至漢하여 六藝出於秦火之餘하고 士學於百家之後하여
言道德者는 矜高遠而遺世用이요 語政理者는 務卑近而非師古라
惟知經者爲善矣로되 又爭爲章句訓詁之學하여 以其私見으로 妄臆穿鑿爲說이라
當是時하여 能明先王之道者는 揚雄而已로되 而雄之書를 世未知好也라
然士之出於其時者는 皆勇於自立하고 無苟簡之心하여
至於廢錮殺戮
이로되 而其操愈厲者 相望於先後
하니 故雖有
이라도 猶低徊沒世
하여 不敢遂其簒奪
하니라
以迄於今히 士乃有特起於千載之外하여 明先王之道하여 以寤後之學者라
故習其說者는 論道德之旨하여 而知應務之非近하며 議政理之體하여 而知法古之非迂라
其於貧富貴賤之地에는 則養廉遠恥之意少하고 而偸合苟得之行多하니
夫所聞或淺이로되 而其義甚高와 與所知有餘로되 而其守不足者는 其故何哉오
至於循習之深하여는 則得於心者는 亦不自知其至也라
由是觀之컨대 則上所好면 下必有甚者焉이 豈非信歟아
令漢與今에 有敎化開導之方하며 有庠序養成之法이어든 則士於學行에 豈有彼此之偏과 先後之過乎리오
夫大學之道는 將欲誠意正心修身하여 以治其國家天下로되 而必本於先致其知하니
當慶曆之初하여 詔天下立學하되 而筠獨不能應詔하니 州之士以爲病이러니
始告于知州事尙書都官郞中董君儀하니 董君乃與通判州事國子博士鄭君蒨으로 相州之東南하고 得亢爽之地하여 築宮於其上하니라
齋祭之室과 誦講之堂과 休息之廬로 至於庖湢庫廐히 各以序爲라
使筠之士로 相與升降乎其中하여 講先王之遺文하여 以致其知하여 其賢者는 超然自信而獨立하고 其中材는 勉焉以待上之敎化하리니
則是宮之作이 非獨使夫來者玩思於空言하여 以干世取祿而已라
注
〈의황현학기宜黃縣學記〉에 나타난 깊은 소견보다는 못하지만, 문자를 조직하여 의사意思를 서술한 것은 작자가 평소에 지닌 취지에 부합된다.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선왕先王이 제정한 전장제도典章制度가 사라져버렸다.
한漢나라 때에 이르러 육경六經이 진시황이 서적을 불태워버린 속에서 발굴되어 나왔고, 학자들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익히던 끝에 비로소 육경六經을 접촉하였다.
도덕道德을 담론하는 도가道家는 고상한 철학만 힘쓸 뿐 현실에 필요한 학문은 고려하지 않았으며, 정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소한 일에만 힘쓸 뿐 옛 선왕의 도를 본받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형명刑名을 강구하는 법가法家와 권모술수를 강구하는 병가兵家는 또 폭력과 속임수를 부리는 데에만 익숙하였다.
오로지 육경六經을 아는 사람만이 가장 나은 편이었으나, 이들은 또 너나 할 것 없이 장구章句, 훈고학訓詁學을 일삼아 자신의 사견私見으로 억측하고 천착하여 일설一說을 만드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왕先王이 제정한 전장제도는 빛을 보지 못하였고,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구습舊習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이러한 시대에 선왕先王의 도道를 밝힐 수 있었던 사람은 양웅揚雄뿐이었으나, 세상 사람들은 양웅揚雄의 저서를 선호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 시대에 출현한 학자들은 모두 독자적인 문호를 정립하는 데에 용감하여 구차하게 영합하거나 방자한 마음이 없었다.
그들이 자신의 진퇴거취進退去就를 결정할 때에는 반드시 예의禮義를 기준으로 삼았다.
한漢나라가 이미 쇠약해진 뒤에도 일련의 사대부들은 강포한 자에게 완강하게 맞서고 굽히지 않아, 금고禁錮에 처해지거나 죽임을 당하더라도 그들의 절개는 더욱 단단하여 앞선 자가 넘어지면 다음 사람이 그 뒤를 이어가며 자연스레 절의를 따랐다.
때문에 비록 법을 따르지 않고 역심逆心을 품은 간신奸臣이 있었지만 망설이다가 세상을 떠났고, 감히 자신이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야욕을 실현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한말漢末부터 위진魏晉 이후까지 그 기간 동안 풍속風俗이 퇴폐하고 인재人材가 부족한 지 오래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글을 읽은 사람 중에 비로소 유학儒學의 도가 끊어진 천 년 후에 특출한 자들이 등장하여 선왕先王의 도道를 천명하여 후배 학자들을 일깨웠다.
세상 사람들은 비록 그들의 깊은 뜻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대부분 그들의 의견을 좋아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의 학설을 익힌 사람들은 도덕道德의 의미를 강론하여 시무時務를 다루는 것이 천근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정치政治의 요체를 의논하여 옛 선왕先王의 도道를 본받는 것이 오활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에 미혹되지 않고 훈고학訓詁學에 가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아는 것이 이와 같이 분명하였으니, 이는 한대漢代의 학자가 미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원칙을 따라 지키는 자가 반드시 많은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즐겁고 평이하며 돈후하고 질박한 습속은 쇠퇴하고, 술수를 부리고 기만하며 야박하고 악렬한 습속이 우세해졌다.
공명과 부귀를 누리는 입장에 있는 자들은 청렴결백을 견지하거나 치욕을 멀리하려는 의지가 줄어들고, 구차하게 영합하거나 정당하지 않게 이익을 탐하는 행위가 늘어났다.
이는 사회의 도덕규범이 아름답기가 한대漢代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이다.
선왕先王의 도道에 대해 들은 것은 보잘것없어도 그 의리가 매우 높은 경우가 있고, 아는 것은 많아도 그 지조가 부족한 경우가 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한대漢代의 인재는 향리에서 찰거察擧의 방법을 거쳐 선발되기 때문에 자기의 도덕을 수양하는 데에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성心性을 도야하고 연마하는 기간이 오래되면 의義를 위해 단호하게 몸을 바치는데, 이는 억지로 노력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날 글을 읽은 선비는 문장으로 인재를 선발하기 때문에 지식을 배우는 데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을 익히고 배운 정도가 깊은 수준에 도달하면 마음으로 환히 터득하게 되는데, 이는 자신도 그 높은 경지를 짐작하지 못한다.
이를 통해서 살펴보건대, 윗사람이 선호하는 것이 있으면 아랫사람 중에는 반드시 더 심하게 선호하는 자가 있다는 말이 어찌 맞지 않겠는가.
가령 한대漢代와 현대에 교화를 통해 사람들을 계도하는 방법과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육성하는 제도가 제대로 되어 있다면, 인재들이 학문과 행실에 있어서 어떻게 어느 하나에 편중되는 현상과 어느 쪽을 우선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잘못이 있겠는가.
《대학》에서 가르치는 도리는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의 과정을 거쳐 그 국가와 천하를 잘 다스리려는 것이며, 이는 반드시 먼저 자신의 지식을 극도로 넓히는 데에 근본을 둔다.
이렇게 보면 지식이라는 것은 본디 선善의 시발점이면서 사람들이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오늘날 글을 읽은 자는 사람들이 도달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이미 거의 성취하였다.
그렇다면 위에서 도덕으로 교화를 시행하는 것이 이때보다 쉬운 때는 없으니, 다만 그들을 어떤 방법으로 계도하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다.
균주筠州는 장강長江 서쪽에 위치해 있어 이 지방은 매우 후미진 곳이다.
경력慶曆(인종仁宗의 연호) 초년에 전국 각지에 학교를 세우라는 조령詔令이 내려졌으나, 균주筠州만은 그 조령詔令의 규정대로 집행하지 못하여 균주筠州의 선비들이 이를 문제점으로 여겼다.
그렇게 지금 치평治平(영종英宗의 연호) 3년(1066)까지 왔는데 그동안 23년이 흘러갔다.
균주筠州 선비들이 이제 비로소 지주사知州事 상서도관낭중尙書都官郞中 동군董君 의儀에게 이 사실을 고하자, 동군董君이 마침내 통판주사通判州事 국자박사國子博士 정군鄭君 천蒨과 함께 균주筠州의 동남쪽에 부지를 물색하던 끝에 높고 앞이 탁 트인 땅을 찾아 그 위에 학궁學宮을 건축하였다.
재계하고 제사를 지내는 방, 글을 읽고 강론하는 집,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는 집에서부터 주방, 욕실, 차고車庫, 마사馬舍에 이르기까지 각각 차례차례 만들었다.
공사를 그해 봄부터 시작하여 8월 15일에 준공하였다.
이윽고 학교로 와서 배우는 사람들이 늘 수십, 수백 명에 이르렀다.
동군董君과 정군鄭君이 도성으로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기문記文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내 생각에, 동군董君과 정군鄭君은 정사政事에 있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안다고 할 수 있다.
균주筠州의 선비들로 하여금 서로 함께 균주筠州의 학궁學宮에 다니면서 선왕先王이 남긴 경전經典을 강독하여 자신의 지식을 극도로 넓히게 함으로써, 뛰어난 선비는 월등하게 자신감을 갖고 독자적인 체계를 세우게 하고, 중등의 자질을 가진 자는 노력하여 윗사람의 교육과 감화를 받게 하였다.
그렇다면 균주筠州의 학궁學宮을 세운 것은, 여기로 찾아오는 학생이 책 속의 기재된 공허한 담론만 연구하여 이것을 이용해 세속에 영합하고 작록爵祿이나 취하고 말지는 않게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내가 들은 일련의 정황으로 이 기문記文을 지어주어 가지고 돌아가서 비석에 새기게 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