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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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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8. 간사奸邪함을 분별함에 대한 논문
荊川嘗讀韓非子八諫篇하고 謂是一面이라하니 余於老泉此論亦云이라
형천荊川이 일찍이 《한비자韓非子》 〈팔간편八諫篇〉을 읽어보고 말하기를 “이는 하나의 조요경照妖鏡이다.”라 하였는데, 나는 노천老泉의 이 또한 그렇다고 생각한다.
張文定公撰老蘇先生墓表云
장문정공張文定公(장방평張方平)이 〈노소선생묘표老蘇先生墓表〉를 지어 말하였다.
嘉祐初 王安石名始盛하여 黨友傾一時
가우嘉祐 초년初年왕안석王安石명성名聲이 비로소 하여 당우黨友들이 한때 〈그 사람에게〉 쏠렸다.
其命相制曰 生民以來 數人而已니라
그 〈명상제命相制〉에는 ‘백성이 생겨난 이래 수인數人일 따름이다.’라 하였다.
造作語言하여 至以爲幾於聖人이라
언어言語조작造作하여 심지어 성인聖人에 가깝다고까지 하였다.
歐陽脩亦善之하여 勸先生與之遊니라
구양수歐陽脩 또한 그를 잘 보아 선생先生(소순蘇洵)에게 그와 교유하라고 권하였다.
而安石亦願交於先生이라
그리고 왕안석王安石 또한 선생先生과 교유하기를 원하였다.
先生曰 吾知其人矣 是不近人情者 鮮不爲天下患이라하니라
선생先生이 말하기를 ‘나는 그 사람을 잘 아니 그런 사람은 인정人情에 가깝지 않은 자로, 천하天下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음이 드물다.’라 하였다.
安石之母死 士大夫皆弔호되 先生獨不往하고 作辨奸一篇하니 其文曰
왕안석王安石의 모친이 죽자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조문弔問하였으나 선생先生만은 홀로 가지 않고 〈변간론辨奸論〉 한 편을 지었으니 그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事有必至 理有固然이니 惟天下之靜者라야 乃能見微而知著니라
일에 반드시 이르는 것이 있으면 이치상 실로 그렇게 되는 것이 있으니, 오직 천하의 고요한 자라야 곧 미세한 것을 보고 드러난 것을 알 수 있다.
月暈而風이면 人人知之니라
달무리가 지고 바람이 불면 주춧돌이 축축해지고 비가 옴은 사람마다 알고 있다.
人事之推移 理勢之相因 其疎闊而難知하니 變化而不可測者 孰與天地陰陽之事리오
사람의 일의 추이推移와 이치의 형세形勢가 서로 인과因果가 됨은 소활하여 알기 어려우니, 변화變化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천지天地음양陰陽의 일에 비하여 어떠한가?
而賢者有不知하니 其故何也
그런데 현자賢者도 모름이 있음은 그 까닭이 어째서인가?
好惡亂其中하고 而利害奪其外也니라
호오好惡가 그 안을 어지럽히고 이해利害가 그 바깥을 빼앗기 때문이다.
昔者 曰 誤天下蒼生者 必此人也라하고
옛날에 산거원山巨源(산도山濤)이 왕연王衍을 보고 말하기를 “천하天下창생蒼生을 그르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라 하였고,
曰 此人得志 吾子孫無遺類矣라하니
곽분양郭汾陽(곽자의郭子儀)이 노기盧杞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뜻을 얻으면 내 자손은 남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
自今而言之컨대 其理固有可見者
지금 그것을 말하건대 그 이치가 실로 볼 만한 것이 있다.
以吾觀之하니 王衍之爲人 容貌言語 固有以欺世而盜名者
내가 보기에는 왕연王衍위인爲人용모容貌언어言語가 실로 세상을 속이고 명예名譽를 훔침이 있었지만,
이나 하고 與物浮沈하여 使晉無하고 僅得中主 雖衍百千이라도 何從而亂天下乎
원망하지 않고 추구함이 없이 사물과 더불어 부침浮沈하여, 설사 나라에 혜제惠帝가 없고 중간쯤 되는 임금만 겨우 얻었더라도 왕연王衍 같은 사람이 백천 명이라 한들 무엇 때문에 천하가 어지럽혀졌겠는가?
盧杞之姦 固足以敗國이라
그러나 노기盧杞의 간사함은 실로 나라를 그르치기에 족하였다.
然而不學無文하며 容貌不足以動人하고 言語不足以眩世하니之鄙暗이면 亦何從而用之리오
그런데 배우지 않아 문채가 없으며 용모容貌는 사람을 움직이기에 부족하고 언어言語는 세상을 현혹시키기에 부족하니, 당 덕종唐 德宗의 비루하고 어두움이 아니라면 또한 무엇 때문에 그를 등용했겠는가?
由是言之컨대 二公之料二子 亦容有未必然也
이로써 말하건대 두 이 두 사람을 헤아림에 또한 더러 꼭 그렇지 않은 점이 있었다.
今有人口誦孔老之言하고 身履夷齊之行 收召好名之士不得志之人하여 相與造作言語하고 私立名字하여 以爲顔淵孟軻復出이나 而陰賊險狠하여 與人異趣하니
지금 어떤 사람이 입으로는 공자孔子노자老子의 말을 외고, 몸으로는 백이伯夷숙제叔齊의 행실을 밟는데, 명예名譽를 좋아하는 선비와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을 거두어 불러들여 서로 더불어 언어言語를 조작하고 사사로이 명자名字를 세워 안연顔淵맹가孟軻가 다시 나왔다고 하나, 음험하고 잔인하며 험악하고 악독하여 남들과는 의취意趣가 다르다.
王衍盧杞合而爲一人也 其禍豈可勝言哉리오
이는 왕연王衍노기盧杞가 합쳐서 한 사람이 된 것이니 그 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夫面垢不忘洗하고 衣垢不忘澣 此人之至情也니라
대체로 얼굴이 더러워지면 씻는 것을 잊지 않고, 옷이 더러워지면 빠는 것을 잊지 않으니, 이것은 사람의 지극한 이다.
今也不然하여 衣臣虜之衣하고 하며 而談詩書하니 此豈其情也哉
지금 〈이 사람은〉 그렇지 않아서 포로의 옷을 입고 개‧돼지의 음식을 먹으며 죄수의 머리털에 을 당한 사람의 낯짝으로 《시경詩經》‧《서경書經》을 담론하니, 이것이 어찌 그 정이겠는가?
凡事之不近人情者 鮮不爲大姦慝하니 是也니라
범사가 사람의 정에 가깝지 않은 자는 크게 간특姦慝하지 않음이 드문데, 수조豎刁역아易牙개방開方이 이런 작자들이다.
以蓋世之名으로 而濟其未形之患이면 雖有願治之主好賢之相 猶將擧而用之라도 則其爲天下患必然而無疑者 非特二子之比也니라
세상을 덮는 명성으로 형체가 드러나지 않은 근심을 저지르니, 비록 다스리기를 원하는 임금과 현자賢者를 좋아하는 재상이 있어서 오히려 천거하여 그들을 쓴다 해도 반드시 천하天下의 근심이 될 것임은 의심할 것이 없으니, 〈그 해독이〉 다만 앞의 두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손자孫子가 말하기를 “용병用兵에 뛰어난 자는 혁혁赫赫이 없다.”라 하였다.
使斯人而不用也 則吾言爲過하고 而斯人有不遇之嘆이면 孰知禍之至於此哉
만약 이러한 사람이 등용되지 않으면 내 말이 잘못된 것이고, 이러한 사람이 때를 만나지 못했다는 탄식을 하면, 누가 가 여기까지 이를 줄 알겠는가?
不然이면 天下將被其禍하고 而吾獲知言之名이니 悲夫
그렇지 않아 〈이러한 사람이 등용되면〉 천하天下는 그 화를 입을 것이고, 나는 식견 있다는 명예를 얻을 것이니 슬프다!
역주
역주1 辨奸論 : 이 글은 王安石의 奸邪함을 논한 글로 張方平의 〈文安先生墓表〉에 의하면 “王安石의 모친이 죽었을” 때 지은 것이다. 王安石의 모친은 嘉祐 8년(1063)에 죽었으므로 이 글은 이때 지어졌을 것이다.
역주2 照妖鏡 : 入山修道하는 사람이 妖怪를 물리치기 위하여 등 뒤에 달았다는 거울이다.
역주3 礎潤而雨 : 《淮南子》 〈說林訓〉에 “산의 구름이 많으면 기둥 아래 주춧돌이 축축해진다.[山雲烝 柱礎潤]”는 말이 있다. 이는 무슨 일이 발생하기 전에 반드시 무슨 조짐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4 山巨源 見王衍 : 巨源은 山濤(205~283)의 자이다. 河內 懷縣(지금의 河南 茂陵) 사람으로 老莊을 좋아하여 은거하면서 嵇康‧阮籍 등과 교유하며 竹林七賢의 하나가 되었다. 40세 때 벼슬길에 나서 右僕射, 吏部尙書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嵇康에게 절교를 당하였다. 王衍(256~311)은 자가 夷甫이며 琅邪 臨沂(지금의 山東 臨沂) 사람이다. 老莊의 玄談을 좋아하고 義理를 논함에 변화가 많아 ‘口中雌黃’이라 불렸다. 벼슬길에 올라 거듭 승진하여 尙書令, 司空, 司徒에 올랐다. 당시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자신의 보전만 꾀하여 아우인 王澄을 荊州刺史로, 족제인 王敦을 靑州刺史로 삼아 세 개의 굴을 미리 준비하였다. 東海王 司馬越이 苟晞를 토벌할 때 太尉로 太傅軍司가 되었으며, 司馬越이 죽자 元帥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石勒에게 패하여 포로로 잡혀 죽었다. 《晉書 王衍傳》
역주5 郭汾陽 見盧杞 : 郭汾陽은 곧 郭子儀(697~781)이다. 郭子儀에 대해서는 앞의 〈上韓樞密書〉에 보인다. 盧杞(?~785)는 자가 子良으로 滑州(지금의 河南 滑縣) 사람이다. 門蔭으로 靑道率府兵曹參軍이 되었다. 建中 2년(781) 御史大夫로 승진하고 조금 있다가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로 발탁되었다. 賢能한 이를 질투하여 楊炎과 顔眞卿 등을 모함하였다. 《舊唐書 盧杞傳》
역주6 不忮(기)不求 : 忮는 ‘질투, 원망’의 뜻이다. 《詩經》 〈邶風 雄稚〉에 “질투하지 않고 탐하지 않는다면, 어찌 착하지 않으리오.[不忮不求 何用不臧]”라는 구절이 있다.
역주7 惠帝 : 晉 惠帝 司馬衷(259~306)으로 자는 正度이며, 武帝 司馬炎의 次子이다. 太熙 원년(290)에 즉위하였으며 우매하고 지혜가 없었다. 백성들이 크게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자 “어찌하여 고기 죽을 먹지 않느냐?”고 하여 웃음거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外戚인 楊駿의 조종을 받다가 나중에는 賈皇后가 전권을 행사했다. 永康 원년(300) 趙王 司馬倫이 賈氏를 멸하고 집정대신을 모두 잡아 죽였다. 이듬해에 趙王에게 禪讓하여 여러 왕들의 난을 야기시켰다. 얼마 후 복위하였지만 천하의 일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역주8 德宗 : 唐 德宗 李適(742~805)을 말하며, 代宗의 장자이다. 大歷 14년(779)에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 중에 藩鎭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德宗 또한 그 때문에 梁州(지금의 陝西 漢中)로 도망갔다.
역주9 食犬彘之食 : 宋나라 邵伯溫의 《邵氏聞見録》(卷2)에 의하면 仁宗 朝에 王安石이 知制誥가 되었는데 하루는 꽃구경을 하고 낚시를 하고 内侍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각기 금접시에 낚시 미끼를 담아 상 위에 놓았더니 王安石은 그것을 다 먹었다. 다음날 皇帝가 宰輔에게 이르기를 “王安石은 남을 속이는 사람이다. 거짓으로 낚시 미끼를 먹게 하였더니 〈다른 사람들은〉 한 입만 먹어보고는 그만 먹는데 王安石은 다 먹었으니 진정이 아니다.”라며 황제는 기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역주10 囚首喪面 : 韓琦가 知揚州로 있을 때 王安石은 막 급제하여 僉判이 되었는데, 매번 글을 읽다가 아침이 되었으며 대충 선잠을 자다 해가 이미 높이 떠서야 관청에 갔으며 거의 세수와 양치를 하지 않았다. 韓琦는 王安石의 나이가 아직 어린 것을 보고 밤마다 술을 마시고 방종하는 것으로 의심했다. 하루는 조용하게 王安石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나이가 어리니 책 읽는 것을 그만두지 말고 자포자기하지 말라.” 하니 王安石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邵氏聞見録 卷9》
역주11 豎刁易牙開方 : 이 일은 《史記》 〈齊太公世家〉에 보인다. 이 세 사람은 모두 齊나라의 신하이다. 豎刁는 桓公을 섬겨 桓公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스스로 宮刑을 받아 寵臣이 되었으며 아울러 共姬(長衛姬)의 총애도 받았다. 桓公이 죽자 易牙와 함께 총애를 믿고 뭇 관리들을 죽이고 公子 無詭를 임금으로 세웠다. 易牙는 ‘雍巫’라고도 하며 桓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기의 아들을 삶아 바쳤으며 桓公의 총애를 받았다. 開方은 桓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버이를 저버렸으며 만년에 桓公의 총애를 받았다. 원래는 衛나라의 公子였으나 千乘의 君位를 버리고 桓公의 신하가 되어 섬겼다고도 한다. 齊 孝公 10년(B.C. 633)에 孝公이 죽자 開方은 孝公의 아우 潘을 도와 孝公의 아들을 죽이고 왕으로 세웠다.
역주12 孫子曰……無赫赫之功 : 《孫子兵法》 〈形篇〉에 나오는데, “그러므로 잘 싸우는 자가 이긴 것은 智謀가 있다는 名聲도 없고 勇敢한 功勞도 없다.[故善戰之勝也 無智名 無勇功]”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해 曹操는 “적병이 형세를 채 이루기 전에 이기면 혁혁한 공이 없다.[敵兵刑未成 勝之無赫之功也]”라고 注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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