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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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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4. 역사歷史에 대한 논문
評隲諸家 如酷吏斷獄이라
제가諸家를 평하여 판정함이 혹리酷吏옥사獄事를 판결하는 것 같다.
或問 子之論史 鉤抉仲尼遷固潛法隱義 善矣
혹자가 물었다. “그대가 역사歷史에 대해 논한 것 중 중니仲尼, 사마천司馬遷, 반고班固의 깊은 법과 숨은 뜻을 찾아낸 것은 좋다.
仲尼則非吾所可評 吾惟意遷固非聖人이나 其能如仲尼 無一可指之失乎
중니仲尼는 내가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다만 생각하기를, 사마천司馬遷반고班固성인聖人이 아니지만, 〈그들이〉 중니仲尼와 같을 수 있다면 하나도 지적할 만한 실수가 없겠는가?”
내가 말했다. “사마천司馬遷잡설雜說을 좋아하여 의 옳고 그른 곳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반고班固는 아첨과 거짓을 귀하게 여겼고 죽음으로 를 지킴을 천하게 여겼다.
大者此旣陳議矣 又欲寸量銖稱以摘其失이면 則煩不可擧이니 今姑告爾其尤大彰明者焉이라
큰 것은 여기서 이미 의논을 펼쳤으며, 또한 아주 미세한 것까지 따져서 그 과실을 가려내려고 한다면 번거로워 들 수가 없으니, 지금은 일단 그대에게 그 가운데 더욱 크고 환히 드러난 것만을 일러주겠다.
遷之辭 淳健簡直하여 足稱一家 而乃裂取六經傳記하여 雜於其間하니 以破碎汩亂其體러라
사마천司馬遷문사文辭는 순박하고 굳세며 간략하고 곧아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할 만하나, 육경六經전기傳記를 찢어서 취하여 그 사이에다 섞어 넣어 그 를 깨뜨리고 부수어 어지럽게 하였다.
五帝三代紀 多尙書之文하고 齊魯晉楚宋衛陳鄭吳越世家 多左傳國語之文이라
오제기五帝紀〉와 〈삼대기三代紀〉에는 《상서尙書》의 문장이 많고, 〈제세가齊世家〉, 〈노세가魯世家〉, 〈진세가晉世家〉, 〈초세가楚世家〉, 〈송세가宋世家〉, 〈위세가衛世家〉, 〈진세가陳世家〉, 〈정세가鄭世家〉, 〈오세가吳世家〉, 〈월세가越世家〉에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국어國語》의 문장이 많으며, 〈공자세가孔子世家〉와 〈중니제자전仲尼弟子傳〉에는 《논어論語》의 문장이 많다.
孔子世家仲尼弟子傳 多論語之文이라 夫尙書左傳國語論語之文 非不善也로되 雜之則不善也니라
대체로 《상서尙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국어國語》, 《논어論語》의 문장이 훌륭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섞어놓아서 훌륭하지 못한 것이다.
今夫繡繪錦縠 衣服之窮美者也 尺寸而割之하여 錯而紉之以爲服이면 則綈繒之不若이니 遷之書 無乃類是乎
지금 저 그림을 수놓은 비단은 의복衣服 가운데 매우 아름다운 것인데 한 자 한 치씩 잘라 섞어서 이어 옷을 만든다면 깁비단만 못하게 된다. 사마천司馬遷의 책이 이와 비슷하지 않겠는가!
그의 〈자서自敍〉에서는 “태사공太史公이 되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태사공太史公이릉李陵를 당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버지와 칭호가 다르지 않은 것이다.
固沒彪之名 不若遷讓美於談이라하나
선유先儒들은 오히려 말하기를 반고班固반표班彪의 이름을 없앤 것은 사마천司馬遷이 아름다움을 사마담司馬談에게 양보한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吾不知遷 於紀 於表 於書 於世家 於列傳 所謂太史公者 果其父耶 抑其身耶
그러나 나는 사마천司馬遷이 〈〉, 〈〉, 〈세가世家〉, 〈열전列傳〉에서 이른바 ‘태사공太史公’이란 것이 과연 그의 아버지인지 아니면 그 자신인지 모른다.
此遷之失也니라
이것이 사마천의 과실이다.
반고班固나라에 대해 찬술하면서 창업創業에서 절필하는 사이에 사마천司馬遷이 논한 것을 답습하여 그 기록에 보탠 것이 반이 넘는다.
且褒賢貶不肖 誠己意也 盡己意而已니라
또한 현자를 기리고 불초한 자를 폄훼함에 자기의 뜻을 성실히 발휘하였는데 자기의 뜻을 다하였을 뿐이다.
今又剽他人之言以足之 彼旣言矣 申言之하니 何益이리오
이제 또 다른 사람의 말을 표절하여 거기에 보태었으며, 저기서 이미 말하였는데 거듭 말을 하니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사마천司馬遷양웅揚雄의 전기를 쓰면서 모두 그들이 썼던 〈자서自敍〉에서 취하여 자잘하게 그 세계世系를 왜곡하여 기술하였다.
固於他載 豈若是之備哉
반고班固가 다른 기록에서 어찌 이와 같이 갖추었겠는가!
彼遷雄自敍可也 己因之非也
사마천司馬遷양웅揚雄의 〈자서〉라면 괜찮으나 자기가 그것을 그대로 쓴 것은 그릇된 것이다.
此固之失也니라
이것이 반고班固의 과실이다.”
或曰 遷固之失旣爾 遷固之後 爲史者多矣 范曄陳壽 實巨擘焉이나이나 亦有失乎
혹자가 말하였다. “사마천司馬遷반고班固의 과실은 이미 그렇다 치더라도 사마천司馬遷반고班固의 후에도 역사를 집필한 자가 많은데, 범엽范曄진수陳壽가 실로 으뜸이지만 또한 과실이 있는가?”
曰 烏免哉리오 曄之史之傳 若酷吏宦者列女獨行 多失其人이라
내가 말하였다. “어찌 면하겠는가! 범엽范曄사서史書(《후한서後漢書》)의 가운데 〈혹리전酷吏傳〉, 〈환자전宦者傳〉, 〈열녀전列女傳〉, 〈독행전獨行傳〉 같은 것은 들어가야 할 인물들을 많이 빠뜨렸다.
간혹 더욱 심한 것은 동선董宣충의忠毅한데 〈혹리전酷吏傳〉에 개괄하였으며, 정중鄭衆여강呂强은 청렴하고 명민하며 곧고 진실된데도 〈환자전宦者傳〉에 개괄하였으며, 채염蔡琰은 치욕을 참아가며 오랑캐의 처가 되었는데 〈열녀전烈女傳〉에 개괄하였으며, 이선李善왕돈王忳인의仁義가 깊고 두터운데 〈독행전獨行傳〉에 개괄하여 넣었으니,
한서漢書》에서 장탕張湯을 〈혹리전酷吏傳〉에 수록하지 않고 《사기史記》에서 요씨姚氏, 두씨杜氏, 구씨仇氏, 조씨趙氏의 무리를 〈유협전遊俠傳〉에 수록하지 않은 것과는 거리가 멀도다.
又其是非頗與聖人異하여 則戒以宋襄之違天이며 則惜張騫班勇之遺佛書
또한 그 시비是非를 가림이 자못 성인聖人과는 다르며, 두무竇武하진何進을 논한 것은 송 양공宋 襄公이 하늘을 어긴 것을 가지고 경계하였으며, 서역西域을 논한 것은 장건張騫반용班勇불서佛書를 빠뜨린 것을 애석히 여겼다.
是欲相將苟免以爲順天乎
이는 구차하게 화를 면하고자 하는 것을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인가?
中國叛聖人以奉戎神乎 曄之失也
중국中國성인聖人을 배반하고 오랑캐의 을 받들겠는가? 이는 범엽范曄의 실수이다.
진수陳壽삼국三國의 역사를 기록할 때 나라는 〈본기本紀〉에 넣고 나라와 나라는 〈열전列傳〉에 넣었다.
夫三國鼎立稱帝하며 魏之不能有吳蜀 猶吳蜀之不能有魏也
대체로 삼국三國정립鼎立하여 칭제稱帝하였으며, 나라가 나라와 나라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은 나라와 나라가 나라를 가질 수 없었던 것과 같다.
壽獨以帝當魏하고 而以臣視吳蜀이니 吳蜀於魏何有而然哉 此壽之失也니라
진수陳壽는 유독 나라를 황제皇帝에 해당시키고, 나라와 나라를 신하臣下로 간주하였으니, 나라와 나라가 나라에 무슨 〈권위가〉 있어서 그렇게 하였던가? 이는 진수陳壽의 실수이다.”
固譏遷失이나 而固亦未爲得이요 曄譏固失이나 而曄益甚이며 至壽復爾
아! 반고班固사마천司馬遷의 과실을 나무랐지만 반고班固 또한 제대로 터득하지 못하였고, 범엽范曄반고班固의 과실을 나무랐지만 범엽范曄은 더욱 심하였으며, 진수陳壽에 이르러 되풀이되었을 따름이다.
史之才誠難矣 後之史 宜以是爲監하여 無徒譏之也니라
역사의 재능은 실로 어렵도다! 나중의 역사는 마땅히 이를 거울삼아 공연히 나무라지 말아야 한다.
역주
역주1 史論 下 : 이 글에서는 司馬遷, 班固, 范曄, 陳壽의 실수를 논하였다.
역주2 遷喜雜說 不顧道所可否 : 司馬遷은 《春秋左氏傳》, 《國語》, 《世本》, 《戰國策》, 《楚漢春秋》와 諸子百家를 널리 취하여 《史記》를 지었는데, 揚雄의 《法言》 〈問神〉에서는 그가 훌륭한 史官의 재질이 있다고 칭찬하였지만 “그 재주가 많은데 어찌 그리 잡박한가!”라 하였고, 班固의 《漢書》 〈司馬遷傳〉에서는 “소략한 곳이 매우 많고 혹 모순되는 곳도 있다.”, “또한 그 是非는 자못 聖人과 다르다.”라 하였다. 그 후에 劉知幾의 《史通》 〈六家〉에서도 그에 대하여 논하기를 “옛 기록을 많이 모아 이따금 잡된 말을 끼워넣었다.”라 하였다.
역주3 固貴諛僞 賤死義 : 《後漢書》 〈班彪列傳贊〉에서는 “班彪와 班固는 司馬遷을 비난하면서 是非가 聖人에 오류가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논의는 늘 죽음으로 지킨 節槪를 배척하였고 正直함을 부정하였으며 殺身成仁의 아름다움을 서술하지 않았으니 仁義를 가벼이 여기고 節槪를 지킴을 천하게 여김이 더욱 심했다.……아아! 古人이 말한 눈과 속눈썹같이 아주 가까운 논의에만 치중한 것이다.”라 하였다.
역주4 其自敍曰……太史公遭李陵之禍 : 〈自敍〉는 〈太史公自序〉를 가리킨다. ‘敍’자는 저본에 ‘序’로 되어 있는데, 《嘉祐集》에 따라 수정하였다. 이는 蘇洵이 부친의 이름인 ‘序’자를 피휘하여 ‘敍’자를 쓴 것이다. 談은 司馬遷의 부친인 司馬談을 가리킨다. 〈自序〉에서는 “喜는 談을 낳았는데, 談은 太史公이 되었다.”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에 그 글을 論次하였다. 7년 만에 太史公(司馬遷)은 李陵의 화를 당하여 포박되어 유폐되었다.”라 하였다. 司馬遷의 〈自序〉에서는 그 부친인 司馬談과 스스로를 太史公이라 한 것이 더 많은데 여기서는 이 예만 들었을 뿐이다.
역주5 先儒反謂 : 劉知幾의 《史通》 〈六家〉에서는 “司馬遷은 《史記》를 지으면서 지금의 임금에게서 끝냈는데 太初 이하로는 빠뜨리고 기록하지 않았다. 班彪는 그에 이어 〈後記〉를 완성하여 前篇을 이었다. 班固는 高祖에서부터 잘라 王莽에게서 끝을 내어……한 史書를 이루고 《漢書》라고 하였다.”라 하였다. 司馬遷은 《史記》에서 그 아버지가 史官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班固는 《漢書》에서 그 아버지가 쓴 《後記》라는 책이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역주6 固贊漢自倉業至麟止之間……以足其書者過半 : 《史記》는 黃帝에서부터 시작하여 武帝가 기린을 잡은 데서 그친다. 《史記索隱》에서는 服虔의 말을 인용하여 “武帝가 雍에 이르러 흰 기린을 잡자 쇠를 부어 기린의 발 모양을 만들었으므로 ‘麟止’라고 하였다(止자는 趾자와 통용됨). 司馬遷이 《史記》를 지으면서 여기서 끝낸 것은 《春秋》가 기린을 잡은 데서 끝나는 것과 같다.”라 하였다. 기린이 잡힌 것은 太初 2년(B.C. 103)인데 그 전의 것에 대해 《漢書》에서는 《史記》의 것을 많이 베꼈다.
역주7 及其傳遷揚雄……屑屑然曲記其世系 : 《漢書》 〈司馬遷傳〉과 〈揚雄傳〉은 모두 그 시조로부터 시작하는데, 거의 司馬遷과 揚雄의 〈自序〉를 베껴 체례가 어긋나게 되었다. 揚雄의 〈自序〉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
역주8 董宣以忠毅 槪之酷吏 : 董宣은 洛陽令이 되어 법대로 湖陽公主의 종을 사형시켰는데, 공주가 光武帝에게 알리자 황제가 노하여 매질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董宣이 이치대로 대답하였지만 光武帝는 끝내 公主에게 사죄하게 하였으며, 董宣은 맞서서 따르지 않았다. 이로부터 호족들을 치니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죽은 후 집에는 보리 몇 되와 부서진 수레 한 대밖에 없었다. 《後漢書 酷吏傳》
역주9 鄭衆呂强以廉明直諒 槪之宦者 : 鄭衆은 사람됨이 계책이 있었는데, 당시 竇憲이 권력을 천단하고 있었으며 朝臣들 가운데 상하간에 그에게 붙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鄭衆만은 왕실에 一片丹心이었으며 누구보다도 먼저 竇憲을 죽이려고 하였다. 呂强은 사람됨이 맑고 충성스러웠으며, 누차 글을 올려 일을 논하였으나 도리어 여러 常侍로부터 참소를 받아 마침내 자살하고 말았다. 《後漢書 宦者傳》
역주10 蔡琰以忍恥妻胡 槪之烈女 : ‘烈’은 《嘉祐集》에는 ‘列’로 되어 있다. 蔡琰은 자가 文姬이며 董祀의 처이자 蔡邕의 딸이다. 興平 연간에 천하가 화란에 휩싸이자 文姬는 오랑캐의 기병에 붙잡혀 南匈奴 左賢王에게 떨어져 오랑캐 땅에서 12년 동안 있으면서 두 아들을 낳았다. 曹操가 사자를 보내어 金과 碧玉으로 속량하고 돌아오게 하여 董祀에게 다시 시집보내었다. 《後漢書 列女傳》
역주11 李善王忳以深仁厚義 槪之獨行 : 李善은 본래 南陽 淯陽의 李元의 家奴였다. 建武 연간에 疫疾이 돌아 李元의 집 사람들이 잇달아 죽고 고아인 李續만 남았는데 태어난 지 수십 일밖에 되지 않았으나 재산은 천만 금이었다. 여러 종들이 李續을 죽이고 그 재산을 나누어 가지려고 하였는데, 李善은 이를 막을 수가 없자 몰래 李續을 업고 도망쳐서 10세가 되도록 먹이고 키워 李善과 함께 本縣으로 돌아가 옛 家業을 닦고 다스렸다. 王忳은 新都 사람으로 일찍이 京師에 갔다가 빈 집에서 한 書生이 병들어 있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보살펴주었다. 書生의 목숨은 이미 경각에 달려 허리춤에 찬 금 열 근을 주고는 죽은 뒤에 장례를 치러주기를 바랐다. 미처 성명을 묻기도 전에 절명했다. 王忳은 즉시 금 1근을 팔아서 장례를 치러주고 나머지 금 9근은 모두 관 밑에 그대로 놓아두었다. 《後漢書 獨行傳》
역주12 前書張湯 : 前書는 곧 《漢書》이다. 《史記》에서는 張湯을 〈酷吏列傳〉에 넣었으나, 《漢書》 〈酷吏傳贊〉에서는 “張湯과 杜周는 자손이 매우 귀하여졌으므로 별도의 傳이 있다.”라 하였다.
역주13 史記姚杜仇趙之徒……遠矣 : 《史記》 〈游俠傳〉에서는 “長安 북쪽 지방의 姚氏, 서쪽 지방의 杜氏, 남쪽 지방의 仇景, 동쪽 지방의 趙他羽公子, 南陽의 趙調 등의 무리는 盜跖과 같은 집단으로 단지 민간에 섞여 살았을 뿐이다. 어찌 거론할 가치가 있겠는가! 이들은 모두 옛날 朱家와 같은 인물이 매우 수치스럽게 여기던 자들이었다.”라 하였다.
역주14 論竇武何進 : 《後漢書》 〈竇何列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竇武의 딸은 桓帝의 왕비가 되고 何進의 누이는 靈帝의 왕비가 되었는데, 당시에는 宦官이 권력을 좌지우지하여 모두 죽일 계책을 세웠으나 실패하여 해를 당하였다. 그 끝에 다음과 같은 論評이 붙어 있다. “竇武와 何進은 元舅라는 자리에 의지하고 정치를 보좌하는 권력에 의거하여 안으로는 太后가 조정에 군림하는 위엄에 기대고 밖으로는 뭇 영웅들의 바람을 타는 듯한 기세를 맞았으나, 끝내 환관들에 의해 일은 어그러지고 몸은 죽었으며 공은 허물어져 마침내 세상이 슬퍼하는 바가 되었다. 어찌 智慧가 부족한데 權勢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겠는가! 《春秋左氏傳》에서 말하기를 ‘하늘이 商을 폐한 지 오래되었는데 主君께서 흥기시키려고 하고 계십니까?’라 하였다. 이는 宋 襄公이 泓에서 패한 까닭이다.” 蘇洵은 宋 襄公이 하늘의 뜻을 어겨 실패한 일과 竇氏‧何氏의 패인을 나란히 든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역주15 論西域 : 張騫은 西漢 때 두 차례 西域으로 出使한 적이 있으며, 班勇은 東漢 때 西域長史를 맡은 적이 있는데 모두 奇功을 세운 적이 있다. 《後漢書》 〈西域傳〉에서는 말하기를 “佛道의 神化가 身毒(印度)에서 일어났으나 두 漢나라(前漢‧後漢)의 方志에는 칭한 것이 없다. 張騫은 다만 땅이 매우 덥고 습하며 코끼리를 타고 싸운다고 기록하였을 따름이다. 班勇은 비록 그들이 浮圖를 받들고 살벌하지 않음을 열거하였으나 문장이 정밀하고 법에 뛰어나며 이끈 공에 대해서는 傳述한 것이 없다.”라 하였다.
역주16 壽之志三國也 紀魏而傳吳蜀 : 曹丕는 漢나라 延康 원년(220)에 황제에 즉위하고 黃初로 改元하였으며, 劉備는 魏나라 黃初 2년(221)에 황제에 즉위하고 章武로 改元하였으며, 孫權은 魏나라 太和 3년(229)에 황제에 즉위하고 黃龍으로 改元하여 三國이 서로 신하에 속하지 않았다. 《隋書》 〈經籍志 正史類敍〉에서는 “晉나라 때 巴西의 陳壽가 三國의 일을 刪集하였는데 魏나라의 황제만 紀로 삼고 그 공신 및 吳와 蜀의 임금은 모두 傳을 짓고 그대로 각각 그 나라별로 分類하여 《三國志》라 하였다.”라 하였다. 宋나라 晁公武의 《郡齋讀書志》에서도 “魏나라는 4紀, 26列傳이고, 蜀나라는 15列傳, 吳나라는 20列傳이다.”라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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