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余嘗按南越할새 南越州郡吏特得威名者 撫而制之하니 無難者
無已則鵰其酋足矣
今之請兵大征者 皆非也
荊民與蠻合爲寇 潭旁數州被其害하니
天子宰相 以潭重鎭 守臣不勝任이라하여 爲改用人하고 又不勝이어늘 復改之하니라
守至上書乞益兵하니 詔與撫兵三百히여 實護以往하니라
希道雅與余接하여 間過余道潭之事한대
余曰 潭山川甲兵如何 食幾何 賊衆寡强弱如何 余不能知
能知書耳 書之載 若潭事多矣
或合數道之兵以數萬하여 絶山谷而進 其勢非不衆且健也 然而卒殲焉者多矣
或單車獨行이나 然而以克者相踵焉이니
顧其義信何如耳
致吾義信하면 雖單車獨行이라도 寇可以爲無事 之類是也
義信不足以致之 雖合數道之兵以數萬이라도 卒殲焉이라
適重寇耳 況致平耶
之類是也
則兵不能致平이라
致平者 在太守身也明矣
前之守者果能此 天子宰相烏用易之리오
必易之 爲前之守者不能此也니라
今往者復曰 乞益兵이라하니 何其與書之云者異耶
予憂潭民之重困也 寇之益張也하노라
往時 潭吏與旁近郡靳力勝賊者 暴骸者 戮降者有之러니
今之往者 將特不爲是而已耶 抑猶不免乎爲是也
天子宰相任之之意其然耶
潭守近侍臣이요 使撫覘潭者 相望하니
爲我諗其賢者曰 今之言古書 往往曰迂라하나 然書之事 乃已試者也
事已試而施諸治 與時人之自用 孰爲得失耶리오하라
愚言倘可以乎
潭之患 今雖細러니 夫豈階於大哉
爲近臣郞吏御史博士者獨得而不思也
希道 固喜事者 因其行 遂次第其語以送之하노라


04. 조굉趙宏을 전송하는 서문
내가 일찍이 남월南越안무按撫했을 때, 남월南越주군리州郡吏로서 유별나게 위세와 명망을 얻은 자를 위무하고 통제하였더니 어려운 것이 없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 우두머리만 쳐내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지금 병력을 요청하여 대규모로 정벌을 감행하는 자들은 모두 틀렸다.
형초荊楚 지방의 백성들이 만인蠻人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담주潭州, 방주旁州 몇 곳이 그 피해를 입었다.
천자天子재상宰相은 요충지인 담주潭州를 태수가 그 직무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여 다른 사람으로 교체했고, 또 그 사람이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자 다시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였다.
태수가 임지에 부임하여 글을 올려 병력을 증원해달라고 청원하자, 조서詔書를 내려 위무慰撫에 투입할 병사 300명을 보내주게 되었는데, 전직殿直으로 있던 천수天水 조군趙君 희도希道가 그 군대를 호위하여 가게 되었다.
희도希道가 평소에 나와 교제하였는데 기회를 틈타 나를 방문하여 담주潭州의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담주潭州의 지리적 여건과 군비軍備 상황은 어떠하고, 식량 사정은 어떠하며, 도적들의 수효와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책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인데, 책에 기재된 내용에는 담주潭州에 관한 일이 많다.
몇 개 의 병력을 수만으로 규합하여 골짜기를 막은 채 진격했을 때 그 형세로 보아 병력이 많고 세력이 강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결국 섬멸당하는 자들이 많은 경우가 있다.
반면에 수레 한 대로 혼자 부임해서도 승리를 거두는 자들도 한둘이 아니다.
이는 다만 난을 평정하러 간 사람들의 신의信義가 어떠하냐에 달렸을 뿐이다.
자신의 신의信義를 전달하기만 한다면 비록 수레 한 대로 혼자 부임한다 해도 반란군들이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으니, 공수龔遂, 장강張綱, 축양祝良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신의信義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면 비록 몇 개 의 병력을 수만으로 규합하더라도 결국 섬멸당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단지 반란군의 기세만 더할 뿐인데 더구나 반란을 평정하는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겠는가.
양민楊旻, 배행립裴行立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그렇다면 군대로는 반란을 평정하는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
반란을 평정하는 임무를 완수하는 것은 태수 자신에게 달린 것이 분명하다.
전임前任 태수들이 정말로 이렇게 할 수 있었다면, 천자와 재상들이 왜 그들을 교체했겠는가.
기어이 그들을 교체한 이유는 전임前任 태수로 있던 자들이 이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태수로 부임해 간 사람도 역시 조정에 병력을 증원해달라고 요청하였으니, 어쩌면 그렇게 책에서 말하는 상황과 다르단 말인가.
나는 담주潭州 백성들이 거듭 곤경에 빠지고 반란군의 세력이 더욱 확장될까 두렵다.
이전에는 담주潭州의 관리와 인근 이 협력하여 반란군을 이긴 자도 있었고, 죽은 적의 시체를 전야에 버리거나 항복한 자를 죽인 자도 있었다.
지금 그곳으로 가는 사람은 앞으로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을지, 아니면 또 이러한 행위를 자행할지는 알 수 없다.
천자와 재상이 그를 임용한 뜻이 과연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던가.
담주潭州태수는 황제를 가까이 모시는 신하이고, 담주潭州를 위무하고 동태를 살펴보는 임무를 맡는 자는 낭이郞吏, 어사御史, 박사博士들이 계속 뒤를 잇고 있다.
그대는 나를 대신하여 그들 가운데 현능한 자에게 당부하기를 “지금 옛 역사서의 내용을 언급하면 일반적으로 오활하다고 말하지만 역사서에 기재된 일들은 이미 시험을 해본 것들이다.
일을 이미 시험하여 정치에 적용해본 경우와 지금 사람들이 제멋대로 시행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라고 하라.
내가 하는 말이 혹시 타당하지 않겠는가.
담주潭州의 우환이 지금은 비록 작다고 하나, 대중大中, 함통咸通 연간에 남방南方의 우환이 극심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우환이 어찌 처음에 작았던 것이 그처럼 커진 것이 아니었던가.
근신近臣, 낭이郞吏, 어사御史, 박사博士가 된 자들은 이 점을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희도希道는 본디 일을 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므로, 그가 떠나는 것을 계기로 삼아 마침내 그에 관한 말을 차례대로 정리하여 그를 전송한다.


역주
역주1 送趙宏序 : 작자 28세 때인 慶曆 6년(1046)에 쓴 送序이다. 慶曆 3년(1043)부터 荊楚 지방인 黃河, 長江 유역의 농민들이 瑤族인 蠻人과 연합하여 宋나라에 반기를 들고 저항하여 폭동이 잇달아 발생했다. 처음에는 조정에서 이들을 강경하게 진압하였으나, 나중에는 이들을 안무하는 회유책으로 선회했다. 한편, 농민폭동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던 趙宏은 작자와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작자는 趙宏에게 무력 사용을 지양하고 백성들을 안무하는 정책을 시행하기를 당부하고 있다.
역주2 殿直天水趙君希道 : 殿直은 황제의 侍從官을 말하고, 天水는 秦州 속현으로 趙宏의 고향이며, 希道는 그의 자이다.
역주3 龔遂張綱祝良 : 龔遂는 西漢 중기의 이름난 循吏(법을 지키고 도리를 따르는 관리)이다. 漢 宣帝 때 渤海郡 일대에 흉년이 들어 민란이 일어나 백성들이 칼을 차고 다니며 약탈을 자행하였다. 龔遂가 그 지역 太守로 부임하여 도적을 체포하지 말 것을 명하고, 백성들이 칼을 가져오면 송아지 한 마리를 살 돈을 주면서 “무엇하러 송아지를 차고 다니는가. 속히 그 칼을 송아지로 바꿔 생업에 종사하라.”라고 한 결과 민심이 안정되었다. 《漢書 循吏傳》 張綱은 東漢 順帝 때의 이름난 直臣이다. 廣陵의 張嬰이 수만 명의 민중을 모아 조정에 반항하면서 10년 동안이나 揚州와 徐州 일대에 출몰하였으나 조정에서 제압하지 못하였다. 張綱이 廣陵太守로 부임하여 군사 10여 명만 대동하고 張嬰의 진영을 찾아가 부드러운 말로 그들의 고통을 동정하고 사리로 일깨우자, 張嬰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그 이튿날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後漢書 張綱傳》 祝良은 張綱과 같은 시대의 인물인데 順帝 때 日南郡 밖의 蠻人이 조정에 반항하자 九眞太守로 부임하여 단독으로 말 한 마리를 타고 蠻人들의 본거지로 들어가 利害의 사리로 일깨우자, 수만 명이 항복하여 그 지역이 다시 평온해졌다. 《後漢書 南蠻西南夷列傳》
역주4 楊旻裴行立 : 모두 唐나라 때의 지방관이다. 唐 德宗 貞元 10년(794)에 廣州, 容州 이남과 邕州, 桂州 서부의 西原蠻이 조정에 반항하여 13개 고을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자, 唐州刺史 楊旻이 容管招討經略使가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진압에 나섰다가 크게 패배하였다. 그리고 元和 11년(816)에 西原蠻이 또 欽州, 橫州, 巖州를 공격하자, 裴行立이 桂管觀察使로 있으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무고한 자를 많이 죽임으로써 인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로 인해 그 이후 100년 가까이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 唐나라의 멸망이 더 빨라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新唐書 西原蠻傳》
역주5 郞吏御史博士 : 郞吏는 尙書省 각 부의 郞中과 員外郞을 말하고, 御史는 御史大夫이며, 博士는 學官인데 宋나라 때 太學, 國子學, 武學, 宗學에 모두 博士를 두어 학생을 가르쳤다.
역주6 大中咸通之間 南方之憂嘗劇矣 : 大中은 唐 宣宗의 연호(847~859)이고, 咸通은 唐 懿宗의 연호(860~873)인데, 전후의 기간은 모두 26년이다. 大中 때 安南經略使 李琢이 황소 한 마리 값을 소금 한 말로 쳐주는 虐政을 자행하는 것에 반발하여 南詔夷人들이 난을 일으켜 오랫동안 조정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咸通 원년(860)에 浙東에서 또 仇甫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와 같은 일들이 黃巢의 반란이 일어나 唐나라가 큰 시련을 겪게 된 원인이 되었다. 《新唐書 南詔傳下》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