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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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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本末纖悉하여 得記事法이로되 纔是有用文字 不如鑑湖圖序更妙하다
鄞縣張侯圖其縣之廣德湖하고 而以書幷古刻石之文遺予曰 願有紀하노라하니라
蓋湖之大五十里 而在鄞之西十二里
其源出於四明山하고 而引其北爲하며 泄其東北入江이라
凡鄞之鄕十有四 其東七鄕之田 錢湖漑之하고 其西七鄕之田 水注之者 則此湖也
舟之通越者皆繇此湖 而湖之産 有鳧雁魚鱉茭蒲葭菼葵蓴蓮茨之饒
其舊名 曰鸎脰湖 而今名 大曆八年令儲仙舟之所更也
貞元元年 刺史任侗 又治而大之하고
大中元年 民或上書請廢湖爲田하여 任事者左右之어늘
爲出御史李後素驗視한대 後素不爲撓民以得罪하니 而湖卒不廢하니라
刺史李敬方與後素 皆賦詩刻石以見其事한대
其說以謂當是時湖成三百年矣라하니 則湖之興 其在梁齊之際歟인저
宋興하여 淳化二年 民始與州縣彊吏盜湖爲田하여 久不能正이라가
至道二年 知州事丘崇元 躬按治之하여 而湖始復하니라
轉運使言其事하여 詔禁民敢田者하고
至其後하여는 遂著之於一州勅하니라
咸平中 賜官吏하여 取湖之西山足之地百頃爲之한대 旣而務益取湖以自廣이러라
天禧二年 知州事李夷庚 始正湖界하여 起隄十有八里以限之
湖之濱有地하니 曰林村砂末 曰高橋臘臺 而其中有山하니 曰白鶴 曰望春이라
自太平興國以來 民冒取之한대 夷庚又命禁絶하여 而湖始復하니라
天聖景祐之間 民復相率請湖爲田한대 州從事張大有 案行止之하고
而知州事李照又言其事하여 報知至道詔書하고
照以刻之石하니 自此言請湖爲田者始息이요
而康定某年 縣主簿曾公望 又益治湖하니라
至張侯之爲鄞하여는 則湖久不治하여 西七鄕之農以旱告한대
張侯爲出營度하니 民田湖旁者皆喜하고 願致其力이라
張侯計工賦材하고 擇民之爲人信服有知計者하여 使督役而自主之하고
一不以屬吏어늘 人以不擾하고 而咸勸趨하더라
於是 築環湖之隄하니 凡九千一百三十四丈이요 其廣一丈八尺이요 而其高 八尺이니
廣倍於舊하고 而高倍於舊三之二이라
鄞人累石陻水한대 闕其間而扃以木하여 視水之小大而閉縱之하니 謂之碶
於是 又爲之益舊하여 總爲碶九 爲埭二十
隄之上 植楡柳하니 益舊總爲三萬一百이라
又因其餘材 爲二亭於隄上以休하고 而與望春白鶴之山相直하여 因以其山名이라
山之上爲廟하니 一以祠神之主此湖者 一以祠吏之有功於此湖者
以熙寧元年十一月始役하여 而以明年二月卒事하니
其用民之力 八萬二千七百九十有二工이요 而其材出於工之餘
旣成 而田不病旱하고 舟不病涸하며
魚雁茭葦果蔬水産之良 皆復其舊하고 而其餘及於比縣旁州하니 張侯於是可謂有勞矣
是年 予通判越州事한대 越之南湖 久廢不治하니
蓋出於吏之因循하여 而至於不知所以爲力하니 予方患之
觀廣德之興컨대 以數百年 危於廢者數矣언마는
繇屢有人이라 故益以治하니라
蓋大曆之間 漑田四百頃이요 大中八百頃이요 而今二千頃矣
則人之存亡 政之廢擧 爲民之幸不幸이니 其豈細也歟리오
故爲之書하여 尙俾來者知毋廢前人之功하여 以永爲此邦之利하고 而又將與越之人圖其廢也하노라
張侯名峋이요 字子堅이니
以材聞하여 去而爲提擧兩浙路常平廣惠倉하고 兼管勾農田差役水利事하니 方且用於時云이니라


07. 광덕호廣德湖에 관한 기문
본말本末이 빈틈없이 갖추어져 일을 기록하는 방법에 맞으나, 실용문實用文에 지나지 않으니, 〈서월주감호도序越州鑑湖圖〉가 더 절묘한 것만 못하다.
은현鄞縣장후張侯가 자기 광덕호廣德湖를 그림으로 그리고, 편지와 옛날 비석에 새겨져 있던 글을 나에게 보내주며 기문記文을 써달라고 하였다.
광덕호廣德湖의 크기는 50로, 은현鄞縣 서쪽 12 되는 지점에 있다.
광덕호廣德湖수원水源사명산四明山에서 나오며, 그 북쪽 물을 끌어 조거漕渠를 만들고 그 동북쪽 물을 끌어 장강長江으로 유입流入하도록 했다.
은현鄞縣은 총 14곳으로, 그 중 동쪽 7개 에 있는 농지는 전호錢湖의 물로 관개를 하며, 나머지 서쪽 7개 에 있는 농지에 물을 대는 곳이 바로 이 광덕호廣德湖이다.
선박으로 월주越州에 가는 경로는 모두 이 광덕호廣德湖를 경유하며, 광덕호廣德湖의 특산물로는 물오리, 기러기, 물고기, 자라, 줄풀, 부들, 갈대, 물억새, 아욱, 순채, 연, 쇠귀나물이 풍부하다.
광덕호廣德湖의 옛 이름은 앵두호鸎脰湖라 하는데, 현재의 명칭은 대력大曆 8년(773) 은현鄞縣 현령縣令 저선주儲仙舟가 바꾼 것이다.
정원貞元 원년(785)에는 자사刺史 임동任侗이 또 광덕호廣德湖를 정비하여 크게 만들었다.
대중大中 원년(847)에는 백성들 중 어떤 이가 글을 올려 광덕호廣德湖를 메워 농지로 만들자고 요청하여 요로에 있는 자가 그 주장에 가세하였다.
이 때문에 어사대부御史大夫 이후소李後素를 파견하여 광덕호廣德湖를 살펴보도록 하였는데, 이후소李後素는 농지로 만들자는 백성의 의견에 흔들리지 않은 일로 죄를 얻었으나 이로 인해 광덕호廣德湖가 결국 메워지지 않게 되었다.
자사刺史 이경방李敬方이후소李後素는 모두 를 짓고 비석에 글을 새겨 그 일을 세상에 알렸다.
그 말에 따르면 당시에 광덕호廣德湖가 조성된 지 300년이 되었다 하였으니, 광덕호廣德湖가 만들어진 것은 아마도 남조南朝 나라나 나라 때인 듯하다.
나라가 건국되고 순화淳化 2년(991)에 민간인이 처음으로 세력이 있는 주현州縣의 관리와 한통속이 되어 광덕호廣德湖를 불법으로 매립하고 농지로 만들어 오랫동안 시정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도至道 2년(997)에 지주사知州事구숭원丘崇元이 직접 그 소행을 조사하고 관련자들을 치죄治罪한 끝에 호수가 비로소 복원되었다.
전운사轉運使가 그 일을 조정에 보고하자, 조서詔書를 내려 민간인이 감히 농지로 사용하는 행위를 금지하도록 했다.
그 후에는 결국 이 금령禁令 전체에 적용하도록 조칙詔勅으로 명시하였다.
함평咸平 연간(998~1003)에 관리들에게 직분전職分田을 내려 광덕호廣德湖 서쪽 산기슭 100 땅을 가져다 그 직분전職分田으로 삼도록 하였는데, 얼마 후 광덕호廣德湖를 더 매립하여 자신의 전지를 확대하는 행위에 진력하게 되었다.
천희天禧 2년(1018)에 지주사知州事 이이경李夷庚이 최초로 광덕호廣德湖의 경계를 바로잡아 제방으로부터 18까지를 호수의 구역으로 한정하였다.
호숫가에는 임촌사말林村砂末고교랍대高橋臘臺라는 땅이 있고, 그 가운데 백학산白鶴山망춘산望春山이라는 산이 있다.
태평흥국太平興國 연간(976~983) 이래로 백성들이 불법을 무릅쓰고 농지로 사용하자, 이이경李夷庚이 또 금지할 것을 명하여 광덕호廣德湖가 비로소 복원되었다.
천성天聖 연간(1023~1031)과 경우景祐 연간(1034~1038)에 백성들이 다시 잇달아 호수를 농지로 개간하자고 요청했는데, 주종사州從事장대유張大有광덕호廣德湖를 순행하고서 그 요청을 저지시켰다.
그리고 지주사知州事 이조李照가 또 그 일을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지도至道 2년에 내렸던 조서詔書 내용을 통보했다.
그래서 이조李照가 이 내용을 비석에 새기자 이때부터 호수를 농지로 개간하자고 요청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비로소 잠잠하게 되었다.
강정康定 연간(1040~1041) 어느 해에 은현鄞縣 주부主簿 증공망曾公望이 또 광덕호廣德湖를 추가로 수리했다.
장후張侯은현鄞縣을 다스릴 때에는 광덕호廣德湖가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아, 서쪽 7개 의 농사가 가뭄에 시달린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장후張侯가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공사계획을 발표하자, 광덕호廣德湖 주변에서 농사짓던 백성들은 모두 환호하며 자신들의 힘도 보태기를 희망하였다.
장후張侯가 노동력을 산출하고 목재를 모은 뒤에 사람들이 신복하고 지혜가 있는 백성을 골라 공역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이 사업을 주관하여 어느 것 하나 부하 관리에게 맡기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동요하지 않고 모두들 고무되어 공역장工役場으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광덕호廣德湖를 둘러싼 제방을 건축하였는데 길이는 총 9,134이며 그 너비는 1 8, 그 높이는 2이었다.
너비는 이전보다 두 배나 되었고, 높이도 예전보다 두 배가 되는 곳이 전체의 3분의 2였다.
은현鄞縣 사람들이 돌을 쌓아 물을 막은 상태에서 그 사이를 비워 나무로 빗장을 만들어 수량水量의 정도를 관측하여 빗장을 개폐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갑문閘門)이라 한다.
이때에 또 그 수를 늘려 9개, 보 20개를 만들었다.
제방 위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이전보다 수를 늘려 총 3만 100그루였다.
또 공사에 쓰고 남은 목재를 활용하여 제방 위에 정자 두 채를 지어 휴식공간으로 만들고, 망춘산望春山백학산白鶴山과 서로 마주보게끔 하여 산의 이름으로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
두 산 위에 사당을 세웠는데, 하나는 광덕호廣德湖를 주관하는 신에게 제를 올리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광덕호廣德湖에 공을 세운 관리들에게 제를 올리는 곳이다.
희령熙寧 원년(1068) 11월에 공역을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료하였다.
이 공역에 투입된 백성들의 노동력은 8만 2,792명이며, 목재는 노동력을 징발하지 않은 가구家口에서 징발하였다.
공역이 완성되자 농지를 일구는 사람들은 가뭄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고, 선박을 운행하는 사람들은 호수가 마를까 근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품질 좋은 물고기, 기러기, 줄풀, 갈대, 과일, 채소와 수산물이 모두 예전과 같이 회복되었으며 수요를 충족하고 남은 여분이 이웃 과 주변 까지 돌아갔으니, 이로 볼 때 장후張侯가 공로를 세웠다고 할 만하다.
이해에 내가 월주통판越州通判이 되었는데 월주越州남호南湖가 오랫동안 버려져 관리되지 않고 있었다.
이는 관리들이 타성에 젖어 힘을 발휘할 방법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니, 나는 한창 그 상황을 근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광덕호廣德湖의 공역을 살펴보면 수백 년 동안 마를 뻔했던 위기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인재가 나왔기 때문에 더욱 잘 관리될 수 있었다.
대력大曆 연간(766~779)에는 농지 4백 에 물을 대고, 대중大中 연간(847~859)에는 8백 , 현재에는 2천 에 물을 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재가 있느냐 없느냐와 정사政事가 잘 실행되느냐 마느냐에 백성들이 행복해지느냐 불행해지느냐가 결정되니,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때문에 이 문장을 지어 뒷사람으로 하여금 전인前人의 공로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지 말고 영원히 이 고을의 이익이 되도록 하며, 또 앞으로 월주越州 사람들과 함께 거의 말라가는 호수를 어떻게 살릴지 도모하려고 한다.
장후張侯의 이름은 이고, 자견子堅이다.
재능이 있다고 알려져 은현鄞縣에서 떠나 제거량절로상평광혜창提擧兩浙路常平廣惠倉관구농전차역수리사管勾農田差役水利事가 되었는데, 이제 또 조정朝廷에서 중용重用될 것이라고 한다.


역주
역주1 廣德湖記 : 작자 51세 때인 熙寧 2년(1069)에 越州通判으로 있으면서 鄞縣縣令 張峋의 부탁을 받고 쓴 記文이다. 廣德湖는 越州와 인접한 明州에 있던 호수인데, 지금은 메워지고 현존하지 않는다. 본 작품에서는 廣德湖에 대한 지리정보와 수리사업의 연혁 및 경과를 소개하고 있다.
역주2 漕渠 : 양곡을 운반할 수 있는 수로를 말한다.
역주3 職田 : 職分田을 가리키는 말로, 관료의 職品에 따라 봉록으로 지급하는 公田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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