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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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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3. 무주撫州안로공사당顔魯公祠堂에 쓴 기문
魯公之臨大節而不可奪處 凡四五
안노공顔魯公이 생사존망의 긴급한 때에 임해서도 뜻을 굽히지 않은 적이 총 네댓 번이었다.
而曾公之文 亦足以劃一而點綴之하니 令人讀之而泫然涕洟 不能自已하니라
그리고 증공曾公의 이 문장도 일필휘지로 엮어내려가 안노공顔魯公을 충분히 부각시킴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이 문장을 읽고 절로 그만둘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贈司徒魯郡顔公 諱眞卿이니 事唐爲太子太師
증사도贈司徒 노군공魯郡公 안공顔公진경眞卿이니 나라 때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냈다.
與其從父兄杲卿으로 皆有大節以死하여 至今雖小夫婦人라도 皆知公之爲烈也
그의 종형從兄 안고경顔杲卿과 함께 모두 큰 절의를 견지한 채 죽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백성이라 하더라도 모두들 안공顔公의 장렬한 사적을 알고 있다.
以忤楊國忠으로 斥爲平原太守어늘 策安祿山必反하고 爲之備하다가
당초에 안공顔公양국충楊國忠의 심기를 거스른 이유로 평원태수平原太守폄척貶斥을 당했는데, 안녹산安祿山이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예측하고 그에 대비하였다.
祿山旣擧兵 與常山太守杲卿으로 伐其後하니 賊之不能直闚潼關 以公與杲卿撓其勢也
안녹산安祿山거병擧兵하자 상산태수常山太守 안고경顔杲卿과 함께 그의 배후를 공격하였으니, 반적叛賊들이 곧바로 동관潼關을 넘보지 못했던 것은 안고경顔杲卿반적叛賊들의 기세를 꺾었기 때문이다.
在肅宗時하여는 數正言이어늘 宰相不悅하여 斥去之하고 又爲御史唐旻所搆하여 連輒斥하고
숙종肅宗 때에는 자주 바른말을 하자, 재상이 싫어하여 공을 배척하였고, 또 어사御史 당민唐旻의 모함에 빠져 잇달아 폄척을 당했다.
李輔國遷太上皇居西宮이어늘 公首率百官하여 請問起居하니 又輒斥하고
그리고 이보국李輔國태상황太上皇을 이주시켜 서궁西宮에 거처하도록 하자, 이 앞장서서 백관들을 거느리고 태상황太上皇의 문안을 여쭈었으므로 또 곧 폄척을 당했다.
代宗時 與元載爭論是非라가 載欲有所壅蔽어늘 公極論之하니 又輒斥하고
대종代宗 때에는 원재元載와 시비거리를 놓고 논쟁하다가 원재元載가 조정백관과 황제의 사이를 떼어놓으려 하자, 이 극력 그 일을 논하는 바람에 또 곧 폄척을 당했다.
楊炎盧杞旣相德宗 益惡公所爲하여 連斥之하되 猶不滿意라가
그리고 양염楊炎, 노기廬杞덕종德宗 때 재상이 되고 나서는 이 하는 일을 더욱 싫어하여 잇달아 을 폄척하고서도 오히려 만족해하지 않다가, 이희열李希烈여주汝州를 함락시킬 때 노기廬杞가 즉시 이희열李希烈에게 사신으로 보냈다.
李希烈陷汝州 杞卽以公使希烈이어늘 希烈初慚其言하여 後卒縊公以死하니 是時公年七十有七矣러라
이희열李希烈이 처음에는 이 하는 말을 듣고 부끄러워하다가 최후에는 도리어 을 목매어 죽이니, 이때 의 나이가 77세였다.
天寶之際 久不見兵이라가 祿山旣反 天下莫不震動이어늘
천보天寶 연간에 오랫동안 전란戰亂을 경험해보지 못하다가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천하에 그 어느 누구도 혼비백산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公獨以區區平原으로 遂折其鋒하여 四方聞之 爭奮而起하니
그런데 만은 좁은 평원平原 땅을 기반으로 삼아 마침내 반적叛賊들의 예봉銳鋒을 꺾자, 사방에서 그 소식을 듣고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분발하여 떨쳐 일어났다.
唐卒以振者 公爲之倡也
나라가 마침내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창도倡導한 일이다.
當公之開土門 同日歸公者 十七郡이요 得兵二十餘萬이니
토문土門에 주둔하던 반적들을 물리치자, 그날로 에게 귀의한 자들이 17개 에 달하고 병사 20여만 명을 얻었다.
繇此觀之컨대 苟順且誠이면 天下從之矣
이것으로 보면, 만약 이치에 맞고 진실한 마음을 가지면 천하가 따르는 것이다.
自此至公歿 垂三十年이라 小人繼續任政하니 天下日入於弊하여 大盜繼起하여
그 이후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30년의 세월 동안 소인이 계속 국정을 맡는 바람에 천하天下는 날로 피폐해져서 큰 도적들이 계속 봉기하였다.
天子輒出避之하고 唐之在朝臣 多畏怯觀望이어늘
그러자 천자는 걸핏하면 수도를 빠져나가 난리를 피했고 조정에 있던 나라 신하들은 대부분 겁에 질려 관망만 하고 있었다.
能居其間하니 一忤於世하여 失所而不自悔者寡矣 至於再三忤於世하여 失所而不自悔者 蓋未有也
그러한 시대를 살면서 한 번 시류時流를 거슬러 자신의 기반을 잃고도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사람은 적을 것이요, 두세 차례 시류時流를 거슬러 자신의 기반을 잃고도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도 아직까지 없었을 것이다.
若至於起且仆하여 以至於七八이요 遂死而不自悔者 則天下一人而已 若公是也
만약 쓰러졌다가 일어나기를 일고여덟 차례가 되고 마침내 목숨을 잃고서도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사람은 천하에 한 명뿐이니, 이 곧 그 사람이다.
公之學問文章 往往雜於神仙浮屠之說하여 不皆合於理로되 及其奮然自立하여 能至於此者 蓋天性然也
의 학문과 문장은 이따금 신선神仙불가佛家의 설이 섞여 있어 모두가 이치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연奮然히 스스로 떨쳐 일어나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천성天性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故公之能處其死로되 不足以觀公之大하니 何則
때문에 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의 위대함을 볼 수 없으니, 어째서인가?
及至於勢窮하여는 義有不得不死하니 雖中人可勉焉이어든 況公之自信也歟
사세事勢가 궁해질 때에는 의리상 죽지 않을 수 없으므로 비록 보통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는 쉽게 될 수 있는데, 하물며 공과 같이 스스로 신념을 가지고 죽은 경우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維歷忤大奸하여 顚跌撼頓 至於七八이로되 而終始不以死生禍福으로 爲秋毫顧慮 非篤於道者 不能如此 此足以觀公之大也니라
다만, 여러 차례 큰 간신들의 비위를 거슬러 좌절을 맛본 것이 일고여덟 차례에 이르렀으나, 시종일관 사생死生이나 화복禍福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던 경지는 에 독실한 사람이 아니면 이와 같이 장렬한 행동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니, 여기에서 의 위대함을 볼 수 있다.
夫世之治亂不同 而士之去就亦異하니 彼各有義어늘
세상이 치세治世인지 난세亂世인지의 차이에 따라 지식인의 거취도 달라지니, 백이伯夷성인聖人 중에 청고淸高한 절개를 지키는 사람이고, 이윤伊尹성인聖人 중에 천하를 자기 책임으로 자임하는 사람이고, 공자孔子성인聖人 중에 시세상황에 따라 처신하는 사람인데, 그들은 저마다 자기의 도리가 있다.
夫旣自比於古之任者矣 乃欲睠顧回隱하여 以市於世 其可乎
이미 자기를, 고대古代에 천하를 자기 책임으로 자임한 사람에 견주고 있으면서 도리어 앞뒤를 재고 회피하는 짓을 일삼으며 세속과 영합한다면 되겠는가.
때문에 공자孔子께서 비열한 자는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미워하고 자신을 희생하여 을 완성한 자는 찬미하였으니, 과 같은 사람은 공자孔子께서 말한 을 완성한 자가 아니겠는가.
今天子至和三年 尙書都官郞中知撫州聶君厚載 尙書屯田員外郞通判撫州林君慥 相與慕公之烈이러니 以公之嘗爲此邦也라하여 遂爲堂而祠之
지금의 천자天子 지화至和 3년(1056)에 상서도관낭중尙書都官郞中 지무주知撫州 섭군聶君 후재厚載상서둔전원외랑尙書屯田員外郞 통판무주通判撫州 임군林君 가 함께 의 장렬한 행동을 흠모하던 중 이 일찍이 이 지역을 다스린 적이 있었다는 이유로 마침내 사당을 짓고 그를 제사 지냈다.
旣成 二君過予之家而告之曰 願有述하노라하니라
사당이 완성된 뒤에 섭군聶君임군林君이 내 집을 방문하여 “사당을 지은 경위를 서술한 글을 지어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夫公之赫赫不可盡者 固不繫於祠之有無어니와 蓋人之嚮往之不足者 非祠則無以致其至也
혁혁하여 소멸될 수 없는 의 공적은 사실 사당의 유무有無와 무관한 것이지만, 흠모하는 마음이 충만한 사람은 사당이 아니면 그 간절한 충정을 드러낼 수가 없다.
聞其烈 足以感人이어든 況拜其祠而親炙之者歟
의 장렬한 행동을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는 터에, 하물며 을 모신 사당에 참배하여 직접 신령과 접촉하는 체험을 하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今州縣之政 非法令所及者 世不復議어늘 二君獨能追公之節하고 尊而祠之하여 以風示當世하니
지금 주현州縣에서 하는 정사政事법령法令으로 명시된 것이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더 이상 논의하려 하지 않는데, 섭군聶君임군林君은 유독 의 절의를 추모하고 그를 존경한 나머지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냄으로써 당세의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爲法令之所不及이니 是可謂有志者也로다
법령法令에도 명시되지 않은 일을 행하였으니, 이는 뜻 있는 선비라고 말할 만하다.
唐荊川曰 此文三段이니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이 문장은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第一段敍 第二段議論이요 第三段敍立祠之事
첫 번째 단락은 사실을 서술한 것이고, 두 번째 단락은 논변이고, 세 번째 단락은 사당을 세운 일을 서술한 것이다.
敍事議論處 皆以捍賊忤奸分作兩項이라가 而混成一片하되 絶無痕跡하니 此是可法處라하고
사실을 서술하고 논변을 전개한 부분에서 모두 안노공顔魯公반적叛賊들에게 맞서고 간신의 심기를 거슬렀던 일을 별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다루다가 하나로 합쳤는데도 전혀 가공을 한 흔적이 없으니, 이것이 본받을 만한 부분이다.”
又曰 歐陽公於王彦章之忠則略之하되 而獨言其善出奇하고 曾子固於顔魯公之捍賊則略之하되 而獨言忤奸而不悔하니
또 말하였다. “구양수歐陽脩왕언장王彦章의 충성에 대해서는 대강 기술하고 그가 기지를 잘 발휘했다는 점을 특별히 언급하였으며, 증자고曾子固안노공顔魯公반적叛賊에게 맞섰던 사실에 대해서는 대강 기술하고 간신의 심기를 거스르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점을 특별히 언급하였다.
此是文之微顯闡幽處라하니라
이것이 곧 문장에서 세상 사람들이 잘 아는 점은 대강 넘어가고 잘 모르는 점은 드러내 밝히는 부분이다.”
역주
역주1 撫州顔魯公祠堂記 : 작자 38세 때인 至和 3년(1056)에 쓴 記文이다. 이때는 작자가 벼슬하기 이전으로, 撫州 臨川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글을 부탁한 聶厚載와 林慥는 당시에 각각 撫州의 知州와 通判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들은 唐나라 大曆 3년(768)에 撫州刺史로 부임했던 顔眞卿의 충절을 흠모해왔다. 이 작품에서는 顔眞卿의 생애와 업적, 장렬한 최후를 서술하고 그를 칭송하였으며, 뒷부분에서는 顔眞卿의 사당을 세운 경위를 밝혔다.
역주2 伯夷之淸……孔子之時 : 《孟子》 〈萬章 下〉에 “伯夷는 聖人 중에 淸高한 사람이고, 伊尹은 聖人 중에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고, 柳下惠는 聖人 중에 관대함을 따르는 사람이고, 孔子는 성인 중에 시기상황을 중시하는 사람이다.”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역주3 孔子惡鄙夫不可以事君 而多殺身以成仁者 : 《論語》 〈陽貨〉에 “비열한 자는 어찌 그와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였고, 《論語》 〈衛靈公〉에 “뜻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를 구하여 仁을 해치는 일이 없고 자기 몸을 죽여 仁을 이루는 일이 있다.” 하였는데, 이 두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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