印觀
이 賣綿於市
할새以穀買之而還
이러니이 攫其綿
하여 墮
家
어늘 印觀
이 歸于署調曰 鳶
汝綿於吾家
라 故
로 還汝
하노라 署調曰 鳶
이 攫綿與汝
는 天也
라리오 印觀曰 然則還汝穀
하리라 署調曰 吾與汝者市二日
이니 穀已
汝矣
라하고 二人
이 相讓
이라가 幷棄於市
하니 掌市官
이하여 並賜爵
하니라
이 少貧甚
러니 一日朝
에 婢兒踊躍獻七兩錢曰 此在鼎中
하니이요 니 天賜天賜
니이다 公驚曰 是何金
고하고 卽書失金人
字
하여而待
러니 俄而姓劉者來問書意
어늘 公悉言之
한대 劉曰
하니 果天賜也
라닛고 公曰 非吾物
에 何
오 劉俯伏曰
이 昨夜
에라가 還憐家勢蕭條而施之
러니 今感公之廉价
하고하여 誓不更盜
하고 願欲常侍
하오니 勿慮取之
하소서 公卽還金曰
나 金不可取
라하고 終不受
하니라 後
에 公爲判書
하고이 爲憲宗國舅
하며 劉亦
하여 身家大昌
하니라
高句麗
之女 幼時
에 好啼
러니 王戱曰 以汝
로 將
愚
하리라 及長
에 欲
于
高氏
한대이라하여 固辭
하고 終爲溫達之妻
하니라溫達
이 家貧
하여 行乞養母
하니 時人
이 目爲愚溫達也
러라 一日
은 溫達
이 自山中
으로 負楡皮而來
하니 王女訪見曰
라하고 乃賣首飾
하여 而買田宅器物
하고 多養馬以資溫達
하여 終爲顯榮
하니라
인관印觀이 장에서 솜을 파는데 서조署調라는 사람이 곡식으로써 솜을 사 가지고 돌아가더니 솔개가 그 솜을 채 가지고 인관의 집에 떨어뜨렸다. 인관이 서조에게 솜을 돌려 보내며 말하기를, “솔개가 너의 솜을 내 집에 떨어뜨렸으므로 너에게 돌려 보낸다.” 하니, 서조는 말하기를, “솔개가 솜을 채다가 너에게 준 것은 하늘이 한 일이다. 내가 어찌 받겠는가?” 하였다. 인관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솜 값으로 받은〉 너의 곡식을 돌려보내겠다.” 하자, 서조가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준 지가 벌써 두 장이 지났으니, 곡식은 이미 너에게 귀속되었다.” 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사양하다가 솜과 곡식을 다 함께 장에 버리니, 시장을 맡아 다스리는 관원이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모두 벼슬을 주었다.
[출전]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 이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해설] 솜장사 인관印觀과 그에게서 솜을 산 서조署調 사이의 욕심 없는 삶과 거기에 대해 보답 받는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홍공洪公기섭耆燮이 젊었을 때 가난하여 매우 무료無聊하였는데, 하루는(어느 날) 아침에 어린 계집종이 기쁜 듯 뛰어와 돈 일곱 냥을 바치며 말하기를, “이것이 솥 안에 있었으니, 쌀이 몇 섬일 수 있고, 나무가 몇 바리일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늘이 주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놀라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된 돈인가?” 하고 곧 돈 잃은 사람은 와서 찾아가라는 글을 써서 대문에 붙여 놓고 기다렸다.
얼마 후 유가劉哥라는 사람이 찾아와 글 뜻을 묻자, 공은 자세히 그 내용을 말해 주었다. 유가가 말하기를, “이치상 남의 솥 안에 돈을 잃는 일은 없으니, 참으로 하늘이 주신 것입니다. 왜 취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의 물건이 아닌데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유가가 엎드려 말하기를, “소인이 어젯밤에 솥을 훔치러 왔다가 도리어 가세家勢가 너무 쓸쓸한 것을 불쌍히 여겨 이것을 놓고 돌아갔습니다. 지금 공의 청렴淸廉에 감동하고 양심良心이 저절로 우러나 도둑질을 아니할 것을 맹세하고, 앞으로는 항상 옆에서 모시기를 원하오니 염려마시고 취하소서.” 하였다.
공이 곧장 돈을 돌려주며 말하기를, “네가 착하게 된 것은 좋으나 이 돈은 취할 수 없다.” 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 뒤에 공은 판서가 되고 그의 아들 재룡在龍은 헌종憲宗의 국구國舅(임금의 장인)가 되었으며, 유가 또한 신임을 얻어 몸과 집안이 크게 번창하였다.
[출전] 《대동기문大東奇聞》 권지사卷之四헌종조憲宗朝 〈홍기섭인류군자견뢰洪耆燮因劉君子見賴〉에도 보인다.
[해설] 이 글도 청렴한 선비 홍기섭洪耆燮과 유가劉哥라는 양심 있는 도둑 사이에 벌어진 선행善行이 나중에 보답받는 과정을 엮은 것인데, 《주역周易》의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 : 선을 쌓는 집에는 경사慶事가 있다”라는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의 딸이 어렸을 때 울기를 좋아하니, 왕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너를 장차 바보 온달溫達에게 시집보내리라”하였다. 〈딸이〉 자라자 상부上部고씨高氏에게 시집을 보내려 하니 딸이 임금은 식언食言을 해서는 안된다 하여 굳이 사양하고 마침내 온달의 아내가 되었다.
온달溫達은 집이 가난하여 돌아다니며 빌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니 당시 사람들이 지목指目하여 바보 온달이라고 한 것이다. 하루는 온달이 산 속으로부터 느릅나무 껍질을 짊어지고 돌아오니, 임금의 딸이 찾아와 보고 말하기를, “나는 바로 그대의 아내입니다” 하고는 머리의 장식물을 팔아 밭과 집과 기물을 꽤 풍부豊富하게 사들이고, 말을 많이 길러 온달을 도와 마침내 영달하게 되었다.
[출전]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사십오卷第四十五 〈열전列傳온달溫達〉에 이 같은 내용이 보인다.
[해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의 딸 평강공주平康公主와 이른바 바보 온달 사이의 혼인에 얽힌, 속물 근성을 떨쳐버린 소박한 삶이 종국에는 영달한다고 우리에게 큰 의미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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