王에게 이간질하기를 “나라의 염장군廉將軍(廉頗)은 인물이 상대하기 쉽고 또 장차 항복할 것이니, 지금 나라는 다만 마복군馬服君(趙奢)의 아들 조괄趙括이 장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할 뿐이다.” 하니, 이에 나라가 염파廉頗를 물러나게 하고 조괄趙括을 등용한 것과 같다.
又有兩國相親하여 互相救援이어든 亦當設計離之
또 두 나라가 서로 친하여 서로 구원하거든 또한 마땅히 계책을 써서 이간질시켜야 한다.
如秦晉合兵伐鄭이어늘 鄭遣使夜出하여 說秦伯曰 今得鄭則歸於晉하리니 於秦 無益也
예컨대 나라와 나라가 군대를 연합하여 나라를 공격하자, 나라가 밤중에 사신을 내보내어 진백秦伯을 설득하기를 “지금 나라를 얻으면 나라에 귀속될 것이니, 나라에게는 유익함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를 내버려두어 동쪽 길의 주인이 되게 하는(秦나라에 복종하는 나라가 되게 하는)것만 못합니다.” 하니, 진백秦伯이 깨닫고 군대를 물린 것이 이것이다.
攻其無備하고 出其不意니라
적이 대비가 없는 곳을 공격하고 적이 예상하지 않은 곳으로 출동해야 한다.
原注
乘敵人之無備하여 攻而取之하고 出敵人之不意하여 襲而破之
적이 대비가 없는 곳을 틈타 공격하여 취하고, 적이 예상하지 않은 곳으로 출동해서 기습하여 격파해야 한다.
여몽呂蒙관우關羽가 철군한 틈을 타서 기습하여 남군南郡을 점령하고, 등애鄧艾음평陰平에서 사람이 없는 땅 700리를 행군하여 촉한蜀漢이 예상하지 않은 곳으로 출동한 것이 이것이다.
兵家之勝이니 不可先傳也니라
이는 병가兵家의 승리하는 방도이니, 미리 전해서는 안 된다.
原注
兵家取勝之道 不可先傳泄於人也
이는 병가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방도이니, 미리 남에게 먼저 전하여 누설해서는 안 된다.
夫未戰而廟算勝者 得算多也 未戰而廟算不勝者 得算少也니라
싸우기 전에 묘당廟堂에서 계산하여 우세한 자는 승산을 얻음이 많은 것이요, 싸우기 전에 묘당에서 계산하여 우세하지 않은 자는 승산을 얻음이 적은 것이다.
原注
夫未戰之하여 先於廟堂之上 以五事七計校量之하여 或得八九焉하면 得算多而必勝也 未戰之하여 先於廟堂之上 以五事七計校量之하여 或得四五焉이면 得算少而不勝也
싸우기 전에 미리 묘당廟堂의 위에서 다섯 가지 일과 일곱 가지 계책으로 비교하고 헤아려서 혹 8, 9를 얻으면 이는 승산을 얻음이 많아 반드시 승리하는 것이요, 싸우기 전에 먼저 묘당의 위에서 다섯 가지 일과 일곱 가지 계책으로 비교하고 헤아려서 혹 4, 5를 얻으면 이는 승산을 얻음이 적어서 승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多算이면하고 少算이면 不勝이어든 而況於無算乎
승산이 많으면 이기고 승산이 적으면 이기지 못하는데, 하물며 승산이 없음에랴.
原注
五事七計 得多者하고 少者 不勝하나니 而況於五事七計 全無者乎
다섯 가지 일과 일곱 가지 계책에 승산을 많이 얻은 자는 승리하고 승산을 적게 얻은 자는 승리하지 못하는 것이니, 하물며 다섯 가지 일과 일곱 가지 계책에 승산이 전혀 없는 자임에랴!
吾於此觀之하면 勝負見矣니라
내가 이것을 관찰하면 이기고 지는 것이 나타난다.
原注
吾以此五事七計 觀彼我之情이면 則勝與負見矣
내가 이 다섯 가지 일과 일곱 가지 계책을 가지고 적과 우리의 실정을 관찰하면 이기고 짐을 알 수 있다.
原注
○ 愚謂 算 卽計也 正指五事七計言이요 不可別立一意說이니 恐非孫子本意
내가 생각하건대 은 바로 이니, 바로 다섯 가지 일과 일곱 가지 계책을 가리켜 말한 것이요, 별도로 한 가지 뜻을 세워 말해서는 안 되니, 이는 손자孫子의 본의가 아닌 듯하다.
道天地將法五者 治國之常事 故曰經이요 主孰有道 至賞罰孰明七者 制勝之權法이라 故曰計 下文 皆說因利制權之事
천시天時지리地利장수將帥법령法令 다섯 가지는 나라를 다스리는 떳떳한 일이므로 이라 하였고, 어느 군주가 를 가지고 있는가로부터 은 누가 분명한가에 이르기까지의 일곱 가지는 승리를 만드는 권도權道의 법이므로 라 하였으며, 아래의 글은 모두 이로움을 따라 권도를 만드는 일을 말하였다.
孫子始計一篇之大旨 學者不可不察也니라
이는 《손자孫子》의 〈시계始計〉 한 편의 대지大旨이니, 배우는 자가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역주
역주1 : 固(진실로)와 같다.
역주2 武王……離心離德 : 《書經》 〈周書 泰誓 上〉에 “힘이 같을 경우에는 덕을 헤아리고 덕이 같을 경우에는 의를 헤아리니, 受는 신하 억만 명이 있으나 마음이 억만으로 다르지만 나는 신하 3천 명이 있는데 한마음이다.[同力度德 同德度義 受有臣億萬 有億萬心 予有臣三千 有一心]”라고 한 내용을 근거로 말한 것이다. 受는 紂王의 이름이다.
역주3 仁人之兵……手足之捍頭目而覆(부)胸臆 : 荀子(B.C. 313~B.C. 238)는 戰國時代의 思想家로 이름이 況인데 荀卿으로 불렸다. 荀子가 臨武君과 더불어 趙 孝成王 앞에서 兵法을 논할 적에 荀子가 “兵法에서 중요한 것은 백성을 잘 따르게 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자, 臨武君이 이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이에 荀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말하는 것은 仁人의 兵法과 王者의 兵法입니다. 仁人이 쓰는 兵法은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仁人은 상하가 서로 사랑하고 모든 장수들이 한마음이며, 三軍이 힘을 함께하여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이 마치 자식이 아버지를 섬기고 아우가 형을 섬기는 것과 같으며, 손과 팔이 머리와 눈을 보호하고 가슴과 배를 덮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荀子 권10 議兵》
역주4 : 부
역주5 時日支干孤虛旺相 : 時는 四時이고 日은 날짜의 日辰이며, 支는 十二支이고 干은 十干이다. 陰陽五行說에 입각하여 孤虛는 철이나 日辰에 도와줌이 없음을 이르고, 旺相은 기운이 왕성하고 다른 기운이 도와줌이 있음을 이른다.
예컨대 日辰에 甲子가 든 10일 동안은 戌‧亥가 孤이고 辰‧巳가 虛가 된다. 日辰을 10일 단위씩 끊어 甲子旬中, 甲戌旬中, 甲申旬中으로 표시하는데, 甲子旬中에는 戌‧亥의 日辰이 없으므로 孤라 한 것이고 辰‧巳는 戌‧亥와 상대가 되는데, 戌‧亥가 없으므로 虛라 한 것이다. 그리하여 甲戌旬中에는 申‧酉가 孤이고 寅‧卯가 虛이며, 甲申旬中에는 午‧未가 孤이고 子‧丑이 虛이다.
旺相은 해당 方位와 日辰에 왕성한 것으로, 子는 北方, 午는 南方, 卯는 西方인데, 東方 木은 卯가 旺相이고 南方 火는 午가 旺相이고 西方 金은 酉가 旺相이고 北方 水는 子가 旺相이다.
이에 대하여 南塘 韓元震은 “兵法에 ‘孤를 등지고 虛를 공격하면 승리한다.’ 하였으며 예컨대 甲子旬中(甲子‧乙丑‧丙寅‧丁卯‧戊辰‧己巳‧庚午‧辛未‧壬申‧癸酉의 일진)에는 戌‧亥의 방위를 등지고 辰‧巳의 방위를 공격하는 것이요 ‘旺을 타고 쇠진하는 곳을 공격하면 승리한다.’고 하였으며, 예컨대 봄에 전투할 경우 木氣를 타야 하므로 東을 등지고 西를 공격하는 것이다.[兵法云 背孤擊虛則勝 如甲子旬中 則背戌亥方而擊辰巳方 是也 乘旺擊衰則勝 如春戰則乘木氣 背東擊西 是也]” 하였다.
한편 雙峰饒氏(饒魯)는 “봄은 木에 속하니 甲‧乙의 木은 丙‧丁의 火를 낳는바, 이는 木이 旺이고 火가 相이며, 金은 이때에 이르면 쇠하니, 이 때문에 孤가 되는 것이다. 水는 母가 되고 木은 子가 되니, 자가 實하면 母가 虛해진다. 水가 여기에 이르면 이 때문에 虛가 되는 것이다.[春屬木 甲乙木生丙丁火 是木旺而火相 金到這裏衰 所以孤 水爲母 木爲子 子實則母虛 水到此 所以虛] 《孟子集註詳說》
陰陽五行說에서 水는 木을 낳고 木은 火를 낳고 火는 土를 낳고 土는 金을 낳고 金은 水를 낳고 水는 다시 木을 낳는바, 水가 母이면 木은 子이며, 木이 母이면 火가 子인데,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모두 영양소를 빼앗기므로 자식이 충실하며 어머니가 허약하다 한 것이다.
역주6 歲星在越而吳伐之……歲星福越而禍吳 : 歲星은 木星의 고대 이름으로 五星 중의 하나인데, 五行說에 있어 나무에 해당하므로 木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黃道 위를 약 12년 주기로 이동하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黃道上 목성의 위치에 따라 해의 이름을 정하는 紀年法이 행하여졌기 때문에 歲星이라고 하였다. 術數家들은 歲星을 君王의 상징으로 여겨, 諸神을 인솔하여 방위를 올바르게 하고 四季를 순환시키는 별로 중시하고, 특히 그 방위를 범하는 것을 금기로 여겼다. 闔廬는 闔閭로도 표기하는바, 吳王 光의 별칭이다.
본문의 내용은 春秋時代 말기에 歲星이 越나라의 分野에 있었는데, 吳나라가 越나라를 정벌하여 禁忌를 범하였으므로 뒤에 吳나라가 越나라에게 패망하였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昭公 32년에 “여름에 吳나라가 越나라를 정벌하였으니, 이는 吳나라가 처음으로 군대를 이용하여 越나라를 정벌한 것이다. 晉나라의 史墨이 말하기를 ‘40년이 되지 않아 越나라는 吳나라를 점령할 것이다. 越나라가 歲星을 얻었는데 吳나라가 越나라를 정벌하였으니, 반드시 화를 당할 것이다.’ 하였다.[夏吳伐越 始用師於越也 史墨曰 不及四十年 越其有吳乎 越得歲而吳伐之 必受其凶]”라고 보이는데, 그 후 과연 史墨의 예언대로 오나라는 월나라에게 패망하였다. 昭公 32년은 B.C. 510년이다.
역주7 漢高入關之年……而秦見滅 : 漢高는 漢나라를 일으킨 高祖 劉邦이다. 처음에는 沛公으로 있다가 漢王이 되고 楚 覇王인 項羽와 천하를 놓고 패권을 다투다가 垓下의 一戰으로 천하를 통일하였다. 東井은 별자리 이름으로 28宿 가운데 하나인데, 玉井의 동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B.C. 206년 겨울 10월에 五星이 東井에 모였는데, 당시 沛公으로 있던 劉邦이 군대를 이끌고 覇上에 이르자, 秦王 子嬰이 흰 수레에 白馬를 멍에하고 자신의 목을 끈으로 옭아맨 다음 皇帝의 玉璽와 符節을 봉함하여 枳道 곁에서 항복하였다. 《漢書 권1 高帝紀》
역주8 周武……以甲子日興師而敗 : 甲은 天干의 첫 번째이고 子는 地支의 첫 번째로서, 이 甲子日은 陰陽家에서 말하는 출행하면 길한 날이다. 그런데 이 甲子日에 商(殷)나라 紂王과 周 武王이 싸워 紂王은 패배하고 武王은 승리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紂王과 武王이 甲子日에 싸운 것은 《書經》 〈周書 牧書〉에 보인다.
역주9 宋劉裕……以往亡日而勝 : 往亡日은 陰陽家에서 말하는 출행하면 불길한 날로, 天門日이라고도 하는데 정월은 寅日, 2월은 巳日, 3월은 申日, 4월은 亥日, 5월은 卯日, 6월은 午日, 7월은 酉日, 8월은 子日, 9월은 辰日, 10월은 未日, 11월은 戌日, 12월은 丑日이며, 또 驚蟄이 지난 뒤 14일째 되는 날이라 한다. A.D. 410년 丁亥 往亡日에 宋나라 劉裕와 南燕의 慕容超가 대전하였는데, 劉裕는 승리하였고 慕容超는 패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당일에 劉裕가 병력을 총동원하여 南燕을 공격하니, 어떤 사람이 ‘오늘은 往亡日이라 출병하기에 불리합니다.’라고 하였으나, 劉裕는 ‘내가 가면 저들이 패망하는데 무엇이 불리하겠는가.’ 하고 적에게 맹공을 가하여 南燕을 멸망시켰다. 《資治通鑑 권114 晉紀 安皇帝》
역주10 陰陽寒暑……此皆不順天時而受害者也 : 學海堂 趙羲純의 《孫子髓》에 “‘時制’란 陰陽과 寒暑를 때에 따라 마땅하게 조처하는 것이니, 비가 내리고 날씨가 개는 것이 때에 맞고 더위와 추위가 시절에 응하며 농사가 풍년이 들고 백성들이 질병으로 일찍 죽는 자가 없는 것을 이른다.[時制者 陰陽寒暑 以時制宜也 謂雨暘時若 舒慘應令 年穀豊登 民無夭札也]”라 하였는데, 舊註에 “時는 일진의 干支이고 制는 五行의 剋制라 하였으니, 크게 잘못되었다.”라고 비판하였다. 이는 劉寅의 《孫武子直解》에 비하여 훨씬 더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역주11 漢征匈奴 士卒墮指 : 漢 高祖가 중원을 통일하고 얼마 후에, 匈奴의 冒頓單于가 精兵을 이끌고 중원을 침략하여 句注山을 넘어 太原을 함락시키고 마침내는 晉陽城 밑까지 육박하였다. B.C. 200년, 高祖는 친히 匈奴를 정벌하고자 출병하였는데, 때마침 겨울이라 추위가 심하고 큰 눈이 내려, 많은 병사가 동상에 걸려 손가락이 떨어질 정도였다. 高祖는 平城에 이르러 匈奴의 유인책에 걸려서 본진과 떨어진 채 白登山에서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궁지에 빠졌는데, 陳平의 계책으로 冒頓單于의 왕후인 閼氏에게 후한 뇌물을 주고 겨우 포위망을 빠져나와 목숨을 구했으며 결국 불리한 조건을 무릅쓰고 匈奴와 화친하였다. 《史記 권110 匈奴列傳》
역주12 馬援征蠻 衆多疫死 : 馬援(B.C. 14〜49)은 後漢 光武帝 때의 명장으로 太中大夫와 隴西太守를 지냈다. 伏波將軍에 임명되어 交趾 지방에서 봉기한 徵側‧徵貳 자매의 반란을 토벌하고, 하노이 부근의 浪泊까지 진출하여 남방을 평정한 공로로 B.C. 43년 新息侯에 봉해졌으며, 북방의 匈奴와 烏丸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남방의 武陵蠻을 토벌하러 출정하였다가 험로에 막혀 진격하지 못하고 열병 환자가 속출하여 고전하다가 많은 병사를 잃고 자신도 진중에서 병들어 죽었다. 《後漢書 권24 馬援列傳》
역주13 曲……謂計度(탁)費用之物 : 《孫武子直解》는 張預의 해석을 따라 여섯 가지로 나누었으나, 《孫子髓》에는 “본문의 曲制, 官道, 主用은 部曲(부대)에는 각기 節制(통제)가 있고 百官은 각기 자기 도리를 따르고 軍用은 오로지 주장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部曲各有節制 百官各遵其道 軍用專有主者]”라고 하고, 여섯 가지로 나눈 張預의 說을 비판하면서 “‘主’를 군수물자를 관장하는 사람이라 하고, ‘用’을 사용하는 물건을 계산하고 헤아리는 것이라 하였으니, 주장하는 자와 군대에 사용하는 물건을 어찌 나누어 둘로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논박하였다.
역주14 : 탁
역주15 漢高入關……秦人大失望 : B.C. 206년, 子嬰이 秦王이 된 지 46일 만에, 楚나라의 장수인 沛公(高祖)이 秦軍을 격파하고 武關을 통과하여 咸陽으로 들어가 覇上에 이르니, 子嬰이 자신의 목을 끈으로 옭아맨 채, 천자의 옥새와 부절을 받들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에 沛公이 咸陽에 들어가 宮室과 府庫를 봉인한 다음, 일체의 살상을 저지르지 않고 覇上으로 군대를 철수시키니, 秦나라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한 달 뒤에 諸侯들의 맹주가 되어 연합군을 이끌고 함양에 이른 項羽가 子嬰과 秦나라의 여러 公子들과 宗親들을 죽이고 咸陽의 백성들을 도륙하는 한편, 宮室을 불태우고 珍寶와 재화를 거두어 諸侯들과 함께 나누어 가지니, 秦나라 백성들이 크게 실망하였다. 《史記 권6 秦始皇本紀》
역주16 漢王……安能當吾韓信 : B.C. 205년 8월에 魏王 豹가 배반하자, 漢王(劉邦)은 韓信으로 하여금 魏나라를 정벌하게 하면서 酈食其에게 魏나라의 大將이 누구인지를 물으니, ‘柏直’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漢王은 “柏直은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나는 어린애 같은 자이니, 韓信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뒤에 과연 韓信이 기습 공격으로 魏軍을 대파하고 魏王 豹를 사로잡았다. 《漢書 권1 高帝紀》
역주17 曹操盛冬伐吳 : 後漢 獻帝 建安 13년(208) 7월, 漢나라 丞相 曹操가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남방에서 할거하고 있는 劉表와 劉備, 孫權을 정벌하고자 南征하여, 9월에 新野를 점령하고 劉備를 夏口로 패주시킨 다음 江陵으로 진군하여 한겨울인 12월에 赤壁江에서 孫權과 劉備의 연합군과 대치하였다. 이때 전염병이 크게 유행해서 병사들이 많이 죽어 사기가 크게 떨어져 孫權과 劉備의 연합군에게 火攻을 당하여 대패하고 회군하니, 이를 赤壁大戰이라 하는바, 이로 인해 魏‧吳‧蜀漢의 삼국시대가 정립되었다. 《三國志 권1 武帝紀》
역주18 慕容超不據大峴山 : 慕容超는 五胡十六國時代 南燕의 군주로 鮮卑族이다. 東晉 安帝 義熙 5년(409)에 慕容超가 淮水 북안 지역을 대거 약탈하자, 東晉의 劉裕가 북벌을 개시하여 水軍 船團은 淮水와 泗水를 거쳐 下邳에 이르고 步軍은 琅邪로 진군하였다.
東晉軍이 곧 당도할 것이라는 보고가 올라오자, 南燕의 大將 公孫五樓는 “마땅히 大峴을 차단하고 여기에 웅거하여 농작물을 베어버리고 성벽을 견고히 지키면서 저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저들은 싸우려 해도 싸울 수가 없어 열흘이나 달포 사이에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慕容超는 따르지 않고 “저들은 멀리 와서 피로하여 형편상 오래가지 못한다. 다만 저들로 하여금 大峴을 넘어오도록 하였다가 내가 鐵騎로 짓밟아버릴 것이니, 격파하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 없다. 어찌 미리 농작물을 베어버려 먼저 위축되고 나약함을 보이겠는가?” 하였다.
劉裕가 진군하려 하자, 논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적들은 우리 大軍이 멀리 출동하였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싸우지 않으려 할 것이니, 만약 大峴을 차단하지 않으면 廣固를 굳게 지키고 농작물을 베어 들판을 깨끗이 비워버릴 것이니, 성공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장차 스스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劉裕는 “나는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鮮卑族들은 탐욕스러워서 원대한 계책에 미치지 못한다. 나아갈 적에는 포로를 잡는 것을 이익으로 여기고 물러갈 적에는 농작물을 아깝게 여긴다. 우리의 고립무원한 군대가 멀리 들어와서 지구전을 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나오면 臨朐에 웅거하고 물러나면 廣固를 지키는 데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일단 大峴으로 들어가면 병사들은 후퇴할 마음이 없어질 것이다. 필사의 무리를 휘몰아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오랑캐를 향하여 전진한다면, 어찌 이기지 못함을 걱정하겠는가. 저들은 들판을 비우고 굳게 지키는 작전을 쓰지 못할 것이니, 나는 제군들에게 장담한다.” 하였다. 劉裕는 大峴에 들어가자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나의 일이 성취되었다.’ 하였는데, 과연 그의 예상대로 南燕을 대파하여 멸망시켰다. 《宋書 권1 本紀 第2 武帝 上》
南燕은 五胡十六國 때에 鮮卑族이 세운 나라이다.
역주19 魏絳戮楊干 : 魏絳은 春秋時代 晉 悼公 때의 名將이고 楊干은 悼公의 아우이다. B.C. 571년 晉나라가 諸侯들과 會盟할 적에 魏絳이 일을 주관하였는데, 楊干이 법을 어지럽히자 차마 楊干을 죽이지 못하고 대신 그의 馬夫를 斬首하여 기강을 세웠다. 이 사실을 알고 悼公이 노하여 魏絳을 처벌하려 하자, 어떤 사람이 悼公에게 간언을 올렸는데, 悼公은 즉각 자신의 잘못을 알고 곧 魏絳에게 정사를 맡겨 마침내 그의 도움으로 覇業을 이룩하였다. 《史記 권44 魏世家》
역주20 穰苴斬莊賈 : 穰苴는 春秋時代 齊 景公 때의 名將으로 姓이 田氏인데, 뒤에 司馬 벼슬을 하여 司馬氏가 되었다. 莊賈는 景公이 총애하는 신하이다. 晉나라와 燕나라가 연합하여 齊나라를 침공하자, 景公이 名相 晏嬰의 천거로 당시 미천하였던 穰苴를 大將으로 기용하였는데, 穰苴가 “저는 천한 신분이라서 권위가 미약하니, 주군이 총애하는 신하를 監軍으로 삼아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景公은 이에 莊賈로 하여금 동행하도록 하였다. 穰苴는 莊賈에게 다음날 정오에 軍門에 이르도록 명령을 내렸는데, 莊賈가 전별 잔치에 참여하여 술을 마시느라 명령을 어기고 저녁나절에야 軍門에 당도하였다. 穰苴는 軍法을 담당한 軍正을 불러서 “軍法에 시간을 어긴 죄는 어디에 해당하는가?” 하고 물으니, 軍正은 “斬首에 해당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莊賈는 두려워서 종자를 시켜 景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구명을 청하였으나, 穰苴는 종자가 돌아오기 전에 莊賈의 목을 베고 이 사실을 三軍에 선포하니, 三軍의 士卒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복종하여 군의 기강이 엄히 서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燕‧晉 두 나라는 더 이상 침공하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史記 권64 司馬穰苴列傳》
역주21 唐李靖……存至公而已矣 : 李靖(571〜649)은 唐나라 초기의 名將으로 衛國公에 봉해져 李衛公으로 불리는바, 그가 太宗과 문답식으로 兵法을 논한 것이 《李衛公問對》로 武經七書 중의 하나이다.
원문은, 唐 太宗이 李靖에게 “蕭銑을 평정할 적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반역자들의 재산을 적몰하여 장병들에게 상으로 주려고 하였으나, 그대는 홀로 따르지 않았는데, 얼마 후 長江과 漢水 지역이 귀순하였다. 古人의 말에 ‘文은 능히 무리를 귀순하게 하고 武는 능히 敵을 위엄에 떨게 한다.’ 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卿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라고 한 말에 대답한 내용으로, 자신은 장군이 된 지 오래되어 엄격한 처벌을 시행하지 않고 오로지 공정함만을 가지고도 법도와 호령이 행해질 수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李衛公問對 卷中》
역주22 齊桓募士五萬……以服隣敵 : 이 내용은 魏 武侯가 ‘군대를 양성하고 인재를 등용하며 국방을 튼튼히 하는 방도’를 물은 데 대한 吳起의 답변에 나오는 말로, 자세한 내용은 《吳子》 〈圖國〉 참조. 吳起(B.C. 440〜B.C. 381)는 춘추시대 衛나라 출신의 장군이자 兵法家로 《吳子》의 저자이다.
역주23 項羽使人有功當封……卒以取敗 : 漢王(劉邦)이 漢中으로 들어갈 적에 蕭何의 천거로 無名의 韓信을 大將에 임명하고 韓信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韓信이 아뢰기를 “大王께서 천하의 권세를 다투는 상대인 項王(項羽)은 용맹과 어짊과 굳셈이 大王보다 더 낫습니다. 項王은 호령을 하면 천 명의 정신을 잃게 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으나, 현명한 장수를 믿어서 맡기지 못하므로 그의 용기는 匹夫의 용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項王은 공손하고 정중한 태도와 부드러운 언어로 사람을 대하며, 사람이 병에 걸렸을 경우에는 흐느껴 울며 자기가 먹을 음식을 나누어주나, 사람을 부림에 있어서는 공을 세워서 땅을 떼어 봉해주어야 할 경우에 印章을 새겨두고서도 그 모서리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차마 주지를 못 하고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이는 이른바 부인의 어짊이란 것이어서, 그의 강성함은 쉽게 쇠약해질 수 있습니다. 大王께서는 일체 이와 반대로 하십시오.” 하였다. 그 후 項羽는 과연 韓信의 예언대로 쉽게 쇠약해져서 垓下의 一戰으로 패망하고 천하를 高祖에 내주고 말았다. 《史記 권92 淮陰侯列傳》
역주24 漢元帝……而不能正其罪 : 蕭望之(B.C. 106〜B.C. 47)는 前漢 元帝의 師傅인데, 元帝의 宦官인 弘恭‧石顯의 모함을 받아 자살하였다. 元帝는 蕭望之가 죽은 뒤에 이 사건이 弘恭과 石顯의 모함과 핍박에 의한 것임을 알고 이를 몹시 후회하였으나, 끝내 弘恭과 石顯의 죄상을 규명하여 처벌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후 宦官이 國權을 專橫하는 폐단을 야기하였으며, 前漢은 결국 外戚인 王莽이 찬탈함으로써 멸망하게 되었다. 《漢書 권78 蕭望之傳》
역주25 此將字 指偏裨之將而言也 : 《孫子髓》에는 “舊註에 본문의 ‘將聽吾計’의 將을 偏裨의 장수라 하였으니, 잘못이다. 이 篇은 廟堂의 算(계산, 승산)을 가지고 말하였으니, 計는 군주에게서 나오고 장수는 오로지 정벌만 하는 장수(대장)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역주26 馬謖……亮斬之 : 馬謖(190〜228)은 삼국시대 蜀漢의 장수로, 諸葛亮의 총애를 받았다. 建興 6년(228)에 諸葛亮이 魏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漢中을 나서 祁山으로 향할 적에, 사람들은 경험이 많은 魏延 등을 先鋒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으나, 諸葛亮은 평소에 아끼던 馬謖을 선봉으로 발탁하여 魏나라 장수 張郃과 街亭에서 싸우도록 하였는데, 馬謖이 諸葛亮의 지휘를 어기고 山 위에 진을 쳤다가 張郃에게 대패하였다. 이에 諸葛亮은 진격하여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退軍하여 漢中으로 돌아왔으며, 馬謖은 옥에 갇혀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로 ‘泣斬馬謖’의 故事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諸葛亮이 직접 馬謖을 斬首刑에 처한 것은 아니다. 《三國志 권39 董劉馬陳董呂傳》
역주27 前言將聽吾計……亦互文耳 : 互文은 서로 보완되는 내용을 두 句에 나누어 쓰게 될 경우, 각각의 句에 서로 보완되는 상이한 내용을 쓰는 문체를 이른다. 즉 大將인 자신이 적과 우리의 형세를 잘 헤아려 유리한데 부하 장수들이 자신의 계책을 잘 따름을 말한 것으로, 앞의 ‘將聽吾計’도 부하 장수들이 무턱대고 나(大將)의 계책을 잘 따르는 것이 아니고 大將의 철저한 계산에 의한 계책을 따름을 말한 것이다.
역주28 : 형
역주29 : 폐
역주30 韓信……鼓行出井陘口 : 漢 高祖와 楚 覇王인 項羽가 천하를 다툴 적인 B.C. 204년에, 漢나라 將軍인 韓信이 張耳와 함께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趙나라를 공격하니, 趙王 歇과 成安君 陳餘가 이 말을 듣고 병력을 井陘 어구에 집결시키고 20만 대군이라 하였다.
이때 廣武君 李左車가 成安君에게 “井陘의 길이 좁아 漢軍의 양식이 반드시 그 후미에 있을 것이니, 奇兵 3만 명을 저에게 빌려주시어 샛길로 漢軍의 보급로를 끊게 하고 足下는 垓子를 깊게 파고 堡壘를 높이 쌓아 저들과 싸우지 않으시면 10일이 못 되어 두 장수의 머리를 휘하에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청하였으나, 成安君은 廣武君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첩자로부터 이 보고를 들은 韓信은 과감히 井陘의 좁은 길로 내려가서 背水陣을 치고, 또 2천 명의 정예병을 선발하여 은밀히 보내면서 “너희는 각기 붉은 漢나라 깃발 한 개씩을 가지고 숲 속에 은신하여 있다가 내가 패전하여 도망가면 趙나라 병사들이 성벽을 비우고 추격할 것이니, 이 틈을 타서 趙나라 성벽으로 들어가 趙나라의 깃발을 모두 뽑아버리고 우리 漢軍의 붉은 깃발을 꽂아라.” 하였다.
趙나라 장병들은 韓信이 背水陣을 친 것을 보고는 兵法을 모르는 자라고 비웃었다. 韓信이 趙軍을 맞아 출전하였다가 거짓으로 大將軍의 깃발과 북을 버리고 도망하니, 趙나라 병사들은 성벽을 비우고서 漢나라의 북과 깃발을 다투어 취하고 韓信을 추격하였다. 韓信을 추격하던 趙軍은 韓信이 背水陣을 친 진영으로 들어가 결사적으로 싸우므로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자기들 성벽으로 돌아가면서 바라보니, 성벽은 이미 漢軍이 점령하여 붉은색의 깃발이 꽂혀있었다. 趙軍이 이것을 보고 우왕좌왕하자, 漢나라 군대가 협공하여 趙軍을 대파하고, 陳餘를 참수하고 趙王 歇을 사로잡아 趙나라를 점령하였다. 《史記 권92 淮陰侯列傳》
역주31 欒(란)枝曳柴揚塵 : 春秋時代인 B.C. 632년 여름 4월에 晉나라 군대가 莘北에 진을 치고 楚軍과 싸울 적에 晉나라 장군 欒枝가 戰車에 나무 섶을 매달아 먼지를 일으켜 달아나는 것처럼 위장하니, 楚軍이 이를 추격하였다. 이에 原軫과 郤溱이 中軍의 公族을 이끌고 楚軍의 측면을 공격하고, 狐毛와 狐偃이 上軍을 이끌고 楚軍을 통솔하는 子西를 공격하여 楚나라의 左師가 궤멸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 28년》
역주32 : 란
역주33 孫臏令軍減竈 : 孫臏은 戰國時代 齊나라 출신의 將軍이자 兵法家인 孫武의 손자이고, 손무와 같이 孫子로 불리는바, 《孫臏兵法》의 저자이다. 戰國時代 초기인 B.C. 341년, 魏나라가 趙나라와 연합하여 韓나라를 공격하자, 韓나라는 齊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齊나라는 田忌를 장수로 삼고 孫臏을 軍師로 삼아 韓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이때 孫臏은 魏나라 군대가 사납고 용맹하여 齊나라의 군대를 경시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이용하기 위해, 齊軍으로 하여금 魏나라 땅에 들어가 첫날에는 10만 개의 아궁이를 만들게 하고, 다음날에는 5만 개, 또 다음날에는 3만 개로 차츰 줄여서, 적에게 아군이 약하여 도망자가 속출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에 魏나라 장수 龐涓은 사흘 만에 齊나라 병사가 대부분 이탈하여 齊軍의 군세가 보잘것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소수의 경무장한 기병만 거느리고 행군 속도를 배가하여 齊軍을 추격하다가, 馬陵에서 齊軍의 매복공격에 빠져 큰 타격을 입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니, 齊나라는 이로 인하여 승세를 타고 魏나라 군대를 대파하였다. 《史記 권65 孫子列傳》
마지막에 줄인 아궁이의 숫자에 대해서는 《通鑑節要》와 《史記》의 내용이 다른데, 《通鑑節要》에는 2만으로 되어있다.
역주34 田單神師火牛 : 田單은 戰國時代 齊나라의 먼 王族으로 燕나라에게 거의 멸망하게 된 나라를 구한 명장이다. 神師는 神明스러운 스승을 가리키며, 火牛는 소의 머리에 칼날을 꽂아놓고 꼬리에 불을 붙여 적진으로 치닫게 한 일을 가리킨다.
B.C. 279년 齊軍이 卽墨에서 燕軍에 포위되어 농성전을 벌일 적에 田單은 城 안의 군대와 백성들에게 끼니마다 뜰에 음식을 차려놓고 祖上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러자 새들이 모두 내려와 이 음식을 먹었다. 성 밖의 燕軍이 새떼가 성 안으로 날아가 내려앉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자, 田單은 “神明께서 내려오셔서 우리를 가르쳐주시는 것이다.”라고 선전하는 한편, 성 안의 군대와 백성들에게도 “神明이 오셔서 우리의 스승이 되실 것이다.”라고 말하고, 병졸 한 사람을 데려다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군령을 내릴 적마다 반드시 神師의 지시라고 일컬어 군대와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田單은 한편으로 반간계를 써서 燕나라의 명장 樂毅를 물러나게 하고, 성 안에서 천여 마리의 소를 모아서 그 위에 얼룩덜룩한 龍의 무늬를 그린 옷을 입히고 뿔에 날카로운 칼날을 묶은 다음, 갈대를 쇠꼬리에 묶어 기름을 붓고 그 끝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성벽에 수십 개의 구멍을 뚫어 한밤중에 소를 풀어놓고 壯士 5천 명이 그 뒤를 따르게 하니, 소들은 꼬리가 뜨거워지자 성이 나서 燕軍의 陣中으로 돌진하였다. 燕軍은 한밤중에 기습 공격을 받고 큰 혼란에 빠졌다.
齊나라의 壯士 5천 명이 재갈을 물고 은밀히 출동하여 燕軍을 공격하였으며, 성중에서는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노약자들도 모두 구리그릇을 두드려 소리를 내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에 燕軍은 대패하고 大將 騎劫도 전사하였는바, 齊나라는 이후 승승장구하여 이전에 잃었던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다. 《史記 권82 田單列傳》
역주35 韓信囊沙壅水 : B.C. 205년, 漢나라의 韓信이 濰水에서 楚나라 장수 龍且를 水攻으로 궤멸시킨 사건이다. 韓信이 齊나라를 공격하여 臨淄를 함락시키고 齊王을 추격하자, 項羽가 자신의 막하 장수인 龍且로 하여금 이를 구원하게 하여, 濰水를 끼고 서로 대치하였다. 龍且는 평소 韓信을 輕視하여 전면전으로 韓信軍을 섬멸하고자 하였다. 韓信이 밤에 사람을 시켜 1만여 개의 주머니(포대)를 만들어 江의 상류를 막고 병사를 이끌고 강을 반쯤 건너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후퇴하였다. 龍且가 기뻐하면서 “韓信이 겁쟁이인 것은 평소에 알고 있었다.”라고 하며 공격 명령을 내려 추격하게 하였다. 韓信이 사람을 시켜 막아놓았던 물을 터놓으니, 물이 크게 흘러 龍且의 군대가 대혼란에 빠졌다. 이에 韓信이 반격을 가하여 龍且를 죽이고 楚軍을 대파하였다. 《史記 권93 淮陰侯列傳》
역주36 : 알
역주37 領兵去邯鄲 : 한단
역주38 趙奢救閼(알)與……解閼與而還 : 趙奢는 戰國時代 趙나라의 名將으로 馬服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秦나라가 韓나라를 치기 위해 閼與로 진군해 오자, 趙王은 趙奢를 將軍으로 임명하여 閼與를 구원하도록 하였다. 趙奢는 “병력을 많이 집결하여 진지를 견고히 지키면서 秦軍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秦軍을 이길 수 있다.”는 許歷의 간언에 따라 성벽을 굳게 지키고 28일을 머물며 행군하지 않고 보루를 더욱 증축하였다. 趙軍의 實情을 탐색하기 위해 秦나라의 間使(첩자로 온 使者)가 오자 趙奢는 그가 첩자임을 모르는 것처럼 하고 잘 대접하여 보냈는데, 間使가 돌아가 이러한 사실을 秦나라 장수에게 보고하니, 秦나라 장수는 趙奢가 싸울 뜻이 없는 것으로 오판하고 방심하였다. 趙奢는 間使를 보내자마자, 갑옷을 말아 〈무장을 가볍게 하고〉 급히 행군하여 秦軍보다 한발 앞서 전투에 유리한 고지인 北山을 선점하고 秦軍을 대파하여 閼與의 포위를 풀게 하였다. 《史記 권81 廉頗藺相如列傳 附 趙奢》
역주39 呂蒙詐稱病……陰遣蒙圖羽 : 三國時代에 吳나라의 장수 呂蒙이 魯肅을 대신하여 關羽가 수비하고 있는 荊州의 접경지대인 陸口에 부임하자, 關羽는 呂蒙을 경계하여 魏나라의 樊城을 토벌하면서도 많은 장병을 잔류시켜 公安과 南郡을 방비하게 하였다.
이에 呂蒙은 孫權에게 상소하여 吳나라가 배후를 도모할 것을 염려하는 關羽를 안심시키기 위해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都城인 建業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원하자, 孫權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격문을 보내 呂蒙을 都城으로 불러들이고 陸口의 守將을 陸遜으로 교체하였다. 陸口로 부임한 陸遜이 關羽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의 공로와 훌륭한 덕을 칭송하고 깊이 겸양하여 충심을 다해 스스로 의탁하려는 뜻을 표명하니, 關羽가 안심하고 차츰 수비병을 철수하여 樊城으로 집결하였다.
이에 呂蒙은 정예병을 배 안에 숨겨 이들을 장사꾼으로 위장하고, 주야로 배를 몰아 關羽가 설치해둔 강변의 초소와 망대들을 기습 점거하였다. 關羽는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吳軍에게 公安과 南郡을 빼앗기고 마침내는 荊州 전역을 잃게 되었다. 《三國志 권54 呂蒙列傳》
역주40 有敢泄武安君……因敗趙括 : 戰國時代인 B.C. 260에 秦나라 장수 王齕이 趙나라를 공격하였으나 趙나라의 명장 廉頗의 수비 전술에 막혀 승기를 잡지 못하였다. 이에 應侯(范睢)가 趙나라에 諜者를 보내 “秦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馬服君(趙奢)의 아들 趙括이 장수가 되는 것일 뿐이니, 廉頗는 상대하기 쉽고 장차 항복할 것이다.”라고 反間計를 퍼뜨렸다.
趙王은 이에 속아 廉頗 대신 趙括을 장수로 임명하여 秦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秦王은 이 소식을 듣자 백전노장인 武安君 白起를 上將軍으로 삼고, 軍中에 “武安君이 장수 된 것을 감히 누설하는 자가 있으면 斬刑에 처하겠다.”는 영을 내렸다. 秦軍을 얕잡아본 趙括은 마음 놓고 出兵하여 秦軍을 공격하다가 거짓으로 敗走하는 秦軍의 계책에 빠져 자신은 전사하고 趙軍 40만은 포로가 되어 모두 구덩이에 파묻혀 죽임을 당하였다. 《史記 권73 白起列傳》
역주41 段紀明……而詐爲召還 : 紀明은 後漢 桓帝 때의 장수인 段熲(?〜179)의 字이다. 그가 遼東屬國都尉로 부임하였을 때 鮮卑族이 국경을 침범하자, 즉시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출동하였는데, 이미 적들은 달아나버린 뒤였다. 이에 段熲은 파발마를 위장해 황제의 가짜 璽書를 전달하게 하여 황제가 단경에게 돌아오라는 詔書를 내린 것처럼 꾸미고는, 퇴각하였다가 몰래 돌아와서 매복하였다. 이에 속은 오랑캐들이 곧바로 경내로 진입하여 段熲을 추격하다가 매복에 빠져 궤멸되었다. 《後漢書 권65 段熲列傳》
역주42 : 경
역주43 越與吳夾水相拒……襲破吳兵 : 句卒은 陣法의 이름으로, 三軍 외에 별도로 左‧右의 偏師를 두어 虛張聲勢하여 적을 유인해서 적으로 하여금 左‧右로 대응하게 함으로써 兵力을 분산시키는 술책이다.
《春秋左氏傳》 哀公 17년에 “3월에 越子가 吳나라를 공격하자, 吳子가 笠澤에서 방어하여 물을 끼고 대진하였다. 이때 越子가 左右의 句卒을 만들어 한밤중에 혹은 왼쪽으로 혹은 오른쪽으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니, 吳나라에서는 군대를 나누어 방어하였다. 이에 越子는 은밀히 笠澤을 건너가 吳나라의 中軍을 향해 진격하니, 吳軍이 크게 혼란하여 마침내 패주하였다.[三月 越子伐吳 吳子禦之笠澤 夾水而陳 越子爲左右句卒 使夜或左或右 鼓譟而進 吳師分以御之 越子以三軍潛涉 當吳中軍而鼓之 吳師大亂 遂敗之]”라고 보인다.
越子는 越王 句踐이고, 吳子는 吳王 夫差이다.
역주44 : 면
역주45 韓信……襲破魏兵 : 漢 高祖 2년(B.C. 205) 魏王 豹가 漢나라를 배반하자, 高祖(劉邦)가 韓信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魏王 豹가 蒲坂에 병력을 집중 배치하여 臨晉 나루터를 막자, 韓信은 곧장 臨晉 나루를 건너 魏軍을 공격할 것처럼 위장해서 魏나라의 도성인 安邑의 수비를 허약하게 만들고, 은밀히 나무로 만든 병인 木罌을 이용하여 夏陽을 통해서 黃河를 건너가 安邑을 습격, 魏王 豹를 사로잡았다. 《史記 권92 淮陰侯列傳》
역주46 : 앵
역주47 李牧以利誘胡人入境 因大破其衆 : 李牧(?〜B.C. 236)은 戰國時代 趙나라의 名將으로, 같은 趙나라의 廉頗와 秦나라의 白起, 王翦과 함께 戰國 4대 명장으로 꼽힌다.
李牧이 代邑의 雁門에서 匈奴를 수비할 적에 兵車 1,300乘과 말 3,000필, 정예병 5만 명과 弓手 10만 명을 여러 요처에 분산 배치하고, 匈奴軍 전방에 많은 가축을 풀어놓아 匈奴가 이를 약탈하는 것을 계속 방치하였다. 이에 방심한 匈奴의 대군이 趙軍의 포위망 속으로 들어오자, 李牧은 협공하여 10만이 넘는 匈奴의 騎兵을 죽이고 襜襤 부족을 멸망시켰으며, 東胡를 격파하고 林胡를 항복시켰다. 이에 匈奴의 單于는 도망치고 그 뒤 10여 년 동안 감히 趙나라 국경에 접근하지 못하였다. 《史記 권81 廉頗藺相如列傳 附 李牧》
역주48 楚人……設伏兵以敗之 : 春秋時代인 B.C. 700년에 楚나라가 絞나라를 토벌할 적에, 초나라 군대가 絞나라의 성 남문에 이르자, 楚將 屈瑕가 絞나라는 소국으로 사람들이 경박하고 지모가 모자라니, 땔감 사역병[採樵者]에게 호위 병사를 붙이지 말고 내보내어 저들을 유인하자는 계책을 내었다. 초나라 임금이 그대로 따르자, 과연 絞나라 군대가 초나라의 땔감 사역병 30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이튿날에는 絞나라 군대가 다투어 나와 초나라의 땔감 사역병을 산중까지 추격하였다. 楚軍은 북문을 지키고 산 밑에 군대를 매복시켰다가 絞軍을 대파하였다. 《春秋左氏傳 桓公 12년》
역주49 謝玄與苻堅……玄遂進兵大破之 : 東晉 太元 연간(383)에 前秦의 苻堅이 東晉을 정벌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壽陽으로 진출하여 淝水에 陣을 치고 謝玄의 晉軍과 대치하였다. 이때 謝玄이 使者를 보내 ‘前秦의 軍陣을 조금 뒤로 물려서 東晉의 군대로 하여금 물을 건너게 한 뒤에 승부를 내자.’고 요구하였는데, 苻堅은 신하들의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軍陣을 뒤로 물린 뒤에 물을 건너오는 東晉의 군대를 공격할 속셈으로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前秦의 군대는 싸움에 패한 줄 알고 큰 혼란에 빠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謝玄과 謝琰, 桓伊 등이 이끄는 東晉의 군대가 淝水를 건너 前秦軍을 급습하여 궤멸시켰다. 《百戰奇略 권2 衆戰》
역주50 馮異與赤眉戰……遂破赤眉兵 : 馮異는 後漢 光武帝 때의 명장이다. 赤眉는 前漢 말기의 反軍으로 王莽이 漢을 찬탈하자, 琅琊의 樊崇이 莒에서 군대를 일으켰는바, 눈썹을 붉게 칠하였으므로 赤眉라 불렸다. 이들은 劉玄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劉盆子를 세워 황제로 삼아 江淮 사이에서 횡행하다가 뒤에 光武帝에 의해 평정되었다.
建武 3년(A.D. 27)에 馮異가 赤眉軍과 會戰할 적에 壯士들로 하여금 赤眉軍과 똑같이 變服하고 눈썹을 붉게 칠하고 길가에 매복하게 하였다. 아침에 赤眉가 1만 명의 군대를 내어 馮異의 先鋒 부대를 공격하였는데, 馮異가 소수의 병력으로 구원하자, 赤眉는 馮異의 軍勢가 약한 것을 보고는 마침내 병력을 총동원하여 馮異를 공격하였다. 馮異가 군대를 내어 크게 싸웠는데, 해가 기울자 赤眉의 기운이 이미 쇠하였고, 馮異가 매복해놓은 군대가 갑자기 일어나니, 赤眉가 다시 彼我를 식별하지 못하여 全軍이 혼란에 빠져 도주하였다. 이에 馮異의 군대가 추격하여 殽山 아래에서 크게 격파하고 남녀 8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資治通鑑 권41 漢紀 世祖光武皇帝》
역주51 趙奢救閼與……以待秦兵 : 83쪽 주 1) 참조.
역주52 王覇閉城休士 避周建蘇茂之鋒 : 王覇는 後漢 光武帝의 장수이다. 建武 4년(A.D. 28) 가을에 王覇가 捕虜將軍 馬武와 함께 垂惠에 할거해 있던 周建의 반란군을 토벌하였는데, 周建의 친구인 蘇茂가 周建을 구원하기 위해 정예기병을 보내어 漢軍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고 馬武를 포위 공격하였다. 馬武가 王覇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王覇는 이에 응하지 않고 성문을 닫고 성벽을 견고히 지키면서 병사들을 휴식시켰다. 蘇茂와 周建이 전군을 동원하여 馬武를 공격하자, 馬武의 군대도 友軍의 구원을 포기한 채 사력을 다해 應戰하여 양군은 모두 피로에 지쳐갔다. 이 틈을 노리고 있던 王覇가 정예기병을 출동시켜 적의 배후를 기습, 馬武 軍과 앞뒤로 적을 협공하여 패주시켰다.
물러갔던 반군들이 다시 군대를 수습하고 몰려와 王覇에게 도발했으나, 王覇는 미동도 하지 않고 “지금 성문을 닫고 군대를 휴식시킴은 兵法에 이른바 ‘싸우지 않고 적의 군대를 굴복시킨다.’는 것이니 최선의 최선이다.” 하면서 응전하지 않았다. 蘇茂와 周建은 할 수 없이 병사를 이끌고 營寨로 돌아갔으나, 周建의 조카 周誦이 성문을 닫아 이들의 入城을 막고 성을 들어 王覇에게 항복함으로써 반란이 평정되었다. 《後漢書 권20 王覇列傳》
역주53 周亞夫謂楚兵剽輕……出兵擊之 : 周亞夫(B.C. 199~B.C. 143)는 前漢 초기 景帝 때의 명장이다. 景帝 3년(B.C. 154)에 漢나라의 同姓 諸侯인 吳나라와 楚나라가 주동이 되어 7國이 반란을 일으키자, 景帝가 周亞夫를 보내 이를 평정하게 하였다. 周亞夫는 景帝에게 건의하기를 “楚나라 군대가 날래고 가벼우니, 더불어 銳鋒을 다투기가 어렵습니다. 원컨대 梁나라로 하여금 楚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저들의 식량 수송로를 끊어야만 비로소 제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景帝가 이를 허락하였다.
吳나라와 楚나라가 梁나라를 공격하자 梁나라가 周亞夫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周亞夫는 움직이지 않았다. 梁나라가 급히 사신을 景帝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景帝가 周亞夫에게 군대를 이동하여 梁나라를 구원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周亞夫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성벽을 굳게 지키고 병사들을 휴식시키면서 경무장한 기병으로 淮泗의 어귀로 나아가 吳軍과 楚軍의 후미를 차단하고 식량 수송로를 끊게 하였다. 양식이 떨어져 궁지에 빠진 吳軍과 楚軍이 수차례에 걸쳐 도전해왔으나, 周亞夫는 일절 응전하지 않고 수비만 하다가, 적군이 굶주리고 피곤해지기를 기다려 출병해서 마침내 평정하였다. 《史記 권57 絳侯周勃世家》
역주54 晉人 執宛春以怒楚 : 《春秋左氏傳》 僖公 27년에, 楚나라가 晉나라의 동맹국인 宋나라를 포위 공격하자, 晉 文公은 楚나라와 친한 衛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다음 해 晉나라와 楚나라가 城濮에서 결전을 하게 되었는데, 楚王은 晉나라와의 전쟁을 회피하려 하였으나 성질이 강한 令尹 子玉은 기어이 싸울 것을 청하니, 楚王은 병력을 조금만 주었다.
子玉은 大夫인 宛春을 晉 文公에게 사신으로 보내어 “晉나라에서 衛나라 임금을 復位시키고 曹나라를 봉해주면 저도 宋나라의 포위를 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晉나라의 子犯(狐偃)은 “子玉이 무례합니다. 군주(文公)는 한 가지를 취하고 신하(子玉)는 둘을 취하려 하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공격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先軫의 계책을 따라 宛春을 衛나라에 구류하고 또 은밀히 曹나라와 衛나라의 임금을 복위시킬 것을 허락하였다. 이로 인해 子玉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출전하였다가 대패하였다.
역주55 如冒頓 : 묵특
역주56 以千里馬閼氏 : 연지
역주57 冒頓(묵특)以千里馬閼氏(연지)……怒襲而滅之 : 冒頓(재위 : B.C. 209〜B.C.174)은 蒙古 일대의 騎馬 民族을 통합하여 帝國을 건설한 匈奴의 單于이다. 東胡는 蒙古 高原 동부에 있었던 수렵 민족들이 연맹한 부족국가로, 뒤에 冒頓에 의해 匈奴에 服屬되었다.
冒頓이 처음 單于가 되자 東胡가 冒頓을 시험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千里馬를 요구하였는데, 冒頓은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千里馬를 내어주었다. 東胡가 다시 사자를 보내 單于의 애첩인 閼之를 달라고 하자 많은 신하들이 이를 반대하였으나, 冒頓은 이를 물리치고 또 애첩을 내어주었다. 이에 교만해진 東胡가 匈奴와의 경계에 있는 천여 리의 황무지를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신하들이 어차피 버려둔 땅이니 주자고 하였으나, 冒頓은 “땅은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 땅을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땅을 주자고 한 신하들을 모조리 참수한 다음, 東胡를 급습하여 크게 무찔러 그 왕을 죽이고 나라를 멸망시켰다. 《史記 권110 匈奴列傳》
역주58 越子率衆朝吳……吳後果爲所滅 : 春秋時代인 B.C. 494년, 吳王 夫差에게 대패한 越王 句踐은 신하가 되는 조건으로 강화하여 나라를 부지하고, 밖으로는 吳王을 성실히 섬기면서 臥薪嘗膽,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B.C. 485년, 吳王이 齊나라를 정벌하려고 出兵하자, 越王 句踐이 吳나라에 朝會하면서 吳王과 여러 士[列士]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니, 吳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오직 伍員만이 이를 두려워하여 “이는 저들이 우리들에게 낚싯밥을 주어 이용하려는 것이다.” 하고, 吳王 夫差에게 “越나라는 우리 吳나라에 있어서 心腹의 질환이니, 같은 지역에 있으면서 우리에게 야욕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유순하게 복종하는 것은 저들의 야욕을 이루고자 해서이니, 조기에 越나라를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고 간하였으나, 吳王 夫差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吳王 夫差는 楚나라를 정벌하여 수도인 郢에까지 쳐들어갔으며 뒤에 또 齊나라와 晉나라에 공격을 가하고 黃池에서 맹약을 주도하는 등 승리에 도취되어 국방을 소홀히 하다가, 그로부터 9년 후인 B.C. 473년, 越나라의 공격으로 마침내 패망하였으며, 吳王 夫差는 伍員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자결하였다. 伍員의 字는 子胥이다. 《春秋左氏傳 哀公 11년》, 《史記 권66 伍子胥列傳》
역주59 唐公李淵……李密果驕而取敗 : 隋 恭帝 말엽에 천하가 혼란에 빠져 군웅들이 각축하였는데, 唐公 李淵과 魏公 李密이 그중 가장 강성하였다. 義寧 원년(617) 7월에 李淵이 李密과 연합하기 위해 편지를 보내 초청하자, 李密은 군대의 강성함을 믿고 스스로 盟主가 되고자 하여 李淵에게 호언장담의 편지를 보낸 다음, 보병과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河內에 이르러 李淵과 맹약을 맺었다.
李淵은 “李密이 自尊妄大하나, 우리가 현재 關中(長安)에 일이 많은 상황에서 이를 갑자기 끊어버리면 바로 다시 또 하나의 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말을 낮추어 추켜주고 칭찬하여 그 뜻을 교만하게 해서 그로 하여금 成皐의 길을 막고 東都(洛陽)의 병사를 묶어두게 하면 우리는 西征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關中이 평정되기를 기다려 서서히 漁夫之利를 거두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李密에게 겸손한 답장을 보내었다.
李密은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뻐하여 말하기를 “唐公의 추대를 받았으니, 천하를 평정할 것도 없다.”라고 하였는데, 李密은 뒤에 唐나라에 귀부하였으나 끝내 만족할 줄 모르고 다시 반란을 도모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資治通鑑 권184 唐紀 恭皇帝》
역주60 吳三軍迭出 而楚疲於奔命 : 《春秋左氏傳》 昭公 27년에 吳王 僚가 楚王이 죽은 틈을 타서 同母弟인 公子 掩餘와 燭庸으로 하여금 楚나라의 潛 땅을 포위 공격하게 하였다. 이틈을 타 公子 光이 吳王 僚를 시해하고 즉위하니, 이가 바로 闔閭이다. 闔閭가 徐나라를 시켜 掩餘를 잡아오게 하고 鍾吾의 사람으로 하여금 燭庸을 잡아오게 하니, 두 公子가 楚나라로 망명하였다. 楚王은 이들에게 큰 땅을 떼어주어 봉하니, 이는 吳나라를 해치기 위해서였다.
이에 令尹인 子西가 諫하기를 “吳王 光이 새로 나라를 차지하고 백성들을 친애하여 자식처럼 보살펴서 辛苦를 함께하니, 이는 백성을 동원하여 전쟁에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吳나라의 국경 지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유순하게 복종하도록 하더라도 오히려 그들이 쳐들어올까 염려되는데 우리가 또 그들의 원수를 봉하여 거듭 노엽게 하는 것은 不可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楚王이 그 말을 따르지 않았는데, 이로써 吳‧楚 관계가 악화되어 전란이 계속되었으며, 楚나라는 吳나라에게 크게 패하였다.
역주61 田豊說袁紹……人不安業之類 : 後漢 獻帝 建安 5년(200)에 曹操가 官渡로 회군하자, 袁紹는 許都를 공격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때 田豊이 袁紹에게 諫하기를 “曹操가 이미 劉備를 격파하였으니, 許都는 비어있지 않을 것입니다. 또 曹操는 용병을 잘하여 변화가 무쌍하니, 병력이 비록 적으나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지구전을 하는 것만 못합니다. 장군은 山河의 견고함에 의지하여 4州의 무리를 거느리고서, 밖으로는 영웅호걸과 결탁하고 안으로는 농사짓고 전투하는 방법을 가르친 뒤에 정예병을 선발하여 나누어 奇兵을 만들고 기회를 틈타 번갈아 출동해서 河南을 소요시키되, 저들이 오른쪽을 구원하면 그 왼쪽을 공격하고 저들이 왼쪽을 구원하면 그 오른쪽을 공격하십시오. 그리하여 曹操의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히 하지 못하게 하면 우리는 수고롭지 않은데도 적은 이미 피폐할 것이니, 3년이 못 되어서 가만히 앉아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袁紹는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가 결국 曹操에게 패망하였다. 《資治通鑑 권63 漢紀 孝獻皇帝》
역주62 項羽使至……羽由是不聽范增之計 : 亞父는 楚王 項羽의 책사인 范增의 존칭으로, 이는 漢 高祖가 項羽와 쟁패할 적에, 范增을 제거하기 위해 陳平이 획책한 反間計이다. 高祖가 滎陽城에서 포위되어 위태롭게 되자 項羽와 화친을 도모하였는데, 范增이 이를 반대하였다.
이때 漢나라의 상황을 살피고자 項羽가 사신을 보냈는데, 陳平이 太牢의 성찬을 장만하여 사신에게 올리다가 사신을 보고는 거짓으로 놀란 체하며 말하기를 “나는 亞父의 사신인 줄 알았더니 지금 보니 바로 項王의 사신이다.” 하고는 도로 가져가게 하고, 다시 나쁜 음식을 차려 초나라의 사신에게 올렸다.
楚나라의 사신이 돌아가 項羽에게 이 사실을 아뢰니, 項羽가 이로 말미암아 范增을 크게 의심하였다. 范增이 滎陽城을 급히 공격하여 함락하려 하였으나 項王은 范增의 계책을 듣지 않았다. 范增은 項羽가 자기를 의심한다는 것을 알고 노하여 “천하의 대사는 이미 결정이 났습니다. 앞으로의 일은 군왕께서 스스로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돌아가다가 彭城에 미치지 못해 등에 종기가 나서 죽었다. 《史記 권56 陳丞相世家》
역주63 : 뢰
역주64 秦應侯使人間趙王曰……趙退廉頗而用括 : 84쪽 주 2) 참조.
역주65 秦晉合兵伐鄭……秦伯悟而退師 :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僖公 30년에 그대로 보인다.
역주66 呂蒙……而襲取南郡 : 84쪽 주 1) 참조.
역주67 鄧艾自陰平……出蜀不意 : 鄧艾(197〜264)는 삼국시대 魏나라의 장수이다. 景元 4년(263), 鄧艾가 陰平에서 景穀의 길을 따라 사람이 없는 땅 700리를 은밀히 행군하여 江油에 이르러 蜀漢의 守將 馬邈의 항복을 받고, 綿竹關에서 蜀漢의 衛將軍 諸葛瞻을 격파하니, 蜀漢의 後主인 劉禪이 鄧艾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三國志 권28 鄧艾列傳》

손무자직해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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