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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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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6. 〈위정공전魏鄭公傳〉 뒤에 쓰다
借魏鄭公하여 以諷世之焚藁者之非하니 而議論甚圓暢可誦이라
위정공魏鄭公의 사실을 빌어 세상에 역사사실을 기록한 원고를 불태우는 일이 잘못임을 비판하였는데, 논변이 매우 통창하여 읽을 만하다.
予觀太宗常屈已하여 以從群臣之議하니 而魏鄭公之徒 喜遭其時하고 感知己之遇하여 事之大小 無不諫諍하니 雖其忠誠自至 亦得君以然也
내가 보건대, 태종太宗이 항상 자기 뜻을 굽혀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따르자, 위정공魏鄭公의 무리가 그 시대를 만난 것을 기뻐하고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 것을 감사히 여겨서 크고 작은 일마다 모두 간쟁하였으니, 비록 그들의 충성이 본디 지극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제대로 된 군주를 만나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則思唐之所以治 太宗之所以稱賢主 而前世之君不及者 其淵源 皆出於此也 能知其有此者 以其書存也니라
생각건대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태종太宗이 어진 군주로 칭송되어 전대의 군주들이 그에 미치지 못했던 이유는 그 근원이 모두 여기에서 나왔으니, 이러한 사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그에 관한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及觀鄭公 以諫諍事付史官할새 而太宗怒之하여 하여 失終始之義하여는 則未嘗不反覆嗟惜하여 恨其不思하고 而益知鄭公之賢焉이라
정공鄭公이 그가 간쟁했던 일을 사관史官에게 넘겼을 때 태종太宗이 노하여 그에게 은례恩禮를 박하게 함으로써, 의리가 시종여일하지 못한 것을 보면서 나는 거듭 탄식하고 안타까워하며 그가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고 정공鄭公이 어질다는 것을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夫君之使臣 與臣之事君者何 大公至正之道而已矣
군주가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것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공명정대한 도를 따르면 그뿐이다.
大公至正之道 非滅人言以掩己過 取小亮以私其君이니 此其不可者也
공명정대한 도는 남의 말을 무시하여 자기의 잘못을 감추거나 소소한 작은 겸양을 취해 군주에게 아부하는 것이 아니니, 이것은 매우 옳지 않은 일이다.
又有甚不可者하니 夫以諫諍爲當掩이라
이보다 더 옳지 않은 일이 있으니, 간쟁을 당연히 숨겨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以諫諍爲非美也이니 則後世誰復當諫諍乎리오
이는 간쟁을 좋지 않게 여기는 것이니 그렇다면 후세에 누가 다시 간쟁하겠는가.
況前代之君 有納諫之美어늘 而後世不見하니 則非惟失一時之公이요 又將使後世之君으로 謂前代無諫諍之事 啓其怠且忌矣
게다가 전대의 군주가 간쟁을 받아들이는 미덕이 있었던 것을 후세의 군주는 알지 못하니, 이는 다만 한 시대의 공정함을 그르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장차 후세의 군주로 하여금 전대에는 간쟁하는 일이 없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그 게으름과 시기심을 열어주는 것이다.
太宗末年 群下旣知此意而不言하여 漸不知天下之得失하고 하니 未嘗知其悔之萌芽 出於此也
태종太宗 말년에 여러 신하들이 이러한 뜻을 알고도 말하지 않아서 군주가 점차 천하의 득실을 알지 못하게 되고 요동遼東의 패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공鄭公이 세상에 없는 것을 한탄하였는데, 그 회한의 싹이 여기에서 나왔다는 것은 몰랐다.
夫伊尹周公 何如人也
이윤伊尹주공周公은 어떤 사람인가?
伊尹周公之諫切其君者 其言至深하고 而其事至迫하니 存之於書하여 未嘗掩焉이라
이윤伊尹주공周公이 그 군주에게 간절히 간쟁한 것은 그 말이 매우 심각하고 그 일이 매우 급박하였는데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서 감춘 적이 없었다.
至今稱太甲成王爲賢君하고 而伊尹周公爲良相者 以其書可見也
지금까지도 태갑太甲성왕成王을 어진 군주로 칭송하고 이윤伊尹주공周公을 훌륭한 재상으로 여기는 것은 그 기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令當時削而棄之하여 成區區之小讓이면 則後世何所據依而諫하며 又何以知其賢且良與
가령 당시에 그 기록을 삭제해서 없애버려 섬기는 군주에 대한 소소한 작은 겸양만을 보전했더라면 후세 사람들이 무엇에 근거하여 간쟁하겠으며, 또한 무슨 수로 그들이 어질고 훌륭했다는 것을 알겠는가.
桀紂幽厲始皇之亡 則其臣之諫詞 無見焉하니 非其史之遺 乃天下不敢言而然也니라
걸왕桀王, 주왕紂王, 유왕幽王, 려왕厲王, 진시황秦始皇이 망할 무렵에는 그 신하들의 간언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역사기록에서 빠뜨린 것이 아니라 곧 천하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則諫諍之無傳 乃此數君之所以益暴其惡於後世而已矣
그러한즉 간쟁한 사실이 전하지 않는 것은 곧 이 몇몇 군주들이 후세에 자신들의 악함을 더욱 드러내게 된 까닭일 뿐이다.
或曰 春秋之法 爲尊親賢者諱하니 與此戾矣라하니 夫春秋之所以諱者 惡也 納諫諍 豈惡乎리오
혹자는 “춘추필법은 존자尊者, 친자親者, 현자賢者에 대해서는 숨겨주는 바가 있으니, 이것과는 어긋난다.”라고 말하지만, 춘추필법에 숨겨주는 것은 이니, 간쟁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찌 이겠는가.
然則焚藁者 非歟아하니 曰 焚藁者 誰歟
“그렇다면 상소문 초고를 불태우는 것은 잘못인가?”라고 말하는데, 초고를 불태우는 자는 누구인가?
非伊尹周公爲之也 近世取區區之小亮者爲之耳 其事又未是也
이윤伊尹주공周公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고 근세에 소소한 작은 겸양을 취하는 자가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니, 그 일은 더욱 옳지 않다.
何則 以焚其藁 爲掩君之過하여 而使後世傳之하니 則是 使後世不見藁之是非하여 而必其過常在於君하고 美常在於己也
어째서인가? 그 초고를 태움으로써 군주의 과실을 감춘 채 그대로 후세에 전하게 하니, 이는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초고의 잘잘못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과실은 언제나 군주에게 있으며 미덕은 언제나 자기에게 있게끔 하였다.
豈愛其君之謂歟
이것이 어찌 그 군주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其在正邪 未可知也하니 而焚之而惑後世 庸詎知非謀己之奸計乎리오
공광孔光이 그 초고에 적힌 내용을 없애버림으로써 그의 잘잘못을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초고를 불태워버려 후세 사람들을 미혹시킨 것이 어찌 일신의 안녕을 도모한 간교한 계책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겠는가.
或曰 造辟而言하고 詭辭而出하니 異乎此라하니 曰此 非聖人之所曾言也
혹자가 “군주를 알현하면 말씀드리고, 나와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실을 고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경우와는 다르다.”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성인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
今萬一有是理라도 亦謂君臣之間議論之際 不欲漏其言於一時之人耳 豈杜其告萬世也리오
지금 만일 이러한 이치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군신간에 의논하는 사이에 당대 사람들에게 그 말을 누설하려 하지 않음을 말한 것일 뿐이지, 어찌 만세에 일러주는 길까지 막자는 것이겠는가.
以誠信待己而事其君하여 而不欺乎萬世者 鄭公也 益知其賢云이라
아, 진실한 몸가짐으로 그 군주를 섬겨 만세를 속이지 않는 이는 정공鄭公이니, 그가 어질다는 것을 더욱 잘 알겠다.
豈非然哉 豈非然哉
어찌 그렇지 않은가, 어찌 그렇지 않은가.
역주
역주1 書魏鄭公傳後 : 魏鄭公은 唐 太宗 때의 명재상 魏徵(580~643)으로, 鄭公은 그의 봉호이다. 그가 太宗을 섬기는 동안 크고 작은 국사에 관해 200여 차례를 간하였고 太宗도 대부분 받아들임으로써 이른바 貞觀之治를 이룩하여 군신관계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太宗은 魏徵이 그동안 간쟁한 사실을 史官에게 넘겼을 때 절대적인 군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매우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작자가 이 점에 착안하여 후세의 군주들이 신하들이 간했던 내용을 역사서에서 삭제하고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에 대해 그 잘못을 비판하면서, 군주와 신하는 마땅히 大公至正한 도로 준칙을 삼아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역주2 薄其恩禮 : 魏徵이 太宗에게 간쟁할 때 주고받았던 대화를 史官인 褚遂良에게 보여주었다. 太宗이 그 사실을 알고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여 衡山公主를 魏徵의 맏아들 魏叔玉에 시집보내려 했던 계획을 취소하는 등 예우가 소홀해졌다. 《新唐書 魏徵列傳》
역주3 至於遼東之敗 而始恨鄭公不在世 : 貞觀 19년(645) 6월에 唐 太宗이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遼東까지 왔으나 安市城(지금의 遼東 海城縣 남쪽)의 저항으로 9월까지 머물러 있던 중 군사와 말들이 태반이 죽고 군량도 바닥나 결국 실패하고 돌아갔다. 이때 크게 후회하며 말하기를 “魏徵이 만약 살아 있다면 내가 이곳으로 오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 하고, 사람을 보내 魏徵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주고 그의 처자식을 불러 위문하고 예물을 하사하였다. 《新唐書 魏徵傳》
역주4 孔光之去其藁之所言 : 孔光(B.C. 65~A.D. 5)은 孔子의 14대손이다. 漢 哀帝 때 승상을 지냈는데 국사를 논하는 상소문을 올린 뒤에 신하로서 군주의 허물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하여 그 초고를 삭제하거나 수정하였다. 이처럼 군주의 의중을 배려한 방식으로 18년간 요직을 보전하였다. 《漢書 孔光列傳》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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