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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記正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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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요
之謂道
道之謂니라
[注]天命 謂天所命生人者也 是謂性命이라
木神則仁이요 金神則義 火神則禮
循也
循性行之 是謂道
治而廣之 人放傚之 是曰敎
[注]道 猶道路也
出入動作由之 離之惡乎從也리오
[注]小人 閒居 爲不善하여 無所不至也
君子則不然하니이라도 猶戒愼恐懼自修正하니 是其不須臾離道
君子 니라
[注]愼獨者 愼其閒居之所爲
小人於隱者 動作言語 自以爲不見睹不見聞이면 則必肆盡其情也 若有佔聽之者 是爲顯見 甚於衆人之中爲之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이요 發而皆中節 謂之和
[注]中爲大本者 以其含喜怒哀樂하고 禮之所由生하고 政敎自此出也
하면 天地하고 萬物이니라
[注]致 行之至也
猶正也
生也 長也
[疏]‘天命’至‘育焉’
○正義曰 : 此節明中庸之德, 必修道而行, 謂子思欲明中庸, 先本於道.
○‘天命之謂性’者, 天本無體, 亦無言語之命,
但人感自然而生, 有賢愚吉凶, 若天之付命遣使之然,
故云‘天命’.
但人自然感生, 有剛柔好惡, 或仁‧或義‧或禮‧或知‧或信, 是天性自然,
故云‘性’.
○‘率性之謂道’, 率, 循也.
道者, 通物之名.
言依循性之所感而行, 不令違越, 是之曰道. 感仁行仁, 感義行義之屬, 不失其常, 合於道理, 使得通達, 是‘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謂人君在上修行此道以敎於下, 是‘脩道之謂敎’也.
○注‘天命’至‘曰敎’
○正義曰 : 云‘天命 謂天所命生人者也 是謂性命’, 案易乾彖云 “乾道變化, 各正性命.” 是也.
云‘木神則仁’者, 皇氏云, “東方春, 春主施生”, 仁亦主施生.
云‘金神則義’者, “秋爲金, 金主嚴殺”, 義亦果敢斷決也.
云‘火神則禮’者, “夏爲火, 火主照物而有分別”, 禮亦主分別.
云‘水神則信’, “冬主閉藏, 充實不虛,
水有內明, 不欺於物”, 信亦不虛詐也.
云‘土神則知’者, “金‧木‧水‧火, 土無所不載”, 土所含義者多, 知亦所含者衆,
故云‘土神則知’.
云‘孝經說曰 性者 生之質命 人所稟受度也’, 不云命者, 鄭以通解性命爲一,
故不復言命.
但性情之義, 說者不通, 亦略言之.
賀瑒云, “性之與情, 猶波之與水, 靜時是水, 動則是波, 靜時是性, 動則是情.”
案左傳云, “.”
至於含生之類, 皆感五行生矣.
唯人獨稟秀氣, 故禮運云 “
旣有五常仁‧義‧禮‧智‧信, 因五常而有, 則性之與情, 似金與鐶印,
鐶印之用非金, 亦因金而有鐶印.
情之所用非性, 亦因性而有情, 則性者靜, 情者動.
故樂記云, “人生而靜, 天之性也. 感於物而動, 性之欲也.”
故詩序云“情動於中”是也.
但感五行, 在人爲五常, 得其淸氣備者則爲聖人, 得其濁氣簡者則爲愚人.
降聖以下, 愚人以上, 所稟或多或少, 不可言一,
故分爲九等.
二者之外, 逐物移矣,
故論語云, “性相近, 習相遠也.” 亦據中人七等也.
‘道也者 不可須臾離也’者, 此謂聖人修行仁‧義‧禮‧知‧信以爲敎化.
道, 猶道路也.
道者, 開通性命, 猶如道路開通於人, 人行於道路, 不可須臾離也.
若離道則礙難不通, 猶善道須臾離棄則身有患害而生也.
‘可離非道也’者, 若荒梗塞澀之處是可離棄, 以非道路之所由. 猶如凶惡邪辟之行是可離棄, 以亦非善道之行,
故云‘可離非道也’.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者, 言君子行道, 先慮其微.
若微能先慮, 則必合於道.
故君子恒常戒於其所不睹之處.
人雖目不睹之處猶戒愼, 況其惡事睹見而肯犯乎.
故君子恒常戒愼之.
○‘恐懼乎其所不聞’者, 言君子恒恐迫畏懼於所不聞之處.
言雖耳所不聞, 恒懷恐懼之.
不睹不聞猶須恐懼, 況睹聞之處.
恐懼可知也.
○‘莫見乎隱 莫顯乎微’者, 莫, 無也.
言凡在衆人之中, 猶知所畏, 及至幽隱之處, 謂人不見, 便卽恣情, 人皆佔聽, 察見罪狀, 甚於衆人之中.
所以恒須愼懼如此, 以罪過愆失無見於幽隱之處, 無顯露於細微之所也.
○‘故 君子 愼其獨也’者, 以其隱微之處, 恐其罪惡彰顯,
故君子之人恒愼其獨居.
雖曰獨居, 能謹愼守道也.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者, 言喜怒哀樂緣事而生, 未發之時, 澹然虛靜, 心無所慮而當於理, 故‘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者, 不能寂靜而有喜怒哀樂之情, 雖復動發, 皆中節限, 猶如, 性行和諧, 故云‘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者, 言情慾未發, 是人性初本, 故曰‘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者, 言情慾雖發而能和合, 道理可通達流行, 故曰‘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致, 至也.
位, 正也.
育, 生長也.
言人君所能至極中和, 使陰陽不錯, 則天地得其正位焉.
生成得理, 故萬物其養育焉.


하늘이 명령한 것을 ‘’이라고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라고 하고, ‘도’를 익혀 아랫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라고 한다.
천명天命은 하늘이 태어나는 사람에게 명령한 것을 이르니, 이것을 성명性命이라고 한다.
의 성질[神]은 , 의 성질은 , 의 성질은 , 의 성질은 , 의 성질은 이다.
효경설孝經說》에 “은 타고난 그대로의 질박質樸한 명령[質命]이니, 사람이 품부稟賦받은 법도이다.”라고 하였다.
은 따름[循]이다.
을 따라 행함을 라고 한다.
는 익힘[治]이다.
익혀 넓히면 사람들이 그것을 본받으니, 이것을 라고 한다.
라는 것은 잠시도 벗어날 수 없으니, 벗어날 수 있으면 가 아니다.
도로道路와 같다.
출입하고 동작(활동)할 때에 이를 말미암으니, 〈길을〉 벗어난다면 어디를 따라가겠는가.
이 때문에 군자는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여 삼가며, 남들이 듣지 않는 곳에서도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소인小人은 홀로 지낼 때에 불선不善한 짓을 하여 못하는 짓이 없다.
군자君子는 그렇지 않으니, 비록 보이는 사람이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더라도 경계하여 삼가며 염려하고 두려워하여 스스로 바로잡아 고치니, 〈이것이〉 ‘잠시도 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깊숙이 가려져 있는 곳[隱]보다 더 잘 드러나는 곳은 없으며 깊숙이 숨은 곳[微]보다 더 잘 나타나는 곳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지낼 때의 행위를 삼간다.
신독愼獨은 홀로 지낼 때의 행위를 삼가는 것이다.
소인이 깊숙이 가려져 있는 곳에서 〈자신의〉 동작과 언어가 〈남에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고 스스로 여긴다면 반드시 자기의 정욕情欲을 제멋대로 다 풀어낼 것이니, 만일 엿보고 엿듣는 사람이 있다면 나타나고 드러남이 사람들 속에서 하는 것보다 심할 것이다.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라고 한다.
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라는 것은 천하의 보편적인 이다.
이 큰 근본이 되는 것은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을 머금고 있고, 가 이를 바탕으로 생기고, 정사政事교화敎化가 이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를 지극하게 행하면 천지〈의 운행질서〉가 바르게 되고, 만물이 생장한다.
는 행함이 지극한 것이다.
(바르게 되다)과 같다.
은 태어남이며 자라남이다.
의 [天命]에서 [育焉]까지
정의왈正義曰 : 이 단락은 중용中庸은 반드시 를 익혀 행하여야 함을 밝힌 것이니, 자사子思가 중용을 밝히고자 함에 먼저 에 뿌리를 두었음을 이른 것이다.
○[天命之謂性] 하늘은 본래 형체가 없으니 또한 말로 명령함이 없다.
그러나 다만 사람이 감응하여 자연스럽게 태어남에 현명함과 어리석음‧길함과 흉함이 있음이, 마치 하늘이 명령命令을 주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런 것 같다.
그러므로 ‘천명天命’이라고 한 것이다.
노자老子가 “는 본래 이름이 없으나, 억지로 이름을 붙여 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다만 사람이 자연스럽게 감응하여 태어남에 굳셈과 부드러움‧좋아함과 싫어함이 있어 어질기도 하고 의롭기도 하고 가 있기도 하고 지혜롭기도 하고 믿음직스럽기도 함은 자연스러운 천성天性이다.
그러므로 ‘지위성之謂性’이라고 한 것이다.
○[率性之謂道]은 따름[循]이다.
사물事物을 통하게 한다는 것[通物之名]이다.
감동感動한 것을 따라 행하여 어기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을 라고 하니, 에 감동하면 을 행하고, 에 감동하면 를 행하는 것들로 그 정상正常을 잃지 않고 도리道理에 맞아 막힘없이 도달하게 하는 것[通達]이 ‘을 따르는 것을 라고 한다.’는 말이다.
○[修道之謂敎]인군人君이 위에서 이 를 닦아 실천하여 아래를 교화하는 것을 이르니, 이것이 ‘도를 익혀 아랫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의 [天命]에서 [曰敎]까지
정의왈正義曰 : [天命 謂天所命生人者也 是謂性命] 《주역周易건괘乾卦단전彖傳〉을 살펴보면 “건도乾道가 변화하여 만물萬物마다 성명性命을 바르게 한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木神則仁]황씨皇氏(皇侃)가 “동쪽은 봄으로 간주하니, 봄은 만물의 생육[施生]을 주관한다.”라고 하였으니, 도 만물의 생육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金神則義] 〈황씨가〉 “가을은 으로 간주하니, 은 매섭게 소멸시킴[嚴殺]을 주관한다.”라고 하였으니, 도 과감하게 결단하기 때문이다.
[火神則禮] 〈황씨가〉 “여름은 로 간주하니, 는 사물을 비춰 분별함이 있음을 주관한다.”라고 하였으니, 도 분별함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水神則信] 〈황씨가〉 “겨울은 갈무리함을 주관하니 충실하여 비어 있지 않다.
는 안이 맑아 사물을 속이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도 터무니없이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土神則知] 〈황씨가〉 “가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가 함축하고 있는 뜻이 많고 도 함축한 것이 많다.
그러므로 ‘의 성질은 이다.’라고 한 것이다.
[孝經說曰 性者 生之質命 人所稟受度也]을 말하지 않은 것은 정현鄭玄을 통틀어 해석하여 하나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의 뜻은 해설한 것이 통하지 않으니, 또한 대략 말하겠다.
하창賀瑒이 “의 관계는 물결과 물의 관계와 같으니, 고요할 때에는 물이지만 움직이면 물결이 일어나듯, 고요할 때에는 이지만 움직이면 이 된다.”라고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살펴보면 “하늘에는 육기六氣가 있는데, 〈이것이〉 내려와서 오행五行이 생긴다.”라고 하였다.
일체 생명이 있는 종류[含生之類]에 이르러서는 모두 오행에 감응되어 생겨난다.
오직 사람만이 빼어난 기운을 품부받았기 때문에,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사람은 오행의 빼어난 기운”이라 하고, “〈다섯 가지〉 색의 옷을 입고 살아간다.”라고 하였다.
〈사람에게〉 이미 오상五常, 즉 이 있고, 오상을 말미암아 육정六情이 있게 되니, 의 관계는 환인鐶印의 관계와 같다.
환인의 은 금이 아니지만, 또한 금을 말미암아 환인이 있게 된다.
이 아니지만, 을 말미암아 이 있게 되니, 은 고요한 것이고, 은 움직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사람이 막 태어나 〈정욕情欲이 아직 없어 마음이〉 고요함은 천성天性이요, 외물外物에 감응하여 〈마침내 마음이〉 움직임은 의 욕망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경詩經》 〈대서大序〉에서 “이 마음속에서 발동한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다만 오행에 감응함이 사람에게 있으면 오상이 되니, 그 맑은 기운을 얻어 넉넉한[備] 자는 성인聖人이 되고, 그 탁한 기운을 얻어 모자란[簡] 자는 우인愚人이 된다.
성인聖人 이하와 우인愚人 이상은 품부받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여 하나로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홉 등급으로 나누었다.
공자孔子가 “상등上等지자智者하등下等우인愚人만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두 등급 이외에는 외물을 쫓아 변한다.
그러므로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은 서로 가까우나 익히는 것에 따라 서로 멀어진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상등의 지자智者와 하등의 우인愚人〉 사이의 사람 일곱 등급에 근거한 것이다.
의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이것은 성인聖人을 닦아 실천하여 교화敎化함을 이른 것이다.
도로道路와 같다.
성명性命을 통하게 하니, 도로가 사람들을 통행하게 하여 사람이 도로를 다님에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를 벗어나면 막혀 통하지 않으니, 선도善道를 잠시라도 벗어나버린다면 몸에 근심과 재해가 생기는 것과 같다.
[可離非道也] 예를 들어 외지고 막힌 곳을 벗어나버릴 수 있는 것은 도로가 거쳐 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요, 흉악凶惡하고 사벽邪辟한 행위를 떠나버릴 수 있는 것도 선도善道의 행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벗어날 수 있으면 가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군자가 를 행할 때에 먼저 그 은미한 것을 생각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만일 은미한 것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면 반드시 에 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항상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한다.
남들이 비록 눈으로 보지 못하는 곳이라 하더라도 경계하여 삼가는데, 하물며 악한 일이 보이는데도 저지르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군자는 항상 경계하여 삼가는 것이다.
○[恐懼乎其所不聞] 군자는 항상 남이 듣지 않는 곳에서도 염려하고 두려워함을 말한 것이다.
비록 〈남들이〉 귀로 듣지 못하더라도 항상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음을 말한 것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데에서도 염려하고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보이고 들리는 곳에서이겠는가.
염려하고 두려워함을 알 수 있다.
○[莫見乎隱 莫顯乎微]은 없음이다.
여러 사람들 속에 있을 때는 오히려 두려워할 줄 알면서, 깊숙이 가려져 있는 곳[幽隱之處]에 이르러서는 남이 보지 못한다고 여겨 곧 제멋대로 한다면 남이 모두 엿보고 엿듣고서 죄상罪狀을 따져봄이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하는 것보다 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이와 같이 삼가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죄과罪過와 허물이 깊숙이 가려져 있는 곳보다 더 잘 드러나는 곳은 없고, 깊숙이 숨은 곳[細微之所]보다 더 잘 나타나는 곳은 없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故 君子 愼其獨也] 그 은미한 곳에서 그 죄악罪惡이 뚜렷하게 드러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인 사람이 항상 그 홀로 지냄을 삼가는 것이다.
비록 홀로 지낸다고 하더라도 잘 삼가 를 지킴을 말한 것이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은 일을 따라 생기니, 하지 않았을 때에는 담연澹然하게 텅 비고 고요하여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없어도 이치에 합당하기 때문에 ‘위지중謂之中’이라고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發而皆中節 謂之和] 〈마음이〉 매우 고요하지 못하여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의 이 비록 중복되어 발하더라도 모두 절도와 한계에 맞음이 짠맛과 신맛이 서로 〈조화가〉 맞는 것처럼 과 행실이 조화롭게 어울리기 때문에 ‘위지화謂之和’라고 한 것이다.
○[中也者 天下之大本也]정욕情慾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가 인성人性근본根本[初本]이기 때문에 ‘천하의 큰 근본이다.’라고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和也者 天下之達道也]정욕情慾이 비록 발하였더라도 화합할 수 있다면 도리道理를 깊이 통하고 널리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천하의 보편적인 이다.’라고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는 지극함이다.
는 바르게 됨[正]이다.
은 생장함이다.
인군人君를 지극하게 행하여 음양陰陽이 어그러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천지가 바른 자리를 얻을 것이다.
생성함이 이치에 맞기 때문에 만물이 양육됨을 말한 것이다.


역주
역주1 天命之謂性 : 하늘이 인간에게 附與한다는 측면에서 말하면 命이라 하고, 인간이 하늘에게서 稟賦받는다는 측면에서 말하면 性이라고 한다. 하늘과 인간, 그 어느 쪽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性과 命이 구분된다. 그러나 그 이치는 하나이다. 鄭玄과 朱熹는 모두 이 性을 五常, 즉 仁‧義‧禮‧智‧信이라고 하였다.
역주2 率性之謂道 : 朱熹는 “道는 길[路]과 같다. 사람과 생물이 저마다 자기의 자연스러운 性을 따르면 일상생활하며 處事接物하는 사이에 저마다 행해야 할 길을 가지고 있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道라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鄭玄은 “性을 따라 행하는 것[循性行之]”, 孔穎達은 “率은 循이고, 道는 事物을 통하게 한다는 것이다.[率 循也 道者 通物之名]”라고 하였다.
역주3 率性 : 朝鮮 校正廳 《中庸諺解》에는 ‘性을 率ᄒᆞᆯᄊᆞᆯ(性을 따르다.)’로 풀이하였고, 李滉(朝鮮)은 《中庸釋義》에서 ‘性率홈을(性을 따르다.)’과 ‘性다이 率ᄒᆞᆯᄉᆞᆯ(性대로 따르다.)’ 두 가지 풀이를 제시하고, 두 가지 설 모두 옳다고 하면서도 ‘性다이 率ᄒᆞᆯᄉᆞᆯ’이라고 한 것이 조금 더 나은 듯하다고 하였다.
金正默(朝鮮)은 “현재 통행하는 諺解本에는 率性을 ‘性을 率하다.’라고 풀이하였는데, 이렇게 하면 사람이 그것을 따른다고 오해할까 염려스러우므로, ‘性ᄃᆡ로 率하다.’라고 고치는 것이 좋을 듯한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여 이황의 견해와 맥을 같이 한다.(《過齋先生遺稿》 〈雜著 中庸〉)
역주4 修道之謂敎 : 丁若鏞(朝鮮)은 〈中庸〉을 가르침을 세우는 서적으로 보아 ‘修道’ 역시 “道를 스스로 닦는 공부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스스로 닦도록 가르치는 것[乃敎人以自修也]”이라고 하였다.(《中庸講義補》)
역주5 : 朱熹는 ‘修’를 ‘등급을 살펴 알맞게 조절하는 것[品節]’이라고 하였고, 鄭玄은 ‘〈몸에〉 익히는 것[治]’이라고 하였다.
역주6 : 朱熹는 “聖人이 사람과 사물이 행해야 할 것을 따라 등급에 맞게 조절하여 천하에 법을 만들었으니, 그것을 敎라고 한다. 禮樂刑政과 같은 따위가 이것이다.”라고 하여 聖人이 정해놓은 법을 ‘敎’라고 한 반면, 鄭玄은 “익혀 넓히면 사람들이 본받는 것[治而廣之 人放傚之]”이라고 하였다.
역주7 水神則信 土神則知 : 鄭玄은 信과 知를 각각 水와 土에 해당시켰으나, 朱熹는 知를 水에, 信을 土에 해당시켰다.(《論語或問》 〈學而〉)
역주8 性者……人所稟受度也 : 海保漁村(日)은 ‘性者生之質, 命人所稟受度也.’로 句讀하여 “性은 생긴 그대로의 바탕이며, 命은 사람이 품부받은 법도이다.”라고 풀이하였다.(《中庸鄭氏義》)
그러나 孔穎達은 疏에서 이 《孝經說》에 대해 “命을 말하지 않은 것은 鄭玄이 性과 命을 통틀어 해석하여 하나로 여겼기 때문이다.[不云命者 鄭以通解性命爲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영달의 견해를 따라 ‘性者生之質命, 人所稟受度也.’라고 구두하여 풀이하였다.
역주9 : 《周禮注疏》 〈春官 大宗伯〉 ‘治其大禮(大禮를 익히다.)’에 대한 鄭玄의 注에 “治, 猶簡習也.”라고 하였다. 簡習은 演習‧訓練이라는 뜻으로 ‘몸에 익힌다.’는 뜻이다.
역주10 道也者……非道也 : 朱熹는 “道는 일상생활하며 處事接物할 때에 행해야 할 도리이다. 모두 德性으로서 마음에 갖춰져 있기 때문에, 어떠한 사물이든 있지 않음이 없고 어떠한 때에도 그러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벗어날 수 있다면 어찌 性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겠는가.”라고 하였다.
역주11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 朱熹는 《中庸或問》에서 不睹‧不聞에 대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이다.[其所不睹不聞者 己之所不睹不聞也]”라고 하였고, 戒愼과 恐懼는 性情이 發하기 이전의 마음을 미연에 방비하는 것으로 未發일 때의 공부라고 하였다. 그러나 鄭玄과 孔穎達은 ‘다른 사람이 나를 보지 않고 나의 말을 듣지 않는 곳’으로 풀이하였다. 丁若鏞(朝鮮)은 《中庸講義補》에서 ‘不睹不聞의 대상은 바로 天命[不睹不聞 豈非所謂天命乎]’이라고 지적하였다.
역주12 視之無人聽之無聲 : ‘보이는 사람이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다.’는 것은 ‘혼자 있음[閒居]’을 풀어서 말한 것이다.
역주13 莫見乎隱 莫顯乎微 : 朱熹는 “隱은 어두운 곳이다. 微는 미세한 일이다. 獨은 남은 모르고 자기 혼자만 아는 〈마음의〉 자리이다. 어두운 가운데와 자잘한 일은, 자취는 비록 드러나지 않았으나 기미는 움직였고, 남은 비록 모르나 자기 혼자만은 그것을 안다. 그렇다면 이는 천하의 일에 있어서 이보다 더 이상 훤하게 보이고 환하게 드러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이미 항상 〈자기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며 〈자기가 듣지 못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자기 혼자만 아는 마음의 자리를 삼가는〉 여기에 더욱 더 삼간다. 그래서 人欲이 싹트려 할 때 막아 은밀하고 미세한 가운데 몰래 불어나고 자라서 멀리 道를 벗어남에 이르지 않게 한다.”라고 하였다. 주희는 戒愼과 恐懼를 未發일 때의 공부로 보고, 愼其獨을 已發일 때의 공부로 보아, 未發의 공부와 已發의 공부를 나누고 있다. 孔穎達은 隱은 幽隱之處, 微는 細微之所라고 하였다.
鄧林(淸)은 “隱은 마음속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微는 한 생각의 움직임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隱指心曲中言 微指一念之動言]”라고 하였다.(《中庸補註備旨》)
역주14 愼其獨 : 朱熹는 “獨은 남은 모르는 곳으로서 자기 혼자만 아는 〈마음의〉 자리이다.[獨者 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라고 하였다. 그러나 鄭玄은 ‘獨’을 “홀로 지낼 때의 행위[閒居之所爲]”, 孔穎達은 “홀로 지냄[獨居]”이라고 풀이하였다.
역주15 喜怒哀樂之未發……天下之達道也 : 朱熹는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은 情이다. 그것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는 性이니, 치우치고 기운 것이 없으므로 中이라고 하였다. 발현되어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은 바른 情이니 어긋남이 없으므로 和라고 하였다. 大本은 하늘이 명령한 性이다. 천하의 道理가 모두 이로부터 나왔으니 道의 體이다. 達道는 性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천하와 古今이 함께 따르는 것이니, 道의 用이다. 이는 性‧情의 덕을 말하여 ‘道는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라고 하였다.
역주16 致中和 : 朱熹는 “致는 미루어 끝까지 다하는 것이다. 位는 제자리에 편안한 것이다. 育은 제 生理를 이루는 것이다. 戒愼恐懼로부터 요약해서,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한쪽으로〉 치우치고 기운 것이 없어 그 지킴을 잃지 않음에 이르면 그 中을 극진하게 하여 천지의 운행질서가 제자리를 잡을 것이다. 謹獨(愼獨)으로부터 정밀하게 해서 사물과 접촉하는 곳에서 조금의 오차나 잘못이 없어, 어디를 가든 그렇지 않음이 없음에 이르면 그 和를 극진하게 하여 만물이 자라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17 : 朱熹는 ‘位’를 ‘제자리에 편안한 것[安其所也]’이라고 하였고, 鄭玄과 孔穎達은 ‘바르게 되다[正]’라고 하였다.
역주18 : 朱熹는 ‘育’을 ‘제 生理를 이루는 것[育者遂其生也]’이라고 하였고, 鄭玄과 孔穎達은 ‘生長’이라고 하였다.
역주19 老子云……强名之曰道 : 현재 통용하는 《老子》에는 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말이 第25章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여 글자로 ‘道’라고 하고, 억지로 이름을 지어 ‘大’라고 하였다.[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역주20 (謂之)[之謂] : 저본에는 ‘謂之’로 되어 있으나, 經文 및 阮刻本에 “惠棟校宋本에는 ‘之謂’로 되어 있는데 이 本에는 ‘之謂’ 2자가 도치되었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之謂’로 바로잡았다.
역주21 天有六氣 降而生五行 : 《春秋左氏傳》 昭公 元年 晉侯有疾條에는 “天有六氣, 降生五味.(하늘에 六氣가 있는데, 이것이 내려와서 五味가 생겨났다.)”라고 하였다. 五味는 鹹(짠맛)‧苦(쓴맛)‧酸(신맛)‧辛(매운맛)‧甘(단맛)이다. 《尙書》 〈洪範〉을 살펴보면 鹹은 水, 苦는 火, 酸은 木, 辛은 金, 甘은 土에서 나왔다고 하였으니, 五味는 오행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孔穎達이 《춘추좌씨전》을 인용하면서 ‘五味’를 ‘五行’으로 바꾼 것이다. 六氣는 陰‧陽‧風‧雨‧晦‧明이다.
역주22 人者五行之秀氣 被色而生 : 《禮記》 〈禮運〉에 “사람은 천지의 덕이요, 음양의 사귐이요, 귀신의 모임이요, 오행의 빼어난 기운이다.[人者其天地之德 陰陽之交 鬼神之會 五行之秀氣也]”, 또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요, 오행의 단서이니, 〈다섯 가지〉 맛을 먹고, 〈다섯 가지〉 소리를 구별하고, 〈다섯 가지〉 색의 옷을 입고 사는 것이다.[人者天地之心也 五行之端也 食味別聲 被色而生者也]”라고 하였다. 여기서 ‘色’은 五色으로서 赤‧靑‧黃‧白‧黑이다. 赤은 火, 靑은 木, 黃은 土, 白은 金, 黑은 水에 해당한다.
역주23 六情 : 喜‧怒‧哀‧樂‧愛‧惡를 이른다.
역주24 唯上智與下愚不移 : 《論語》 〈陽貨〉에 나온다.
역주25 (言) : 저본에는 ‘言言’으로 되어 있으나, 阮刻本에 “閩本‧監本‧毛本에는 ‘言’자가 중첩되지 않았는데, 이 本에만 잘못 중첩되었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言’ 1자를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역주26 鹽梅相得 : 소금은 짠맛을, 매실은 신맛을 지칭한다. 《尙書》 〈說命 下〉에 “〈내가〉 만일 국에 간을 맞춘다면 너는 소금과 매실이 되어야 할 것이다.[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하였다. 蔡沈(宋)의 《書集傳》을 살펴보면, 范氏가 “국을 만들 경우 소금을 많이 넣으면 짜고, 매실을 많이 넣으면 시다. 소금과 매실이 알맞게 들어간 뒤에야 국이 완성된다.[作羹者 鹽過則鹹 梅過則酸 鹽梅得中然後成羹]”라고 하였다. 鹽梅相得은 신맛은 짠맛을 부드럽게 해주고 짠맛은 신맛을 부드럽게 해주기 때문에, 짜지도 시지도 않게 잘 조화를 이루어 국이 완성된 것처럼 性과 行이 조화롭게 어울림을 비유한 것이다.

예기정의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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