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向所著說苑二十篇을 崇文總目云 今存者五篇이요 餘皆亡이라한대 臣從士大夫間得之者 十有三篇이니 與舊爲十有八篇이라
向采傳記百家所載行事之迹하여 以爲此書奏之는 欲以爲法戒라
夫學者之於道에 非知其大略之難也요 知其精微之際 固難矣라
孔子之徒三千에 其顯者七十二人이니 皆高世之材也라
然獨稱
라하고 及回死
에 又以謂
라하며 而回亦稱夫子曰
이라하고 子貢又以謂
라하니 則其精微之際固難知 久矣
라
向之學은 博矣요 其著書及建言은 尤欲有爲於世로되 忘其枉己而爲之者有矣니 何其徇物者多而自爲者少也오
子曰 道之將行也與
도 命也
며 라하니 豈不得之有命哉
아
令向知出此하여 安於行止하여 以彼其志로 能擇其所學하여 以盡乎精微면 則其所至를 未可量也라
然向數困於讒하되 而不改其操하니 與夫患失之者로 異矣라 可謂有志者也로다
注
이 편은 작자의 정신이 녹아든 점이 〈신서목록서新序目錄序〉와 〈전국책목록서戰國策目錄序〉 등 기타 여러 편만 못하다.
유향劉向이 저술한 《설원說苑》 20편을 《숭문총목崇文總目》에서는 “지금 남아 있는 것은 5편이고 나머지는 모두 산일散佚되었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사대부들 사이에서 얻은 것이 13편이니 구본舊本과 합쳐 모두 18편이다.
그 빠지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되 의심나는 것은 그대로 놓아두고 그 편목篇目에 다음과 같이 서문을 쓴다.
유향이 전기傳記와 백가서百家書에 수록된 행사行事의 자취를 채집하여 이 책을 만들고 천자에게 올린 것은 권선징악勸善徵惡의 소재로 삼고자 해서이다.
그러나 그가 취한 것이 가끔 또 이치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배우는 자가 도道에 대하여 그 대략을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그 깊고 미묘한 부분을 아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공자孔子의 문도門徒 3천 명 가운데 드러난 이가 72명이니 모두 세상에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들이다.
그런데 공자孔子는 “안씨顔氏의 아들은 거의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라고 특별히 칭찬하였고, 안회顔回가 죽었을 때에도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가 없다.”고 하였으며, 안회顔回 역시 부자夫子를 일컬어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단단하다.”고 하였고, 자공子貢은 또 “부자夫子께서 성性과 천도天道를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였으니, 그 정밀하고 은미한 부분을 참으로 알기 어려운 지가 오래되었다.
이 때문에 도道를 취사선택할 때 잘못이 없을 수가 없다.
그래서 “배운 뒤에야 부족함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유향劉向의 학문은 넓고 그가 저술한 책과 건의한 말은 무엇보다도 세상에 큰 기여를 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자기의 의견이나 주장은 도외시하고 남이 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는 점이 있으니, 어쩌면 그리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추종하는 것은 많고 자기의 말을 하는 것은 적단 말인가.
옛날의 성현들이 세상에 큰 기여를 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구하는 데에 도道가 있고 얻는 데에 명命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그가 찾아간 나라에서 반드시 그 나라의 정사에 참여하였는데, 자공子貢은 “부자夫子께서 요구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구하는 데에 도道가 있지 않겠는가.
공자孔子가 “도道가 장차 행해지는 것도 명命이며 도道가 장차 폐해지는 것도 명命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얻는 데에 명命이 있지 않겠는가.
만약 유향劉向이 이 길을 따라 행할 줄을 알아서 출처행지出處行止를 운명에 맡기고, 그의 그와 같은 큰 뜻으로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을 선택하여 깊고 미묘한 도리를 터득하였더라면, 그가 도달한 경지는 쉽게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孔子는 “옛날의 배우는 자들은 자신부터 수양하였다.”고 말하였고, 맹자孟子는 “군자君子는 도를 스스로 깨달아 얻으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전후좌우 가까운 곳에서 취할 때 그 근원을 만난다.”고 하였으니, 어찌 자기 이외의 외물에 치중할 것이 있겠는가.
유향劉向의 잘못이 이와 같으니 또한 배우는 자들이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서론敍論에서 이 문제를 드러내어 이 책을 읽는 자들이 제대로 살펴 선택할 줄 알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향劉向은 여러 번 참소에 몰려 곤경에 처하였는데도 그 지조를 바꾸지 않아, 일단 부귀를 얻은 뒤에는 그것을 잃을까 근심하는 자들과는 다르니, 뜻이 있는 이라고 말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