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謂紂爲繼世
요 箕子乃同姓之臣
이니 事與雄不同
이라하고 又謂
은 恐箕子不爲也
라하고 又謂雄非有求於莽
이요 特於義命有所未盡
이라하니 鞏思之恐皆不然
이라
則相與謀
하여 以謂去之可也
요 任其難可也
라 各以其所守自獻於先王
이요 不必同也
라하니 此見於
也
니라
三子之志 或去或任其難은 乃人臣不易之大義니 非同姓獨然者也라
於是에 微子去之하고 比干諫而死하고 箕子諫不從하여 至辱於囚奴라
夫任其難者는 箕子之志也니 其諫而不從하여 至辱於囚奴는 蓋盡其志矣라
不如比干之死는 所謂各以其所守自獻於先王하고 不必同也며
然而不去는 非懷祿也요 不死는 非畏死也요 辱於囚奴而就之는 非無恥也니라
在我者
는 固彼之所不能易也
라 故曰
라하고 又曰
라하니라
此箕子之事
는 하여 其說不同
하니 而其終始可考者如此也
라
雄遭王莽之際하여 有所不得去요 又不必死며 辱於仕莽而就之하니 固所謂明夷也라
不去非懷祿也요 不死非畏死也요 辱於仕莽而就之非無恥也니라
在我者 亦彼之所不能易也라 故吾以謂與箕子合이라하나니
若可已而不已는 則鄕里自好者 不爲어늘 況若雄者乎아
箕子者 至辱於囚奴而就之하니 則於美新에 安知其不爲며 而爲之 亦豈有累哉아
若此者
는 孔子所不能免
이라 로되 見所不見
하고 敬所不敬
하니 此法言所謂詘身所以伸道者也
라
二者皆天也
라 順天者存
하고 逆天者亡
이라하고 而孔子之見南子
하고 亦曰
시리라하니 則雄於義命
에 豈有不盡哉
아
夷甫以謂無不可者는 聖人微妙之處니 神而不可知也라 雄德不逮聖人하니 强學力行이라도 而於義命有所未盡이라 故於仕莽之際에 不能無差라하고
雄亦爲太玄賦
하여 稱夷齊之徒
하고 而
曰 我異於是 執太玄兮 蕩然肆志 不拘攣兮
以二子之志로 足以自知而任己者如此하니 則無不可者는 非二子之所不可學也라
在我者 不及二子면 則宜有可有不可리니 以學孔子之無可無不可然後에 爲善學孔子니라
觀雄之所自立이라 故介甫以謂世傳其投閣者妄이라하니 豈不猶孟子之意哉리오
鞏自度學每有所進이면 則於雄書每有所得하고 介甫亦以爲然하니
則雄之言이 不幾於測之而愈深하고 窮之而愈遠者乎아
況若雄處莽之際는 考之於經而不繆요 質之於聖人而無疑하니 固不待議論而後明者也라
08. 왕심보王深甫가 양웅揚雄에 관해 논한 것에 답한 편지
注
우선 뽑아 기록하여 식견이 있는 자의 평가를 기다린다.
보내주신 편지를 받아보니 “양웅揚雄이 왕망王莽 때에 처신한 것은 기자箕子의 명이괘明夷卦의 뜻에 부합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상이보常夷甫(상질常秩)는 “주왕紂王은 왕위를 세습하였고 기자箕子는 주왕紂王과 성姓이 같은 신하였으니 일이 양웅과는 다르다.” 하고, “〈극진미신劇秦美新〉과 같은 글을 짓는 일은 기자箕子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양웅揚雄이 왕망王莽에게 요구한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다만 정도正道에 미진한 점이 있었을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저는 모두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왕紂王이 정사를 어지럽게 할 때에 미자微子‧기자箕子‧비간比干 세 사람이 모두 그것을 간하였으나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서로 상의하기를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나는 것이 옳고 어려움을 당할 사람은 당하는 것이 옳으니, 각자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로 선왕先王에게 충성을 다할 뿐이고 굳이 행동을 함께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으니, 이 내용은 《상서尙書》에 실려 있는 세 사람의 뜻에 드러나 있습니다.
세 사람의 뜻이 혹은 떠나거나 혹은 어려움을 당하자고 한 것은 곧 신하로서 바꿀 수 없는 대의大義이니 군주와 성이 같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미자微子는 떠났고 비간比干은 간하다 죽었으며, 기자箕子는 간해도 그의 말을 따라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구금되어 노예가 되는 치욕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체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기자箕子의 뜻이었으니, 간해도 따라주지 않고 구금되어 노예가 되는 치욕까지 받은 것은 그 뜻을 다한 결과입니다.
비간比干이 죽은 경우와 같지 않은 것은 이른바 “각자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로 선왕先王에게 충성을 다할 뿐이고 굳이 행동을 함께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 것에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구금되어 노예가 되는 치욕을 받으면서도 순종한 것은 이른바 명이明夷입니다.
상처를 받으면서도 떠나지 않은 것은 녹祿을 탐해서가 아니고, 죽지 않은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며, 구금되어 노예가 되는 치욕을 받으면서도 순종한 것은 수치심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가슴에 지니고 있는 뜻은 진실로 남이 바꿀 수 없는 법이기 때문에 “안에 있어 어려우나 그 뜻을 바르게 하였다.”라 하고, 또 “기자箕子의 곧고 바른 행동이야말로 그 밝음을 꺼지게 할 수 없다 하겠다.”라 하였습니다.
기자箕子의 일은 《상서尙書》, 《주역周易》, 《논어論語》에 보이는 설이 같지 않은데 전체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양웅揚雄이 왕망王莽 때를 만나 떠날 수 없는 사정이 있었고 또 굳이 죽을 필요도 없었으며 왕망에게 벼슬하는 치욕을 당하더라도 그에게 순종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이른바 명이明夷입니다.
〈이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은〉 양웅揚雄이 한 말이 그의 글에 드러나 있고 행실이 역사에 드러나 있으므로 상고해볼 수가 있습니다.
떠나지 않은 것은 녹을 탐해서가 아니었고, 죽지 않은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었으며, 왕망王莽을 섬기는 치욕을 당하면서도 순종한 것은 수치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슴에 지니고 있는 뜻은 진실로 남이 바꿀 수 없는 법이기 때문에 저는 그가 기자箕子와 합치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기자箕子와 합치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점에서 그런 것이지, 기자箕子가 주紂를 섬기던 초기의 일과 합치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극진미신劇秦美新〉을 지은 것에 관해서는 그만둘 수 있었는데도 그만두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만둘 수 있는데도 그만두지 않는 행위는 자기의 순결을 아끼는 향리鄕里의 무식한 자들도 하지 않는 일인데, 하물며 양웅揚雄과 같은 이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또 경중을 비교해보면 〈극진미신劇秦美新〉을 짓는 일보다 왕망王莽에게 벼슬한 치욕이 더 중합니다.
양웅揚雄이 왕망王莽에게 벼슬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으니, 그 가벼운 일을 그만둘 수 있었겠습니까.
기자箕子는 구금되어 노예가 되는 치욕을 당하면서 순종하였으니 기자箕子가 〈극진미신劇秦美新〉을 짓지 않을 것이란 것을 어찌 알겠으며, 설사 짓는다 하더라도 또 무슨 하자가 있겠습니까.
“단단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갈아도 얇아지지 않으니. 희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라는 말처럼 자신의 가슴에 지닌 뜻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공자孔子께서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자南子는 보고 싶은 자가 아니었고 양호陽虎는 공경하고 싶은 자가 아니었지만 만나보았고 또 공경을 하였으니, 이는 《법언法言》의 이른바 “자신의 몸을 굽혀 도를 편다.”고 한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양웅揚雄이 당시의 시대상황을 스스로 드러내 보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맹자孟子께서 “천하에 도가 있을 때에는 소덕小德이 대덕大德에게 사역을 당하고 소현小賢이 대현大賢에게 사역을 당하며, 천하에 도가 없을 때에는 작은 자가 큰 자에게 사역을 당하고 약자가 강자에게 사역을 당한다.
이 두 가지는 천리天理이니, 천리天理를 순종하는 자는 보존되고,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라고 하였고, 공자孔子께서 남자南子를 만나보고 말씀하기를 “내 맹세코 잘못된 짓을 하였다면 하늘이 나를 버리시리라! 하늘이 나를 버리시리라!”라 하였으니, 양웅이 도리에 있어서 어찌 미진한 점이 있겠습니까.
또 보내오신 편지에 “왕개보王介甫(왕안석王安石)는 ‘양웅揚雄이 벼슬한 것이 공자孔子의, 가한 것도 없고 불가不可한 것도 없다는 뜻과 부합한다.’고 하였고,
상이보常夷甫는 ‘불가不可한 것도 없다는 것은 성인의 오묘한 부분으로서 신묘하여 측량할 수 없는 경지이다. 양웅揚雄의 덕은 성인에 미치지 못하니 힘써 배우고 행하더라도 도리에 미진한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망王莽에게 벼슬한 일은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하고,
또 그가 하는 말이 ‘〈극진劇秦 미신美新〉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천록각天祿閣에서 몸을 던진 일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자孔子의 이른바 ‘불가不可한 것도 없다.’라는 것은 맹자孟子가 말한 ‘성인의 시중時中’인데, 맹자孟子가 백이伯夷 이하 성인들에 관해 차례대로 서술하고 마지막에 “내가 원하는 것은 공자孔子를 배우는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웅揚雄도 《태현부太玄賦》를 지어 백이伯夷‧숙제叔齊 등을 칭송하면서도 노래하기를 “나는야 이들과 달리 큰 도를 지키련다. 호호탕탕 뜻을 펴서 어디에도 아니 매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뜻은 자기의 수준을 충분히 알면서도 자신에 대한 기대를 그처럼 하였으니, ‘불가不可한 것도 없다.’는 성인의 경지는 두 사람이 배우지 못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두 사람에 미치지 못하므로 당연히 가可한 것도 있고 불가不可한 것도 있으니, 공자孔子의 ‘가可한 것도 없고 불가不可한 것도 없다.’는 것을 배운 뒤에야 공자孔子를 잘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배우는 과정에 있는 자는 일깨울 수 있으나 양웅揚雄에게는 적용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에, 이윤伊尹이 음식을 요리하여 탕湯임금에게 등용되기를 구하였다고 하고, 공자孔子께서 옹저癰疽와 척환瘠環을 주인으로 섬겼다고 하였는데, 맹자孟子가 단연코 이는 이윤伊尹과 공자孔子의 일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리로 살펴보면 그 말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양웅揚雄이 도를 스스로 세운 것을 보았기 때문에 개보介甫가 “세상에 양웅揚雄이 천록각天祿閣에서 몸을 던졌다고 전해오는 말은 거짓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맹자孟子의 생각과 같지 않겠습니까.
저는 스스로 생각건대, 학문이 매번 진보할 때마다 양웅揚雄의 글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고 개보介甫 역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양웅揚雄의 말은 헤아릴수록 더욱 깊고 궁구할수록 더욱 원대한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양웅揚雄의 일에 이해되지 않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우선 그의 의중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더구나 양웅揚雄이 왕망王莽 때에 대처한 일은 경전經傳에서 살펴보더라도 어긋남이 없고 성인에게 질정하더라도 의심할 것이 없으니, 진실로 이런저런 논변을 기다린 뒤에야 진상이 밝혀질 일이 아닙니다.
이상의 이야기를 이보夷甫에게 전달해주고 혹 미진하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다시 편지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注
“〈양웅揚雄이〉 왕망王莽에게 벼슬한 것을 기자箕子가 구금되어 노예가 된 데에 비교하였으니, 이것도 이미 과장된 것인데 하물며 〈극진미신劇秦美新〉에 있어서겠는가.
자고子固와 같은 인물로서도 오히려 그 설說에 동조하였으니 잘못된 정도가 심하다.
군자君子가 천하를 저울질하는 것은 출처出處의 도리가 반드시 성인聖人의 경지 이른 뒤에 가능할 것이다.
내 생각에 양웅揚雄은 분명히 초楚의 두 공씨龔氏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