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兵은 伐謀하고 其次는 伐交로되 而若伐未及謀하고 交亦已合이면 則惟有戰耳라
故로 前此三篇은 皆不欲戰之意요 至於不得已而戰이라도 亦必制敵於萬全이요 不可求勝於僥倖이라
故로 先爲不可勝하여 以待敵之可勝이로되 形之以有餘不足하여 而終能自保全勝이니 寧可無智名勇功而務歸리오
故로 善戰者는 能爲不可勝이요 不能使敵之必可勝이라
己與敵이 只爭一誤하니 勿誤는 雖在我나 敵誤는 故在敵하니
不可勝者는 守也요 可勝者는 攻也니 守則不足이요 攻則有餘라
善守者는 藏於九地之下하고 善攻者는 動於九天之上이라
李靖曰 敵未可勝이면 則我且自守하고 待敵可勝이면 則攻之爾니 非以强弱爲辭也라하고
又曰 攻是守之機요 守是攻之策이니 同歸于勝而已라
唐太宗曰 守之法은 要在示敵以不足이요 攻之法은 要在示敵以有餘라
據太宗云 守之法은 要在示敵以不足이라하니 若有餘면 則固不必守矣요 若果不足이면 則示敵以來攻이 豈計之得也리오
蓋攻與守는 原是二事로되 惟能守면 便能攻이요 能攻이면 便能守니 所以攻是守之機요 守是攻之策하여 其實은 一也라
譬之碁者컨대 欲殺他人이면 先活自己니 豈二其官哉아
按衛公
이 深得孫子本意
요 而得太宗說益明
하고 又經陽明
하여 而義無餘蘊
이라
蓋攻守之說은 仍是上文의 先爲不可勝하여 以待敵之可勝이니 則我之攻守 始因敵形하여 而敵無可勝之隙이라
故로 以有餘不足으로 形之於攻守하니 守則藏於九地하고 攻則動於九天하여 而所以有餘不足之者極矣라
故로 敵無釁則守而自保하고 敵有隙則攻而全勝이로되 惟能以守爲攻하고 以攻爲守故耳라
若曰弱而守하고 强而攻云爾라하면 則非止語氣萎枯하여 不成文理而已라 正是二其官也니라
見勝이 不過衆人之所知는 非善之善者也요 戰勝에 而天下曰善은 非善之善者也니라
故
로 擧秋毫
는 不爲多力
이요 見日月
은 不爲明目
이요 聞雷霆
은 不爲聰
니라
故
로 其戰勝不
하니 不忒者
는 其所措
勝
하여 勝已敗者也
니라
冠子曰 扁鵲兄弟三人
이 皆善於醫
러니 魏文侯問 孰最善
고 鵲曰 長兄
은 視色故
로 名不出家
하고 仲兄
은 視毫毛故
로 名不出門
하고 鵲
은 鍼人血脈
하고 投人毒藥故
로 名聞諸侯
라하니라
視色視毛之類也요 破軍殺將하여 天下震動은 鍼人毒人之類也라
故로 善戰者는 立於不敗之地하고 而不失敵之敗也니라
是故로 勝兵은 先勝而後에 求戰하고 敗兵은 先戰而後에 求勝하나니 善用兵者는 修道而保法이라
先戰而後求勝者는 雖勝이나 幸勝也요 先勝而求戰者는 修道而保法也니 卽所謂立於不敗之地也라
兵法
은 一曰
요 二曰量
이요 三曰數
요 四曰稱
이요 五曰勝
이니 地生度
하고 度生量
하고 量生數
하고 數生稱
하고 稱生勝
이라
故
로 勝兵
은 若以
稱銖
하고 敗兵
은 若以銖稱鎰
하나니
隨地置陳
하여 先
長短
은 地生度也
요 旣有度矣
에 縱橫引
하여 界而旋之
면 是有方圓
이요 方圓則可容受
니 度生量也
라
量地計人은 量生數也요 旣有衆寡하여 而稱校彼己之强弱治亂은 數生稱也요 如以鎰稱銖는 則稱生勝也라
然이나 借象設喩하고 由麤入細하여 未易辨析하니 讀者宜深察之니라
銖는 二十四分兩之一也요 鎰은 二十四兩也니 以鎰稱銖는 輕重相懸이요 而至於决積水於千仞之谿하여는 則不啻若决江河而莫之禦矣라
蓋先爲敵人不可勝我之形하고 而又必不失敵人可勝之形이라
故로 守則毁形以致之하고 攻則張形以震之하여 藏於九地하고 動於九天하여 而敵不能測我之形矣라
勝於易勝하고 勝於已敗하여 而所以措勝者 幾於無形矣라
以至營陣하여는 則有長短廣狹之形하고 兵士則有衆寡治亂之形하고
擧一篇而皆形也로되 而蓄於意中하여 秘而不發이라가 直至篇終積水一喩하여 纔肯露出一箇形字하니
최상의 군대는 적의 계책을 정벌하는(깨뜨리는) 것이고, 그 다음은 적의 외교를 정벌하는 것인데, 만약 적이 계책을 세울 적에 정벌이 미처 계책을 깨뜨리지 못하고 적의 외교가 또한 이미 이루어졌으면, 전쟁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앞에 있는 세 편은 모두 싸우고자 하지 않는 뜻이고, 부득이하여 전쟁에 이르더라도 또한 반드시 만전萬全을 기하여 적을 제압하여야 하고 요행으로 승리를 바라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먼저 적이 이기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은 뒤에 적에게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유여有餘한가 부족한가를 드러내 보여서 끝내 스스로 전승全勝을 보전해야 하니, 어찌 지혜로운 명성과 용맹한 공功이 없이 그대로 돌아오기를 힘쓰겠는가.
먼저 승리할 계책을 세운 뒤에 싸우면 이에 비로소 군대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 싸울 수 있다.
옛날에 전쟁을 잘한 자는 먼저 〈수비를 잘하여 적이〉 승리할 수 없게 만들어놓고 적에게 승리할 수 있는 틈이 있기를 기다렸다.
《오자吳子》에 이르기를 “군대는 잘 다스림으로써 승리한다.” 하였으니, 다스림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한 것이요, 《삼략三略》에 이르기를 “적의 빈틈을 엿보아야 한다.” 하였으니, 빈틈이 적에게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정李靖이 말하기를 “먼저(미리) 수비를 잘하여 적이 승리할 수 없게 만들어놓는 것은 자기를 아는 것이요, 적에게 승리할 수 있는 틈이 있기를 기다리는 것은 적을 아는 것이다.” 하였다.
승리할 수 없음은 자기에게 있고, 이길 수 있음은 적에게 있다.
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자는 적이 자기를 이길 수 없게는 할 수 있어도, 적으로 하여금 우리가 반드시 이기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승리는 알 수는 있어도 만들 수는 없다.” 한 것이다.
자기와 적이 다만 한 번 실수함을 다툴 뿐이니, 실수하지 않는 것은 비록 나에게 있으나, 적이 실수함은 그 연고가 적에게 있는 것이다.
나에게 있는 것은 내가 할 수 있고 적에게 있는 것은 내가 기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적이 실수함은 비록 내가 알 수 있으나 적이 실수하도록 억지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정李靖이 말하기를 “비유하건대 바둑을 둘 적에 두 적수가 대등하다가 한 번 바둑알을 잘못 놓으면 끝내 구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였으니, 이것을 말한 것이다.
승리할 수 없는 경우에는 지키고 승리할 수 있는 경우에는 공격하여야 하니, 수비는 부족한 것처럼 보이고 공격은 유여有餘한 것처럼 보인다.
수비를 잘하는 자는 구지九地의 아래에 감추듯이 하고, 공격을 잘하는 자는 구천九天의 위에서 출동하듯이 한다.
그러므로 지키면 스스로 보전하고, 싸우면 온전히 승리하는 것이다.
이정李靖이 말하기를 “적을 이길 수 없으면 우리가 우선 스스로 수비하고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공격하는 것이니, 강약強弱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공격은 바로 수비의 기틀이요, 수비는 바로 공격의 계책이니, 똑같이 승리로 귀결될 뿐이다.
만약 공격하면서 수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수비하면서 공격할 줄을 모르면, 그 일을 두 가지로 생각할 뿐만 아니요 또 그 관원을 두 가지로 두는 것이다.” 하였다.
당唐 태종太宗은 말하기를 “수비하는 방법은 요점이 적에게 부족함을 보임에 달려 있고, 공격하는 방법은 요점이 적에게 유여有餘함을 보임에 달려 있다.
적에게 부족함을 보이면 적이 반드시 와서 공격할 것이니, 이는 적이 그 공격할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적에게 유여함을 보이면 적이 반드시 스스로 수비할 것이니, 이는 적이 그 수비할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왕수인王守仁은 말하기를 “유여함과 부족함은 끝내 피아彼我의 형세를 살피는 것이니, 예컨대 《손자孫子》 13편에 ‘병력이 10배이면 포위하고 5배이면 공격한다.’는 등의 구句에서 볼 수 있다.” 하였다.
태종太宗의 말에 근거하면 ‘수비하는 방법은 요점이 적에게 부족함을 보임에 달려 있다.’ 하였으니, 만약 자기의 형세가 유여有餘하다면 진실로 굳이 수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요, 만약 참으로 부족하다면 적이 와서 공격하도록 보이는 것이 어찌 좋은 계책이겠는가.
공격과 수비는 원래 두 가지 일인데, 오직 능히 수비할 수 있으면 능히 공격할 수 있고 능히 공격할 수 있으면 능히 수비할 수 있으니, 이 때문에 공격은 바로 수비의 기틀이고 수비는 바로 공격의 계책이어서 그 실제는 하나인 것이다.
이것을 바둑을 두는 자에게 비유하면 타인他人을 죽이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가 살아야 하니, 어찌 그 맡은 일을 둘로 나눌 수 있겠는가.
살펴보건대 이 경문經文의 뜻은 이위공李衛公이 손자孫子의 본의本意를 깊이 얻었고, 태종太宗의 말을 얻어 더욱 분명해졌으며, 또 왕양명王陽明(王守仁)의 점철點綴을 거쳐 뜻이 미진함이 없게 되었다.
공격과 수비의 설說은 바로 윗글에 ‘먼저 〈수비를 잘하여 적이〉 승리할 수 없게 만들어놓고 적에게 승리할 수 있는 틈을 기다린다.’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우리의 공격과 수비가 비로소 적의 형세에 따라 드러나서 적이 승리할 만한 틈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여함과 부족함을 가지고 공격과 수비에 드러냈으니, 수비할 때에는 구지九地의 아래에 감춘 듯이 하고 공격할 때에는 구천九天의 위에서 출동하듯이 하여, 유여하고 부족하게 함이 지극한 것이다.
그러나 드러내 보임은 나에게 있고 따름은 적에게 있다.
그러므로 적에게 빈틈이 없으면 수비하여 스스로 보전하고 적에게 빈틈이 있으면 공격하여 완전히 승리하되, 오직 수비를 공격으로 삼고 공격을 수비로 전환할 뿐이다.
만약 “약하면 수비하고 강하면 공격한다.”라고 말한다면 문장의 기운이 약하여 문리文理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 맡은 관직을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이 된다.
승리를 발견함이 보통 사람이 아는 바를 넘지 못하는 것은 잘하는 중에 잘하는 자가 아니요, 싸워서 승리했을 적에 천하 사람들이 잘 싸웠다고 말하는 것은 잘하는 중에 잘하는 자가 아니다.
《육도六韜》에 이르기를 “지혜가 보통 사람과 같다면 나라의 스승이 아니다.” 하였고, 《오자吳子》에 이르기를 “자주 싸워 이겨서 천하를 잃는 자가 많다.” 하였다.
그러므로 가을의 털끝을 드는 것은 힘의 많음이 되지 못하고, 해와 달을 보는 것은 눈의 밝음이 되지 못하고, 귀로 천둥소리를 듣는 것은 귀의 밝음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위의 ‘승리를 발견함이 보통 사람이 아는 것을 넘지 못함은 잘하는 중에 잘하는 자가 아니다.’라는 뜻을 거듭 밝힌 것이다.
옛날에 이른바 ‘전쟁을 잘했다.’는 자는 쉽게 승리하게 만들어놓고 승리한 자이다.
이 때문에 전쟁을 잘하는 자의 승리는 지혜로운 명성이 없고 용맹한 공功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함에 승리가 어긋나지 않는 것이니,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조처하는 바가 반드시 승리하도록 만들어 이미 패한 자에게 승리하는 것이다.
위의 ‘싸워서 승리했을 적에 천하 사람들이 잘 싸웠다고 말하는 것은 잘하는 중에 잘하는 자가 아니다.’라는 뜻을 거듭 말한 것이다.
《할관자鶡冠子》에 이르기를 “편작扁鵲의 형제 세 사람이 모두 의술醫術이 뛰어났는데, 위魏 문후文侯가 ‘누가 가장 뛰어난가?’라고 묻자, 편작扁鵲이 대답하기를 ‘장형長兄은 사람의 안색顔色을 살피기 때문에 명성이 집안을 벗어나지 않고, 중형仲兄은 털끝을 살피기 때문에 명성이 문 밖을 나가지 않고, 저는 사람의 혈맥血脈에 침을 놓고 남에게 독약을 투여하므로 명성이 제후諸侯들에게 알려졌습니다.’라고 했다.” 하였다.
쉽게 승리하도록 만들어놓고 이미 패한 적에게 승리하니, 어찌 공명功名이 있겠는가.
이는 바로 의원이 안색을 살피고 털끝을 살핀다는 따위이고, 적군을 격파하고 적장을 죽여서 천하가 진동함은 의원이 사람의 혈맥에 침을 놓고 사람에게 독약을 투여하는 따위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자는 패하지 않을 자리에 서고, 적의 패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정李靖이 말하기를 “절제節制는 자신에게 있다.” 하였다.
이 절節은 머리 장章의 뜻을 거듭 맺은 것이다.
이 때문에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승리할 방책을 세운 뒤에 싸움을 청하고, 패하는 군대는 먼저 싸운 뒤에 승리하기를 바라니, 용병用兵을 잘하는 자는 도道를 닦고 병법을 보전한다.
먼저 싸운 뒤에 승리하기를 바라는 자는 비록 승리하더라도 요행으로 승리한 것이요, 먼저 승리할 방책을 세운 뒤에 싸움을 청하는 자는 도道를 닦고 병법을 보전하는 것이니, 바로 이른바 ‘패하지 않을 땅에 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군정軍政이 반드시 승리하기 쉽게 만들어놓은 뒤에 승리하고, 이미 패한 적에게 승리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병법兵法은 첫 번째는 도度이고 두 번째는 양量이고 세 번째는 수數이고 네 번째는 칭稱이고 다섯 번째는 승勝이니, 땅은 도度를 낳고 도度는 양量을 낳고 양量은 수數를 낳고 수數는 칭稱(저울질)을 낳으며 칭稱은 승勝(승리)을 낳는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군대는 일鎰(900g)을 가지고 수銖(9g)를 다는 것과 같고, 패하는 군대는 수銖를 가지고 일鎰을 다는 것과 같다.
승리하는 자의 싸움이 마치 저장해놓은 물을 천 길의 계곡에 쏟아놓는 것과 같은 것은, 형태[形]이다.
지형에 따라 진영을 설치해서 먼저 진영의 길고 짧음을 헤아림은 땅이 도度를 낳는 것이요, 이미 도度가 있으면 군대를 종횡으로 펼쳐놓고서 경계를 정하여 돌게 하면 이에 방형方形과 원형圓形이 있게 되고, 방형方形과 원형圓形이 있으면 병력을 수용할 수 있으니, 이것이 도度가 양量을 낳는 것이다.
땅을 헤아려 병력을 배치함은 양量이 수數를 낳는 것이요, 이미 병력의 많고 적음이 있어서 피아彼我의 강하고 약함과 다스려지고 혼란함을 비교함은 수數가 칭稱을 낳는 것이요, 일鎰로써 수銖를 다는 것처럼 함은 칭稱이 승리를 낳는 것이다.
이정李靖이 말하기를 “병사들을 교련함은 마치 바둑판에 바둑알을 놓는 것과 같으니, 만약 그어놓은 선線이 없으면 바둑알을 어디에 놓겠는가.” 하였고, 또 육화진六花陣은 넓이 4백 보 되는 땅을 점거하여 병력 5천 명을 수용하게 하였으며,
《사마법司馬法》에는 “병력을 헤아려 땅을 이용한다.” 하였고, 《울료자尉繚子》에는 “승패를 아는 것은 적장을 저울질하여 헤아리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도度와 양量, 수數와 칭稱을 말한 것이다.
이는 옛날 병가兵家의 말인데, 손자孫子가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상象을 빌려 비유하고 거친 것으로 말미암아 세밀함에 들어가서 쉽게 분변하여 분석하기가 어려우니, 독자들이 마땅히 깊이 살펴야 한다.
수銖는 한 냥의 24분의 1이고 일鎰은 24냥이니, ‘일鎰을 가지고 수銖를 단다.’는 것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서로 현격한 것이요, 저장해놓은 물을 천 길의 계곡에 쏟아놓음에 이르러서는 마치 강하江河를 터놓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어서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손자孫子가 병법兵法을 논한 것이 이에 이르러 비로소 이루어진 형태가 있게 되었다.
적이 우리를 이길 수 없는 형태를 먼저 만들어놓고, 또 반드시 적을 이길 수 있는 형태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수비할 경우에는 우리의 형태를 훼손하여 적을 불러들이고, 공격할 경우에는 우리의 형태를 과장하여 적을 진동시켜서 구지九地에 감추듯이 하고 구천九天의 위에서 출동하듯이 하여 적이 우리의 형세를 측량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승리하기 쉽게 만들어놓은 뒤에 승리하고 이미 패한 적에게 승리하여, 승리를 조처하는 것이 무형無形에 가깝다.
진영에 이르러서는 길고 짧음과 넓고 좁음의 형태가 있고, 병사에 이르러서는 병력의 많고 적음과 다스려지고 혼란함의 형태가 있다.
형세를 살핌에 이르러서는 강하고 약한 형태가 있고, 승부勝負에 이르러서는 일鎰과 수銖의 형태가 있으니,
한 편篇의 전체가 모두 형체이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어서 숨기고 말하지 않다가, 곧바로 이 편篇의 끝에 ‘저장해놓은 물을 천 길의 계곡에 쏟아놓는 것과 같다.’는 한 비유에 이르러 겨우 한 개의 ‘형形’字를 노출하였으니,
만약 금침金針을 저울에 다는 솜씨가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