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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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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2. 여청주余靑州에게 올린 글
論出處 氣多奇崛處
출처出處를 논함에 기세氣勢기이奇異하고 우뚝한 곳이 많다.
洵聞之컨대 楚人 高令尹子文之行하여라하니
제가 듣건대 나라 사람들은 영윤令尹 자문子文의 행실을 고상하게 여겨 “세 번 영윤令尹이 되었으나 기뻐하지 않았고, 세 번 그 영윤직令尹職을 빼앗겼으나 노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其爲令尹也 楚人 爲之喜하고 而其去令尹也 楚人 爲之怒하니 己不期爲令尹이나 而令尹 自至
그가 영윤이 되자 초나라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기뻐하였고, 그가 영윤직에서 떠나자 초나라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노하였으니, 자신은 영윤이 되기를 기대하지 않았지만 영윤직이 절로 이르렀습니다.
夫令尹子文 豈獨惡夫富貴哉
영윤令尹 자문子文이 어찌 유독 부귀富貴를 싫어하였겠습니까?
知其不可以求得하고 而安其自得하니 是以 喜怒不及其心이나 而人爲之囂囂
구하여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얻은 것을 편안하게 여겼으니, 이 때문에 희로喜怒가 그 마음에 일어나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이 때문에 떠들썩하였습니다.
嗟夫 豈亦不足以見己大而人小邪
아아! 어찌 또한 족히 자기는 크게 보고 남은 작게 보기에 충분치 않겠습니까?
脫然爲棄於人이나 而不知棄之爲悲하고 紛然爲取於人이나 而不知取之爲樂이라
탈연脫然히 남에게 버림을 받았으나 버림받은 것이 슬픔인 줄을 몰랐으며, 분연紛然이 남에게 취하여졌으나 취하여진 것이 즐거운 줄을 몰랐습니다.
人自爲棄我取我라도 而吾之所以爲我者如一이면 則亦不足以高視天下而竊笑矣哉
남들이 스스로 나를 버리고 나를 취하였다고 생각하더라도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이 한결같으면, 또한 족히 천하를 고상高尙하게 보기만 하였다거나 가만히 비웃기만 하였다고 볼 수만은 없을 듯하나이다.
昔者 하여 而爲天下之明卿이라
지난날 명공明公께서는 초기에 스스로 남해南海의 바닷가에서 떨쳐 일어나 천하天下명경明卿이 되셨습니다.
하며 한대 其辯 如決河流而東注諸海하고 名聲 四溢於中原而磅礴於戎狄之國하니 可謂至盛矣
성하였을 때는 격앙激昂되어 의분이 북받쳐 득실得失을 논하고 가부可否를 정하였으며, 로는 서강西羌을 어루만지고 로는 거란契丹을 헤아렸으며, 천 리에 사신使臣의 직을 받들어 강하고 사나우며 꺾이지 않는 오랑캐를 탄압彈壓하였는데 그 변설辨說황하黃河의 흐름을 터뜨려 동으로 바다에 대는 것과 같았으며, 명성名聲이 사방으로 중원中原에 넘치고 융적戎狄의 나라에 가득 찼으니 지극히 성하였다고 하겠습니다.
하여는 明公無求於人하고 而人亦無求於明公者
중도에 이르러 그만두고 바닷가의 필부匹夫가 되었을 때는 대개 그 사이 10여 년 동안 명공明公께서는 남에게 구하지를 않았고 사람들도 명공에게 구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 뒤 마침 남만南蠻이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어 만 리에 가득 차도록 아무도 그것을 구제하지 못하였는데, 명공明公께서 이에 백성의 무리 가운데서 일어나 채찍을 꺾어 그들을 치니 오래지 않아 남방이 또한 안정되었습니다.
夫明公 豈有求而爲之哉
대저 명공明公께서 어찌 추구함이 있어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適會事變以成大功하고 功成而爵祿至
때마침 사변事變을 만나 큰 을 이루셨고 공이 이루어져 작록爵祿이 이르렀습니다.
明公之於進退之事 蓋亦綽綽乎有餘裕矣
명공明公께서는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에 대체로 또한 느긋하게 여유가 있었습니다.
悲夫 世俗之人 紛紛於富貴之間而不知自止
슬프도다! 세속世俗의 사람들은 분분紛紛부귀富貴의 사이에서 스스로 멈출 줄을 모릅니다.
達者 安於逸樂而習爲高岸之節한대 顧視四海하니 饑寒窮困之士 莫不嚬蹙嘔噦而不樂이요
현달顯達한 자는 편안하고 즐거운 곳에 안주하여 고상하고 준엄한 절개에 습관이 되어 있는데, 사해四海를 돌아보니 주리고 춥고 궁곤窮困한 선비는 눈살을 찌푸리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즐겁지 않습니다.
窮者 藜藿不飽하고 布褐不暖하며 習爲貧賤之所摧折하여 仰望貴人之輝光이면 則爲之顚倒而失措
곤궁한 자는 명아주잎과 콩잎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거친 베옷으로 따뜻이 입지 못하며, 항상 빈천貧賤에 좌절된 것에 습관이 되어 귀인貴人광휘光輝를 우러러 바라보면 그 때문에 전도顚倒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此二人者 皆不可與語於輕富貴而安貧賤이라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부귀富貴를 가벼이 여기고 빈천貧賤을 편안히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더불어 얘기할 수 없습니다.
何者 彼不知貧賤富貴之正味也
어째서이겠습니까? 저들이 빈천과 부귀의 올바른 맛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夫惟天下之習於富貴之榮하고 而狃於貧賤之辱者라야 而後可與語此
대체로 다만 천하天下에서 부귀의 영화에 습관이 되어 있고, 빈천의 욕됨을 부끄러워해 본 자라야만 더불어 이러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今夫天下之所以奔走於富貴者 我知之矣로되 而不敢以告人也
지금 저 천하天下부귀富貴에 분주한 까닭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만 감히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못합니다.
富貴之極 止於天子之相이라
부귀富貴천자天子재상宰相에서 그칩니다.
而天子之相 果誰爲之名 豈天爲之名耶
그런데 천자의 재상은 과연 누가 그 이름을 지어주었습니까? 어찌 하늘이 그 이름을 주었겠습니까?
其無乃亦人之自相名耶
그것은 또한 사람들이 서로 이름을 지어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夫天下之官 上自三公으로 至於卿大夫하고 而下至於士 此四者 皆人之所自爲也 而人亦自貴之
대체로 천하의 관리官吏가 위로는 삼공三公에서 대부大夫에 이르고 아래로는 에 이르니, 이 네 부류는 모두 사람들이 스스로 되는 것이며, 사람들이 또한 스스로 귀하게 여깁니다.
天下以爲此四者 絶群離類하여 特立於天下而不可幾近이면 則不亦大惑矣哉
천하天下에서 이 네 부류가 무리에서 떨어져 특별히 천하에 우뚝 서서 거의 가까이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또한 크게 의혹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盍亦反其本而思之
어찌 또한 그 근본根本으로 돌아가서 생각지 않습니까?
夫此四名者 其初 蓋出於天下之人 出其私意以自相號呼者而已矣니라
대저 이 네 명칭名稱은 처음에는 아마 천하의 사람들이 사사로운 뜻을 내어 서로 부른 것에서 나왔을 따름일 것입니다.
夫此四名者 果出於人之私意所以自相號呼也 則夫世之所謂賢人君子者 亦何以異此리오
대저 이 네 명칭이 과연 사람들의 사사로운 뜻이 서로 부른 것에서 나왔다면 세상의 이른바 현인賢人군자君子가 또한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有才者爲賢人하고 而有德者爲君子 此二名者 夫豈輕也哉
재주가 있는 자는 현인賢人이 되고 이 있는 자는 군자君子가 되니 이 두 명칭이 어찌 가볍다 하겠습니까?
而今世之士 得爲君子者 一爲世之所棄 則以爲不若之貴어늘 而況以與三公争哉리오
그런데 지금 세상의 선비로 군자가 된 자들이 한결같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는다면 일명一命의 선비의 귀함만 못하다고 생각하거늘, 하물며 삼공三公의 귀함과 다툴 수 있겠습니까?
且夫明公昔者之伏於南海 與夫今者之爲 君子豈有間於其間이며 而明公亦豈有以自輕而自重哉
또한 명공明公께서 지난날 남해南海에서 엎드려 계실 때와 지금 동제후東諸侯가 되신 것에는 군자君子로서의 처신에 어찌 그 사이에 구분이 있을 것이며, 명공明公께서는 또한 어찌 스스로 가벼이 여기고 스스로 중시함이 있겠습니까?
洵以爲明公之習於富貴之榮하고 而狃於貧賤之辱하여 其嘗之也蓋已多矣 是以 極言至此 而無所迂曲이니이다
저는 명공께서 부귀의 영화에도 익숙하고 빈천의 욕됨에도 습관이 되어 이러저러한 것을 맛본 것이 이미 많을 것으로 생각하므로, 이에 극언極言이 여기까지 이르렀고 빙 둘러 말하지 않았습니다.
西蜀之匹夫 嘗有志於當世 因循不遇하여 遂至於老
저는 서촉西蜀필부匹夫로 일찍이 당세에 뜻을 가졌으나 머뭇거리다가 때를 만나지 못하여 마침내 노년老年에 이르렀습니다.
이나 其常所欲見者 天下之士 蓋有五六人이라
그러나 늘 만나보고 싶었던 분은 천하의 선비 중에 대개 대여섯 분이었습니다.
五六人者 已略見矣로되 而獨明公之未嘗見 每以爲恨이라
그 대여섯 분은 이미 대략 만나뵈었습니다만 유독 명공明公만을 일찍이 뵙지 못한 것이 늘 한으로 생각되었습니다.
今明公 來朝하시고 而洵 適在此하여 是以 不得不見이라
지금 명공明公께서 내조來朝하시고 제가 마침 이곳에 있어 이 때문에 찾아뵙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伏惟加察이면 幸甚이로소이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더욱 잘 살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역주
역주1 上余靑州书 : 余靑州는 곧 余靖(1000~1064)이다. 《北宋經撫年表》에 의하면 余靖은 嘉祐 3년(1058) 10월에 知潭州에서 知靑州로 관직이 바뀌었으며, 嘉祐 6년 5월에는 知靑州에서 知廣州로 바뀌었다. 嘉祐 5년(1060) 2월 이전에 蘇洵은 서울에 있지 않았고, 8월에는 試檢校郞 벼슬을 받았는데, 余靑州가 서울로 올라온 것이 이해 7월경이었으므로 이 글은 대개 嘉祐 5년 7월 중에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역주2 三以爲令尹而不喜 三夺其令尹而不怒 : 《論語》 〈公冶長〉에 “令尹 子文이 세 번 벼슬하여 令尹이 되었으나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고, 세 번 벼슬을 그만두었으나 서운해하는 기색이 없었다.[令尹子文 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고 하였다. 令尹 子文은 楚나라의 大夫로 성은 鬪이고, 이름은 穀(누)이며, 자는 於菟(오도)이다.
역주3 明公之初 自奮於南海之濱 : 《宋史》 〈余靖傳〉에서는 “余靖은 자가 安道로 韶州 曲江(지금의 廣東 韶關市 교외) 사람이다. 젊어서는 〈자신을〉 엄격하게 단속하지 않았으며 文學으로 鄕里에서 일컬어졌는데, 進士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라 하였다.
역주4 當其盛时……定可否 : 仁宗 慶曆 연간에 余靖이 諫官이 되어 자주 일에 대하여 말하여 일찍이 夏竦의 간사함을 논하여 樞密使가 되지 못하게 하였고, 王擧正은 재주가 없다 하여 政府에 있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며, 狄靑은 武人으로 홀로 渭州를 지키게 하면 변방의 일을 그르칠 것이라 하였고, 張堯佐는 修媛(女官) 때문에 提點府界公事에 제수하는 것은 훌륭한 政事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가 한 말은 거의 받아들여져 쓰였다고 한다. 《宋史 余靖傳》, 《續資治通鑑 권45, 46》
역주5 左摩西羌……彈壓强悍不屈之虜 : 西羌은 西夏이다. 仁宗 慶曆 연간에 마침 서쪽 변경의 전쟁에 염증이 나서 元昊가 和議를 청하고 歲賜를 늘릴 것을 논의하자, 余靖은 “뜻을 굽혀 숙여 따르면 나라에 수치스럽다.”고 반대하였으며, 元昊가 이미 투항하자 조정에서는 封冊을 더하려 하였으나 契丹은 서쪽 변경에 군대를 대어놓고 사자를 보내어 말하기를 “중국을 위하여 賊을 토벌하겠으니 청컨대 그만두고 그들과 화해하지 마시오.”라 하였다. 조정의 논의는 난처해하였다. 마침 余靖이 여러 차례 契丹은 간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가벼이 허락할 수 없다고 하여 즉시 余靖을 보내서 가서 알리게 하여 夏國을 봉책하는 일은 보류하여 불발되었다. 余靖은 契丹에 이르러 마침내 논의를 굴복시키고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마침내 夏에 冊을 발하고 元昊를 신하로 삼았다. 서쪽의 군사들은 이미 삼엄함을 풀었고 북쪽 또한 무사하였다고 한다. 《宋史 余靖傳》, 《續資治通鑑 권45, 46》
역주6 及至中廢而爲海濱之匹夫 : 慶曆 6년(1046) 7월의 일을 말한다. 余靖은 契丹으로 3번 사신을 나갔는데 또한 외국어에 능통해서 일찍이 蕃語로 시를 지은 적이 있다. 御史 王平 등이 余靖이 사자의 체통을 잃었다고 탄핵하여 知吉州로 나갔다. 余靖이 諫官이 되었을 때 일찍이 太常博士 茹孝標의 不孝를 탄핵하여 상주한 일이 있었는데 그가 모친상을 은닉하여 죄에 걸려 폐하여졌다. 余靖이 권세를 잃자 茹孝標는 궁궐에 이르러 余靖이 젊었을 때 廣州에서 놀면서 법을 어겼다고 하였다. 余靖은 이 말을 듣고 어쩔 수가 없어 양친을 봉양할 것을 청하여 떠났다. 관직이 바뀌어 將作少監이 되었지만 南京 分司에 근무하며 〈실권이 없이〉 曲江에 거처하였다. 《宋史 余靖傳》, 《續資治通鑑長編 권46》
역주7 蓋其間十有餘年 : 余靖은 慶曆 6년(1046) 7월에 韶州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받았으며, 嘉祐 5(1060), 6년에야 來朝하였으니 이미 14, 5년이 되었다.
역주8 其後……不旋踵而南方又安 : 皇祐 4년(1052)의 일로 “남만의 儂智高가 邕州에서 반란을 일으켜 승세를 타고 9개 군을 노략질하고 군사로 廣州를 포위하였다.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남쪽의 일을 고려하여 부친상을 치르는 중임에도 余靖을 秘書監, 知潭州로 삼았고 知桂州로 바꾸어 廣南西路를 余靖에게 맡겨 통제하게 하였다.……결사대를 特磨道로 들여보내 儂智高의 모친과 아들, 아우 3명을 사로잡아 대궐에 바쳤다.”고 한다. 《宋史 余靖傳》, 《續資治通鑑 권52》
역주9 一命士 : 周나라 때 九命의 品級이 있었는데, 一命은 제일 낮은 품급의 관직이다. 三公과 대비되는 말이다.
역주10 東諸侯 : 靑州는 東京東路(路는 宋代의 가장 큰 행정구역)의 가장 으뜸가는 州로, 知靑州가 되면 반드시 東京東路按撫使 兵馬巡檢이 되므로 이렇게 말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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