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
志士 每秋夜涔寂
에 落葉撲窓
하고 竹涼乍侵
이면 悄對螢燈
하고 看劍引杯
하며 抽古人書
하여 讀數篇
이라가 竟爲之拍案掀髯
하여 以紓其胷中湮欝之氣
하니 當此之時
하여 吾知其所讀者必兵書也
로라
旣而泛覽諸家
하여 博而約之
하면 則吾又知其必歸於孫子
하니 이라
魏晉迄明
히 凡八十餘家
로되 요 兼又文章
이 하여 多得言外之意
하여 有非後世能言之士
의 所可幾及
이라
然이나 往往瑕不掩瑜하니 豈以下筆在得意後하여 務於矜伐而未暇攻苦歟아
劉寅說은 極淺近하니 可無譏리오마는 而今偏列於武學하니 豈刊行時他善本이 未及東來歟아
余少喜兵家言
하여 讀史至有國戰守
하면 未嘗不三
하여
更思以
으로 翼附於孫子
러니 先我而
하여 爲窅然綴作者
라
久之에 晩有幽憂之疾하여 無意於當世하여 養疴山齋하니 容易得閒이라
兒子頭角稍長
하여 하여 請業甚勤
이어늘 取刊本
解
하여 試使讀之
로되 而粹駁兼收
하여 欠於折中
하고 語氣萎
하여 苦不當意
라
性又褊拗
하여 不能苟從
하고 竊不自揆
하여 每手疏數則而課之
하니 蓋以
라
編旣成
에 有騁談之客
이 曰 吾少志於此
하여 閱亦多矣
라
孫子一書 欠爲註家所寃이로되 千載之下에 莫有白者러니
今子是編은 專推究用心하여 下字處 幾乎剝其膚而精入髓矣니 盍以是名之리오
기인畸人과 지사志士들이 매번 고요한 가을밤에 낙엽이 창문을 때리고 대나무 숲의 차가운 기운이 침입해오면, 근심스레 등잔불을 대하며 검劍을 보고 술잔을 들면서 고인古人의 책을 뽑아 몇 편을 읽다가 끝내 책상을 치고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가슴의 답답한 기운을 펼치게 되니, 이때를 당하여 나는 그들이 읽는 책이 반드시 병서兵書임을 아노라.
이윽고 제가諸家의 설을 두루 살펴 널리 보고 요약하면 나는 또 반드시 《손자孫子》로 돌아올 줄을 아니, 이는 천하 사람들의 기호가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唐나라 문황文皇 또한 말하기를 “여러 병서兵書가 《손자孫子》를 벗어날 것이 없다.” 하였으니, 이 때문에 《손자孫子》의 주석서가 유독 많은 것이다.
위魏‧진晉으로부터 명明나라에 이르기까지 주석註釋을 낸 자가 모두 80여 가家인데, 조맹덕曹孟德을 첫 번째로 꼽으니, 이는 다만 용병술이 손오孫吳에 방불할 뿐만이 아니요, 겸하여 또 그의 문장文章이 진晉나라 사마씨司馬氏의 시작이 되어서 《손자孫子》의 글에 나타난 뜻 이외의 의미를 많이 깨달아, 후세에 글을 잘하는 선비가 능히 바라고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왕 옥玉의 티가 아름다운 옥玉을 가리지 못하니, 이는 어찌 조맹덕曹孟德이 득의양양한 뒤에 주석을 쓰면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함을 힘쓰고, 《손자孫子》를 열심히 공부할 겨를이 없어서가 아니겠는가.
유인劉寅의 설說은 지극히 천근淺近하니 비판이 없을 수 있겠는가마는 지금 유독 무학武學에 나열되어 있으니, 이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병서兵書를 간행할 적에 다른 좋은 본本이 미처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젊어서부터 병가兵家의 글을 좋아하여 역사책을 읽다가 국가의 전쟁과 수비에 이르면 일찍이 세 번 반복하여 읽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에 승패勝敗의 자취를 가지고 《손자孫子》에 참고하고 징험하려고 하였는데, 나보다 먼저 등정라鄧廷羅가 《병경兵鏡》이라는 책을 지었다.
다시 생각하기를 육자六子가 남긴 말을 가지고 《손자孫子》에 부익附翼할까 하였는데, 나보다 먼저 이탁오李卓吾가 《참동參同》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아득히 작자作者가 되었다.
얼마 후에 나는 뒤늦게 깊이 간직한 속병을 앓고 당세에 뜻이 없어 산재山齋에서 병을 조섭하니, 한가한 시간을 얻기가 용이하였다.
아들이 재주와 기개가 차츰 자라서 대장장이의 아들이 갖옷 만들기를 배우기에 뜻을 둔 것처럼 학업을 매우 부지런히 청하였는데, 간행되어 있는 본本들의 여러 해석을 취하여 한번 읽게 하였으나, 순수함과 잡박雜駁함이 함께 실려 있어서 절충하기에 부족하였고, 문장의 기운이 약해 마음에 합당하지 못하여 괴로웠다.
나는 또 성품이 편협하여 구차히 남의 말을 따르지 못하고는 스스로 자신을 헤아리지 않고 매번 손수 몇 쪽을 써서 공부를 시키니, 남이 한 번 하면 자기는 백 번 하는 공부로, 이렇게 하면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한 번은 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책이 이루어지자 담론談論하는 손님이 급히 찬성하여 말하기를 “내 젊어서 여기에 뜻을 두어 책을 본 것이 또한 많았습니다.
《손자孫子》 한 책은 유감스럽게도 주석가들에 의해 잘못 해석되었는데, 천 년 뒤에도 이것을 밝히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대의 이 책은 오로지 손자孫子의 용심用心을 미루어 구명究明해서 글자를 놓은 것이 거의 살을 파고 정수精髓에 들어갔으니, 어찌 이것으로 이름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웃고 고개를 끄덕이고서 마침내 이름을 《손자수孫子髓》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