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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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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3. 역사歷史에 대한 논문
分段議論體 古人讀史 刻畫如此
단락을 나누어 의론議論이니, 옛사람들이 역사歷史를 읽음에 새김질을 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遷固史雖以事辭勝이나이나 亦兼道與法而有之하니 時得仲尼遺意焉이니라
사마천司馬遷반고班固역사歷史가 비록 사실事實문사文辭를 뛰어난 것으로 여기기는 하지만, 또한 도 겸하여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따금 중니仲尼가 남긴 뜻을 얻었다.
吾今擇其書 有不可以文曉 而可以意達者四 悉顯白之리라
내가 지금 그 책을 택하면서 으로는 밝힐 수가 없고 뜻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이 네 가지가 있는데 모두 드러내어 말한다.
其一曰隱而彰이요 其二曰直而寬이요 其三曰簡而明이요 其四曰微而切이니라
첫째는 “숨기면서도 밝히는 것”이고, 둘째는 “곧으면서도 너그러운 것”이며, 셋째는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것”이고, 넷째는 “작으면서도 절실한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염파廉頗을 지으면서 알여閼與를 구할 것을 의논하는 실수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조사전趙奢傳〉에 보이며, 역이기酈食其의 전을 지으면서 나라의 권세를 어지럽힐 것을 모의하는 잘못을 기록하지 않았는데 〈유후전留侯傳〉에 보인다.
반고班固주발周勃의 전을 지으면서 땀이 흘러 등을 흠뻑 적신 치욕을 기록하지 않았는데 〈왕릉전王陵傳〉에 보이며, 동중서董仲舒의 전을 지으면서 화친和親을 의논하는 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흉노전匈奴傳〉에 보인다.
夫頗食其勃仲舒 皆功十而過一者也
염파廉頗, 역이기酈食其, 주발周勃, 동중서董仲舒는 모두 은 열 가지이고 는 하나인 사람들이다.
苟列一以疵十이면 後之庸人 必曰 智如廉頗 辯如酈食其 忠如周勃이요 賢如董仲舒 而十功不能贖一過라하니 則將苦其難而怠矣리라
실로 하나를 들어 열 가지 흠을 낸다면 후세의 용렬한 사람들은 반드시 “지혜智慧염파廉頗와 같고, 변설辯說역이기酈食其와 같고, 충성忠誠주발周勃과 같으며, 현명賢明하기가 동중서董仲舒와 같은데 열 가지 공이 하나의 과실을 속죄하지 못하는구나.”라 할 것이니, 그 어려움을 괴로워하면서도 업신여기게 될 것이다.
是故 本傳晦之하고 而他傳發之 則其與善也 不亦隱而彰乎
그런 까닭에 본전本傳에서는 그런 사실들을 숨기고 타인의 전에서 그것을 밝혔으니, 훌륭한 점을 칭찬한 것이 또한 은미하면서도 드러난 것이 아니겠는가?
사마천司馬遷소진蘇秦을 논하면서 그 지혜智慧가 남보다 뛰어나다고 칭찬하여 혼자 악하다는 명성을 뒤집어쓰게 하지 않았으며, 북궁백자北宮伯子를 논하면서 사람을 사랑하는 장자長者라 칭찬하였다.
반고班固장탕張湯에 적기를 현자賢者를 추천하고 선행善行을 장려한다고 칭찬하였으며, 혹리酷吏에 적기를 사람들이 칭찬하는 바가 있어, 유독 그 악행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夫秦伯子湯酷吏 皆過十而功一者也 苟擧十以廢一이면 後之凶人 必曰 蘇秦北宮伯子張湯酷吏 雖有善不錄矣 吾復何望哉아하리니
소진蘇秦, 북궁백자北宮伯子, 장탕張湯, 혹리酷吏들은 모두 가 열이고 은 하나인 자들인데, 실로 열을 들어 하나를 폐한다면 후세의 흉악한 사람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소진蘇秦, 북궁백자北宮伯子, 장탕張湯, 혹리酷吏들은 비록 훌륭한 점이 있긴 하지만 기록하지 않았으니 내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라 할 것이다.
是窒其自新之路하고 而堅其肆惡之志者也
이는 그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길을 막고 그 방자하고 악한 뜻을 굳게 하는 것이다.
於傳 詳之하고 於論於贊 復明之 則其懲惡也 不亦直而寬乎
그러므로 에서 〈그들의 장점을〉 상세하게 밝히고 에서 다시 밝혔으니 그 악함을 징계하는 것이 또한 곧으면서도 너그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사마천司馬遷의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는 나라를 필두로 나라까지 사실 13인데 나라는 거기에 끼이지 못했다.
夫以十二名篇 而載國十三 何也 不數吳也니라
십이十二라고 편명篇名을 달고, 수록된 나라가 13인 것은 어째서인가? 나라를 헤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 제후諸侯일 따름인데 유독 나라를 헤아리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오랑캐의 를 썼기 때문이다.
不數而載之 何也 周裔而霸盟上國也니라
헤아리지 않고는 수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나라의 후예로 상국上國과의 맹약 때 패주霸主가 되었기 때문이다.
春秋書哀七年 公會吳于鄫하고 書十二年 公會吳于槖皐하며 書十三年 公會晉侯及吳子于黃池
춘추春秋애공哀公 7년의 기록에 에서 나라를 만났고, 12년의 기록에 탁고槖皐에서 나라를 만났으며, 13년의 기록에 진후晉侯오자吳子황지黃池에서 만났다고 하였다.
此其所以雖不數而猶獲載也
이는 비록 헤아리지는 않았어도 기록된 것이다.
나라의 경우는 남이南夷에 구구하여 승냥이, 이리, 여우, 삵과 함께 살아 중국中國과의 회맹會盟에 참여하여 화풍華風을 보지는 못했지만 오랑캐 풍속風俗의 이름을 써서 나아갔기 때문에 군자君子가 곧 그 자칭自稱을 가지고 주었다.
春秋書定五年 於越入吳하고 書十四年 於越敗吳于檇李하고 書哀十三年 於越入吳 此春秋所以夷狄畜之也
춘추春秋정공定公 5년의 기록에 나라가 나라에 들어갔고, 14년의 기록에 나라가 취리檇李에서 나라를 물리쳤고, 애공哀公 13년의 기록에 나라가 나라에 들어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춘추春秋》가 이적夷狄으로 받아들인 까닭이다.
苟遷擧而措之諸侯之末하니 則西戎獫狁亦或庶乎其間이라
실로 사마천司馬遷이 들어 제후의 끝에 두었으니 서융西戎험윤獫狁 또한 어쩌면 아마 그 사이에 놓일 것이다.
是以絶而棄之하여 將使後之人君으로 觀之 曰 不知中國禮樂하여 雖句踐之賢이라도 猶不免乎絶與棄 則其賤夷也 不亦簡而明乎
이런 까닭으로 잘라내어 버렸으니 후세의 인군人君에게 그것을 보게 한다면, “중국中國예악禮樂을 몰라 구천句踐이 현명하여도 오히려 단절되고 버려짐을 면치 못하였다.”라 할 것이니, 오랑캐를 천하게 여긴 것이 또한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것이 아니겠는가?
반고班固의 〈〉는 8편인데 왕후王侯가 6편이다.
書其人也 必曰 某土某王若侯某라하고
사람을 기록할 때는 반드시 “아무개 땅의 아무개 혹은 아무개”라 하였다.
공신功臣이나 외척外戚이라면 그 을 더하여 첫머리의 제목에서 ‘봉호封號시호諡號성명姓名’이라 하였는데, 이는 이성異姓 열후列侯의 예이다.
제후왕諸侯王은 그 제목이 ‘봉호封號시호諡號’에 그치니 어찌 높이기 때문에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不曰名之 而實名之 豈以不名則不著耶 此同姓諸侯王之例也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데 실은 이름을 말하였으니 어찌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겠는가? 이는 동성同姓 제후왕諸侯王의 예이다.
왕자후王子侯는 그 제목이 둘인데 위에서는 ‘봉호封號시호諡號‧이름’을 말하고 그 이름을 붙여 ‘이름’이라고 한 것은 한 등급을 줄인 것이다. 이는 동성同姓 열후列侯의 예이다.
及其下則曰號諡姓名하여 夫以同姓列侯 而加之異姓之例 何哉
그 아래에서는 ‘봉호封號시호諡號성명姓名’으로 하여 대체로 동성同姓 열후列侯이성異姓의 예를 더한 것은 어째서인가?
察其故 蓋元始之間 非天子親親而封之者也
그 까닭을 살펴보면 대개 원시元始 연간에 왕망王莽이 거짓으로 종실宗室포양褒揚하고 봉한 것이지 천자天子가 친족을 가까이하여 봉한 것이 아니다.
宗室天子不能封이요 而使王莽封之 從異姓例 亦示天子不能有其同姓也
종실宗室천자天子가 봉할 수 없었고 왕망王莽으로 하여금 봉하게 하였으므로 이성異姓를 따라 또한 천자天子는 그 동성同姓을 가질 수 없음을 보인 것이다.
將使後之人君으로 觀之 曰 權之歸於臣 雖同姓不能有하니 名器 誠不可假人矣로다하리니 則其防僭也 不亦微而切乎
후세의 인군人君들에게 그것을 보게 하면 “권계勸戒를 신하에게 돌리면 비록 동성同姓이라 하더라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니 명호名號기물器物은 실로 남에게 빌려줄 수가 없겠구나!”라 할 것이니, 참람됨을 막은 것이 또한 작으면서도 절실한 것이 아니겠는가?
隱而彰이니 則後人樂得爲善之利 直而寬이니 則後人知有悔過之漸이요 簡而明이니 則人君知中國禮義之爲貴 微而切이니 則人君知彊臣專制之爲患이라
아! 숨기면서도 밝히니 후인後人들이 을 하는 이로움을 얻는 것을 즐기고, 곧으면서도 너그러우니 후인後人들이 과실過失을 점점 뉘우침이 있음을 알며, 간단하면서도 명료하니 인군人君중국中國예의禮義가 귀한 것을 알고, 작으면서도 절실하니 인군人君이 강한 신하臣下전제專制하는 것이 근심이 된다는 것을 안다.
用力寡而成功博이니 其能爲春秋繼 而使後之史無及焉者 以是夫로다
힘을 씀이 적은데 공은 넓으니 능히 《춘추春秋》를 이을 수 있고, 나중의 역사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게끔 하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역주
역주1 史論 中 : 이 글은 《史記》와 《漢書》가 비록 事實과 文辭를 뛰어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또한 孔子의 經을 닦는 道와 法의 遺意를 겸하고 있음을 논하였다.
역주2 遷之傳廉頗也……見之趙奢傳 : 《史記》 〈趙奢傳〉에는 秦나라가 韓나라를 치면서 閼與(지금의 山西 和順)에 주둔하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趙나라〉 왕이 廉頗를 불러서 묻기를 “구할 수 있겠는가?”라 하자, 대답하기를 “길이 멀고 좁고 험하여 구하기가 어렵습니다.”라 하였다. 또 趙奢를 불러서 묻자 趙奢가 대답하기를 “길이 멀고 좁고 험한 것은 비유컨대 쥐 두 마리가 구멍에서 싸우는 것과 같으니 용감한 자를 데리고 가면 이길 수 있습니다.”라 하였다. 왕이 이에 趙奢에게 명하여 구원하게 하여 마침내 閼與의 포위를 풀었다. 〈趙奢傳〉은 《史記》 〈廉頗藺相如列傳〉에 붙어 있다.
역주3 傳酈食(이)其也……見之留侯傳 : 漢나라 3년에 項羽가 滎陽에서 漢王(劉邦)을 급히 포위하자 漢王이 두려워하여 酈食其와 함께 모의하여 六國의 후예들을 복위시켜 楚나라의 힘을 약화시키자고 하니 漢王이 좋다고 하였다. 張良이 와서 뵈었는데 漢王은 마침 식사를 하면서 酈食其의 계책을 알려주었다. 張良이 8가지 어려운 점을 들어 말하기를 “실로 客의 계책을 쓰면 폐하의 일은 그르칠 것입니다.”라 하였다. 漢王은 입안의 음식을 뱉고 꾸짖기를 “썩은 선비가 하마터면 일을 그르칠 뻔하였구나.”라 하였다. 《史記 留侯世家》
역주4 固之傳周勃也……見之王陵傳 : 文帝가 帝位를 이은 후 얼마 있다가 나라의 일에 더욱 익숙해져서 조회 때 右丞相 周勃에게 묻기를 “천하에 한 해의 決獄이 얼마나 되오?”라 하니 周勃이 알지 못한다고 사과하였다. 또 묻기를 “천하에 錢穀의 출입이 한 해에 얼마나 되오?”라 하니 周勃이 또 알지 못한다고 사과하였는데, 땀이 나서 등이 축축해졌고 부끄러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漢書 王陵傳》
역주5 傳董仲舒也……見之匈奴傳 : 《漢書》 〈匈奴傳贊〉에서는 “董仲舒는 네 조정(高祖‧惠帝‧文帝‧景帝)의 일을 보고 오히려 다시 義를 지켜 자못 그 맹약을 더하려 하였으니, 義는 君子를 움직이고 利는 貪人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였다. 匈奴 같은 것은 仁義를 가지고 말할 수 없다. 유독 두터운 이익으로 유세하여 천자의 나라와 연결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두터운 이익을 주어 공격하려는 뜻을 없애고 천자와 동행케 하여 그 약속을 굳게 하고 그 사랑하는 아들을 인질로 삼아 그 마음을 묶어야 한다. 董仲舒의 의논을 살펴보고 여러 행사를 고찰해보면 당시와는 맞지 않으며 후세에 부족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라 하였다.
역주6 遷論蘇秦……不使獨蒙惡聲 : 《史記》 〈蘇秦列傳贊〉에서는 “蘇秦이 평민의 신분에서 입신하여 6국을 연결시켜 合縱을 맺게 한 것은 그의 才智가 일반 사람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그의 경력과 사적을 나열함으로써 그 혼자만 惡評을 받도록 하지 않았다.”라 하였다.
역주7 論北宮伯子 多其愛人長者 : 《史記》 〈佞幸列傳〉에서 “孝文皇帝 때의 寵臣으로 士人은 鄧通이 있고, 宦者로는 趙同과 北宮伯子가 있다. 北宮伯子는 사람을 사랑하는 長者로, 趙同은 占星術과 望氣術에 뛰어난 자로 총애를 받았다.”라 하였다.
역주8 固贊張湯 與其推賢揚善 : 《漢書》 〈張湯傳贊〉에서 “張湯은 비록 매우 혹독하여 자신은 해를 입었으나 賢者를 추천하고 善한 자를 선양하였기 때문에 이로 인해 後嗣가 있었다. 아들 安世는 道를 지켰고, 아들 賀는 陰德을 쌓았다.”라 하였다.
역주9 贊酷吏……不獨暴其惡 : 《漢書》 〈酷吏傳贊〉에서 “郅都 이하로는 모두 매우 혹독한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郅都는 강직하여 是非를 끌어당기고 대체를 다투었다.……그중에 淸廉한 자는 족히 儀表가 될 만하였고, 汚點이 있는 자도 백성을 교도하기를 꾀하고 일체 간사한 것을 금하였으며 또한 바탕에 文武를 갖추고 있었다. 비록 혹독하기는 하였으나 그 지위에 걸맞았다.”라 하였다.
역주10 遷表十二諸侯……而載國十三 : 《史記》 〈十二諸侯年表〉의 《史記索隱》에서는 “12篇이라 하고 실제 13諸侯를 서술한 것은 夷狄을 천하게 여겨 吳나라를 치지 않았고, 또 霸諸侯가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치지 않았는데도 서술한 것은 闔閭가 上國과의 盟約에서 霸權을 잡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年表〉에서는 魯‧齊‧晉‧秦‧楚‧宋‧衛‧陳‧蔡‧曹‧鄭‧燕‧吳나라의 13國을 열거하였으나 吳나라를 치지 않았으니 12이다.
역주11 獨不數吳……周裔而霸盟上國也 : 吳太白은 周 太王의 아들로 太王이 그 아우 季歷을 세우고자 하니 太白은 이에 荊蠻으로 달아나 自號를 句吳라 하고 文身을 하고 머리카락을 잘라 쓸모가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季歷을 피하였다. 荊蠻에서 이를 의롭게 여겨 吳太白을 세웠는데 闔閭에까지 전하여져 패권을 잡았다. 《史記 吳太白世家》
역주12 若越……故君子卽其自稱以罪之 : 越王 句踐은 그 선조가 禹의 苗裔로 會稽에 봉하여졌다. 文身을 하고 머리카락을 잘랐으며, 草木을 제거하고 都邑을 세웠다. 孔子가 《春秋左氏傳》에 越나라를 기록할 때 ‘於越’이라 적은 것은 越나라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발음할 때 내는 소리를 그대로 적은 것이고, ‘越’이라는 말은 中原 사람들이 그렇게 적은 것이라고 한다. 《史記 越王句踐世家》
역주13 固之表八而王侯六……某士某王若侯某 : 班固의 《漢書》는 권13에서 권20까지가 〈表〉로 모두 8表이다. 그 가운데 권13에서 권18까지가 〈王侯表〉로 모두 6表이다. ‘某土某王若侯某’라는 것은 首欄의 名目으로 “西楚(某土)의 霸王(某王) 項籍(某)”(〈異姓諸侯王表〉)과 “楚(某土)의 元王(某王) 交(某)”(〈諸侯王表〉) 같은 것이다.
역주14 或功臣外戚……此異姓列侯之例也 : 이는 권16에서 권18까지의 〈功臣表〉 및 〈外戚表〉인데 首欄은 ‘號諡姓名’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平王懿侯(號諡) 曹參(姓名)”(〈功臣表〉)과 “臨泗侯(號諡) 呂公(姓名)”(〈外戚表〉) 같은 것이다.
역주15 諸侯王其目止號諡……此同姓諸侯王之例也 : 이는 《漢書》 권14 〈諸侯王表〉의 首欄에서 ‘號諡’만 기록한 것에 그친 것을 가리키지만 실은 그의 이름을 주로 달았다. 이를테면 ‘楚의 元王 交’라 한 것과 같은 따위이다.
역주16 王子侯其目爲二……而加之異姓之例 : 《漢書》 〈王子侯表〉의 上卷에서는 첫머리에 號‧諡‧名 셋을 썼는데 이를테면 “安城 恩侯 蒼”과 같은 따위이다. 下卷의 “松玆載侯 霸” 같은 따위에 이르면 姓은 기록하지 않았더라도 첫머리에 號, 諡, 姓, 名의 4자를 반드시 추가하였는데 이는 異姓의 예가 同姓에 있는 것이다.
역주17 王莽僞褒宗室而封之者也 : 기록에 의하면, 平帝 元始 원년에 王莽을 安漢公으로 삼았다. 王莽은 吏民에게 아첨하여 종실의 군신들을 포상할 것을 건의하고 옛 東平王 雲의 태자 開明을 왕으로 세웠으며, 또한 東平思王의 손자 成都를 中山王으로 삼고 孝王의 뒤를 받들었으며 宣帝의 耳孫 信 등 36명을 모두 列侯에 봉하였다. 《資治通鑑 권35》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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