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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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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1.
11. 항적項籍을 논함
蘇氏父子 往往按事後成敗하여 立說이나 而非其至
소씨蘇氏 부자父子는 왕왕 사후事後성패成敗에 의거해서 자신의 견해를 세웠지만 적절한 데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나 其文特雄하여 近戰國策이라
그러나 그 문장만은 뛰어나 《전국책戰國策》에 가깝다.
吾嘗論項籍 有取天下之才 而無取天下之慮 曹操 有取天下之慮 而無取天下之量이요 劉備 有取天下之量이나 而無取天下之才
나는 일찍이 “항우項羽는 천하를 취할 재능才能은 있으나 천하를 취할 책략策略이 없고, 조조曹操는 천하를 취할 책략策略은 있으나 천하를 취할 도량度量이 없으며, 유비劉備는 천하를 취할 도량度量은 있으나 천하를 취할 재능才能이 없었다.”라고 논평한 적이 있다.
終其身無成焉이라
그러므로 이 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성공할 수 없었다.
且夫不有所棄 不可以得天下之勢 不有所忍이면 不可以盡天下之利
또한 대저 버리는 것이 있지 않으면 천하의 대세大勢를 얻을 수 없고, 인내하는 바가 있지 않으면 천하의 이익利益을 다 차지할 수 없다.
是故 地有所不取 城有所不攻이요 勝有所不就 敗有所不避
이 때문에 땅도 취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고, 도 공격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으며, 승리할 수 있어도 나아가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실패할 수 있어도 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其來不喜하고 其去不怒하여 肆天下之所爲하여 而徐制其後 乃克有濟
와도 기뻐하지 않고 떠나도 성내지 아니하여, 천하 사람들이 하는 대로 놓아두었다가 서서히 그 뒤를 제압하면 이에 성공할 수 있다.
嗚呼 項籍 有百戰百勝之才하니 無惑也
아아! 항우項羽백전백승百戰百勝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해하垓下에서 죽었으니, 의아해할 것이 없다.
한대 見其慮之不長하고 量之不大하여 未嘗不怪其死於垓下之晚也
나는 거록鉅鹿에서 그가 한 싸움을 관찰해보았는데, 그의 책략이 장구하지도 않고 도량도 크지 않음을 보고서, 그가 그렇게 늦게 해하垓下에서 죽은 것을 괴이하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니 籍於此時 若急引軍趨秦하여 及其鋒而用之 可以據咸陽하여 制天下
항우項羽황하黃河를 건너고 있을 때에, 유방劉邦은 비로소 군대를 정돈하여 함곡관函谷關으로 향하기 시작하였으니, 항우項羽가 이때에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나라로 나아가, 병사의 사기가 충만했을 때에 용병用兵을 했더라면 함양咸陽(의 수도)을 차지하여 천하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不知出此하고 而區區與秦將으로 爭一旦之命하고
이러한 계책을 낼 줄도 모르고 속 좁게 나라 장군과 보잘것없는 승부를 다투고, 이미 거록鉅鹿을 온전히 차지하고서도 하남河南신안新安 사이를 배회하다가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니, 유방劉邦함양咸陽에 입성한 지가 수개월이나 되었다.
하니 則其勢不得强而臣이라
나라 사람들은 이미 유방劉邦에게 편안함을 느끼고 항우項羽에게는 적개심을 느꼈으니, 그렇다면 그 형세상 〈나라 사람을〉 항우項羽에게 억지로 복종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우項羽는 비록 유방劉邦한중漢中 땅으로 옮기기는 하였지만, 그는 끝내 팽성彭城에 도읍을 정함으로써 유방劉邦이 다시 삼진三秦을 평정할 수 있게 하였으니, 그렇다면 천하의 대세는 나라에 있었지 나라에 있지 않았다.
楚雖百戰百勝이라도 尙何益哉
나라가 비록 백전백승할 수 있더라도 오히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曰 兆垓下之死者 鉅鹿之戰也라하니라
그러므로 “해하垓下에서 죽음이 예견된 것은 거록鉅鹿의 싸움이었다.” 하겠다.
或曰 雖然이나 籍必能入秦乎아하니
어떤 사람이 물었다. “비록 그러하나 항우項羽가 모름지기 나라로 들어갈 수는 있었을까?”이에 대답하였다.
謂楚不足慮 移兵伐趙하니 有輕楚心하여 而良將勁兵 盡于鉅鹿이라
항량項梁이 죽자, 장한章邯나라는 족히 염려할 것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군대를 옮겨 나라를 쳤으니, 나라를 가볍게 여긴 마음이 있어 뛰어난 장군과 날쌘 병사들을 모두 거록鉅鹿으로 집결시켰던 것이다.
籍誠能以必死之士 擊其輕敵寡弱之師 入之易耳
항우項羽가 진실로 필사의 병사들로, 적을 가볍게 여기고 얼마 되지도 않은 연약한 〈함곡관函谷關나라〉 수비군을 공격했더라면 쉽게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且亡秦之守關 與沛公之守 善否可知也 沛公之攻關 與籍之攻 善否又可知也
또 망해가는 나라가 함곡관函谷關을 지키는 것과 유방劉邦함곡관函谷關을 지키는 것 중 누가 더 잘 지킬지 알 수가 있었을 것이고, 유방劉邦함곡관函谷關을 공격하는 것과 항우項羽함곡관函谷關을 공격하는 것 중 누가 더 잘 공격할지 또한 알 수가 있었을 것이다.
以秦之守 而沛公攻入之하고 沛公之守 而籍攻入之하니 然則亡秦之守 籍不能入哉
나라가 지키는데 유방劉邦이 공격해 들어갔고, 유방劉邦이 지키는데 항우項羽가 공격해서 들어갔으니, 그렇다면 망해가는 나라가 함곡관函谷關을 지키는데 항우項羽가 들어갈 수 없겠는가?”
或曰 秦可入矣 如救趙何오하니
어떤 사람이 물었다. “나라로 들어가면, 나라를 구원하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曰 虎方捕鹿한대 羆據其穴하여 搏其子 虎安得不置鹿而返 返則碎於羆明矣
이에 대답하였다. “호랑이가 사슴을 잡으려 하고 있는데, 곰이 호랑이굴을 점거하여 그 새끼를 잡으려 한다면, 호랑이가 어찌 사슴을 놓아두고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돌아오면 곰에게 박살날 것은 분명하다.
병서兵書에 이른바 ‘그들이 반드시 구원할 곳을 공격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使籍入關이면 必釋趙自救
항우項羽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라 장군〉 왕리王離섭간涉間이 반드시 나라를 버리고 스스로 구원하러 올 것이다.
籍據關逆擊其前하고 趙與諸侯救者十餘 躡其後 覆之必矣
항우項羽함곡관函谷關을 점거하여 그들의 앞을 막아 공격하고 나라와 구원에 나섰던 십여 명의 제후諸侯 군대가 그들의 뒤를 밟는다면, 그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是籍一擧解趙之圍하고 而收功於秦也
이렇게 해야 항우項羽는 일거에 나라의 포위를 풀게 할 수 있고, 나라에서도 을 거둘 것이다.
전국시대에, 나라가 나라를 공격하니 나라가 나라를 구원하였다.
田忌引兵하여 疾走大梁하니 因存趙而破魏
나라〉 전기田忌가 군대를 이끌고 재빨리 〈나라 수도인〉 대량大梁으로 들어가니, 이로 인해 나라를 보존시키고 나라를 깰 수 있었다.
號知兵이나 殊不達此하고 屯安陽不進하여 而曰待秦敝라하니 吾恐秦未敝 而沛公先據關矣
송의宋義 같은 이는 용병用兵을 안다고 하지만 전혀 이런 이치를 깨우치지 못하고 안양安陽에 주둔하여 나아가려 하지 않으면서 ‘적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린다.’고 하였으니, 나는 나라가 피로해지기도 전에 유방劉邦이 먼저 함곡관函谷關을 점거할까 두렵다.
籍與義俱失焉이라
항우項羽송의宋義는 다 실책한 것이다.”
是故 古之取天下者 常先圖所守
이 때문에 옛날 천하를 취하려는 자는 늘 지킬 곳을 먼저 도모하였다.
한대 吾知其無能爲也
제갈공명諸葛孔明형주荊州를 버리고 서촉西蜀으로 갔는데, 나는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임을 알았다.
且彼未嘗見大險也 彼以爲者可以不亡也
게다가 그는 일찍이 이처럼 큰 험지를 본 적이 없었으니, 그는 검문劒門이란 곳을 의지하면 망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吾嘗觀蜀之險한대 其守不可出하고 其出不可繼하니 兢兢而自完 猶且不給이어늘 而何足以制中原哉
나는 일찍이 의 험준함을 살펴보았는데, 그곳을 지키면 나올 수가 없고 그곳을 나오면 〈후원군을〉 계속해서 보낼 수가 없으니, 전전긍긍하며 자신을 보존하기에도 오히려 또한 넉넉하지 않거늘, 어찌 족히 중원中原을 제압할 수 있겠는가?
若夫 沃土千里 洪河大山이니 眞可以控天下어늘 又烏事夫不可以措足如劍門者而後 曰險哉
의 옛 도읍 같은 곳은 옥토沃土가 천 리에 걸쳐 있고 큰 강과 높은 산이 있으니 진실로 천하를 통제할 수 있거늘, 또한 어찌하여 발도 편히 둘 수 없는 검문劒門 같은 곳을 기반으로 한 뒤에 ‘험하구나!’라고 한단 말인가!
今夫富人必居四通五達之都하여 使其財布出於天下然後 可以收天下之利
지금 부자들은 반드시 사통팔달四通八達의 도시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재부財富를 천하에 유통시킨 뒤에 천하의 이익을 모두 거두어들인다.
有小丈夫者 得一金하여도 櫝而藏諸家하여 拒戶而守之
졸장부는 일금一金만 얻어도 함 속에 넣어 집안에 감추어두고서 문을 걸어 잠그고 그것을 지킨다.
嗚呼 是求不失也 非求富也
아아! 이것은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지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大盜至하여 劫而取之 又焉知其果不失也리오
큰 도적이 들어 겁탈하여 가져가버리면, 또한 어찌 과연 잃어버리지 않을 것인지 알겠는가?
역주
역주1 項籍 : 이 글은 項羽가 천하를 차지하지 못한 실책을 밝힌 것이다. 蘇洵은 먼저 ‘項羽가 百戰百勝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끝내 천하를 얻지 못한 것은 천하를 취할 재능은 있으나 천하를 취할 책략이 없었기 때문이다.’라 정의를 내리고, 구체적으로 魏나라가 趙나라를 공격했을 때에, 齊나라가 비어 있는 魏나라 수도 大梁을 공격함으로써 趙나라도 구원하고 魏나라도 패배시킨 그런 책략을 취하여, 項羽도 바로 秦나라 수도 咸陽을 공략하여 천하를 취해야 했지만, 項羽에게는 그런 책략이 없었다는 것이다.
역주2 三人 : 《嘉祐集》에는 ‘三人者’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저본을 따랐다.
역주3 死于垓下 : 秦末 楚‧漢이 천하를 다투다가 項羽는 垓下에서 劉邦에게 포위되어 烏江 가에서 자살하였다. 垓下는 지명이다.
역주4 吾觀其戰於鉅鹿 : B.C. 207년, 秦나라 장수 章邯이 項梁의 군대를 격파한 후, 楚軍을 보고 趙나라를 공격하자 趙王이 鉅鹿城으로 도망하였다. 章邯과 부장 王離‧涉間이 鉅鹿城을 포위하니, 楚 懷王이 宋義를 上將軍으로, 項羽를 次將으로 삼아 북으로 趙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楚軍이 安陽에 이르자 宋義는 秦軍을 두려워하여 진영에 머문 채 40여 일을 관망하면서 종일 友人들과 술만 마셨다. 項羽가 화가 나서 宋義를 죽이고, 漳河를 건너 鉅鹿에서 秦軍과 싸워 秦軍을 대파하였다. 《史記 項羽本紀》 저본에는 ‘吾於其戰鉅鹿’이라고 되어 있으나, 《嘉祐集》에 따라 ‘吾觀其戰於鉅鹿’으로 바꾸었다.
역주5 方籍之渡河 沛公始整兵向關 : 楚 懷王이 宋義와 項羽를 보내 趙나라를 구원하도록 할 때에, 劉邦에게는 서쪽으로 函谷關을 공략하여 서로 호응하게 하였다. 懷王이 諸將들이 출발하기 전에 먼저 咸陽(秦의 수도)을 점령하는 사람에게 그곳 제후왕으로 봉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項羽가 章邯과 싸우고 있을 때 劉邦이 이미 高陽‧陳留‧南陽‧武關을 거쳐 서쪽 秦나라 땅으로 들어가 灞上에 주둔하자 秦의 왕자 嬰이 劉邦에게 투항하였다. 《史記 項羽本紀》
역주6 旣全鉅鹿……入咸陽數月矣 : 項羽가 鉅鹿에서 秦軍을 대파했을 때에, 章邯의 軍은 項羽의 軍과 대치하다가 秦나라 내부의 갈등으로 章邯이 투항하려 할 때에 項羽의 공격을 받고 패하였다. 項羽는 이 뒤에도 바로 咸陽으로 향하지 않고 新安으로 가서 항복한 秦軍 20만을 땅에 묻어 죽였다. 이때 劉邦은 咸陽에 입성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史記 項羽本紀》
역주7 夫秦人……而讐籍 : 劉邦은 咸陽에 입성한 후 秦나라 府庫의 재물을 그대로 봉해놓고, 군대를 여전히 灞上에 주둔시키며 秦나라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여 세 가지 법만 지킬 것을 약속하였다. 반면에 項羽는 函谷關에 들어온 후 咸陽을 도륙하고 항복한 秦나라 왕자 嬰을 죽였으며, 秦나라 궁실을 불태우고 재물과 부녀자들을 약탈하는 등 劉邦의 태도와는 확연히 달랐다.
역주8 籍雖遷沛公漢中……得還定三秦 : 項羽가 咸陽을 불태운 뒤, 그 참혹한 모습을 보고 동쪽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楚 懷王을 義帝로 높이고 제장들을 侯王으로 세운 뒤,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동으로 가서 아홉 개의 郡을 통할하며 彭城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한편 劉邦을 漢王에 봉하고 巴‧蜀 땅을 거느리게 하고, 秦나라 옛 땅을 三分하여 秦나라의 항복한 장수에게 주고서 劉邦이 東進하는 것을 막게 하였다. 그 후 B.C. 206년 漢王 劉邦은 韓信의 계책에 따라 漢中으로 돌아와 三秦을 평정하고 項羽와 천하를 다투었다. 《史記 項羽本紀》 三秦이란 지금의 陝西省 중북부 일대로 秦나라의 옛 땅이다. 項羽가 入關한 후 세 곳으로 쪼개어 章邯을 雍王으로 봉하여 咸陽 서쪽 땅을 다스리게 하고, 司馬欣을 塞王으로 봉하여 咸陽 서쪽 땅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董翳를 翟王에 봉하여 지금의 陝北 땅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것을 합쳐 三秦이라 하였다.
역주9 項梁 : 秦末 下相 사람으로 楚나라 장수 項燕의 아들이며 項羽의 숙부이다. 項羽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秦나라에 대항하다가 定陶에서 秦나라의 장수 章邯에게 패하여 죽었다.
역주10 章邯 : 秦나라의 장수로 반란군과 싸워 자주 이겼으나, 鉅鹿을 포위하였다가 項羽의 군대에 패하였다. 그 후 楚나라에 항복하여 雍王이 되었다가 劉邦에게 패하여 자살하였다.
역주11 軍志 所謂攻其必救也 : 《孫子兵法》 〈虛實篇〉에 “내가 싸우고자 하면 적이 비록 성루를 높이 쌓고 참호를 깊이 파고 지키고 있어도 우리와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반드시 구원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我欲戰 敵雖高壘深溝 不得不與我戰者 攻其所必救也]”라는 내용이 있다.
역주12 王離涉間 : 王離는 秦나라의 명장 王翦의 손자로 鉅鹿의 싸움에서 項羽에게 사로 잡혔고, 涉間은 鉅鹿의 싸움에서 項羽에게 패하여 분신자살하였다.
역주13 : 옛날 군영의 담장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군대를 대칭한 말이다.
역주14 戰國時……因存趙而破魏 : 魏나라 장수 龐涓이 군대를 거느리고 趙나라를 공격하자 趙나라는 齊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齊나라는 田忌를 장군으로 삼고 孫臏을 軍師로 삼아 趙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孫臏은 魏나라 大軍이 외지에 있어 국내가 텅 빈 것을 알고 田忌에게 魏나라 수도 大梁을 공격할 것을 권하였다. 魏나라 군대가 자신의 수도가 긴박함을 알고 급히 회군하여 桂陵에서 齊나라와 싸웠지만 魏나라는 패하고 龐涓은 죽었다. 《史記 孫武吳起列傳》
역주15 宋義 : 秦나라 말기 楚나라 사람이다. 項梁을 따라 起兵하여 秦나라에 대항하였다. B.C. 207년 章邯이 黃河를 건너 趙나라를 공격하여 鉅鹿을 포위하자 楚 懷王은 宋義를 上將軍으로 삼고 項羽를 次將으로 삼아 趙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宋義가 安陽에 이르러 46일간을 형세만 엿보며 공격하지 않자, 답답하게 여긴 項羽는 宋義가 齊나라와 모의해 楚나라를 배신하려 한다며 그를 살해하였다.
역주16 諸葛孔明 棄荊州而就西蜀 : 孫權‧劉備의 연합군이 赤壁에서 승리한 후 劉備는 본래 荊州를 그대로 차지하고 西蜀을 경영할 생각이었지만, 關羽의 실수로 荊州를 잃어 어쩔 수 없이 西蜀을 근거지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蘇洵은 마치 諸葛孔明이 天下三分의 계획 때부터 蜀나라가 西蜀을 근거지로 삼은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역주17 劒門 : 劒門山에 설치한 關의 이름이다. 劒門山은 梁山이라고도 하는데, 劒門 72峰이 있고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諸葛亮이 劒門關을 설치하고 棧道를 만들었다. 陝西에서 蜀으로 들어오는 목구멍 같은 곳이다.
역주18 秦漢之故都 : 秦나라 수도 咸陽과 漢나라 수도 長安을 말한다. 이곳에는 모두 關中의 비옥한 땅이 있고, 關門으로는 函谷關이 있으며, 東西로는 崤山의 험준함과 華山‧終南山이 있고, 강으로는 黃河‧渭水가 감싸고 있어 나아가면 공격할 수 있고 물러나면 방어할 수 있어 西蜀과는 다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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