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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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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幅尺自好
熙寧元年冬 廣德軍作新門하고 鼓角樓成하다
太守合文武賓屬以하고
旣而以書走京師하여 屬鞏曰 爲我記之하라하니
鞏辭不能하여 書反覆至五六辭不獲일새
乃爲其文曰
蓋廣德 居吳之西疆故鄣之墟하니
境大壤沃하여 食貨富穰하고 人力有餘
而獄訟赴訴 財貢輸入 以縣附宣하여 道路回阻하니 衆不便利 歷世久之
太宗皇帝在位四年 乃按地圖하여 因縣立軍하여 使得奏事專決하니 體如大邦이라
自是以來 田里辨爭 歲時稅調 始不勤遠하여 人用宜之
而門閎隘庳하고 樓觀弗飾하여 於以納天子之命하여 出令行化하고 朝夕吏民 交通四方하며 覽示賓客 弊在簡陋하여 不中度程이라
治平四年 尙書兵部員外郞知制誥錢公輔 守是邦하여 始因豐年하여 聚材積土하여 將改而新之러니
會尙書駕部郞中朱公壽昌 來繼其任하여
明年政成하여 封內無事하니 乃擇能吏하여 揆時庀徒하여 以畚以築하고 以繩以削하여 門阿是經하고 觀闕是營하니 不督不期로대 役者自勸이라
自冬十月甲子始事하여 至十二月甲子卒功하니라
崇墉崛興하고 複宇相瞰하니 壯不及僭하고 麗不及奢
憲度政理 於是出納하고 士吏賓客 於是馳走 尊施一邦 不失宜稱이라
至於伐鼓鳴角하여는 以警昏昕하고 下漏數刻하여 以節晝夜하니 則又新是 列而棲之로다
邦人士女 易其聽觀 莫不悅喜하여 推美誦勤이라
夫禮有必隆하여 不得而殺하고 政有必擧하여 不得而廢
二公於是 兼而得之하니 宜刻金石以書美實하고 使是邦之人으로 百世之下에도 於二公之德 尙有考也


07. 광덕군廣德軍에 있는 중수重修고각루鼓角樓에 쓴 기문
문장 구성이 나름대로 좋다.
희령熙寧 원년 겨울 광덕군廣德軍 성곽에 새로운 문을 만들고 그 위에 고각루鼓角樓를 완성하였다.
태수가 문무 빈객들을 모아놓고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러고서 편지를 도성으로 부쳐서 나에게 자신을 위해 기문을 지어달다고 부탁하였다.
나는 사양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편지를 대여섯 차례 주고받으며 계속 사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침내 그 문장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대개 광덕廣德 지역은 춘추시대春秋時代 나라의 서쪽 국경으로 옛 왕조 장군鄣郡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관할지역이 크고 땅이 비옥하여 식량과 재화가 풍부하고 인구수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사를 상소하거나 세금을 바치는 일들에, 선주宣州로 소속시킴으로 인해 도로가 구불거리고 험난하여 백성들이 불편한 지가 오래되었다.
태종황제太宗皇帝 재위 4년(979)에 마침내 지도를 놓고 살펴 원래의 을 설립하여 큰 제후국의 체제처럼 조정에 국사를 아뢰고 정사를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부터 이후에 시골 사람들이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해마다 세금을 올릴 적에 비로소 먼 길을 가는 노고를 겪지 않아 사람들이 편안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성곽의 문이 좁고 낮은데다 누각을 수리하지 않아 이곳에서 천자의 명을 받아들여 그것을 반포하고 교화를 행하거나 아침저녁으로 관리와 백성들이 사방으로 왕래할 때, 그리고 빈객들에게 보여주기에 너무나 간소하고 누추하여 법도에 들어맞지 않았다.
치평治平(송 영종宋 英宗) 4년(1067)에 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 지제고知制誥 전공錢公 가 이 지방 수령으로 부임하여 때마침 그해에 풍년이 들었기에 비로소 재목을 모으고 흙을 쌓아 장차 고쳐서 새롭게 하려 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상서가부랑중尙書駕部郞中 주공朱公 수창壽昌이 그 후임으로 오게 되었다.
이듬해에 정사가 안정되고 관할지역에 별다른 일이 없자 마침내 유능한 관리를 택해 농한기를 헤아려 인부를 부려서 삼태기로 흙을 퍼 성을 쌓고 먹줄로 마름질하여 목재를 깎아서 창문과 대들보를 준비하고 누각을 지었는데, 감독하지 않고 기한을 두지 않았는데도 일꾼들이 스스로 분발하였다.
겨울 10월 갑자일에 일을 시작하여 12월 갑자일에 공사를 마쳤다.
높은 담이 솟아 일어나고 겹처마는 서로 굽어보는데 장엄하되 참람함에 이르지 않고 아름답되 사치함에 이르지 않았다.
제도와 정사가 이곳을 통해 나가고 들어오며 관리와 빈객들이 이곳을 통해 달려 다님으로써 이 한 고을이 안정되어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북을 치고 호각號角을 울려 황혼과 새벽을 알리고, 물시계의 물로 시간을 계산하여 밤낮을 구분하는 일에 있어서는 또 이것에 관한 네 가지 기물을 새롭게 만들어 제자리에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이 지역의 남녀노소가 눈과 귀가 새로워짐에 모두들 즐거워하며 이 일을 칭송하였다.
무릇 예는 반드시 성대히 갖춰야 하지 그 규모를 줄여서는 안 되고, 정사는 반드시 치적을 이뤄야 하지 도외시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전공錢公, 주공朱公)은 이 점에 대하여 다 제대로 갖추었으니 마땅히 그 전말을 금석金石에 새겨 아름다운 업적을 기록함으로써, 이 지역 사람들로 하여금 백세 뒤에도 두 의 덕을 상고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역주
역주1 廣德軍重修鼓角樓記 : 작자의 나이 49세 때인 宋 神宗 熙寧 원년(1068)에 지은 기문이다. 廣德軍은 오늘날의 安徽 廣德이다. 軍은 宋代의 행정구역명으로 州, 府, 監에 상당한다. 鼓角樓는 廣德軍의 성곽 위의 누대로 북을 치거나 號角을 불어서 주변의 백성과 군대에 시간을 알리고 명령과 신호를 보내기 위한 용도였다. 태수 錢輔와 후임자인 朱壽昌에 의해 중수되어 그 노고를 기리는 것이 이 기문의 목적이다.
역주2 : 落成祭禮를 말한다.
역주3 四器 : 鼓, 角, 漏壺, 計刻器를 지칭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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