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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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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以詩文相感慨
王平甫旣沒 其家集其遺文爲百卷하여 屬予序
平甫 自少已傑然하여 以才高見於世
爲文 思若決河하고 語出驚人하여 一時爭傳誦之 其學問尤敏而資之以不倦하여 至晩愈篤하고
博覽强記하여 於書無所不通하고 其明於是非得失之理爲尤詳이라
其文閎富典重하고 其詩博而深矣
自周衰 先王之遺文旣喪이라
漢興 文學猶爲近古러니 及其衰하여 而陵夷盡矣 至唐久之 而能言之士始幾於漢이나 及其衰하여 而遂泯泯矣
宋受命百有餘年 天下文章復侔於漢唐之盛이라
蓋自周衰 至今千有餘歲 濱於泯滅하니 能自拔起以追於古者 此三世而已 各於其盛時 士之能以特見於世者 率常不過三數人하니 其世之不數 其人之難得 如此하니라
平甫之文 能特見於世者也 世皆謂平甫之詩宜爲樂歌하여 薦之郊廟 其文宜爲典冊하여 施諸朝廷이라하되 而不得用於世
然推其實하면 千歲之日 不爲不多 焦心思於翰墨之間者 不爲不衆이며 在富貴之位者 未嘗一日而無其人어늘 彼皆湮沒而無傳하고 或播其醜於後어니와
平甫乃躬難得之資하고 負特見之能하여 自立於不朽하니 雖不得其志 然其文之可貴 人亦莫得而揜也
則平甫之求於內 亦奚憾乎
古今作者 或能文不必工於詩 하고 或長於詩不必有文이어늘 平甫獨兼得之
其於詩尤自喜하여 其憂喜哀樂 感激怨懟之情 一於詩見之 故詩尤多也
平甫居家孝友하고 爲人質直簡易하여 遇人豁然推心腹하여 不爲毫髮髮礙 與人交 於恩意尤篤也
其死之日 天下識與不識 皆聞而哀之하니라
其州里世次歷官行事 將有待於識平甫之葬者
故不著於此云하니라
唐荊川曰 文一滾說하고 不立間架라하니라


07. 《왕평보문집王平甫文集》에 쓴 서문
으로 인해 감탄하였다.
왕평보王平甫가 죽은 뒤 그의 집안사람이 평보平甫유문遺文을 모아 100권을 만들고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평보平甫는 어릴 때부터 이미 걸출하여 높은 재주로 세상에 알려졌다.
문장을 지을 적에 생각은 마치 강둑이 터진 듯 막힘이 없었고 말을 꺼내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한때의 사람들이 다투어 그의 글을 전하고 읽었으며, 무엇보다도 학문에 힘써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만년에 이르러 더욱 독실히 하였다.
서적을 많이 보고 잘 기억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글이 없었고, 시비是非득실得失의 이치를 밝히는 데에 있어서는 더욱 치밀하였다.
그의 은 풍부하고 전중典重하였으며 그의 는 범위가 넓고 심오하였다.
나라가 쇠한 뒤로 선왕先王유문遺文이 이미 산실되었다.
그러나 나라가 흥성하자 문학文學이 여전히 고인古人에 근접하였었는데 나라가 쇠함에 미쳐 완전히 쇠퇴하였고, 나라에 이르러 시간이 오래되자 논변을 잘하는 선비가 비로소 나라에 가까워지기 시작하였으나 나라가 쇠함에 미쳐 마침내 모두 민멸되었으며,
나라가 을 받은 후 백여 년 만에 천하의 문장이 다시 , 의 융성하던 때와 같게 되었다.
나라가 쇠한 뒤로 지금에 이르는 천여 년 동안 사문斯文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는데, 스스로 일어나 옛것을 추구한 시대는 이 , , 세 시대일 뿐이었고, 이 세 시대의 융성하던 때에 특별히 뛰어나 세상에 알려진 선비는 항상 몇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러한 시대가 자주 없고 그러한 사람을 얻기 어렵기가 이와 같다.
평보平甫의 문장은 특별히 뛰어나 세상에 알려졌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평보平甫시가詩歌는 마땅히 제사 때 사용하는 악장樂章으로 만들어 교묘郊廟에 올려야 하고, 그의 문장은 마땅히 국가의 중요한 문서로 만들어 조정에서 사용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나 당시에 쓰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실을 따져보면 천 년의 세월이 길지 않은 것이 아니고, 문장에 마음을 쓴 사람이 적은 것이 아니며, 부귀한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 단 하루도 없었던 적이 없었지만, 저들은 모두 매몰되어 전하지 않거나 혹 후세에 추악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평보平甫는 얻기 어려운 자질을 몸소 지니고 세상에 알려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서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지위에 스스로 섰으니, 비록 그 뜻을 펼치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문장의 귀한 가치는 사람들이 또한 엄폐해버릴 수 없다.
그러니 평보平甫가 추구한 내면의 아름다움에 어찌 유감이 있겠는가.
고금의 작자는 에 능한 사람이 반드시 를 잘하는 것은 아니고 를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을 잘하지는 못하는데 평보平甫는 홀로 두 가지를 모두 잘하였다.
그 중에서도 를 더욱 좋아하여 희로애락喜怒哀樂과 감격, 원망의 감정을 한결같이 에 나타냈으므로 가 더욱 많은 것이다.
평보平甫는 집에 있을 때에는 효도하고 우애하였으며, 사람됨이 질박하고 솔직하고 소탈하여 사람을 만나면 거리낌 없이 마음을 열고 대하여 조금도 의심이나 벽을 두지 않았으며,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특별히 은혜를 중시하였다.
그가 죽던 날에 천하 사람들이 그와 면식이 있건 없건 관계없이 모두 그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였다.
그의 관적貫籍, 세차世次, 관직, 업적에 관해서는 평보平甫묘갈명墓碣銘에 기록할 사람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드러내지 않는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문장을 하나의 형식으로 거침없이 써 내려가고 일반적인 틀을 세우지 않았다.”


역주
역주1 王平甫文集序 : 元豐 원년(1078)에 쓴 글이다. 이때 작자의 나이는 60세였으며 知福州로 있었다. 이해 10월에 조정으로 불려 들어갔으나 다시 知明州로 나갔다. 平甫는 王安石의 아우인 王安國(1028~1074)의 자이다. 어릴 적에 총명하여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40세 때인 1068년에 韓絳 등이 그의 재주와 행실을 천거하여 進士及第가 내려진 뒤에 西京國子監敎授, 著作佐郞, 秘閣校理 등을 역임하였는데, 형 王安石과 정치견해가 맞지 않아 新法을 반대하였으며 실권자인 呂惠卿의 미움을 사 조정에서 쫓겨났다. 작자는 이 글에서 王安國의 재주와 학식, 詩文의 성취를 높이 평가하고 아울러 周, 秦 이후 인재를 얻기 어려웠던 정황을 다각도로 논한 뒤에 그가 세상에 쓰이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였다.
역주2 斯文 : 禮樂制度를 말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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