之木
이 嘗美矣
러니 以其
於大國也
라 斧斤
이 伐之
어니 可以爲美乎
아
是其
과 雨露之所潤
에 非無萌蘖之生焉
이언마는 牛羊
이 又從而牧之
라 是以
로 若彼
也
하나니라
人見其濯濯也하고 以爲未嘗有材焉이라하나니 此豈山之性也哉리오
雖存乎人者
인들 豈無
哉
리오마는 其所以放其良心者 亦猶斧斤之於木也
에 旦旦而伐之
어니 可以爲美乎
아
其日夜之所息
과 平旦之氣
에 其
也者 幾希
어늘 則其旦晝之所爲 有
之矣
나니 梏之反覆
이면 則其
이요 夜氣不足以存
이면 則其違禽獸不遠矣
리라
人見其禽獸也
하고 而以爲未嘗有才焉者
라하나니 리오
故苟得其養이면 無物不長이요 苟失其養이면 無物不消니라
孔子曰 操則存
하고 舍則亡
하야 出入無時
하야 莫知其
은 惟心之謂與
인저하시니라
原注
言人之良心이 雖已放失이나 然其日夜之間에 亦必有所生長이라
故平旦未與物接하야 其氣淸明之際에 此心이 必猶有發見者로되
但其發見至微而旦晝所爲之不善者 又已隨而梏亡之하니 如山木旣伐이나 猶有萌蘖이로되 而牛羊又牧之也라
晝之所爲旣熾면 則必有以害其夜之所息이요 夜之所息이 旣薄이면 則愈不能勝其晝之所爲라
是以로 展轉相害하야 至於平旦之氣亦不能淸하야 而不足以存其仁義之良心也니라
原注
孔子言心操之則在此
하고 捨之則失去
하야 其出入
이 無定時
하고 亦無定處
라하시니 孟子引之
하야 以明心之
시니라
原注
心豈有出入이리오한대 伊川先生이 聞之하시고 曰 此女雖不識孟子나 却能識心이라하시니라
原注
存者는 只是於應事接物之時에 事事中理 便是存이니 若只是兀然守在這裏면 忽有事至吾前에 操底便散了리니 却是舍則亡也니라
純夫女知心而不知孟子
하니 此女當是實不
이라 故云無出入
이라하야 而不知人有出入
하니 猶無病者 不知人之疾痛也
니라
原注
君子之學
이 本於心
하니 心不在焉
이면 則視簡不見
하고 聽諷不聞
이니 此其於
에도 猶莫之入也
온 況窮理致知乎
아
蓋學者는 覺也니 覺由乎心하나니 心且不存이면 何覺之有리오
孟子曰 人之所以異於禽獸者 幾希하니 庶民은 去之하고 君子는 存之라하시니 是心不存이면 殆將晦昧僻違하고 觸情從欲하야 不能自別於物이니 尙安所覺哉아
然心雖未嘗不動也로되 而有所謂至靜하니 彼紛紜于中者는 浮念耳요 邪思耳라
君子論心에 必曰存亡云者는 心非誠亡也라 以操捨言之耳니 人能知所以操之면 則心存矣리라
孟子曰 養心
이 莫善於寡欲
이라하시니 養以寡欲
하야 使不誘於外 此存心之
也
니라
原注
[按] 范氏此段에 謂學者覺也와 及謂心非誠亡이라 以操捨言之는 皆有合于程子之說이요
又謂存心이 在至靜而權輿于寡欲은 亦有合于周子之說이니라
原注
孔子言操存, 舍亡하야 出入無時, 莫知其鄕四句하시고 而以惟心之謂一句로 結之하시니
正是直指心之體用하야 而言其周流變化神明不測之妙也라
若謂其舍亡이 致得如此走作인댄 則孔子言心體者 只說得心之病矣리니 聖人立言命物之意 恐不如此라
又謂心之本體를 不可以存亡言이라하면 此亦未安이라
若所操而存者 初非本體면 則不知所存者果爲何物이며 而又何必以其存爲哉아
偶記胡文定公所謂不起不滅
은 心之體
요 은 心之用
이니 能常操而存
이면 則雖一日之間
에 百起百滅
이라도 而心固自若者 自是好語
라
但讀者當知所謂不起不滅者 非是塊然不動하야 無所知覺也요 又非百起百滅之中에 別有一物이 不起不滅也라
原注
夜氣
는 如雨露之潤
이요 良心
은 如萌蘖之生
이니 人之良心
이 雖是有梏亡
이나 而
이라
日夜之所息이 却是心이니 夜氣淸하야 不與物接平旦之時 卽此良心發處로되 惟其所發者少요 而旦晝之所梏亡者展轉反覆이라
則他長一分이면 自家止有九分하고 明日他又進一分이면 自家又退하야 止有八分하니 他日會進이면 自家日會退니라
原注
此章은 孟子切於救人하시니 山木一段이 與良心一段相對하고 養與失養이 亦相對하고 而養之得失이 又在操舍之間하며
程子又發敬以直內一句하야 指示操存之方하시니 可謂切要로다
學者讀之에 急宜警省이니 存得則人이요 存不得則禽獸니
原注
持把不能久
에 又被事物及
引將去
하나니 孟子牛山之木一章
을 最要看
이니라
常惺惺하야 不要放倒하며 覺得物欲來에 便著緊하야 不要隨他去라
原注
學者患心慮紛亂하야 不能寧靜하니 此則天下公病이라
原注
故先儒屢屢言之나 然求其所以操而存者컨대 豈有他術哉리오
原注
如舜之誅
에 四凶已作惡
이어늘 舜從而誅之
하시니 이리오
人不止於事
는 只是攬他事
하야 不能使
이니 物各付物
이면 則是役物
이요 爲物所役
이면 則是役於物
이라
原注
程子又嘗言
어니와 只是心
은 須敎由自家
라하시니 此卽做心主之謂也
니라
原注
人心作主不定
은 正如一箇
라 流轉動搖
하야 無須臾停
하니 所感萬端
이니 若不做一箇主
면 怎生奈何
리오
嘗言 約數年
을 하야 이라하니 不思量後
에 須强把這心來制縛
이어나 이리니 이니라
原注
君實
이 嘗患思慮紛亂
하야 有時中夜而作
하야 達旦不寐
하니 可謂
로다
其後告人曰 近得一術하니 常以中爲念이라하니 則又是爲中所亂이라
也只是於名言之中
에 揀得一箇好字
니 與其爲中所亂
으론 니라
原注
○ [按] 此言은 則知大賢德業之進과 日新之功이 不以壯而健, 老而衰니 學者所當深省也니라
原注
有謂因苦學而至失心者하니 學은 本是治心이니 豈有反爲心害리오
某氣不盛
이나 然而能不病, 無惓怠者
는 只是一箇
니 其於
엔 思慮儘
로라
原注
故
有執持之意
면 卽是此心
이 先自動了
니 此程夫子每言坐忘
은 卽是坐馳
라하시고
而其指示學者操存之道
에 雖曰
나 而又有
便不直矣之云也
시니라
原注
人於夢寐間에 亦可以卜自家所學之淺深이니 如夢寐顚倒면 卽是心志不定이요 操存不固니라
原注
所以做出夢이니 若心神安定이면 夢寐亦不至顚倒니라
原注
心이 淸時少하고 亂時多하니 其淸時엔 視明聽聰하고 四體不待羈束而自然恭謹하며 其亂時엔 反是하니 何也오
蓋用心未熟하야 客慮多而常心少也며 習俗之心未去而實心未完也일새라
人又要得剛이니 剛則守得定不回하야 進道勇敢이니라
原注
橫渠說做工夫處
하니 二程
은 資稟
이 高潔淨
하야 不大段用工夫
하고 橫渠
는 資稟
이 有偏駁夾雜處
라
他大段用工夫來하니 觀此言컨대 說得來大段精切이니라
客慮는 是泛泛底思慮요 習俗之心은 便是從來習熟偏勝等心이요 實心은 是義理底心이니라
原注
嘗記少年時
에 在
하야 夜聞鐘聲
할새 聽其一聲未絶
에 此心
이 已自走作
이어늘
原注
李先生
이 說人心中大段惡念
은 却易制伏
이어니와 最是那不大段計利害
로 乍往乍來底念慮 相續不斷
이 難爲驅除
라하시니 今
에 是如此
로라
原注
人有一正念이 自是分曉로되 又從旁別生一小念하야 漸漸放闊去하나니 不可不察이니라
原注
① 謝顯道從明道先生於
러니 明道一日謂之曰 爾輩在此相從
에 只是學某言語
라
原注
② 伊川先生이 每見人靜坐하시면 便歎其善學이러시다
原注
常乘月訪之
할새 必見其燈下
에 正襟危坐
하야 雖夜深
이라도 亦如之
러라
原注
看康節
컨대 這人
이 須極會處置事
하니 被他神閑氣定
하야 不動
라 須處置得精明
하니
他氣質이 本淸明이어늘 又養得純厚하고 又不曾枉用了心하야 他用那心이 都在緊要上하니 被他靜極了라
原注
延平先生
이 嘗言道理
를 須是日中理會
하고 夜裏
에 却去靜處
하야 坐地思量
이라야 方始有得
이라하시니 某依此說去做
하니 이로라
原注
如敬字를 只是將來說하고 更不做將去하야 根本不立이라
明道, 延平이 皆敎人靜坐하시니 看來에 須是靜坐러라
原注
⑧ 先生
이 問
호되 如何用工
고 曰 且學靜坐
하야 痛抑思慮
로소이다
原注
心未嘗遇事時에 須是靜이라야 臨事方用에 便有氣力이니 如當靜時에 不靜하야 思慮散亂이면 及至臨事에 已先倦了라
伊川解
處云 不專一則不能直遂
라하시니 閑時
에 須是收斂
이라야 做事
에 便有精神
이니라
原注
②
이 問心術最難
하니 如何執持
잇가 程子曰 敬
이니라
原注
程先生所以有功於後學者는 最是敬之一字 有力이니라
原注
今人
은 主心不定
하야 視心如寇賊而不可制
하나니 이라 乃是心累事
니
原注
問程子謂格物窮理를 但立誠意以格之라하시고 又曰 入道莫如敬이라하시니
愚以爲誠意工夫 在格致後어늘 今乃云 先立誠意라야 始去格物이라하시니 毋乃反經意與잇가 潛室陳氏曰
蓋誠敬二字 通貫動靜始末하니 不是於格致之先에 更有一敬工夫在라
一事有一事之理하니 人能安定其心하야 順其理以應之면 則事皆得所하고 心亦不勞어니와 若擾擾焉以私心處之면 則事必不得其當이요 而其心亦無須臾之寧이니 人徒知爲事之累心이요 不知乃心之累事也니라
原注
大凡人心을 不可二用이니 用於一事면 則他事不能入者는 事爲之主也라
事爲之主라도 尙無思慮紛擾之患이어든 若主於敬이면 又焉有此患乎아
原注
或問 事爲之主一段은 疑當使心爲事主요 不可使事爲心主니이다 [朱子]曰
之主
는 只是此心
이 收在一事上
하야 不走作耳
니 伊川
이 欲以數珠與溫公之類
니라
原注
⑤ 橫渠先生
이 嘗言吾十五年
을 學箇
이나 不成
이로라 明道先生曰
로다
原注
凡恭謹이면 必勉强不安肆하고 安肆면 必放縱不恭하나니
他只是學箇恭하야 自驗見不曾熟이니 不是學箇恭하고 又學箇安이니라
原注
學者須敬守此心
하야 不可急迫
이요 當栽培深厚
하야 於其間然後
에 可以自得
이니 但急迫求之
면 只是私己
라 終不足以達道
니라
原注
初要持敬에 也須勉强하야 但覺見有些子放去어든 便收斂提掇起하면 敬便在這裏니 常常相接이면 久後自熟이리라
○ 問今於下工夫之時에 不痛自警策하고 而遽栽培涵泳이면 恐或近於放倒로소이다 南軒張氏曰
敬守此心하야 栽培涵泳이면 正是下工夫處니 若近於放倒면 則何栽培涵泳之有리오
原注
敬
은 이니 人常敬
이면 則天理自明
하야 人欲
이 上來不得
이니라
原注
人當放肆怠惰時
에 敬
이면 便扶策得此心起
니 常常恁地
면 雖有些放僻邪侈意思
라도 也自退聽
이니라
原注
⑩
할새 於靜時
엔 最好
라가 及臨事
면 則厭倦
하고
或於臨事時著力이면 則覺紛擾요 不然이면 則於正存敬時에 忽忽爲思慮引去하니
所以有厭倦하며 爲思慮引去하나니 敬은 只是自家一箇心常惺惺이 便是라
不可將來別做一事
니 又豈可指
하야 塊然在此而後
에 爲敬
이리오
原注
秦漢以下諸儒 皆不知敬爲學問之本
이러니 至程子
하야 指以示人
하시고 而朱子又發明之
하야 極其切至
하시니 有功于聖門
이 此其最大者也
니라
爲學之初에 先要持敬이니 敬則身心收斂하야 氣不粗暴하야 淸者愈淸而濁者不得長하고 美者愈美而惡者不得行이라
靜而敬
에 常念天地鬼神臨之
하야 不敢少忽
하고 動而敬
에 을 一一省察
하야 不要逐物去了
하야 雖在千萬人中
이라도 常知有己
니 此持敬之大略也
라
禮記一書 近千萬言이로되 最初一句曰 毋不敬이라하니 天下古今之善이 皆從敬字上起하고 天下古今之惡이 皆從不敬上生하나니
在小學
에 이요 在大學
에도 也索要敬
이요 爲子爲臣爲君爲父
에 皆索要敬
이요 以至當小事, 當大事
에도 都索要敬
이니 這一件
을 先能著力然後
에 可以論學
이요 學
은 又先要窮理
니라
○ [按]
하야 無所師承
이로되 而獨有得于程朱之心學
하니 惜乎
라
言語文字를 不能盡見이요 其可見者는 若居敬窮理之類 皆至論也라
然則民彝物
이 固不與世爲存亡
이요 而非豪傑之士
면 則亦豈能奮起乎百世之下也哉
아
原注
[按] 聖賢論心이 固以出入操存爲難하시고 而程子又以周流不滯로 爲貴하시니
原注
呂與叔
이 하니 蓋爲前日思慮紛擾
어늘 今要虛靜
이라 故以爲有助
라
如是則只是狂妄人耳니 懲此以爲病이라 故要得虛靜이어니와 其極엔 欲得如槁木死灰하니 又却不是라
非禮而勿視聽言動이면 邪斯閑矣니 以此言之하면 又幾時要身如枯木이며 心如死灰리오
原注
世事雖多나 盡是人事니 人事를 不敎人做면 更責誰做리오
○ [按] 此는 言學者於動時에 宜無所不用其敬也니라
原注
言有敎
요 動有法
이요 晝有爲
요 宵有得
이요 이니라
原注
橫渠此語極好하니 君子終日乾乾하야 不可食息間이며 亦不必盡日讀書니라
天地生物
에 以四時運動
하니 春生夏長
이 固是不息
이어니와 雖秋冬凋落
이라도 未嘗不在其中
하니 學者常喚令此心不死
면 則日有進
이니라
○ [按] 張子動靜交修之功이 如此하시니 眞學者法守也니라
原注
身心內外 初無間隔하니 所謂心者固主乎內나 而凡視聽言動出處語默之見於外者 亦卽此心之用이라 未嘗離也어늘
今於其空虛不用之處엔 則操而存之하고 於其流行運用之實엔 則棄而不省하면 此於心之全體에 雖得其半이나 而失其半矣라
是則其所得之半도 又將不足以自存而失之라 孰若一主於敬而此心卓然하야 內外動靜之間에 無一毫之隙, 一息之停哉리오
原注
⑥ 問敬이 通貫動靜而言이나 然靜時少하고 動時多하니 恐易得撓亂이로소이다 朱子曰
人在世間
에 未有無事時節
하야 自早至暮
히 有許多事
하니 니
若事至前而自家却要主靜하야 頑然不應이면 便是心都死了라
無事時에 敬在裏面하고 有事時에 敬在事上하야 有事無事에 吾之敬이 未嘗間斷也라
故程子說
라하시니 蓋專一則有事無事
에 皆是如此
니 에 是緊要處
니라
原注
⑦ 問一向把捉
이라가 待放下
하야는 便覺恁
하니 不知當如何
잇가 曰
曰 靜坐久之에 一念이 不免發動하니 如何잇가 曰
也須看一念
이 是要做甚麽事
니 若是好事當做
인댄 요 或此事
를 思量未透
어든 須著
며 若是不好底事
인댄 便不要做
니 自家纔覺得如此
면 這敬
이 便在這裏
니라
原注
濂溪云
이라하시니 中與仁
은 是發動處
요 正
은 是當然定理處
요 義
는 是截斷處
라
原注
⑨ 黃直卿
이 勸先生且謝賓客
하고 數月
한대 先生曰
天生一箇人
에 便須著管天下事
니 若要不管
인댄 須是如
라야 方得
이니
原注
○ [按] 朱子以楊氏爲我로 答黃直卿은 與程子以槁木死灰로 答呂與叔同意하고 見客一事는 亦與程子世事須敎人做로 同意하니 皆言動之不可不敬也니라
原注
來諭에 欲棲心淡泊하야 與世少求하고 玩聖賢之言하야 以資吾神, 養吾眞者는 無一字不有病痛이라
夫人心은 活物이라 當動而動하고 當靜而靜하야 不失其時면 則其道光明이니 是乃本心全體大用이라
原注
來諭
에 謂靜則溺於虛無
라하니 如佛老之論
인댄 誠有此患
이어니와 若以天理觀之
면 則動之不能無靜
은 猶靜之不能無動也
며 靜之不可不養
은 猶動之不可不察也
라
但見一動一靜
이 互爲其根
하고 敬義夾持
하야 不容間斷之意
면 則雖下靜字
라도 元非死物
이라 至靜之中
에 自有動之端焉
하니 이라
蓋當此時
면 則安靜以養乎此耳
니 固非遠事絶物
하고 閉目
하야 而偏於靜之謂
라
但未接物時에 便有敬以主乎中이면 則事至物來에 善端昭著하야 所以察之者益精明耳리라
又謂某言以靜爲本이 不若遂言以敬爲本이라하니 此固然也어니와
然敬字工夫
而必以靜爲本
하니 今若遂易爲敬
이면 雖若完全
이나 却不見敬之所施 有先有後
하니 亦未爲
也
라
必如所謂要須靜以涵動之所本
하고 察夫動以見靜之所存
하야 動靜
하고 體用不離而後
에 라
此數語卓然하야 意語俱到하니 當書之座右하야 出入觀省이로라
原注
一二年來에 頗專於敬字上勉力호니 愈覺周子主靜之意 爲有味라
只平日涵養이 便是라하시니 此意를 當深體之也니라
“우산牛山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는데 대국大國의 교외郊外이기 때문에 도끼와 자귀로 매일 나무를 베어 가니, 재목이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그 일야日夜(밤낮)에 자라나는 바와 우로雨露가 적셔 주는 바에 싹이 나오는 것이 없지 않지마는 소와 양이 또 따라서 방목放牧되므로 이 때문에 저와 같이 헐벗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헐벗은 것을 보고는 〈우산牛山에는〉 일찍이 훌륭한 재목이 있지 않았다고 여기니, 이것이 어찌 산山의 본성本性이겠는가.
사람에게 보존된 것인들 어찌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그 양심良心을 잃어버리는 것이 또한 도끼와 자귀가 나무에 있어서 아침마다 베어 가는 것과 같으니, 이렇게 하고서도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일야日夜에 자라나는 바와 평단平旦의 맑은 기운에 그 좋아하고 미워함이 사람들과 서로 가까운 것이 얼마 되지 않는데, 낮에 하는 소행이 이것을 곡망梏亡(질곡하여 망하게 함)하니, 반복해서 곡망梏亡하면 야기夜氣가 보존될 수 없고, 야기夜氣가 보존될 수 없으면 금수禽獸와 거리가 멀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그 금수禽獸와 같은 것을 보고는 일찍이 훌륭한 재질材質이 있지 않았다고 여기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실정實情이겠는가.
그러므로 만일 잘 기름을 얻으면 물건마다 자라지 않는 것이 없고, 만일 기름을 잃으면 물건마다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나가고 들어옴이 일정한 때가 없어서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말함일 것이다’ 하셨다.”
原注
“양심良心은 본연本然의 선善한 마음이니, 곧 이른바 인의지심仁義之心이란 것이다.
평단지기平旦之氣는 사물과 접하지 않았을 때의 청명淸明한 기운을 이른다.
‘좋아하고 미워함이 사람들과 서로 가깝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똑같이 옳게 여기는 바를 얻음을 말한다.
사람의 양심良心이 비록 이미 방실放失되었으나 일야日夜의 사이에 또한 반드시 생장生長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평단平旦에 사물과 접하지 않아서 그 기운이 청명淸明할 때에는 이 양심良心이 반드시 발현發見되는 것이 있다.
다만 그 발현發見됨이 지극히 미미한데 낮에 하는 바의 불선不善이 또 이미 따라서 곡망梏亡하니, 이것은 마치 산山의 나무를 이미 베어가나 오히려 싹이 돋아나지만 소와 양이 또 따라서 방목放牧되는 것과 같다.
낮에 하는 행위가 이미 치성熾盛하면 반드시 밤에 자라는 바를 해치고, 밤에 자라는 바가 이미 적어지면 또 낮에 하는 바의 나쁜 행위를 이기지 못한다.
이 때문에 전전展轉하여 서로 해쳐서 평단平旦의 기운도 청명淸明하지 못해서 인의仁義의 양심良心을 보존할 수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이다.”
原注
“공자孔子께서 말씀하기를 ‘마음은 잡으면 여기에 있고 놓으면 잃어버려서 그 출입出入이 일정한 때가 없고 또한 정처定處가 없다’고 하셨는데, 맹자孟子가 이것을 인용하여 마음이 신명神明하고 측량할 수 없어 위태롭게 동하여 편안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으니, 잠시라도 그 기름을 잃어서는 안됨을 밝히신 것이다.”
原注
또한 잡고 놓음을 가지고 말씀하였을 뿐이니, 마음을 잡는 방법은 경敬하여 마음을 곧게 하는 것일 뿐이다.”
原注
내가 스승에게 들으니,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이 장章의 뜻이 가장 요긴하고 절실하니, 배우는 자들은 마땅히 익숙하게 음미하고 깊이 살펴야 할 것이다.”
原注
범순부范純夫의 딸이 《맹자孟子》의 〈조존장操存章〉을 읽고 말하기를 “맹자孟子는 마음을 모르셨다.
마음이 어찌 출입出入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천선생伊川先生은 그 말을 듣고 말씀하기를 “이 여자가 비록 맹자孟子는 몰랐으나 도리어 마음은 알았다.” 하였다.
原注
혹자가 이천伊川이 ‘범순부范純夫의 딸이 도리어 마음은 알았다’고 말씀한 한 단락을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마음은 알기가 쉬우니, 다만 맹자孟子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
마음은 죽은 물건이 아니니, 모름지기 잡아 활간活看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불가佛家에서 입정入定하고 좌선坐禪하는 모양이다.
존存이란 다만 사물을 응접할 때에 일마다 도리道理에 맞게 하는 것이 곧 존存이니, 만약 다만 오똑히 지켜서 이 속에 있게 하기만 한다면 갑자기 어떠한 일이 자신의 앞에 닥쳤을 때에 잡은 것이 곧 흩어질 것이니, 이것은 도리어 ‘놓으면 잃는 것’이 된다.”
“범순부范純夫의 딸은 마음은 알았으나 맹자孟子는 몰랐으니, 이 여자는 실제로 수고롭게 쫓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출입出入이 없다고 말하여, 딴 사람들의 마음이 출입出入이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니, 병이 없는 자가 남의 질병을 모르는 것과 같다.”
原注
“군자君子의 학문學問은 마음에 근본하니, 마음이 있지 않으면 책을 보아도 보이지 않고 간하는 말을 들어도 들리지 않으니, 이는 구이口耳의 학문學問에도 오히려 들어갈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지극히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배우는 자는 반드시 먼저 마음을 보존하여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보존되면 근본이 서니, 근본이 선 뒤에야 학문을 말할 수 있다.
배움이란 깨닫는 것이니, 깨달음은 마음에 말미암는데 마음도 보존하지 못한다면 무슨 깨달음이 있겠는가.
맹자孟子가 말씀하기를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것이 별로 없으니, 서민庶民은 이것을 버리고 군자君子는 이것을 보존한다’ 하였으니, 이 마음이 보존되지 못하면 장차 어두워지고 편벽되고 어긋나서 정情이 나오는 대로 욕심(욕망)을 따라 스스로 사물과 구별되지 못할 것이니, 오히려 무엇을 깨닫겠는가.
그러나 마음은 비록 일찍이 동動하지 않는 적이 없으나 이른바 ‘지극히 고요하다’는 것이 있으니, 저 마음속에 분분한 것은 부념浮念(잡념)이며 간사한 생각일 뿐이다.
물건이 사귀면 끌려갈 뿐이니, 비록 여러 가지 생각이 번거로우나 이른바 ‘지극히 고요하다’는 것은 진실로 그대로이다.
군자君子가 마음을 논할 때에 반드시 ‘보존되었다’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마음이 참으로 없다는 것이 아니요 잡고 놓는 것을 가지고 말하였을 뿐이니, 사람이 마음을 잡는 방법을 안다면 마음이 보존될 것이다.
맹자孟子가 말씀하기를 ‘마음을 기름은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하였으니, 욕심을 적게 하는 것으로 마음을 길러서 외물外物에 유혹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마음을 보존하는 권여權輿(시초)일 것이다.”
原注
[按]범씨范氏의 이 단락에 ‘배움이란 깨달음’이라는 것과 ‘마음이 참으로 없다는 것이 아니요 잡고 놓는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라는 내용은 모두 정자程子의 말씀에 부합되며,
또 마음을 보존함이 지극히 고요한 데에 있고 욕심을 적게 하는 데에서 권여權輿가 된다고 말한 것은 또한 주자周子의 말씀에 부합된다.
原注
주자朱子가 석자중石子重에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공자孔子가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없어져서 나가고 들어옴이 일정한 때가 없어 그 방향을 알 수 없다’는 네 구句를 말씀하시고, ‘오직 마음을 이른다’는 한 구句로 끝맺으셨으니,
바로 마음의 체體와 용用을 곧바로 가리켜서 두루 유행流行하여 변화하고 신명神明하여 측량할 수 없는 묘함을 말씀한 것이다.
만약 ‘놓으면 잃는 것이 이처럼 마음이 달아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면 공자孔子가 마음의 체體를 말씀한 것은 다만 마음의 병통을 말씀한 것일 뿐이니, 성인聖人이 글을 써서 물건을 명명命名(형용)한 뜻이 이와 같지는 않을 듯하다.
또 출입出入이란 두 글자는 선善이 있고 악惡이 있으니, 모두 놓으면 잃는 것이 초래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 ‘마음의 본체本體는 존망存亡으로 말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또한 온당치 못하다.
만약 잡아서 보존되는 것이 애당초 본체本體가 아니었다면 보존된 것이 과연 무슨 물건인지 모르겠으며 또 하필 보존할 필요가 있겠는가.
우연히 기억하건대 호문정공胡文定公(胡安國)의 이른바 ‘일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은 마음의 체體이며 막 일어나고 막 없어지는 것은 마음의 용用이니, 항상 마음을 잡아 보존하면 하루 사이에 비록 백 번 일어났다가 백 번 없어지더라도 마음은 진실로 그대로이다’라는 것이 진실로 좋은 말씀이다.
다만 읽는 자들은 마땅히 이른바 ‘일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 흙덩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아서 지각知覺하는 바가 없는 것이 아니요, 또 백 번 일어났다가 백 번 없어지는 가운데에 별도로 한 물건이 있어서 일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만 이 마음이 밝아서 사사로운 마음이 전혀 없으면 이는 고요하여 동動하지 않는 본체本體요, 이치를 따라 일어나고 이치를 따라 없어지면 이것이 바로 감동하여 마침내 천하天下의 고故(所以然)를 통하는 것이다.”
原注
혹자가 우산지목장牛山之木章에 대해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야기夜氣는 우로雨露의 적셔 줌과 같고 양심良心은 나무의 싹이 나오는 것과 같으니, 사람의 양심良心이 비록 곡망梏亡함이 있으나 저것(夜氣)이 일찍이 생겨나지 않은 적이 없다.
곡梏은 금계禁戒(형틀)를 쓰고서 이곳에 갇혀 있어 다시는 이 몸이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고, 망亡은 자신의 물건을 잃어 버리는 것과 같다.”
“일야日夜(밤)에 자라나는 것이 마음(良心)이니, 야기夜氣가 맑아서 외물外物과 접하지 않은 평단平旦의 때가 바로 이 양심良心이 나오는 곳이나 다만 발發하는 바가 적고, 낮에 곡망梏亡하는 바가 전전展轉하여 반복된다.
이 때문에 야기夜氣가 보존되지 못하는 것이니, 마치 잠을 한 번 깨어 일어나면 예전처럼 아무 일이 없는 것(잠을 자지 않음)과 같은 것이다.”
“양심良心이 당초에는 본래 10분分이 있었지만 저것(욕심)이 전전展轉하여 곡망梏亡을 가加한다.
그리하여 저것이 1분分 자라면 자가自家(자신의 양심)는 다만 9분分만 있고, 다음날 저것이 또 1분分 진보하면 자가自家는 또 후퇴하여 다만 8분分만 있을 뿐이니, 저것은 날마다 나아가고 자가自家는 날마다 물러간다.
이 장章은 지극히 정미精微하니, 맹자孟子가 아니면 말씀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딴사람은 비록 이러한 뜻이 있더라도 형용하여 말하지 못한다.”
原注
“이 장章은 맹자孟子가 사람을 구원함에 간절한 것이니, 산목山木 한 단락은 양심良心 한 단락과 상대가 되고, 기름과 기름을 잃는 것이 또한 상대가 되며, 기름의 득실得失은 또 잡고 놓는 사이에 달려 있다.
정자程子가 또 경이직내敬以直內 한 구句를 발명發明하여 조존操存하는 방법을 가리켜 보여 주었으니, 간절하고 요긴하다고 이를 만하다.
배우는 자가 이것을 읽을 적에 급히 경계하고 살펴야 할 것이니, 이것을 보존하면 사람이요 이것을 보존하지 못하면 금수禽獸이다.
原注
“사람의 마음이 분요紛擾할 때에는 마음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잡기를 오래하지 못하면 또다시 사물이나 쓸데없는 생각에 끌려가게 되니, 《맹자孟子》의 우산지목장牛山之木章을 가장 잘 보아야 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니, 아무리 어렵더라도 모름지기 스스로 힘써야 한다.
마음이 항상 깨어 있어서 방도放倒하지 않게 하며, 물욕物慾이 옴을 깨달으면 곧 긴장하여 저것(물욕)을 따라가지 않게 하여야 한다.
만일 ‘마음을 잡을 수 없고 저것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니, 다시 어찌 ‘인仁을 함은 자신에게 말미암으니(달려 있으니),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原注
“배우는 자들은 마음과 생각이 분란紛亂하여 편안하고 고요하지 못함을 염려하니, 이는 천하天下의 공통된 병이다.
배우는 자는 단지 이 마음을 세워야 하니, 이 위에 참으로 헤아릴 것이 있다.”
原注
[按] 사람의 마음을 잡아서 보존하지 못함은 대부분 사려思慮가 분요紛擾함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선유先儒들이 누누이 말씀하였으나 마음을 잡아 보존하는 방법을 찾아보면 어찌 딴 방법이 있겠는가.
이제 잡아 보존함에 관한 내용 열한 조목을 아래와 같이 뽑고, 정靜을 주장하고 경敬을 잡는 것에 대해서는 별도로 나타내었다.
原注
“사람들이 사려思慮가 많아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함은 다만 마음의 주장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직 일에 그쳐야 하니,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그치는 따위이다.
순舜임금이 사흉四凶을 주벌誅罰할 때에 사흉四凶이 이미 악惡을 행하였으므로 순舜임금이 따라서 주벌한 것이니, 순舜임금이 어찌 관여하였겠는가.
사람이 일에 그치지 않는 것은 다만 딴 일을 잡고 있어서 사물을 각각 사물에 맡겨두지 못하기 때문이니, 사물을 각각 사물에 맡겨두면 이는 사물을 부리는 것이요, 사물에게 부려지는 바가 되면 이는 사물에게 부림을 당하는 것이다.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으니, 모름지기 일에 그쳐야 한다.”
原注
“정자程子가 또 일찍이 말씀하기를 ‘사람에게는 4백 4가지의 질병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자신에게 말미암지 않지만 다만 마음은 모름지기 자신에게 말미암게 해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바로 마음의 주장을 삼음을 말씀한 것이다.”
原注
“사람 마음의 주장함이 안정되지 못함은 바로 하나의 번차翻車(水車)가 돌고 요동하여 수유須臾(잠시)도 정지할 때가 없는 것과 같아서 감동하는 바가 만 가지이니, 만약 하나의 주장을 삼지 않는다면 아무리 한들 어쩌겠는가.
장천기張天祺가 일찍이 말하기를 ‘몇 년 동안 평상平牀(침상)에 올라 가서 사량思量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하였는데, 조금(잠시)이라도 사량思量하지 않으려 한 뒤에는 모름지기 이 마음을 억지로 잡아서 제재하고 속박하거나 또는 모름지기 하나의 형상形象에 붙여두어야 할 것이니, 이는 모두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原注
“군실君實(司馬光)이 일찍이 사려思慮가 분란紛亂함을 염려하여 때로는 한밤중에 일어나 아침이 되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스스로 괴로워했다고 이를 만하다.
이와 같이 한다면 얼마 안 가서 혈기血氣가 꺾이고 쇠잔하여 다하지 않겠는가.
그후 군실君實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근래에 한 가지 방법을 얻었으니, 항상 중中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또 중中에게 어지럽힘을 당하는 것이다.
중中이 또 무슨 형체가 있기에 어떻게 생각한단 말인가?
또한 다만 명언名言(좋은 말) 가운데에서 한 좋은 글자를 가려낸 것일 뿐이니, 중中에게 어지럽힘을 당하기보다는 한 꿰미 수주數珠(염주)를 주는 것이 나음만 못하다.
밤에는 몸을 편안히 하고 잘 때에는 눈을 감아야 하니, 알지 못하겠으나 괴롭고 괴롭게 무엇을 생각한단 말인가.
이는 다만 마음을 주장으로 삼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原注
후일에 또 말씀하기를 “군실君實이 근년에 병통을 점점 크게 놓아 없앴다.” 하였다.
○ [按] 이 말씀에서 대현大賢의 덕업德業의 진전과 일신日新(날로 새로워짐)의 공부가 젊다고 하여 굳세고 늙었다고 하여 쇠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깊이 살펴야 할 것이다.
原注
“학문에 애씀으로 인하여 마음(정신)을 잃은 데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니, 학문은 본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인데, 어찌 도리어 마음에 해가 된단 말인가.
나는 기운이 왕성하지는 못하나 병이 없고 권태로움이 없는 것은 다만 섭생攝生을 삼가고 마음을 함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니, 〈음식飮食이나 여색女色과 같은〉 밖의 일에 생각이 참으로 한가롭노라.”
原注
“사마자미司馬子微(司馬承禎)가 좌망론坐忘論을 지었으니, 이것은 이른바 ‘앉아서 생각이 달려간다[坐馳]’는 것이다.”
原注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신령스러워서 온갖 변화를 주재主宰하여, 사물이 주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잡아 지키려는 뜻이 있으면 곧 이 마음이 먼저 스스로 동요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정부자程夫子가 언제나 ‘좌망坐忘은 곧 좌치坐馳’라고 말씀한 이유이고,
배우는 자들에게 조존操存하는 방법을 가리켜 보이실 적에 비록 ‘경敬하여 안을 곧게 한다[敬以直內]’고 말씀하였으나 또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면[以敬直內]곧 곧아지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는 것이다.”
原注
“사람이 잠자고 꿈꾸는 사이에도 자신이 배운 바의 깊고 얕음을 징험할 수 있으니, 예컨대 꿈속에서 전도顚倒하면 이는 곧 심지心志가 안정되지 못하고 조존操存이 견고하지 못한 것이다.”
原注
“혼과 넋이 사귀어 잠을 이루니, 마음이 이 사이에 있으면 예전처럼 사려思慮한다.
이 때문에 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 만약 마음과 정신이 안정되었으면 꿈에서도 전도顚倒함에 이르지 않는다.”
原注
“마음이 깨끗할 때는 적고 혼란할 때는 많으니, 깨끗할 때에는 보는 것이 분명하고 듣는 것이 밝고 사지四肢가 속박하지 않아도 자연 공손하고 삼가며, 혼란할 때에는 이와 반대가 되니, 이는 어째서인가?
마음을 씀이 익숙하지 못하여 객려客慮(잡념)가 많고 떳떳한 마음이 적으며, 습속習俗의 마음이 제거되지 못하여 진실한 마음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또 강剛하여야 하니, 강剛하면 지킴이 안정되고 회곡回曲하지 않아서 도道에 나아감이 용감하게 된다.”
原注
“횡거橫渠가 공부하는 곳을 말씀한 것이 이정二程보다 정밀하고 간절하니, 이정二程은 자품資稟이 높고 깨끗하여 대단하게 공부하지 않았고, 횡거橫渠는 자품이 편협하고 박잡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하여 저가 대단하게 공부를 하였으니, 이 말씀을 보면 말씀한 것이 대단히 정밀하고 간절하다.”
“객려客慮는 범범한 사려이고, 습속習俗의 마음은 곧 종래에 익히고 익숙한 편벽되고 치우친 마음이고, 실심實心은 의리義理의 마음이다.”
原注
“오늘날 배우는 자들이 크게 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만 마음이 여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찍이 기억하건대 소년 시절 동안同安에 있으면서 밤에 종소리를 들었는데, 한 종소리를 들어 채 끝나기도 전에 이 마음이 이미 스스로 달려가곤 하였다.
이로 인하여 경계하고 살폈으니, 학문을 함은 모름지기 뜻을 지극히 해야 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原注
“이선생李先生(李侗)이 ‘사람의 마음속에 대단히 악惡한 생각은 도리어 제어하고 굴복시키기가 쉬우나 대단하게 이해利害를 따지는 것도 아니면서 별안간 갔다가 별안간 오는 생각이 서로 이어져서 끊이지 않는 것이 가장 몰아내기 어렵다’ 하였으니, 지금 경험하여 봄에 참으로 이와 같노라.”
原注
“사람이 한 올바른 생각이 있는 것이 자연 분명하나 또 옆에서 별도로 한 작은 생각이 생겨나서 점점 퍼져 나가니, 이것을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된다.”
原注
① 사현도謝顯道가 명도선생明道先生을 부구扶溝에서 수행하였는데, 하루는 명도선생明道先生이 이르기를 “그대들이 이곳에 있으면서 서로 따름에 다만 나의 말만 배운다.
이 때문에 그 학문하는 것이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지 않으니, 어찌 실행하는 것만 하겠는가.” 하였다.
사현도謝顯道가 청하여 묻자, “우선 정좌靜坐하라.” 하였다.
原注
[按]선유先儒들이 정靜을 주장함을 논한 것을 명도선생明道先生으로부터 이하 모두 아홉 조목을 얻었다.
原注
② 이천선생伊川先生은 언제나 사람이 정좌靜坐하는 것을 보면 학문을 잘한다고 감탄하곤 하였다.
原注
③ 소강절선생邵康節先生이 백원산百原山의 깊은 산중에 서재書齋를 열고는 홀로 이 가운데에 거처하였다.
왕승지王勝之(王益柔)가 항상 달밤에 방문하곤 하였는데, 반드시 등잔불 아래에 옷깃을 바르게 하고 무릎 꿇고 앉아서 아무리 밤이 깊어도 이와 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原注
“강절선생康節先生을 보건대 이 분은 모름지기 지극히 일을 잘 처치하였으니, 저가 정신이 한가롭고 기운이 안정되어 음성과 정신 기운을 동하지 않았으므로 처치함이 정밀하고 분명하였다.
그 기질이 본래 청명한 데다가 또 수양하기를 순수하고 후하게 하였으며, 또 일찍이 마음을 헛되이 쓰지 아니하여, 그 마음을 쓰는 것이 모두 긴요한 데에 있었으니, 그의 고요함이 지극하였다.
이 때문에 천하의 사리事理를 보기를 이와 같이 정하고 밝게 한 것이다.”
原注
“정靜을 주장함을 〈《맹자孟子》의〉 야기夜氣 한 장章에서 볼 수 있다.”
原注
⑤ “정자程子가 항상 사람들에게 정좌靜坐하게 하셨으니,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또한 정자程子는 사람들이 생각을 많이 하려고 함을 보았으므로 우선 사람들로 하여금 이 마음을 수습하게 하신 것이니, 처음 배우는 자들은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
原注
“연평선생延平先生이 일찍이 말씀하기를 ‘도리道理를 모름지기 낮 동안에 이해하고 밤에는 조용한 곳에 가서 앉은자리에서 생각하고 헤아려야 비로소 얻음이 있을 것이다’ 하셨으니, 내가 이 말씀을 따라 해 보니, 효과가 참으로 각별하였다.”
原注
“지금 사람들은 모두 근본상根本上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컨대 경자敬字를 가져다가 다만 말만 할 뿐이고 다시는 공부해 나가지 아니하여 근본이 서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타 자질구레한 공부가 머무를 곳이 없는 것이다.
명도明道와 연평延平이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정좌靜坐하게 하셨으니, 내가 보건대 모름지기 정좌靜坐하여야 하겠더라.”
原注
⑧ 선생先生(朱子)이 백우伯羽(董蜚卿)에게 “어떻게 공부하는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우선 정좌靜坐를 배워 사려를 통렬히 억제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통렬히 억제하는 것도 옳지 않으니, 다만 놓아 물러가게 해야 한다.
만약 눈을 완전히 감고 앉아 있으면 도리어 사려가 있게 될 것이다.”
또 말씀하기를 “또한 전혀 사려가 없을 수 없으니, 간사한 생각이 없을 뿐이다.” 하였다.
原注
“마음이 일찍이 일을 만나지 않았을 때에 모름지기 고요하여야만 일을 당하여 막 쓰려고 할 때에 곧 기력(효력)이 있는 것이니, 만약 고요하여야 할 때에 고요하지 아니하여 사려가 산란하다면 일을 당했을 때에 이르러 이미 먼저 피곤해진다.
이천伊川이 ‘고요함이 전일專一함’을 해석한 곳에 이르기를 ‘전일專一하지 않으면 곧바로 이루지 못한다’ 하였으니, 한가로울 때에 모름지기 수렴하여야 일을 할 때에 곧 정신精神이 있는 것이다.”
原注
[按]선유先儒들이 경敬을 잡음을 논한 것을 정자程子로부터 이하 모두 열 조목을 얻었다.
原注
② 소백온邵伯溫이 “심술心術이 가장 어려우니, 어떻게 잡아야 합니까?” 하고 묻자, 정자程子는 “경敬이다.” 하였다.
原注
그리고 또 말씀하기를 “경敬은 온갖 간사함을 이겨낸다.” 하였다.
“정선생程先生이 후학後學들에게 공功이 있는 까닭은 이 한 경자敬字가 가장 공력功力이 있어서이다.”
原注
“도道에 들어가는 것은 경敬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치지致知를 하면서 경敬에 있지 않는 자는 있지 않다.
지금 사람들은 주장하는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여 마음을 보기를 도적처럼 여겨 제재하지 못하니, 이는 일이 마음을 얽매는 것이 아니요 바로 마음이 일에 얽매이는 것이다.
천하에는 한 물건도 없어서는 안 되니 미워해서는 안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原注
“정자程子는 ‘격물格物과 궁리窮理를 다만 성의誠意를 세워 궁구하는 것이다’ 하였고, 또 ‘도道에 들어감은 경敬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제 생각에는 성의誠意공부는 격물格物‧치지致知의 뒤에 있는데, 이제 마침내 성의誠意를 세워야 비로소 가서 격물格物을 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경전經傳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묻자, 잠실진씨潛室陳氏(陳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문程門에는 이러한 유類가 매우 많으니, 예컨대 치지致知에 경敬을 쓰는 것도 정심正心과 성의誠意의 지위(경계)를 먼저 침범(점령)하였다.
성誠‧경敬 두 글자는 동動과 정靜, 시始와 말末을 관통하니, 격물格物‧치지致知하기 전에 다시 하나의 경공부敬工夫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인옹主人翁(心)을 세우고자 할 뿐이니, 그렇지 않으면 모두 망령된 것이다.”
“한 일에는 한 일의 이치가 있으니, 사람이 그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따라 응하면 일이 모두 제자리를 얻고 마음 또한 수고롭지 않지만 만약 분요紛擾하여 사사로운 마음으로 대처한다면 일이 반드시 마땅함을 얻지 못할 것이요 마음 또한 잠시도 편안함이 없을 것이니, 사람들은 다만 일이 마음을 얽매는 것만 알고 바로 마음이 일에 얽매이는 것은 알지 못한다.”
原注
“대체로 사람의 마음을 두 가지로 써서는 안 되니, 한 가지 일에 쓰면 다른 일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그 일이 주장이 되기 때문이다.
일이 주장이 되어도 오히려 사려思慮가 분요紛擾해지는 걱정(병폐)이 없는데, 만약 경敬을 주장한다면 또 어찌 이러한 걱정이 있겠는가.”
原注
혹자가 묻기를 “일이 주장이 된다는 한 단락은 의심컨대 마음으로 하여금 일의 주장이 되게 하고 일로 하여금 마음의 주장이 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인 듯합니다.” 하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일이 주장이 된다는 것은 다만 이 마음이 수렴되어 한 가지 일 위에 있어서 다른 데로 달려가지 않게 하는 것일 뿐이니, 이천伊川이 온공溫公에게 염주를 주고자 한 것과 같은 따위이다.”
原注
⑤ 횡거선생橫渠先生이 일찍이 말씀하기를 “내 15년 동안 ‘공손하면서도 편안함’을 배웠으나 이루지 못하였다.”라고 하자, 명도선생明道先生이 말씀하기를 “학문이 이루어지지 못함은 이처럼 수많은 병통이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하였다.
原注
“무릇 공손하고 삼가면 반드시 억지로 힘써 편안하지 못하고 편안하면 반드시 방종하여 공손하지 못하다.
공손함은 ‘잊지 말라는 것’과 같고, 편안함은 ‘조장助長하지 말라는 것’과 같으니, 바로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않는 사이에 자세히 체인體認하여야 한다.”
○ “횡거橫渠는 다만 굳게 잡기만 하였기 때문에 편안하지 못한 것입니까?” 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그는 다만 공손함만 배워서 스스로 일찍이 익숙하지 못함을 경험하여 본 것이니, 공손함을 배우고 또다시 편안함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原注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이 마음을 공경히 지켜서 급박하게 하지 말 것이요, 마땅히 재배栽培하기를 깊고 후하게 하여 이 사이에서 함양한 뒤에야 자득自得할 수가 있으니, 다만 급박하게 구하면 다만 사사로움일 뿐이어서 끝내 도道에 도달하지 못한다.”
原注
혹자가 “경敬을 잡아 지키는 것이 심히 편안하지 못함을 깨달았습니다.” 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오직 공자孔子라야 비로소 공손하면서도 편안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 공경을 잡아 지키려고 할 때에는 모름지기 힘써서 다만 조금이라도 놓아버림이 있음을 깨닫거든 곧 거두어들이고 제기提起(깨워 일으킴)하면 경敬이 곧 이 가운데에 있게 되니, 항상 서로 이어지게 하면 오랜 뒤에는 저절로 익숙해질 것이다.”
○ “이제 공부할 때에 통렬히 스스로 경책警策하지 않고 대번에 재배栽培하고 함영涵泳하면 혹 방도放倒함(뒤집어짐)에 가까울까 두렵습니다.” 하고 묻자, 남헌장씨南軒張氏가 말씀하였다.
“이 마음을 공경히 지켜서 재배하고 함영하면 이것이 바로 공부하는 곳이니, 만약 방도放倒함에 가깝다면 어찌 재배하고 함영함이 있겠는가.”
原注
“경敬은 바로 성문聖門에 제일의 의義이니, 철두철미하다.
경각頃刻(잠시)이라도 간단間斷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原注
“경敬은 인욕人欲을 대적하는 것이니, 사람이 항상 공경하면 천리天理가 저절로 밝아져서 인욕人欲이 올라올 수가 없다.”
原注
“경敬은 사람을 붙들어 주고 경책警策하는 도리道理이다.
사람이 방사하고 나태할 때에 조금만 공경하면 곧 이 마음을 붙들고 경책警策하여 일으킬 수 있으니, 항상 이와 같이 하면 비록 약간의 방벽放辟하고 사치邪侈한 의사意思가 있더라도 저절로 물러가 명령을 들을 것이다.”
原注
⑩ “평소 경敬을 잡아 지킬 적에 고요할 때에는 매우 좋다가 일을 당하게 되면 싫어지고 게을러지며,
혹은 일을 당했을 때에 힘을 쓰면 분요紛擾함을 깨닫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경敬을 보존할 때에 갑자기 사려思慮에 끌려가곤 하니,
이 세 가지를 장차 어떻게 이겨야 합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경敬을 가져다가 별도로 한 가지 일로 삼는다.
이 때문에 싫어지고 게을러지는 마음이 있으며 사려에 끌려가는 것이니, 경敬은 다만 자신의 한 마음을 항상 깨우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경敬을 가져다가 별도로 한 가지 일로 삼아서는 안 되니, 또 어찌 손을 들고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히고서 흙덩이처럼 여기에 있은 뒤에야 경敬을 한다고 가리켜 말할 수 있겠는가.”
原注
“진秦‧한漢이후로 여러 학자들은 모두 경敬이 학문學問의 근본根本인 줄을 몰랐는데, 정자程子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가리켜 보여주었고 주자朱子가 또 발명發明하여 지극히 간절하게 하였으니, 두 선생이 성문聖門에 공功이 있음은 이것이 그 가장 큰 것이다.”
“학문하는 초기에는 먼저 경敬을 잡아 지켜야 하니, 경敬하면 몸과 마음이 수렴되어서 기氣가 거칠고 사납지 아니하여, 맑은 것은 더욱 맑아져 탁한 것이 자라나지 못하고, 아름다운 것은 더욱 아름다워져 악한 것이 행해지지 못한다.
정靜할 때에 경敬하여 항상 천지귀신天地鬼神이 강림하고 있음을 생각하여 감히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동動할 때에 경敬하여 보고 들음, 얼굴빛과 모양, 말과 일, 의심과 분함, 얻음에서부터 일일이 성찰해서 외물外物을 따라가지 않게 하여 비록 천만인千萬人의 속에 있더라도 항상 자신이 있음을 알아야 하니, 이것이 경敬을 잡아 지키는 대략이다.
《예기禮記》 한 책은 천만자千萬字에 가까운데 최초最初의 한 구句는 ‘무불경毋不敬(敬하지 않음이 없음)’이니, 천하天下 고금古今의 선善이 모두 경자敬字에서 나오고 천하天下 고금古今의 악惡이 모두 불경不敬에서 생겨난다.
《소학小學》에 있어서도 곧 경敬을 찾아야 하고, 《대학大學》에 있어서도 경敬을 찾아야 하며, 자식이 되고 신하가 되고 군주가 되고 부모가 되었을 때에도 모두 경敬을 찾아야 하고, 작은 일을 당하거나 큰 일을 당함에 이르러서도 모두 경敬을 찾아야 하니, 이 한 가지 일에 먼저 힘을 쓴 뒤에야 학문을 논할 수 있으며, 학문은 또 먼저 이치를 연구해야 한다.”
○ [按]허씨許氏(許衡)는 예융裔戎(변방의 오랑캐)이 처음 중국中國을 어지럽히던 시기에 태어나서 스승에게서 전수傳受받은 바가 없었는데도 홀로 정주程朱의 심학心學에 얻음이 있었으니, 애석하다.
그의 언어言語와 문자文字를 다 볼 수 없고, 볼 수 있는 것은 거경居敬과 궁리窮理 같은 유類인데 모두 지극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백성의 떳떳한 성품과 사물의 법칙은 진실로 세상에 따라 존재하거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며, 호걸豪傑의 선비가 아니라면 또한 어찌 〈이처럼〉 백세百世의 뒤에 분발하여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原注
“사람의 마음은 항상 살아 있어야 하니, 살아 있으면 두루 유행流行하여 다함이 없어서 한 귀퉁이에 막히지 않는다.”
原注
[按]성현聖賢이 마음을 논한 것은 진실로 나가고 들어옴과 잡아 보존함을 어렵게 여겼고, 정자程子는 또 두루 유행流行하여 막히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마음은 적寂‧감感을 갖추고 경敬은 동動‧정靜을 겸하니, 좌선坐禪하여 생각을 잡는 것처럼 정靜에 한결같이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바로 털끝 만한 것에서 천리千里의 차이가 생기는 구분이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삼가야 할 바이다.
선유先儒들이 경敬이 동정動靜을 겸함을 논한 것을 모두 열한 조목을 얻어 아래에 자세히 나열하노라.
原注
“여여숙呂與叔은 〈노장老莊의〉 양기養氣가 유학儒學에 도움이 된다고 의심하였으니, 이는 전일前日에는 사려思慮가 분요紛擾하였는데, 이제 허정虛靜(비고 고요함)하려 하므로 도움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전일에 사려가 분요함은 또 의리義理가 아니고 또 사고事故가 아니다.
이와 같다면 미치고 망령된 사람일 뿐이니, 이것을 징계하여 병으로 여겼기 때문에 마음이 허정虛靜하려고 한 것이나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마른나무와 꺼진 재와 같아지려고 하였으니, 이는 또 옳지 않다.
사람은 살아 있는 물건이니, 또 어찌 마른나무와 죽은 재와 같아질 수 있겠는가.
이미 살아 있으면 반드시 동작動作이 있고 반드시 사려思慮가 있다.
사邪를 막으면 성誠(진실)이 저절로 보존되니, 성誠이 보존되면 충신忠信이다.
예禮가 아니거든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고 동하지 않으면 사邪가 막아지니,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또 어느 때에 몸이 마른나무와 같고 마음이 꺼진 재와 같아지겠는가.
또 네 가지(意‧필必‧고固‧아我)를 끊은 뒤에는 마침내 〈그 기상이〉 어떠한가.
또 어느 때에 모름지기 마른나무와 꺼진 재와 같아지겠는가.
경敬하여 안을 곧게 하면 모름지기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지는 것이다.
모든 일이 이와 같으니, 얼마나 크게 직절直截(간단하고 분명함)한가.”
原注
사람들이 일이 많음을 싫어하여 혹자가 이를 고민하자,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세상일이 비록 많으나 모두 사람의 일이니, 사람의 일을 사람으로 하여금 하게 하지 않으면 다시 누가 해주기를 바란단 말인가.”
○ [按] 이는 배우는 자가 동할 때에 마땅히 경敬을 쓰지 않는 바가 없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原注
“말함에는 가르침이 있고 동함에는 법이 있고 낮에는 함이 있고 밤에는 얻음이 있고 눈 깜짝할 사이에도 기름이 있고 숨 쉴 때에도 보존함이 있어야 한다.”
原注
“횡거橫渠의 이 말씀이 지극히 좋으니, 군자君子는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써서 밥 먹을 때나 숨 쉴 때에도 간단間斷하지 않으며, 또한 굳이 종일토록 책만 읽지 않는다.
혹 고요히 앉아서 존양存養하는 것이 모두 공부하는 곳이다.
천지天地가 만물을 낼 적에 사시四時로써 운동하니, 봄에 낳고 여름에 자라는 것은 진실로 쉬지 않는 것이요, 비록 가을과 겨울에 초목이 말라 잎이 떨어지더라도 생의生意가 일찍이 그 가운데에 있지 않은 적이 없으니, 배우는 자가 항상 불러 깨워서 이 마음으로 하여금 죽지 않게 하면 날로 진보함이 있을 것이다.”
○ [按]장자張子의 동動과 정靜을 서로 닦는 공부가 이와 같았으니, 참으로 배우는 자가 본받아 지켜야 할 것이다.
原注
“일이 이르면 응하고 마음이 일을 따라 함께 가지 않는 것이 경敬이 아니겠는가.
만물은 변화하여도 이 마음은 항상 보존되니, 어찌 분요紛擾함이 있겠는가.
부자夫子께서 ‘일할 적에는 공경함을 생각한다’고 하신 것은 바로 이것을 이른 것이다.”
原注
⑤ 주자朱子가 양자직楊子直(楊方)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신심身心과 내외內外가 애당초 간격이 없으니, 이른바 마음이라는 것이 진실로 안을 주장하나 밖에 나타나는 모든 시청언동視聽言動과 출처어묵出處語默 또한 이 마음의 용用이어서 일찍이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지금 공허하여 쓰지 않는 곳에 있어서는 잡아서 보존하고 유행流行하여 운용運用하는 실제에 있어서는 버리고 살피지 않는다면, 이는 마음의 전체에 비록 반은 얻었으나 반은 잃은 것이다.
그러나 얻은 반도 반드시 안배安排하고 포치布置함이 있은 뒤에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보존하면 싹을 뽑아 조장助長하는 병폐가 있고, 보존하지 않으면 버리고 김매지 않는 잘못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얻은 바의 반도 장차 스스로 보존하지 못하여 잃게 될 것이니, 어찌 한결같이 경敬을 주장해서 이 마음이 우뚝하여 내외內外와 동정動靜의 사이에 털끝 만한 틈과 잠깐동안의 정체停滯도 없는 것만 하겠는가.”
原注
⑥ “경敬이 동動‧정靜을 관통한다고 말하나 정靜할 때는 적고 동動할 때는 많으니, 요란해지기 쉬울까 두렵습니다.” 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일이 없을 때가 없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허다한 일이 있으니, 일이 많아 나를 요란하게 하므로 우선 가서 정좌靜坐한다고 말하는 것은 되지 않는다.
만일 일이 앞에 닥쳤는데도 자신이 도리어 정靜을 주장하고자 하여 완연頑然히 응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마음이 모두 죽은 것이다.
일이 없을 때에는 경敬이 이면裏面에 있고 일이 있을 때에는 경敬이 일 위에 있어서 일이 있던 일이 없던 나의 경敬이 일찍이 간단間斷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가 말씀하기를 ‘학문學問은 전일專一함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좋다’ 하였으니, 전일專一하면 일이 있던 일이 없던 모두 이와 같이 할 수가 있으니, 정자程子의 이 단락에 이 한 구句가 바로 긴요한 부분이다.”
原注
⑦ “한결같이 마음을 잡다가 마음을 놓아버리면 곧 이처럼 쇠삽衰颯(쓸쓸함)을 느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만약 가서 잡으려고 한다면 또다시 하나의 마음을 더하게 되니, 그대가 만약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면 마음을 들어(깨우쳐) 일으키는 것이 바로 경敬이다.”
“정좌靜坐를 오래하면 한 생각이 발동함을 면치 못하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또한 모름지기 한 생각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하니, 만약 좋은 일로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면 모름지기 가서 주관할 것이요, 혹 이 일을 사량思量하여 아직 통투通透하지 못했으면 모름지기 사량思量하여 끝낼 것이며, 만약 좋지 못한 일이라면 하지 말아야 하니, 자신이 잠시라도 이와 같음을 깨달으면 이 경敬이 곧 이 안에 있는 것이다.”
原注
⑧ "관직을 맡아 일이 많아서 어지러우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저 스스로 어지러운 것이니,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주염계周濂溪가 말씀하기를 ‘중中‧정正과 인仁‧의義로써 정定하되 정靜을 주장한다’ 하였으니, 중中과 인仁은 발동하는 곳이고 정正은 당연한 정리定理의 곳이고 의義는 절단截斷하는 곳이다.
항상 정靜을 주장하여야 하니, 어찌 다만 마음을 놓아버리고 수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절단截斷’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긴요하다.”
原注
⑨ 황직경黃直卿(黃榦)이 주선생朱先生에게 우선 빈객을 사절하고 몇 달동안 요양하여 신병을 조리할 것을 권하자,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하늘이 한 사람을 낼 적에 모름지기 천하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으니, 만약 주관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모름지기 양씨楊氏(楊朱)의 위아爲我와 같이 하여야만 될 것이다.
나는 일찍이 이러한 학문은 배우지 않았노라.”
原注
“사람들이 언제나 빈객을 만나보지 않으려 하니, 저들이 어찌하여 그러는지 모르겠다.
만약 나로 하여금 한 달 동안 빈객을 만나보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한 달 동안 큰 병을 앓는 것과 같을 것이다.
오늘 빈객과 하룻동안 말을 나누니, 의사意思가 펴지고 통창通暢함을 깨닫겠다.
저 문을 닫고 사람을 만나보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날을 보내는지 모르겠다.”
○ [按]주자朱子가 양씨楊氏의 위아爲我를 가지고 황직경黃直卿에게 답한 것은 정자程子가 마른나무와 꺼진 재로 여여숙呂與叔에게 답한 것과 뜻이 같고, 빈객을 만나보는 한 가지 일은 또한 정자程子가 세상일은 모름지기 사람으로 하여금 하게 한다는 것과 뜻이 같으니, 모두 동動할 때에 경敬하지 않을 수 없음을 말씀한 것이다.
原注
⑩ 주자朱子가 허순지許順之(許升)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보내온 편지에 ‘마음을 담박함에 깃들여 세상에 구하는 것을 적게 하고, 성현聖賢의 말씀을 살펴보아 나의 정신精神을 자뢰하고 나의 진리眞理(性)를 기르고자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한 글자도 병통이 없는 것이 없소.
사람의 마음은 살아 있는 물건이니, 동動해야 할 때에는 동動하고 정靜해야 할 때에는 정靜하여 때를 잃지 않으면 도道가 광명光明해지니, 이것이 바로 본심本心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오.
어떻게 모름지기 담박함에 깃들인 뒤에야 얻음이 되겠소.
또 이 마음은 어떤 것이기에 또 어떻게 깃들게 할 수 있단 말이오.”
原注
⑪ 〈주자朱子가〉 장경부張敬夫(張栻)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보내온 편지에 ‘정靜하면 허무에 빠진다’고 하였으니, 이 한 정자靜字를 불로佛老의 말과 같이 여긴다면 진실로 이러한 병통이 있거니와 만약 천리天理로 본다면 동動에 정靜이 없을 수 없는 것은 정靜에 동動이 없을 수 없는 것과 같으며, 정靜을 기르지 않을 수 없음은 동動을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한 번 동動하고 한 번 정靜하는 것이 서로 뿌리가 되고 경敬과 의義를 양쪽으로 잡아서 간단間斷함을 용납하지 않는 뜻을 본다면 비록 정자靜字를 놓더라도 원래 죽은 물건이 아니어서 지극히 정靜한 가운데에 자연 동動의 단서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천지天地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선왕先王이 동지冬至에 관문關門을 닫은 까닭입니다.
이때를 당하면 안정安靜하여 이것(陽)을 기를 뿐이니, 진실로 사물을 멀리 끊고 눈을 감고 오똑히 앉아서 정靜에 편벽되게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물을 접하지 않았을 때에 곧 경敬을 두어 마음을 주장하면 사물이 올 적에 착한 마음이 밝게 드러나서 살피는 것이 더욱 정밀해지고 분명할 것입니다.
또 말씀하기를 ‘제가 정靜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은 마침내 경敬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셨는데, 이는 참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경자敬字의 공부가 동動‧정靜을 관통하되 반드시 정靜을 근본으로 삼으니, 이제 만약 경자敬字로 바꾼다면 비록 완전한 듯하나 경敬의 베푸는 바가 선先‧후後가 있음을 볼 수 없으니, 또한 적당的當(正當)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보내온 편지에 말씀한 대로 ‘모름지기 정靜으로써 동動의 근본한 바를 함양하고 동動을 살펴 정靜의 보존한 바를 보아서 동動‧정靜이 서로 필요하고 체體‧용用이 떨어지지 않게 한다’는 것과 같이 한 뒤에야 물샐 틈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몇 말씀은 드높아서 뜻과 말이 모두 지극하니, 마땅히 이것을 자리 오른쪽에 써 붙여서 출입할 때에 보며 살피겠습니다.”
原注
“정자程子가 사람들에게 경敬을 하라고 가르친 것은 곧 주자周子의 정靜을 주장한다는 뜻이다.”
原注
“1, 2년 동안에 자못 오로지 경자敬字 상上에 힘을 써보니, 주자周子의 정靜을 주장한다는 뜻이 재미가 있음을 더욱 깨닫겠다.
정자程子가 이르시기를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하기 이전에 다시 무엇을 구한단 말인가.
다만 평소에 함양涵養하는 것이 곧 이것이다’ 하였으니, 이 뜻을 마땅히 깊이 체득해야 할 것이다.”
原注
“남헌南軒의 이 말씀은 경敬과 정靜을 합하여 하나로 만든 것이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