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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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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5. 한소문韓昭文에게 산릉山陵을 논하여 올린 글
論葬禮甚透하니 當與劉向昌陵疏參看이라
장례葬禮를 논함이 매우 투철하며, 마땅히 유향劉向의 〈창릉소昌陵疏〉와 참작하여 보아야 한다.
昭文相公執事 洵本布衣書生으로 才無所長이나 相公不察而辱收之하시고 使與百執事之末하여 平居思所以仰報盛德이나 而不獲其所니이다
소문상공昭文相公 집사께. 저는 본래 포의布衣서생書生으로 재주가 뛰어난 것도 없는데 상공相公께서 살피지도 않으시고 욕되이 거두어주시어 여러 집사들의 끝에 함께하도록 해주셨으며, 평상시 우러러 성대한 덕을 갚을 것을 생각하여 보았으나 마땅한 것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今者 先帝新棄萬國하시고 天子始親政事하사 當海內傾耳側目之秋 而相公實爲社稷柱石莫先之臣하사 有百世不磨之功이라
지금 선제先帝께서는 막 만국萬國을 버리고 승하하셨고, 새 천자天子께서 비로소 친히 정사政事를 돌보시어 해내海內에서 〈새 정치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고 눈길을 모을 때를 당하여, 상공相公께서는 실로 사직社稷주석柱石을 놓는 데 다른 신하들보다 앞장서시어 백세百世토록 닳지 않을 공을 세우셨습니다.
伏惟相公 將何以處之리오
엎드려 생각건대 상공相公께서는 장차 어떻게 처신하시렵니까?
古者 天子卽位 天下之政 必有所不及安席而先行之者
옛날에는 천자天子즉위卽位하면 천하天下의 정치에는 반드시 자리에 편안히 앉을 겨를 없이 먼저 행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대개 한 소제漢 昭帝즉위卽位하자 백 가지 요역徭役을 그만두게 하고 천하와 더불어 다시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였습니다.
其爲天子曾未逾月 而恩澤下布於海內
그러므로 천자가 된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은택恩澤이 아래로 해내海內에 널리 퍼졌습니다.
竊惟當今之事天下之所謂最急 而天子之所宜先行者 輒敢以告於左右하노라
가만히 생각건대 당금當今의 일로 천하天下의 이른바 가장 시급한 것과 천자天子께서 마땅히 먼저 행하여야 할 것을 문득 감히 상공께 아뢰겠습니다.
竊見先帝 以儉德臨天下하사 在位四十餘年 而宮室無所增加하고 幃薄器皿弊陋而不易하사 天下稱頌 以爲之所不若이라
가만히 보건대 선제先帝께서는 검소儉素으로 천하에 임하시어 재위在位 40여 년간 궁실宮室유관游觀증가增加된 것이 없었으며, 휘장과 발, 기명器皿이 해지고 누추해져도 바꾸지 않으시어 천하天下에서 칭송稱頌하여 문제文帝경제景帝가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今一旦奄棄臣下하사 而有司迺欲以末世葬送無益之費 侵削先帝休息長養之民하여 掇取厚葬之名而遺之하여 以累其盛明이라
이제 하루아침에 문득 신하臣下들을 버리셨는데 유사有司는 이에 말세末世 장례葬禮의 무익한 비용으로 선제께서 쉬게 하여 오래 기른 백성을 침탈하고 깎아 성대한 장례를 치렀다는 명성名聲을 가져다주어 그 성명盛明에 누를 끼치려 하고 있습니다.
洵以爲 當今之議 莫若薄葬이라
그러므로 저는 당금의 의논으로 간소簡素한 장례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듣건대 지난번 계유년癸酉年사면赦免을 반포하는 글이 이미 나가자, 군현郡縣에서는 병사兵士들에게 상을 줄 방법이 없어 으레 모두 백성들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民之有錢者 皆莫肯自輸하니 於是 有威之以刀劒하고 驅之以笞箠하여 爲國結怨 僅而得之者
백성 가운데 돈 있는 자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내어놓지 않으려 하자, 이에 도검刀劒으로 그들을 으르고 매와 채찍으로 그들을 몰아서, 나라에 원한 맺히는 것만 겨우 얻은 것입니다.
小民無知하여 不知與國同憂하며 方且狼顧而不寧이어늘 而山陵一切 又以復下하면 計今不過秋冬之間 海內必將騷然하여 有不自聊賴之人이라
소민小民들은 무지無知하여 나라와 더불어 근심을 함께할 줄을 모르며, 바야흐로 또한 이리가 두리번거리듯 편안치 못한데, 산릉山陵일체一切의 일정한 분담액을 다시 부과한다면, 지금을 헤아려보건대 가을과 겨울 사이를 지나지 않아 해내海內는 반드시 시끌벅적하게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竊惟先帝平昔之所以愛惜百姓者 如此其深하고 而其所以檢身節儉者 如此其至也 推其平生之心하여 而計其旣歿之意 則其不欲以山陵重困天下 亦已明矣
가만히 선제先帝께서 평소에 백성을 사랑하심이 이와 같이 깊고, 몸을 검소儉素하게 하고 절검節儉한 것이 이와 같이 지극함을 생각건대, 그 평소의 마음을 미루어보아 이미 돌아가신 뒤에 그 뜻을 헤아린다면, 산릉의 문제로 천하를 거듭 곤란하게 하려고 하지 않으실 것임이 또한 이미 명백합니다.
而臣下乃獨爲此過當逾禮之費 以拂戾其平生之意 竊所不取也
그런데 신하臣下들은 이에 유독 이렇게 적절한 수준을 넘고 를 뛰어넘는 비용 때문에 그 평소의 뜻을 거스르니, 취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且使今府庫之中 財用有餘하고 一物不取於民하고 盡公力而爲之하여 以稱遂臣子不忍之心이라도 猶且이온
또한 지금 설령 부고府庫재용財用이 넉넉하고 한 가지도 백성들에게 취하지 않고서 공력公力을 다하여 그것을 해서 차마 그만둘 수 없는 신하의 마음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또한 성인聖人의 조롱을 받을 것입니다.
況夫空虛無有하여 一金以上 非取於民則不獲하되 而冒行不顧하고 以徇近世失中之禮하니 亦已惑矣로라
하물며 텅 비어 아무것도 없어 일금一金 이상以上을 백성들에게서 취하지 않으면 얻지를 못하는데도, 경솔하게 일을 행하여 돌아보지 않고 근세의 중도를 벗어난 예를 따르니, 또한 이미 의혹스럽습니다.
이나 議者必將以爲 古者 이니 以天下之大 而不足於先帝之葬이면 於人情有所不順이라하나
그러나 논자論者들은 반드시 생각하기를 ‘옛날에 군자君子천하天下 때문에 그 어버이에게 검소儉素하게 하지 않았으니, 천하天下의 큼으로써 선제先帝장례葬禮에 부족함이 있으면 인정人情에 순응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 합니다.
洵亦以爲不然하니
그러나 저는 또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使今儉葬而用이면 則是過也 不廢先王之禮하여 而去近世無益之費 是不過矣니라
지금 장례를 검소하게 하여 묵자墨子의 설을 쓴다면 이는 지나친 것이나, 선왕의 예를 폐하지 않고 근세의 무익한 비용을 없애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자사子思는 말하기를 “사흘 만에 초빈草殯을 하되 모든 죽은 자의 몸에 따르는 것은 반드시 성신誠信하게 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따름이다.
三月而葬이니 凡附於棺者 必誠必信하여 勿之有悔焉耳矣라하니라
석 달 만에 장사를 지내는데 모든 부장副葬하는 것은 반드시 성신誠信하게 하여 후회하는 것이 없도록 하여야 할 따름이다.”라 하였습니다.
古之人所由以盡其誠信者 不敢有略也 而外是者則略之니라
옛사람들이 그 성신誠信을 다한 까닭은 감히 소략하게 함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이를 외면하면 소략하게 한 것입니다.
지난날 화원華元이 그 임금의 장례를 성대히 지내자 군자君子는 신하답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한 문제漢 文帝패릉霸陵에 장사 지냈는데 나무도 새로 열을 맞추지 않았으며 부장품副葬品에 금과 옥도 없었는데, 천하天下에서는 성명聖明이라고 생각하였으며, 후세에 태산泰山보다도 더 편안함을 누렸습니다.
故曰 莫若建薄葬之議 上以遂先帝恭儉之誠하고 下以紓百姓目前之患하며 內以解華元不臣之譏하여 而萬世之後以固山陵不拔之安이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간소한 장례를 세움만 못하다는 의논은 위로는 선제의 공경하고 검소한 정성精誠을 이루고, 아래로는 백성의 목전目前의 근심을 펴는 것이며, 안으로는 화원이 신하답지 못하다는 조롱을 풀어, 만세萬世의 후에 산릉을 공고히 하여 뽑히지 않는 편안함이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洵竊觀古者厚葬之由하니 未有非其時君之不達하여 欲以金玉으로 厚其親於地下인대 而其臣下不能禁止하여 僶俛而從之者 未有如今日之事
제가 옛날에 장례葬禮성대盛大하게 한 이유를 가만히 살펴보니, 당시 임금들이 통달하지 못함이 없지 않아서 지하에 금옥金玉으로 그 어버이를 두터이 장사 지내고자 하였는데, 그 신하들이 금하여 그치게 할 수 없어서 억지로 따른 것이 오늘날과 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太后至明하고 天子至聖이나 而有司信近世之禮하여 而遂爲之者 是可深惜也니라
태후太后께서 지극히 명철明哲하시고 천자天子께서 지극히 성스러우신데도 유사有司들이 근세近世를 믿어 마침내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 이것은 매우 애석해할 만합니다.
且夫相公 旣已立不世之功矣 而何愛一時之勞而無所建明
또한 대저 상공相公께서는 이미 일세一世에 있을 수 없는 공을 세우시고도, 어찌 일시一時의 수고로움을 아끼시어 밝게 건의하지 않으십니까?
恐世之淸議 將有任其責者로라
저는 세상의 맑은 의논에 장차 그 책임을 지게 되시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如曰 詔勅已行하고 制度已定이니 雖知不便이나 而不可復改라하면 則此又過矣
만약 “조칙詔勅이 이미 행하여졌고 제도制度가 이미 정하여졌으니, 비록 불편不便함을 안다고 하더라도 다시 고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또한 지나친 것입니다.
대체로 태종太宗고조高祖를 장사 지낼 때 9봉분封墳을 만들어 나라 장릉長陵의 제도를 따르고자 하여 온갖 사무가 풍후豐厚함을 따랐는데, 뭇 신하들이 옳지 않다고 건의하자 이에 고쳐서 광무제光武帝을 따랐는데, 높이는 6에 지나지 않았고 매사에 검약儉約하였습니다.
夫君子之爲政 與其坐視百姓之艱難而重改令之非 孰若改令以救百姓之急이니이다
대저 군자君子정사政事를 돌봄에, 백성의 어려움을 좌시하고 명령命令의 그릇됨을 고치는 것을 무겁게 여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명령을 고쳐서 백성의 위급危急을 구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不勝區區之心하여 敢輒以告하노이다
구구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감히 문득 아룁니다.
惟恕其狂易之誅 幸甚幸甚이로소이다
바라건대 미치고 경솔한 죄를 용서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唐荊川曰 一事反覆議論이라
당형천唐荊川(당순지唐順之)이 말하기를 “한 가지 일을 반복反復하여 의론議論하였다.”라 하였다.
역주
역주1 上韓昭文論山陵書 : 韓昭文은 곧 韓琦이다. 韓琦에 대해서는 위 〈上韓樞密書〉의 해제 참조. 韓琦는 嘉祐 6년(1061) 8월에 工部尙書 同平章事 昭文館大學士 監修國史의 직책이 더하여졌으므로 이렇게 말하였다. 山陵은 제왕의 墳墓이다. 《水經注》 권19 〈渭水〉에서는 “秦나라에서는 천자의 무덤[冢]을 山이라 하였고, 漢나라에서는 陵이라 하였으므로 통칭하여 山陵이라 하였다.”라 하였다. 嘉祐 8년(1063) 3월에 仁宗이 죽고 英宗이 즉위하였는데, 韓琦를 山陵使로 삼아 仁宗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려 하자, 蘇洵이 이 글을 올려 간하였다.
역주2 蓋漢昭卽位……而恩澤下布於海內 : 漢 昭帝 劉弗陵(B.C. 94~B.C. 74)은 漢 武帝의 아들로 나이가 어려서 즉위하였나 霍光 등의 보필을 받았다. 《漢書》 〈昭帝本紀〉의 贊에서는 “孝武帝의 사치로운 생활과 군사의 기강이 허물어진 뒤를 이어 海內가 고갈되어 戶口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는데, 霍光은 무엇이 중요한 時務인지를 알아 徭役과 賦役을 가벼이 하고 백성들에게 休息을 주었다.”라 하였다.
역주3 游觀 : 游覽할 수 있는 樓臺를 이른다.
역주4 文景 : 漢 文帝와 漢 景帝이다. 漢나라는 초창기 수십 년의 휴식기를 거쳐 文帝와 景帝 때에 이르러 경제가 번영하고 정치가 안정되었는데 역사상 이를 일러 文景之治라고 한다. 《漢書》 〈景帝紀〉의 贊에서는 “周나라에 成王과 康王이 있었다면 漢나라에는 文帝와 景帝가 있었으니 훌륭하도다![周云成康 漢云文景 美矣]”라 하였다.
역주5 竊聞頃者癸酉赦書旣出……爲國結怨 : 《續資治通鑑》 권61 嘉祐 8년(1063) 4월에 “癸酉年에 大赦免令을 내렸고 諸軍에 상을 내렸다.”라 하였다. 知諫院 司馬光이 말하기를 “국가의 用度가 여러 차례 군색한데 다시 大喪을 만나 누세에 걸쳐 소장한 것이 거의 땅을 쓰는 듯하였습니다. 듣자하니 外州와 軍官庫의 돈이 없는 곳에서는 백성의 돈을 꾸어서 賞給을 내렸다는데, 하루아침에 〈백성들이〉 애쓴 것을 빼앗은 것이며 채찍으로 핍박한 것입니다.”라 하였다.
역주6 配率之科 : 일정한 비율로 백성들에게 세금을 분담하는 것을 이른다.
역주7 獲譏於聖人 : 《魏文帝集》 〈終制〉에 “季孫이 璵와 璠으로 염을 하자 孔子가 계단을 뛰어 올라가 헤아려보고는 中原에 뼈를 방치해놓은 것에 비유하였다.”라 하였다. 이 일은 《春秋左氏傳》 定公 5년에 보이는데 “〈季平子가〉 방에서 죽자 陽虎는 璵와 璠으로 염을 하려고 하였다.”라 하였으며, 杜預는 “璵와 璠은 아름다운 玉으로 임금이 차는 것이다.”라 하였다.
역주8 君子不以天下儉其親 : 《孟子》 〈公孫丑 下〉에 보인다. 《孟子集疏》에서는 이 말의 뜻을 “〈군자는〉 천하를 위하여 棺椁의 비용을 아까워하여 그 어버이에게 검소하지 않는다.[不爲天下惜棺椁之費 而儉於其親也]”라고 풀었다.
역주9 墨子之說 : 《墨子》 〈節葬〉에 “棺은 세 치 두께로 충분히 몸을 썩힐 수 있으면 되고, 옷과 이불은 세 벌로 충분히 보기 흉함을 덮을 수 있으면 되며, 〈매장할 때〉 땅을 파는 깊이는 아래로는 지하수에 닿도록 깊이 묻어서는 안 되고, 위로는 냄새가 새어나올 정도로 얕게 묻어서는 안 되며, 封墳은 세 번 간 밭이랑 정도로 만들고 그만둔다.”라 하였다.
역주10 子思曰……勿之有悔焉耳矣 : 이 말은 《禮記》 〈檀弓 上〉에 나온다. ‘附於身者’는 衣衾을 말하며, ‘附於棺者’는 明器를 말하는데 모두 隨葬品들이다.
역주11 昔者……君子以爲不臣 : 華元은 춘추시대 宋나라의 大夫이다. 《史記》 〈宋微子世家〉에 “文公이 죽자 아들인 共公 瑕가 즉위하였다. 이때부터 厚葬이 비롯되었다. 군자들은 華元이 신하답지 않다고 비난하였다.”라 하였다. 또한 《魏文帝集》 〈終制〉에서는 “宋公이 厚葬을 하자 군자들은 華元과 樂莒가 신하답지 않다고 하였으며, 惡으로 임금을 버렸다고 여겼다.”라 하였다.
역주12 漢文葬於霸陵……而後世安於泰山 : 霸陵은 漢 文帝 劉恒의 능묘로 지금의 陝西省 西安의 동북쪽에 있다. 《漢書》 〈文帝本紀〉에 “漢 文帝가 崩御하자 遺詔를 내려 말하였다. ‘지금 세상에서는 모두 사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죽는 것을 미워하여 厚葬하여 生業을 깨뜨리고 服을 重하게 하여 삶을 상하게 하니 내 심히 취하지 않는다.……천하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영을 내려 영이 이르자 弔問한 지 사흘 만에 모두 喪服을 벗었다. 아내를 맞고 딸을 시집보내며 제사를 지냄에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霸陵의 山川은 그 때문에 고친 것이 없었다.’라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역주13 蓋唐太宗之葬高祖也……而每事儉約 : 《通鑑輯覽》 권50에 貞觀 9년 5월 唐 高宗 李淵이 죽자 10월에 獻陵에 장사 지내는 기록이 있는데 “처음에는 山陵을 漢나라 長陵의 故事를 따르게끔 조칙을 내렸다. 秘書監 虞世南이 上疏하기를 ‘陛下의 聖徳은 唐‧虞를 넘는데, 어버이의 葬事는 秦‧漢을 법으로 삼으시니 臣은 외람되오나 陛下를 위해 취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願컨대 《白虎通》의 3仞의 封墳에 의하여 器物과 제도를 모두 절검하여 줄이고, 다만 능의 곁에 刻石만 하고 그 사실을 특별히 한 통 적어 宗廟에 수장하여 자손들을 위한 法典으로 삼도록 하소서.’라 하였다. 소장을 올려 아뢰었으나 답이 없었다. 虞世南이 다시 주청하자 上은 이에 有司에게 조칙을 내려 논의케 하였다. 房玄齡 등은 ‘漢나라 長陵은 9丈이고, 原陵(後漢 光武帝 劉秀의 능)은 높이가 6丈입니다. 지금 9丈은 너무 높고 3仞은 너무 낮으니 청컨대 原陵의 禮制대로 하십시오.’라 하니 그대로 따랐다.”라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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