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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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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按此書 曾公旣自幸爲范文正公所知하여 竊欲出其門하고 又恐文正公 或賤其人이라
故爲紆徐曲折之言하여 以自通于其門이나
而行文 不免蒼莽沈晦하여 如揚帆者之入大海 而茫乎其無畔已
若韓昌黎所投執政書 其言多悲慨하고 歐公所投執政書 其言多婉曲하고 蘇氏父子投執政書 其言多曠達而激昂하여
較之子固 醒人眼目하여 特倍精爽이라
資政
夫學者之於道 非處其大要之難也
至其晦明消長 弛張用舍之際하여 而事之有委曲幾微 欲其取之於心而無疑하고 發之於行而無擇이라
推而通之 則萬變而不窮하고 合而言之 則一致而已 是難也
難如是 故古之人 有斷其志하여 雖各合於義하여 極其分이나 以謂備聖人之道 則未可者
之徒 所不免如此 而孔子之稱其門人라하여 亦各殊科하니
彼其材 於天下之選 可謂盛矣
然獨至於顔氏之子하여 乃曰 인저하시니 是所謂難者久矣
故聖人之所敎人者 其晦明消長 弛張用舍之際 極大之爲無窮하고 極小之爲至隱이라
雖他經靡不同其意 然尤委曲其變於易하고 而重復顯著其義於之文하여 欲人之可得諸心而惟所用之也
然有易以來 自孔子之時 以至於今 得此者 顔氏而已爾 孟氏而已爾
二氏而下 孰爲得之者歟
甚矣其難也로다
若鞏之鄙 有志於學 常懼乎其明之不遠 其力之不强하여 而事之有不得者
旣自求之하고 又欲交天下之賢以輔而進하여 繇其磨礱灌漑하여 以持其志養其氣者有矣
其臨事而忘하고 其自返而餒者 豈得已哉리오 則又懼乎陷溺其心하여 以至於老而無所庶幾也하니라
嘗間而論天下之士컨대 豪傑不世出之材 數百年之間 未有盛於斯時也
而造於道 尤可謂宏且深이요 更天下之事 尤可謂詳且博者 未有過閣下也
故閣下嘗履天下之任矣하니라
事之有天下非之하고 君子非之라도 而閣下獨曰是者하고 天下是之하고 君子是之라도 而閣下獨曰非者라가
及其旣也하여 君子皆自以爲不及이라하고 天下亦曰范公之守是也라하니
則閣下之於道何如哉 當其至於事之幾微하여 而講之以易之變化 其豈有不盡者耶
夫賢乎天下者 天下之所慕也어든 況若鞏者哉
故願聞議論之詳하여 而觀所以應於萬事者之無窮하여 庶幾自寤以得其所難得者 此鞏之心也
然閣下之位 可謂貴矣 士之願附者 可謂衆矣
使鞏也不自別於其間 豈獨非鞏之志哉리오 亦閣下之所賤也
故鞏不敢爲之러니 不意閣下欲收之而敎焉하여 而辱召之하니 鞏雖自守 豈敢固於一耶리오
故進於門下하여 而因自敍其所願與所志하여 以獻左右하노니 伏惟賜省察焉하라


01. 범자정范資政께 올린 편지
이 편지를 살펴보면, 증공曾公이 이미 범문정공范文正公(범중엄范仲淹)이 〈자기의 존재를〉 알아준 것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겨 내심 그의 문하생이 되기를 원하는 한편, 문정공文正公이 혹시 자기를 천시하지나 않을까 우려하였다.
그러므로 완곡하고 부드러우며 함축성이 있는 말을 전개하여 스스로 그 문하에 자기를 알렸다.
그러나 문장 구성이 아련하고 흐릿하여 마치 돛을 단 배가 큰 바다로 들어갔을 때 동서남북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한창려韓昌黎(한유韓愈)가 집정執政에게 보낸 편지는 그 말이 비분강개한 부분이 많고, 구공歐公(구양수歐陽脩)이 집정執政에게 보낸 편지는 그 말이 완곡한 부분이 많으며, 소씨蘇氏 부자父子(소순蘇洵소식蘇軾)가 집정執政에게 보낸 편지는 그 말이 활달하고 격렬한 부분이 많다.
〈이 편지들은〉 자고子固의 이 글과 비교해볼 때 읽는 사람의 눈을 끌어 한결 더 시원스럽다.
자정급사資政給事께 올립니다.
대체로 배우는 자가 를 〈배울 적에〉 그 대체大體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어려운 일은〉 그 가 어두워지고 밝아지며 성하고 쇠하는 상황에 따라 세상에 나가 도를 행하든지 아니면 물러나 은둔하든지 하는 것을 파악하는 데에 있는데, 어떤 일의 내막과 조짐이 있을 때 그것을 마음으로 알아차려 의심하는 일이 없고 행동으로 실천하여 주저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범위를 넓혀 두루 통하면 천만 가지로 변하더라도 막히지 않고, 이것을 수합하여 원점에서 말하면 지니고 있는 기준은 하나일 뿐이니, 이것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를 파악하기가〉 이처럼 어렵기 때문에 옛날 훌륭한 인물들이 결연한 심지를 지니고서 저마다 도의道義에 부합되어 자기의 한계를 유감없이 충족시키기는 하였으나, 〈그 정도만으로〉 성인의 를 완비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이윤伊尹백이伯夷전금展禽 등이 이와 같은 수준을 면치 못하였고, 공자孔子가 그 문인들을 칭찬할 때도 덕행德行문학文學정사政事언어言語를 거론하여 그 종류를 구분하였습니다.
그들의 재주는 천하의 인물 중에서 뽑혔으므로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안자顔子에 대해서 “세상이 나를 쓰면 를 행하고 버리면 은둔하는 일은 오직 나와 네가 이렇게 할 수 있느니라.”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란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성인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그 가 어두워지고 밝아지며 성하고 쇠하는 상황에 따라 세상에 나가 도를 행하든지 아니면 물러나 은둔하든지 하는 일에 대해, 그 범위를 극도로 확대하여 한량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기도 하고 극도로 축소하여 극히 미세한 부분까지 도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여타의 경전經典도 그 뜻이 같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변화에 관해서는 《역경易經》이 더 자세하고 그 의미가 또 계사繫辭 등 내용 속에 되풀이해 가며 나타나 있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이치를 마음으로 깨달아 그대로 운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역경易經》이 세상에 나온 이후 공자孔子 때부터 오늘날까지 이 원리를 파악한 자는 안자顔子맹자孟子뿐입니다.
이 두 사람 이후로 또 누가 파악했습니까.
아, 를 파악한다는 것은 이처럼 어렵습니다.
저처럼 고루한 사람은 학문에 뜻을 두었을 때 항상 자기 식견이 원대하지 못하고 자기 능력이 강하지 못하여 사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일이 있지나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그 〈미진한 부분을〉 배우려 할 뿐만 아니라, 또 천하의 현인賢人과 교제함으로써 그 도움으로 진보하고 이를 통해 갈고닦으며 양분을 받아들여 자기 심지를 굳게 지키고 자기의 기개를 배양하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슨 일에 임하면 처리할 방법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돌이켜보면 기개가 죽어 있는 상황을 어찌 떨쳐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또 자신의 심지가 나약해져서 늙을 때까지도 어떤 희망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얼마 전에 천하의 선비에 관해 논해보았는데, 세상에 자주 나오지 않는 걸출한 인재가 수백 년 사이에 지금보다 많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영역으로 누구보다 넓고도 깊이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고, 천하의 일을 누구보다 자세하고도 두루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각하閣下를 넘어설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각하閣下께서 일찍이 천하의 막중한 책임을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일을 온 천하가 그르다 여기고 군자가 그르다 여기는데도 각하閣下만 혼자 옳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고, 또 온 천하가 옳다고 여기고 군자가 옳다고 여기는데도 각하閣下만 혼자 그르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일이 지나간 뒤에는 군자가 모두 스스로 〈그 식견을〉 따라갈 수 없다고 하고, 천하 사람들도 범공范公이 견지한 뜻이 옳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각하閣下께서 를 〈터득한 수준이〉 과연 얼마나 〈높겠습니까.〉 어떤 일이 일어날 조짐이 있을 때 《역경易經》의 변화하는 이치로 강구해보면 어찌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천하에 뛰어난 자는 온 천하가 흠모하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저 같은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세한 가르침을 듣고 변화무궁한 만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그 방법을 살펴봄으로써 혹시 그 파악하기 어려운 이치를 스스로 깨달았으면 하는 것이 곧 제 마음입니다.
그러나 각하閣下의 지위는 존귀하다 말할 수 있고 선비로서 각하閣下에게 귀의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많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가령 제가 제 자신을 이들과 구별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제 지향志向에만 안 맞을 뿐이겠습니까. 각하閣下께서도 하찮게 여기실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제가 감히 조용히 있지를 못했던 것인데 뜻밖에 각하閣下께서 저를 거두어 가르침을 주시고 불러주셨으니, 제가 비록 제 분수를 지킨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편협하게 한쪽만을 고집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문하를 찾아간 것이며 아울러 〈각하閣下께〉 바라는 바와 뜻하는 바를 스스로 서술하여 집사執事께 올리는 것이니, 바라건대 한번 살펴주십시오.


역주
역주1 上范資政書 : 范資政은 資政殿學士 范仲淹(989~1052)을 말한다. 參知政事가 되어 동지들과 新政을 추진하던 范仲淹이 보수세력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혀 慶曆 4년(1044) 6월에 朋黨을 지었다는 죄목으로 파직된 뒤에 資政殿學士 직명을 띠고 지방으로 나가 知邠州 兼陝西四路沿邊安撫使가 되었다. 慶曆新政이 비록 실패하였으나 개혁 사조는 계속 발전하여 范仲淹 등 개혁파 영수들이 사회로부터 받는 명망은 더 높아져 수많은 선비들이 그들의 문하에 투신하였으며 그들도 기꺼이 영재를 장려하였다. 이해에 范仲淹이 객지에서 작자를 만나보고 문하생으로 거두어주려 하자 작자가 매우 감격한 나머지 이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范仲淹은 儒學을 엄격히 지키고 易學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이에 관한 자기의 견해와 학식을 서술하여 范仲淹에게 자기의 실체를 알리고 문하생이 되어 가르침을 받겠다는 뜻을 말하였다.
역주2 給事 : 執事와 같은 말로, 상대방을 감히 직접 지칭하지 못하는 謙辭이다.
역주3 伊尹伯夷展禽 : 伊尹은 湯을 도와 夏를 멸망시키고 태평성대를 이룩하였다. 뒤에 太甲이 즉위하여 국정을 다스리지 않자 그를 湯의 무덤이 있는 桐으로 축출하여 반성하도록 하였고, 3년 뒤에 반성하자 다시 영접해 와서 복위시켰다. 伯夷는 孤竹國의 왕자이다. 그의 아버지가 아우 叔齊를 후계자로 삼는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은 뒤에 叔齊는 아우가 왕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형에게 양보하고 그는 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 없다는 이유로 아우에게 양보하다가 함께 周나라로 도망해버렸다. 武王이 商을 정벌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武王이 천자가 되자 周나라 곡식을 먹는 것이 부끄러워 首陽山에서 고사리를 꺾어 먹다가 굶어죽었다 한다. 展禽은 柳下惠로, 春秋 때 魯나라 대부이다. 法官으로 바르게 직무를 처리하다가 여러 번 쫓겨나는 것을 보고 주위 사람이 다른 나라로 떠나 벼슬하라고 권하자 “바른 도로 직무를 수행하면 어디를 간들 쫓겨나지 않겠으며, 바르지 않게 직무를 수행하기로 한다면 어찌 굳이 조국을 떠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한다. 孟子가 이들 세 사람을 평하기를 “伯夷는 성인의 덕 중에 맑은 덕을 지녔고, 伊尹은 성인의 덕 중에 스스로 책임지는 덕을 지녔고, 柳下惠는 성인의 덕 중에 누구와도 어울리는 덕을 지녔다.” 하였다. 《孟子 萬章 下》
역주4 德行文學政事言語 : 孔子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각자의 타고난 소질과 능력을 보고 그에 맞게 하였는데,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공자가 뛰어난 제자를 칭찬하기를 “德行이 좋은 자는 顔淵‧閔子騫‧冉伯牛‧仲弓이고, 논변을 잘 구사하는 자는 宰我‧子貢이고, 정사를 잘 처리하는 자는 冉有‧子路이고, 옛 문헌을 잘 아는 자는 子游‧子夏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孔門四科’라 한다. 《論語 先進》
역주5 用之則行……唯我與爾有是夫 : 《論語》 〈述而〉에 보이는 말이다.
역주6 卦爻彖象繫辭 : 卦는 《易經》 안에서 자연현상과 人事 변화를 상징하는 일종의 부호이다. 陽爻와 陰爻가 서로 배합하여 64개로 이루어졌다. 爻는 《易經》 卦를 구성하는 기본 부호이다. 매 3爻가 모여 1卦가 되고 8卦(24爻)가 되며 2卦(6爻)가 서로 중복되어 64卦(386爻)가 되는데, 卦의 변화는 爻의 변화로 인해 결정되므로 爻는 서로 교차하고 변동하는 의미를 나타낸다. 彖은 《易傳》 안에서 각 卦의 기본 의미를 판단하고 설명한다는 뜻으로 彖傳, 또는 彖辭라고도 한다. 象은 사물의 현상을 모방하였다는 뜻으로 그 속에 길흉을 내포하고 있는데, 卦와 爻가 모두 일종의 象이며 각각의 길흉을 설명하는 것을 象辭, 또는 象傳이라 한다. 繫辭는 곧 〈繫辭傳〉으로 상하 두 편이다. 사물 변화의 규율을 탐구한 것으로, 《易傳》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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