雞鳴而起하야 孶孶爲善者는 舜之徒也요 雞鳴而起하야 孶孶爲利者는 蹠之徒也니 欲知舜與蹠之分인댄 無他라
原注
善與利
는 公私而已矣
니 出於善
이면 便以利言也
니라
原注
舜蹠之相去遠矣로되 而其分은 乃在利善之間而已니 是豈可以不謹이리오
然講之不熟
하고 見之不明
이면 니 又學者所當深察也
니라
原注
○ 或問 雞鳴而起하야 若未接物이면 如何爲善이닛고 程子曰
原注
仲舒
이 甚高
하니 後世所以不如古人者
는 以
을 耳
일새니라
原注
透得名利關
이라야 方是
니 今之士大夫
는 何足道
리오
原注
上蔡此言
이 深可畏
니 須是
에 立得脚定然後
에 博文約禮之工
이 有所施耳
니라
原注
如路
를 好人行之
라도 是路
요 賊行之
라도 亦是路
니 는 是天理
요 起計較
면 便不是
니라
原注
利與善之間에 若纔有心要人知하고 要人道好하고 要以此求利祿이면 皆爲利也라
這箇極多般樣하니 雖所爲皆善이라도 但有一毫歆慕外物之心이면 便是利了라
如一塊潔白物事上面에 只著一點黑이면 便不得爲白矣니라
原注
世間喩於義者
는 則爲君子
요 喩於利者
는 卽是小人
이어늘 호되 卒旣不得爲君子
하고 하니 可謂誤用其心矣
로다
原注
昨有李某初上一書하야 極說道學恁地不好라하니 那時에 某人在要路라 故以此說投之하야 卽得超升上州러니
前日
에 某方赴召
하야 到
할새 忽又上一書
하야 極稱道學之美
하니 他便道某有
勢
라하야 要以此相投
하니 極好笑
로다
原注
學者潛心孔孟하야 必求其門而入이니 愚以爲莫先於明義利之辨이라하노니
蓋聖賢
은 니 無所爲而然者
는 며 凡有所爲而然者
는 皆人欲之私
요 而非天理之所存
이니 此義利之分也
라
自未知省察者言之하면 終日之間에 鮮不爲利矣니 非特名位貨殖而後爲利也라
意之所向이 一涉於有所爲면 雖有淺深之不同이나 其爲徇己自私則一而已라
是心이 日滋면 則善端遏塞이니 欲邇聖賢之門牆하야 以求自得이면 豈非却行而望及前人乎아
學者當立志以爲先
하고 에 審其爲
이면 則有以用吾力矣
리라
孔子曰 古之學者는 爲己러니 今之學者는 爲人이라하시니 爲人者는 無適而非利요 爲己者는 無適而非義라
면 雖在己之事
라도 皆爲人也
요 曰義
면 則施諸人者
라도 亦莫非爲己也
라
原注
義也者無所爲而然者也此言
은 蓋可謂
之未發
하야 而同於
者與
인저
朱子云 義利之際
를 固當深明而力辨
이나 然伊洛發明未接物時主敬一段工夫
를 更須精進
이라야 乃佳
니 면 或無所據以審夫義利之分也
라하시니 此說
을 尤學者所當知
니라
原注
라하니 此章
은 以義利判君子小人
하니 苟不於切己觀省
이면 亦恐未能有益也
라
志乎義면 則所習者必在於義니 所習이 在義면 斯喩於義矣요 志乎利면 則所習者必在於利니 所習이 在利면 斯喩於利矣라
今爲士者 固不能免場屋之得失
이나 라 非所以爲君子小人之辨也
어늘
而今世以此相尙
하야 使汨沒於此而不能自拔
하니 則終日從事者 雖曰聖賢之書
나 而要其志之所
이면 則有與聖賢背而馳者矣
라
하면 則又惟官資崇卑
와 祿廩厚薄
을 是計
하니 豈能悉心力於國事
하야 以無負於任使之者哉
아
從事其間
하야 歷之多
하고 講習之熟
이면 安得不有所喩
리오마는 顧恐不在於義耳
라
誠能深思是身을 不可使之爲小人之歸면 其於利欲之習에 怛焉爲之痛心疾首하야 專主乎義而日勉焉하야 博學審問謹思明辨而篤行之리니
由是進於場屋
이면 其文
이 必皆道其平日之學
과 胸中之蘊
하야 不詭於聖人
이요 由是而仕
하면 必皆
其職, 勤其事
하고 心乎國, 心乎民
하야 而不爲身計
하리니 其得不謂之君子乎
아
原注
聖賢敎人
이 都是切己說話
요 不是敎人向外
하야 只就紙上讀了便了
니 自家今且
一箇義利
하야 아 要自爲己
아니 這便是
라
이어늘 某請他
호니 他却說這義利分明
하니 是說得好
라
如云 今人
이 只讀書爲利
하야 如
後
에 又要得官
하고 得官
이면 又要改官
하야 히 無非爲利
라하야 說得來痛快
하니 라
今人은 初生稍有知識에 此心이 便恁舋舋地去了하야 干名逐利하야 浸浸不已하니 其去聖賢이 日以益遠이라
原注
善利之念이 間不容髮이라 一髮之差에 遂分舜蹠이니 學者可不戒且懼哉아
予故發孟子之意
하야 爲舜蹠圖
하노니 謂夫善利之念
이 起于心者 其始甚微
나 而其得失之相去也 若
이라
雖舜也
나 一罔念而狂
하고 雖蹠也
나 一克念而聖
하나니 人能於危微之際而得之
면 則亦幾矣
라
原注
舜蹠圖
[按] 范氏此圖는 可與朱子所訂趙氏誠幾圖로 參觀이니라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善을 하는 자는 순舜임금의 무리요,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자는 도척盜蹠의 무리이니, 순舜임금과 도척盜蹠의 구별을 알고자 한다면 다른 것이 없다.
原注
“사이라고 말한 것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다투는 바가 털끝 만한 것일 뿐임을 말한 것이다.
선善과 이利는 공公과 사私일 뿐이니, 조금이라도 선善에서 벗어나면 곧 이利라고 말할 수 있다.”
原注
“순舜임금과 도척盜蹠의 상거相去가 멀지만 그 구별은 바로 이利와 선善의 사이에 있을 뿐이니, 이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강론講論하기를 익숙히 하지 않고 보기를 분명히 하지 못한다면 도리어 이利를 의義라고 여기지 않을 자가 없으니, 이는 또 배우는 자들이 마땅히 깊이 살펴야 할 것이다.”
原注
혹자或者가 묻기를 “닭이 울면 일어나서 만일 사물을 접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해야 선善이 됩니까?”하자,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다만 경敬을 주장하는 것이 곧 선善을 하는 것이다.”
原注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의義를 바르게 행하고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도道를 밝히고 공功을 계산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이 동중서董仲舒가 제자諸子들보다 크게 뛰어난 이유이다.”
原注
“동중서董仲舒가 성립成立한 것이 매우 높으니, 후세 사람들이 옛사람만 못한 이유는 도의道義와 공리功利의 관문關門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原注
“명리名利의 관문關門을 통과하여야 비로소 조금 쉴 수 있는 곳이니, 지금 사대부士大夫들은 어찌 굳이 말할 것이 있겠는가.
原注
“상채上蔡의 이 말씀은 매우 두려워할 만하니, 모름지기 이곳에 다리를 세워 정한 뒤에야 박문博文‧약례約禮의 공부가 시행될 곳이 있게 된다.”
原注
이利와 선善의 사이를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냉수冷水가 아니면 곧 열탕熱湯이니, 중간에 따뜻함이 따뜻함을 머금은 곳(미지근한 부분)은 없다.”
原注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구분이 단지 사소한 것을 다투므로 주염계周濂溪선생은 다만 기자幾字를 말씀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분별하기를 일찍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횡거橫渠는 언제나 예豫(미리)字를 말씀하였다.”
原注
“일이 도리道理에 부합하는데, 뜻을 두어 이것을 하면 어떻습니까?”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예를 들면 길을 좋은 사람이 가더라도 이 길이요 도적이 가더라도 이 길인 것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하는 것은 천리天理이고 계교計較하는 마음을 두면 곧 옳지 않다.”
原注
“이利와 선善의 사이에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을 두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남이 좋다고 말해 주기를 바라고 이것으로 이利와 녹祿을 구하려고 한다면 모두 이利가 된다.
이러한 경우는 양상樣相이 지극히 많아 여러가지니, 비록 행하는 바가 모두 선善하더라도 다만 일호一毫(조금)라도 외물外物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곧 이利이다.
예컨대 한 덩어리의 깨끗하고 흰 사물의 상면上面에 다만 한 점의 검은 것을 붙여 놓으면 곧 흰 것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原注
“세간世間에 의義를 깨달은 자는 군자君子가 되고 이利를 깨달은 자는 곧 소인小人인데, 근년에 일종의 의론議論은 마침내 이 두 가지의 사이에서 맴돌고자 하여 회호위곡回互委曲(明白正直하지 못함)해서 심기心機를 다 허비해도 마침내는 군자君子가 되지 못하고, 소인小人이 되는 것도 색성索性의 소인小人은 되지 못하니, 마음을 잘못 쓴다고 이를 만하다.”
原注
지난번에 이모李某가 처음 한 글을 올려 도학道學이 이처럼 나쁘다고 극구 말하였으니, 이 때에 아무개가 요로要路에 있었으므로 이 말로 비위를 맞춰서 상주上州로 높이 승진되었다.
그러다가 지난날 내가 막 소명召命에 달려가 행재소行在所에 이르자, 갑자기 또 한 글을 올려 도학道學의 아름다움을 극구 칭찬하였으니, 저는 내가 어떤 세력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것으로 비위를 맞추고자 한 것이니, 지극히 우습다.
原注
“배우는 자는 공맹孔孟에 잠심潛心하여 반드시 그 문을 찾아 들어가야 하는데, 어리석은 나는 생각하건대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밝히는 것보다 더 먼저 할 것이 없다고 여긴다.
성현聖賢은 위한(목적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니, 위한 바가 없이 그러한 것은 천명天命이 그치지 않고 성性이 편벽되지 않고 가르침이 다함이 없는 것이며, 무릇 위한 바가 있어 그러한 것은 모두 인욕人欲의 사私이고 천리天理가 보존된 것이 아니니, 이것이 의義와 이利의 구분이다.
성찰할 줄 모르는 자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하루를 마치는 사이에 이利를 위하지 않는 경우가 드무니, 다만 명예와 지위와 재화財貨인 뒤에야 이利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향하는 바가 조금이라도 위한 바가 있음에 해당되면 비록 얕고 깊음의 차이가 있으나 자기를 따라 스스로 사사롭게 함에 있어서는 똑같을 뿐이다.
이 마음이 날로 불어나면 선善한 마음이 막히게 되니, 성현聖賢의 문장門墻을 가까이하여 자득自得하기를 바란다면 어찌 뒷걸음을 치면서 앞사람에게 미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배우는 자는 마땅히 뜻을 세우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경敬을 잡아 지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서 동정動靜의 사이에 정밀하게 살펴 털끝 만한 차이에서 천양天壤의 구분이 됨을 안다면 자신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있을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옛날의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하였는데, 지금의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한다’고 하셨으니, 남을 위하는 자는 가는 곳마다 이利 아님이 없고 자신을 위하는 자는 가는 곳마다 의義 아님이 없다.
이로우면 비록 자신에게 있는 일이라도 모두 남을 위하는 것이요, 의로우면 비록 남에게 베푸는 일이라도 모두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의義와 이利의 구분이 크니, 어찌 다만 배우는 자가 자신을 다스리는 데에만 먼저 하여야 할 바이겠는가.
原注
“의義는 위한 바가 없이 그러하다는 이 말씀은 예전의 성인聖人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넓혀서 성선性善과 양기養氣를 발명發明한 맹자孟子의 공功과 같다고 이를 만하다.”
“주자朱子가 ‘의義와 이利의 사이를 진실로 깊이 밝혀 힘써 구분하여야 하나, 이락伊洛(程子)이 사물을 접하지 않았을 때에 경敬을 주장해야 한다는 일단一段의 공부를 발명하신 것을 다시 모름지기 정진精進하여야 비로소 아름다우니, 그렇지 않으면 혹 의거하여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살필 수가 없다’ 하신 이 말씀을 더욱 배우는 자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原注
“군자君子는 의義를 깨닫고 소인小人은 이利를 깨닫는다 하였으니, 이 장章은 의義와 이利로써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판별하였는 바, 만일 자기 몸에 절실하게 보고 살피지 않으면 또한 유익함이 없을 듯하다.
사람이 깨닫는 바는 익힌 바에 연유하고 익히는 바는 뜻한 바에 연유한다.
의義에 뜻하면 익힌 바가 반드시 의義에 있을 것이니 익힌 바가 의義에 있으면 의義를 깨달을 것이요, 이利에 뜻하면 익히는 바가 이利에 있을 것이니 익힌 바가 이利에 있으면 이利를 깨달을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의 뜻을 분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선비가 된 자들은 진실로 장옥場屋(科擧)의 득실得失을 면치 못하나 다만 그 기예技藝가 유사有司의 좋아하고 싫어함과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이니,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세속에서는 이것을 서로 숭상하여 여기에 골몰해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니, 그렇다면 종일토록 종사하는 것이 비록 성현聖賢의 책이라 하더라도 그 뜻이 향하는 바를 찾아보면 성현聖賢과 배치背馳됨이 있는 것이다.
미루어 올라가면 또 관자官資의 높고 낮음과 녹봉祿俸의 많고 적음만을 계산하니, 어찌 국가의 일과 백성의 고통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맡기고 부린 자(君上)를 저버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 사이에 종사하여 경력更歷(經歷)함이 많고 강습講習함이 익숙하면 어찌 깨닫는 바가 없겠는가마는 다만 의義에 있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다.
진실로 이 몸을 소인小人으로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여, 이욕利慾의 익힘에 대하여 서글프게 마음을 아파하고 머리를 아파해서 오로지 의義를 주장하여 날로 힘써서,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구분하여 독실히 행하여야 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장옥場屋에 나아가면 그 문장文章이 반드시 평소의 학문學問과 흉중胸中에 쌓인 것을 다 말하여, 성인聖人의 도道와 어긋나지 않을 것이요, 이로 말미암아 벼슬하면 반드시 모두 직책을 수행하고 일을 부지런히 하며 나라에 마음을 두고 백성에게 마음을 두어서 자신을 위한 계교를 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군자君子라 이르지 않겠는가.”
原注
진지陳芝가 “지금 마땅히 무슨 책을 읽어야 합니까?”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성현聖賢이 사람을 가르친 것은 모두 자신에게 간절한 말씀이요, 사람으로 하여금 밖을 향하여 다만 책 위에 나아가 읽고 곧 끝나게 한 것이 아니니, 자신이 지금 우선 하나의 의義와 이利를 판별하여, 자신이 지금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는가, 아니면 스스로 자신을 위하는가를 한 번 살펴보아야 하니, 이것이 바로 죽고 사는 노두路頭(갈림길)이다.
일찍이 육자정陸子靜(陸九淵)의 의리義利의 말을 보았는가?”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하고 대답하니,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이것(義利의 말)은 그가 남강南康에 왔으므로 내가 그에게 글을 해설해 줄 것을 요청하였더니, 그는 도리어 이 의義‧이利를 분명히 해야 함을 말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좋다.
예컨대 ‘지금 사람들은 단지 책을 읽음에 이利를 위하여, 해解(鄕試에 합격함)를 취한 뒤에는 또 벼슬을 얻고자 하고 벼슬을 얻으면 또 벼슬이 승진되기를 구하여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利를 위하지 않음이 없다’ 하여 말함이 통쾌하였으니, 이 말을 듣고 심지어는 눈물을 흘린 자도 있었다.
지금 사람들은 처음 출생하여 다소 지식이 있으면 이 마음이 곧 이와 같이 부지런히 가서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좇아 점점 달려가고 그치지 않으니, 성현聖賢과의 거리가 날로 더욱 멀어진다.
原注
“선善과 이利에 대한 생각은 그 사이에 머리털 하나도 용납하지 않는다.(間髮의 차이밖에 되지 않는다.) 한 털끝 만한 차이에서 순舜임금과 도척盜蹠이 나누어지니, 배우는 자가 경계하고 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利는 반드시 재화財貨의 이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릇 이롭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모두 이利이다.
그러므로 내가 맹자孟子의 뜻을 발명하여 순척도舜蹠圖를 만드나니, 선善과 이利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처음에는 매우 미미하나 득실得失의 상거相去는 구천九泉의 아래와 중천重天의 꼭대기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또 생각하기를 ‘비록 순舜임금이라도 한 번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狂人이 되고 비록 도척盜蹠이라도 한 번 잘 생각하면 성인聖人이 된다’고 여기나니, 사람이 위危(人心)‧미微(道心)의 사이에서 이것을 안다면 또한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므로 또 극념克念과 망념罔念의 말을 순舜임금과 도척盜蹠의 아래에 붙인 것이다.”
原注
[按]범씨范氏의 이 그림은 주자朱子가 정정訂正한 조씨趙氏(趙致道)의 성기도誠幾圖와 참고하여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