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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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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8. 왕심보王深甫양웅揚雄에 관해 논한 것에 답한 편지
此書所議甚舛이라
이 글에서 논변한 내용은 매우 잘못되었다.
姑錄而質之有識者
우선 뽑아 기록하여 식견이 있는 자의 평가를 기다린다.
蒙疏하니 示鞏謂 合於라하고
보내주신 편지를 받아보니 “양웅揚雄왕망王莽 때에 처신한 것은 기자箕子명이괘明夷卦의 뜻에 부합한다.”고 하셨습니다.
以謂紂爲繼世 箕子乃同姓之臣이니 事與雄不同이라하고 又謂 恐箕子不爲也라하고 又謂雄非有求於莽이요 特於義命有所未盡이라하니 鞏思之恐皆不然이라
그리고 상이보常夷甫(상질常秩)는 “주왕紂王은 왕위를 세습하였고 기자箕子주왕紂王이 같은 신하였으니 일이 양웅과는 다르다.” 하고, “〈극진미신劇秦美新〉과 같은 글을 짓는 일은 기자箕子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양웅揚雄왕망王莽에게 요구한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다만 정도正道에 미진한 점이 있었을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저는 모두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왕紂王이 정사를 어지럽게 할 때에 미자微子기자箕子비간比干 세 사람이 모두 그것을 간하였으나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則相與謀하여 以謂去之可也 任其難可也 各以其所守自獻於先王이요 不必同也라하니 此見於니라
그리하여 서로 상의하기를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나는 것이 옳고 어려움을 당할 사람은 당하는 것이 옳으니, 각자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로 선왕先王에게 충성을 다할 뿐이고 굳이 행동을 함께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으니, 이 내용은 《상서尙書》에 실려 있는 세 사람의 뜻에 드러나 있습니다.
三子之志 或去或任其難 乃人臣不易之大義 非同姓獨然者也
세 사람의 뜻이 혹은 떠나거나 혹은 어려움을 당하자고 한 것은 곧 신하로서 바꿀 수 없는 대의大義이니 군주와 성이 같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於是 微子去之하고 比干諫而死하고 箕子諫不從하여 至辱於囚奴
이에 미자微子는 떠났고 비간比干은 간하다 죽었으며, 기자箕子는 간해도 그의 말을 따라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구금되어 노예가 되는 치욕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夫任其難者 箕子之志也 其諫而不從하여 至辱於囚奴 蓋盡其志矣
대체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기자箕子의 뜻이었으니, 간해도 따라주지 않고 구금되어 노예가 되는 치욕까지 받은 것은 그 뜻을 다한 결과입니다.
不如比干之死 所謂各以其所守自獻於先王하고 不必同也
비간比干이 죽은 경우와 같지 않은 것은 이른바 “각자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로 선왕先王에게 충성을 다할 뿐이고 굳이 행동을 함께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 것에 따른 것입니다.
當其辱於囚奴而就之 乃所謂明夷也
그리고 구금되어 노예가 되는 치욕을 받으면서도 순종한 것은 이른바 명이明夷입니다.
然而不去 非懷祿也 不死 非畏死也 辱於囚奴而就之 非無恥也니라
상처를 받으면서도 떠나지 않은 것은 祿을 탐해서가 아니고, 죽지 않은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며, 구금되어 노예가 되는 치욕을 받으면서도 순종한 것은 수치심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在我者 固彼之所不能易也 故曰 라하고 又曰 라하니라
자신의 가슴에 지니고 있는 뜻은 진실로 남이 바꿀 수 없는 법이기 때문에 “안에 있어 어려우나 그 뜻을 바르게 하였다.”라 하고, 또 “기자箕子의 곧고 바른 행동이야말로 그 밝음을 꺼지게 할 수 없다 하겠다.”라 하였습니다.
此箕子之事 하여 其說不同하니 而其終始可考者如此也
기자箕子의 일은 《상서尙書》, 《주역周易》, 《논어論語》에 보이는 설이 같지 않은데 전체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雄遭王莽之際하여 有所不得去 又不必死 辱於仕莽而就之하니 固所謂明夷也
양웅揚雄왕망王莽 때를 만나 떠날 수 없는 사정이 있었고 또 굳이 죽을 필요도 없었으며 왕망에게 벼슬하는 치욕을 당하더라도 그에게 순종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이른바 명이明夷입니다.
然雄之言著於書하고 行著於史者하니 可得而考니라
〈이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은〉 양웅揚雄이 한 말이 그의 글에 드러나 있고 행실이 역사에 드러나 있으므로 상고해볼 수가 있습니다.
不去非懷祿也 不死非畏死也 辱於仕莽而就之非無恥也니라
떠나지 않은 것은 녹을 탐해서가 아니었고, 죽지 않은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었으며, 왕망王莽을 섬기는 치욕을 당하면서도 순종한 것은 수치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在我者 亦彼之所不能易也 故吾以謂與箕子合이라하나니
자신의 가슴에 지니고 있는 뜻은 진실로 남이 바꿀 수 없는 법이기 때문에 저는 그가 기자箕子와 합치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吾之所謂與箕子合者如此 非謂合其事紂之初也
제가 기자箕子와 합치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점에서 그런 것이지, 기자箕子를 섬기던 초기의 일과 합치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至於美新之文하여는 則非可已而不已者也
극진미신劇秦美新〉을 지은 것에 관해서는 그만둘 수 있었는데도 그만두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若可已而不已 則鄕里自好者 不爲어늘 況若雄者乎
그만둘 수 있는데도 그만두지 않는 행위는 자기의 순결을 아끼는 향리鄕里의 무식한 자들도 하지 않는 일인데, 하물며 양웅揚雄과 같은 이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且較其輕重하면 辱於仕莽爲重矣
또 경중을 비교해보면 〈극진미신劇秦美新〉을 짓는 일보다 왕망王莽에게 벼슬한 치욕이 더 중합니다.
雄不得而已하니 則於其輕者 其得已哉
양웅揚雄왕망王莽에게 벼슬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으니, 그 가벼운 일을 그만둘 수 있었겠습니까.
箕子者 至辱於囚奴而就之하니 則於美新 安知其不爲 而爲之 亦豈有累哉
기자箕子는 구금되어 노예가 되는 치욕을 당하면서 순종하였으니 기자箕子가 〈극진미신劇秦美新〉을 짓지 않을 것이란 것을 어찌 알겠으며, 설사 짓는다 하더라도 또 무슨 하자가 있겠습니까.
“단단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갈아도 얇아지지 않으니. 희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라는 말처럼 자신의 가슴에 지닌 뜻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若此者 孔子所不能免이라 로되 見所不見하고 敬所不敬하니 此法言所謂詘身所以伸道者也
이와 같은 일은 공자孔子께서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자南子는 보고 싶은 자가 아니었고 양호陽虎는 공경하고 싶은 자가 아니었지만 만나보았고 또 공경을 하였으니, 이는 《법언法言》의 이른바 “자신의 몸을 굽혀 도를 편다.”고 한 경우입니다.
然則非雄所以自見者歟
그렇다면 양웅揚雄이 당시의 시대상황을 스스로 드러내 보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맹자孟子께서 “천하에 도가 있을 때에는 소덕小德대덕大德에게 사역을 당하고 소현小賢대현大賢에게 사역을 당하며, 천하에 도가 없을 때에는 작은 자가 큰 자에게 사역을 당하고 약자가 강자에게 사역을 당한다.
二者皆天也 順天者存하고 逆天者亡이라하고 而孔子之見南子하고 亦曰 시리라하니 則雄於義命 豈有不盡哉
이 두 가지는 천리天理이니, 천리天理를 순종하는 자는 보존되고,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라고 하였고, 공자孔子께서 남자南子를 만나보고 말씀하기를 “내 맹세코 잘못된 짓을 하였다면 하늘이 나를 버리시리라! 하늘이 나를 버리시리라!”라 하였으니, 양웅이 도리에 있어서 어찌 미진한 점이 있겠습니까.
또 보내오신 편지에 “왕개보王介甫(왕안석王安石)는 ‘양웅揚雄이 벼슬한 것이 공자孔子의, 가한 것도 없고 불가不可한 것도 없다는 뜻과 부합한다.’고 하였고,
夷甫以謂無不可者 聖人微妙之處 神而不可知也 雄德不逮聖人하니 强學力行이라도 而於義命有所未盡이라 故於仕莽之際 不能無差라하고
상이보常夷甫는 ‘불가不可한 것도 없다는 것은 성인의 오묘한 부분으로서 신묘하여 측량할 수 없는 경지이다. 양웅揚雄의 덕은 성인에 미치지 못하니 힘써 배우고 행하더라도 도리에 미진한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망王莽에게 벼슬한 일은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하고,
又謂以美新考之 不可謂之無也라하니라
또 그가 하는 말이 ‘〈극진劇秦 미신美新〉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천록각天祿閣에서 몸을 던진 일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자孔子의 이른바 ‘불가不可한 것도 없다.’라는 것은 맹자孟子가 말한 ‘성인의 시중時中’인데, 맹자孟子백이伯夷 이하 성인들에 관해 차례대로 서술하고 마지막에 “내가 원하는 것은 공자孔子를 배우는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雄亦爲太玄賦하여 稱夷齊之徒하고曰 我異於是 執太玄兮 蕩然肆志 不拘攣兮
그리고 양웅揚雄도 《태현부太玄賦》를 지어 백이伯夷숙제叔齊 등을 칭송하면서도 노래하기를 “나는야 이들과 달리 큰 도를 지키련다. 호호탕탕 뜻을 펴서 어디에도 아니 매이리.”라고 하였습니다.
以二子之志 足以自知而任己者如此하니 則無不可者 非二子之所不可學也
이들 두 사람은 뜻은 자기의 수준을 충분히 알면서도 자신에 대한 기대를 그처럼 하였으니, ‘불가不可한 것도 없다.’는 성인의 경지는 두 사람이 배우지 못할 바가 아닙니다.
在我者 不及二子 則宜有可有不可리니 以學孔子之無可無不可然後 爲善學孔子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두 사람에 미치지 못하므로 당연히 한 것도 있고 불가不可한 것도 있으니, 공자孔子의 ‘한 것도 없고 불가不可한 것도 없다.’는 것을 배운 뒤에야 공자孔子를 잘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此言 有以寤學者 然不得施於雄也이니라
이 말은 배우는 과정에 있는 자는 일깨울 수 있으나 양웅揚雄에게는 적용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에, 이윤伊尹이 음식을 요리하여 임금에게 등용되기를 구하였다고 하고, 공자孔子께서 옹저癰疽척환瘠環을 주인으로 섬겼다고 하였는데, 맹자孟子가 단연코 이는 이윤伊尹공자孔子의 일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蓋以理考之 知其不然也
사리로 살펴보면 그 말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觀雄之所自立이라 故介甫以謂世傳其投閣者妄이라하니 豈不猶孟子之意哉리오
양웅揚雄이 도를 스스로 세운 것을 보았기 때문에 개보介甫가 “세상에 양웅揚雄천록각天祿閣에서 몸을 던졌다고 전해오는 말은 거짓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맹자孟子의 생각과 같지 않겠습니까.
鞏自度學每有所進이면 則於雄書每有所得하고 介甫亦以爲然하니
저는 스스로 생각건대, 학문이 매번 진보할 때마다 양웅揚雄의 글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고 개보介甫 역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則雄之言 不幾於測之而愈深하고 窮之而愈遠者乎
그렇다면 양웅揚雄의 말은 헤아릴수록 더욱 깊고 궁구할수록 더욱 원대한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故於雄之事 有所不通이면 必且求其意
그러므로 양웅揚雄의 일에 이해되지 않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우선 그의 의중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況若雄處莽之際 考之於經而不繆 質之於聖人而無疑하니 固不待議論而後明者也
더구나 양웅揚雄왕망王莽 때에 대처한 일은 경전經傳에서 살펴보더라도 어긋남이 없고 성인에게 질정하더라도 의심할 것이 없으니, 진실로 이런저런 논변을 기다린 뒤에야 진상이 밝혀질 일이 아닙니다.
爲告夷甫하여 或以爲未盡이면 願更疏示하라
이상의 이야기를 이보夷甫에게 전달해주고 혹 미진하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다시 편지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以仕莽擬箕子之囚奴하니 抑已過矣어늘 況美新乎
“〈양웅揚雄이〉 왕망王莽에게 벼슬한 것을 기자箕子가 구금되어 노예가 된 데에 비교하였으니, 이것도 이미 과장된 것인데 하물며 〈극진미신劇秦美新〉에 있어서겠는가.
以子固而猶爲附和其說하니 甚矣
자고子固와 같은 인물로서도 오히려 그 에 동조하였으니 잘못된 정도가 심하다.
君子之權衡天下 出處必至聖人하고 而後折衷也
군자君子가 천하를 저울질하는 것은 출처出處의 도리가 반드시 성인聖人의 경지 이른 뒤에 가능할 것이다.
愚獨謂揚雄 當不逮이라하노라
내 생각에 양웅揚雄은 분명히 의 두 공씨龔氏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본다.”
역주
역주1 答王深甫論揚雄書 : 深甫는 王回(1023~1065)의 자로 福州 侯官縣(지금의 福建 福州) 사람이다. 進士가 되어 亳州 衛眞縣主簿를 지낸 뒤에 潁州에서 죽었다. 작자는 歐陽脩의 소개로 그와 연을 맺어 서로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漢나라 신하로 있다가 王莽의 新나라에 벼슬하여 부귀를 누림으로써 후세에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은 揚雄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는 뜻을 피력하였다. 이 편지가 오간 시기는 알 수 없다.
역주2 揚雄處王莽之際 : 揚雄(B.C. 53~A.D. 18)은 西漢 후기의 문장가이자 철학가이다. 成帝 때에 文學侍從을 맡았고 관직이 成帝, 哀帝, 平帝 때 내내 낮았다가, 王莽이 新나라를 세운 뒤에 太中大夫에까지 올랐다. 저서로는 《周易》을 모방하여 지은 《太玄經》과 《論語》를 본떠 지은 《法言》 등이 있다. 王莽은 孝元皇后의 친정 조카로, 平帝를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여 국호를 新이라고 하였다. 즉위한 지 15년 만에 光武帝에게 패하여 죽었다.
역주3 箕子之明夷 : 《周易》 明夷卦 六五의 爻辭이다. 明夷는 우매한 자가 군주로 있을 때 현인이 자신의 능력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 상처를 받는다는 뜻이다. 箕子가 그와 같이 처신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역주4 常夷甫 : 夷甫는 常秩의 자이다. 宋 神宗 때 사람으로 經學에 통달하였다.
역주5 美新之文 : 〈美新〉은 〈劇秦美新〉의 약칭이다. 揚雄이 王莽에게 아부하기 위해 지은 문장으로 秦나라의 과실을 공격하고 新나라의 미덕을 칭찬한다는 뜻이다.
역주6 微子箕子比干三子者 蓋皆諫而不從 : 箕子와 比干은 각기 紂의 백부와 숙부이고, 微子는 庶兄이다. 이들 세 사람이 紂의 무도함을 간쟁하였으나 따르지 않자, 微子는 떠나 宗祀를 보존했고 箕子는 구금되어 노예가 되고 比干은 죽임을 당했다.
역주7 書三子之志 : 微子가 그의 조국이 장차 망할 것을 애통해한 나머지 箕子, 比干과 함께 각자의 입장에 따라 소신껏 행동하자고 상의한 내용이 《尙書》 〈商書 微子〉에 실려 있는 것을 말한다.
역주8 內難而能正其志 : 《周易》 明夷卦 彖辭의 내용이다.
역주9 箕子之正 明不可息也 : 《周易》 明夷卦 六五 象辭의 내용이다.
역주10 見於書易論語 : 《尙書》 〈商書 微子〉, 《周易》 明夷卦, 《論語》 〈微子〉에 微子‧箕子‧比干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역주11 不曰堅乎……湼而不緇 : 《論語》 〈陽貨〉에 나오는 말로, 心志가 매우 견고하고 결백하여 바깥의 환경에 결코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역주12 故於南子……非所欲敬也 : 南子는 衛靈公의 부인으로 부정한 행실이 있었는데 그가 일찍이 孔子에게 만나기를 청하므로, 공자가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그를 만나보았다. 陽虎는 魯의 권신인 季孫氏의 家臣이다. 공자가 자기 집에 찾아와주기를 바랐으나 공자가 오지 않자, 禮에 “대부가 선비에게 물건을 내렸을 경우에 자신이 직접 받지 못했으면 반드시 대부의 집에 가서 拜謝해야 한다.”고 말한 것을 이용하여, 공자가 집에 없는 틈을 엿보아 공자에게 찐 돼지를 보냈다. 이에 공자도 陽虎가 없는 틈을 엿보아 그 집에 가서 拜謝하였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論語 雍也‧陽貨》
역주13 天下有道……逆天者亡 : 《孟子》 〈離婁 上〉에 나오는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역주14 予所否者……天厭之 : 孔子가 부정한 행실이 있는 南子를 만나보았다 하여 子路가 좋아하지 않자 孔子가 그에게 한 말이다. 《論語 雍也》
역주15 介甫以謂雄之仕 合於孔子無不可之義 : 介甫는 王安石의 자이다. 王安石이, 揚雄이 王莽에게 벼슬한 것은 孔子가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중용의 도를 행한 것과 합치된다고 칭송했다는 것이다. 無不可는 無可無不可의 준말로 孔子가 한 말이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도 없고, 꼭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없다.’는 뜻으로, 하나에 집착하지 않고 시의적절하게 중용의 도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論語 微子》
역주16 投閣之事 : 揚雄이 그의 제자 劉棻의 사건에 연루되어 獄吏가 그를 체포하러 갔을 때, 그는 마침 天祿閣에서 서적을 교정하고 있다가 체포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거기서 뛰어내려 죽을 뻔했던 일을 가리킨다. 《漢書 揚雄傳》
역주17 孟子所謂聖之時也 : 孟子가 고대 성인들의 특성에 관해 “伯夷는 성인의 청렴한 덕을 지닌 자요, 伊尹은 스스로 천하의 치란을 책임지는 성인의 덕을 지닌 자요, 柳下惠는 성인의 온화한 덕을 지닌 자요, 孔子는 시의적절하게 중용의 도를 따르는 성인의 덕을 지닌 자이시다.”라고 말한 것에서 인용한 것이다. 《孟子 萬章 下》
역주18 孟子歷敍伯夷以降……乃所願則學孔子 : 孟子가 伯夷와 伊尹과 孔子에 대해 서술한 뒤에, “벼슬할 만하면 벼슬하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두며, 오래 머무를 만하면 오래 머물고 빨리 떠날 만하면 빨리 떠나신 것은 孔子이니, 모두 옛 성인이시다. 내가 그렇게 행할 수 없지만 원하는 것은 孔子를 배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 上》
역주19 : 저본의 ‘不’자를 《曾鞏集》을 참조하여 ‘亦’자로 고쳤다.
역주20 以謂伊尹以割烹要湯……孟子皆斷以爲非伊尹孔子之事 : 孟子가 伊尹이 湯王을 만날 때의 전설이 잘못된 것을 해명하기를 “그가 堯舜의 도로 湯王에게 요구했다는 말은 들었고 음식 요리로 요구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였고, 또 萬章이 “혹자가 ‘孔子가 衛나라에서는 癰疽를 주인으로 삼으셨고, 齊나라에서는 侍人인 瘠環을 주인으로 삼으셨다.’ 하니,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하자, 孟子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말을 만들어내길 좋아하는 자들이 지어낸 것이다.”라고 해명하였다. 《孟子 萬章 上》
역주21 楚兩龔 : 漢代 楚 지방의 龔勝과 龔舍를 가리킨다. 이들은 교우관계였으며 모두 명예와 절개로 이름이 났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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