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君子則不然
하니 雖
이라도 猶戒愼恐懼自修正
하니 是其不須臾離道
라
注
小人於隱者에 動作言語 自以爲不見睹不見聞이면 則必肆盡其情也니 若有佔聽之者면 是爲顯見이 甚於衆人之中爲之라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요 發而皆中節을 謂之和니
注
[注]中爲大本者는 以其含喜怒哀樂하고 禮之所由生하고 政敎自此出也라
疏
○正義曰 : 此節明中庸之德, 必修道而行, 謂子思欲明中庸, 先本於道.
疏
但人感自然而生, 有賢愚吉凶, 若天之付命遣使之然,
但人自然感生, 有剛柔好惡, 或仁‧或義‧或禮‧或知‧或信, 是天性自然,
疏
言依循性之所感而行, 不令違越, 是之曰道. 感仁行仁, 感義行義之屬, 不失其常, 合於道理, 使得通達, 是‘率性之謂道’.
疏
○‘修道之謂敎’, 謂人君在上修行此道以敎於下, 是‘脩道之謂敎’也.
疏
○正義曰 : 云‘天命 謂天所命生人者也 是謂性命’, 案易乾彖云 “乾道變化, 各正性命.” 是也.
疏
云‘木神則仁’者, 皇氏云, “東方春, 春主施生”, 仁亦主施生.
云‘金神則義’者, “秋爲金, 金主嚴殺”, 義亦果敢斷決也.
云‘火神則禮’者, “夏爲火, 火主照物而有分別”, 禮亦主分別.
云‘土神則知’者, “金‧木‧水‧火, 土無所不載”, 土所含義者多, 知亦所含者衆,
疏
云‘孝經說曰 性者 生之質命 人所稟受度也’, 不云命者, 鄭以通解性命爲一,
賀瑒云, “性之與情, 猶波之與水, 靜時是水, 動則是波, 靜時是性, 動則是情.”
旣有五常仁‧義‧禮‧智‧信, 因五常而有
, 則性之與情, 似金與鐶印,
情之所用非性, 亦因性而有情, 則性者靜, 情者動.
故樂記云, “人生而靜, 天之性也. 感於物而動, 性之欲也.”
但感五行, 在人爲五常, 得其淸氣備者則爲聖人, 得其濁氣簡者則爲愚人.
降聖以下, 愚人以上, 所稟或多或少, 不可言一,
故論語云, “性相近, 習相遠也.” 亦據中人七等也.
疏
‘道也者 不可須臾離也’者, 此謂聖人修行仁‧義‧禮‧知‧信以爲敎化.
道者, 開通性命, 猶如道路開通於人, 人行於道路, 不可須臾離也.
若離道則礙難不通, 猶善道須臾離棄則身有患害而生也.
疏
‘可離非道也’者, 若荒梗塞澀之處是可離棄, 以非道路之所由. 猶如凶惡邪辟之行是可離棄, 以亦非善道之行,
疏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者, 言君子行道, 先慮其微.
疏
○‘恐懼乎其所不聞’者, 言君子恒恐迫畏懼於所不聞之處.
疏
言凡在衆人之中, 猶知所畏, 及至幽隱之處, 謂人不見, 便卽恣情, 人皆佔聽, 察見罪狀, 甚於衆人之中.
所以恒須愼懼如此, 以罪過愆失無見於幽隱之處, 無顯露於細微之所也.
疏
○‘故 君子 愼其獨也’者, 以其隱微之處, 恐其罪惡彰顯,
疏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者, 言喜怒哀樂緣事而生, 未發之時, 澹然虛靜, 心無所慮而當於理, 故‘謂之中’.
疏
○‘發而皆中節 謂之和’者, 不能寂靜而有喜怒哀樂之情, 雖復動發, 皆中節限, 猶如
, 性行和諧, 故云‘謂之和’.
疏
○‘中也者 天下之大本也’者, 言情慾未發, 是人性初本, 故曰‘天下之大本也’.
疏
○‘和也者 天下之達道也’者, 言情慾雖發而能和合, 道理可通達流行, 故曰‘天下之達道也’.
疏
言人君所能至極中和, 使陰陽不錯, 則天地得其正位焉.
하늘이 명령한 것을 ‘성性’이라고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도’를 익혀 아랫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注
천명天命은 하늘이 태어나는 사람에게 명령한 것을 이르니, 이것을 성명性命이라고 한다.
목木의 성질[神]은 인仁, 금金의 성질은 의義, 화火의 성질은 예禮, 수水의 성질은 신信, 토土의 성질은 지知이다.
《효경설孝經說》에 “성性은 타고난 그대로의 질박質樸한 명령[質命]이니, 사람이 품부稟賦받은 법도이다.”라고 하였다.
익혀 넓히면 사람들이 그것을 본받으니, 이것을 교敎라고 한다.
도道라는 것은 잠시도 벗어날 수 없으니, 벗어날 수 있으면 도道가 아니다.
注
출입하고 동작(활동)할 때에 이를 말미암으니, 〈길을〉 벗어난다면 어디를 따라가겠는가.
이 때문에 군자는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여 삼가며, 남들이 듣지 않는 곳에서도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注
소인小人은 홀로 지낼 때에 불선不善한 짓을 하여 못하는 짓이 없다.
군자君子는 그렇지 않으니, 비록 보이는 사람이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더라도 경계하여 삼가며 염려하고 두려워하여 스스로 바로잡아 고치니, 〈이것이〉 ‘잠시도 도道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깊숙이 가려져 있는 곳[隱]보다 더 잘 드러나는 곳은 없으며 깊숙이 숨은 곳[微]보다 더 잘 나타나는 곳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지낼 때의 행위를 삼간다.
注
신독愼獨은 홀로 지낼 때의 행위를 삼가는 것이다.
소인이 깊숙이 가려져 있는 곳에서 〈자신의〉 동작과 언어가 〈남에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고 스스로 여긴다면 반드시 자기의 정욕情欲을 제멋대로 다 풀어낼 것이니, 만일 엿보고 엿듣는 사람이 있다면 나타나고 드러남이 사람들 속에서 하는 것보다 심할 것이다.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和라는 것은 천하의 보편적인 도道이다.
注
중中이 큰 근본이 되는 것은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을 머금고 있고, 예禮가 이를 바탕으로 생기고, 정사政事와 교화敎化가 이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중中과 화和를 지극하게 행하면 천지〈의 운행질서〉가 바르게 되고, 만물이 생장한다.
疏
○정의왈正義曰 : 이 단락은 중용中庸의 덕德은 반드시 도道를 익혀 행하여야 함을 밝힌 것이니, 자사子思가 중용을 밝히고자 함에 먼저 도道에 뿌리를 두었음을 이른 것이다.
疏
○[天命之謂性] 하늘은 본래 형체가 없으니 또한 말로 명령함이 없다.
그러나 다만 사람이 감응하여 자연스럽게 태어남에 현명함과 어리석음‧길함과 흉함이 있음이, 마치 하늘이 명령命令을 주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런 것 같다.
노자老子가 “도道는 본래 이름이 없으나, 억지로 이름을 붙여 도道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다만 사람이 자연스럽게 감응하여 태어남에 굳셈과 부드러움‧좋아함과 싫어함이 있어 어질기도 하고 의롭기도 하고 예禮가 있기도 하고 지혜롭기도 하고 믿음직스럽기도 함은 자연스러운 천성天性이다.
疏
도道는 사물事物을 통하게 한다는 것[通物之名]이다.
성性이 감동感動한 것을 따라 행하여 어기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을 도道라고 하니, 인仁에 감동하면 인仁을 행하고, 의義에 감동하면 의義를 행하는 것들로 그 정상正常을 잃지 않고 도리道理에 맞아 막힘없이 도달하게 하는 것[通達]이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는 말이다.
疏
○[修道之謂敎]인군人君이 위에서 이 도道를 닦아 실천하여 아래를 교화하는 것을 이르니, 이것이 ‘도를 익혀 아랫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는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 : [天命 謂天所命生人者也 是謂性命] 《주역周易》 건괘乾卦 〈단전彖傳〉을 살펴보면 “건도乾道가 변화하여 만물萬物마다 성명性命을 바르게 한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疏
[木神則仁]황씨皇氏(皇侃)가 “동쪽은 봄으로 간주하니, 봄은 만물의 생육[施生]을 주관한다.”라고 하였으니, 인仁도 만물의 생육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金神則義] 〈황씨가〉 “가을은 금金으로 간주하니, 금金은 매섭게 소멸시킴[嚴殺]을 주관한다.”라고 하였으니, 의義도 과감하게 결단하기 때문이다.
[火神則禮] 〈황씨가〉 “여름은 화火로 간주하니, 화火는 사물을 비춰 분별함이 있음을 주관한다.”라고 하였으니, 예禮도 분별함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水神則信] 〈황씨가〉 “겨울은 갈무리함을 주관하니 충실하여 비어 있지 않다.
수水는 안이 맑아 사물을 속이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신信도 터무니없이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土神則知] 〈황씨가〉 “금金‧목木‧수水‧화火에 토土가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토土가 함축하고 있는 뜻이 많고 지知도 함축한 것이 많다.
그러므로 ‘토土의 성질은 지知이다.’라고 한 것이다.
疏
[孝經說曰 性者 生之質命 人所稟受度也]명命을 말하지 않은 것은 정현鄭玄이 성性과 명命을 통틀어 해석하여 하나로 여겼기 때문이다.
다만 성性과 정情의 뜻은 해설한 것이 통하지 않으니, 또한 대략 말하겠다.
하창賀瑒이 “성性과 정情의 관계는 물결과 물의 관계와 같으니, 고요할 때에는 물이지만 움직이면 물결이 일어나듯, 고요할 때에는 성性이지만 움직이면 정情이 된다.”라고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살펴보면 “하늘에는 육기六氣가 있는데, 〈이것이〉 내려와서 오행五行이 생긴다.”라고 하였다.
일체 생명이 있는 종류[含生之類]에 이르러서는 모두 오행에 감응되어 생겨난다.
오직 사람만이 빼어난 기운을 품부받았기 때문에,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사람은 오행의 빼어난 기운”이라 하고, “〈다섯 가지〉 색의 옷을 입고 살아간다.”라고 하였다.
〈사람에게〉 이미 오상五常, 즉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이 있고, 오상을 말미암아 육정六情이 있게 되니, 성性과 정情의 관계는 금金과 환인鐶印의 관계와 같다.
환인의 용用은 금이 아니지만, 또한 금을 말미암아 환인이 있게 된다.
정情의 용用은 성性이 아니지만, 성性을 말미암아 정情이 있게 되니, 성性은 고요한 것이고, 정情은 움직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사람이 막 태어나 〈정욕情欲이 아직 없어 마음이〉 고요함은 천성天性이요, 외물外物에 감응하여 〈마침내 마음이〉 움직임은 성性의 욕망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경詩經》 〈대서大序〉에서 “정情이 마음속에서 발동한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다만 오행에 감응함이 사람에게 있으면 오상이 되니, 그 맑은 기운을 얻어 넉넉한[備] 자는 성인聖人이 되고, 그 탁한 기운을 얻어 모자란[簡] 자는 우인愚人이 된다.
성인聖人 이하와 우인愚人 이상은 품부받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여 하나로 말할 수 없다.
공자孔子가 “상등上等의 지자智者와 하등下等의 우인愚人만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성性은 서로 가까우나 익히는 것에 따라 서로 멀어진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상등의 지자智者와 하등의 우인愚人〉 사이의 사람 일곱 등급에 근거한 것이다.
疏
경經의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이것은 성인聖人이 인仁‧의義‧예禮‧지知‧신信을 닦아 실천하여 교화敎化함을 이른 것이다.
도道는 성명性命을 통하게 하니, 도로가 사람들을 통행하게 하여 사람이 도로를 다님에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도道를 벗어나면 막혀 통하지 않으니, 선도善道를 잠시라도 벗어나버린다면 몸에 근심과 재해가 생기는 것과 같다.
疏
[可離非道也] 예를 들어 외지고 막힌 곳을 벗어나버릴 수 있는 것은 도로가 거쳐 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요, 흉악凶惡하고 사벽邪辟한 행위를 떠나버릴 수 있는 것도 선도善道의 행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벗어날 수 있으면 도道가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疏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군자가 도道를 행할 때에 먼저 그 은미한 것을 생각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만일 은미한 것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면 반드시 도道에 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항상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한다.
남들이 비록 눈으로 보지 못하는 곳이라 하더라도 경계하여 삼가는데, 하물며 악한 일이 보이는데도 저지르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군자는 항상 경계하여 삼가는 것이다.
疏
○[恐懼乎其所不聞] 군자는 항상 남이 듣지 않는 곳에서도 염려하고 두려워함을 말한 것이다.
비록 〈남들이〉 귀로 듣지 못하더라도 항상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음을 말한 것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데에서도 염려하고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보이고 들리는 곳에서이겠는가.
疏
여러 사람들 속에 있을 때는 오히려 두려워할 줄 알면서, 깊숙이 가려져 있는 곳[幽隱之處]에 이르러서는 남이 보지 못한다고 여겨 곧 제멋대로 한다면 남이 모두 엿보고 엿듣고서 죄상罪狀을 따져봄이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하는 것보다 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이와 같이 삼가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죄과罪過와 허물이 깊숙이 가려져 있는 곳보다 더 잘 드러나는 곳은 없고, 깊숙이 숨은 곳[細微之所]보다 더 잘 나타나는 곳은 없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疏
○[故 君子 愼其獨也] 그 은미한 곳에서 그 죄악罪惡이 뚜렷하게 드러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인 사람이 항상 그 홀로 지냄을 삼가는 것이다.
비록 홀로 지낸다고 하더라도 잘 삼가 도道를 지킴을 말한 것이다.
疏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은 일을 따라 생기니, 발發하지 않았을 때에는 담연澹然하게 텅 비고 고요하여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없어도 이치에 합당하기 때문에 ‘위지중謂之中’이라고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疏
○[發而皆中節 謂之和] 〈마음이〉 매우 고요하지 못하여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의 정情이 비록 중복되어 발하더라도 모두 절도와 한계에 맞음이 짠맛과 신맛이 서로 〈조화가〉 맞는 것처럼 성性과 행실이 조화롭게 어울리기 때문에 ‘위지화謂之和’라고 한 것이다.
疏
○[中也者 天下之大本也]정욕情慾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가 인성人性의 근본根本[初本]이기 때문에 ‘천하의 큰 근본이다.’라고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疏
○[和也者 天下之達道也]정욕情慾이 비록 발하였더라도 화합할 수 있다면 도리道理를 깊이 통하고 널리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천하의 보편적인 도道이다.’라고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疏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치致는 지극함이다.
인군人君이 중中과 화和를 지극하게 행하여 음양陰陽이 어그러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천지가 바른 자리를 얻을 것이다.
생성함이 이치에 맞기 때문에 만물이 양육됨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