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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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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
十有一年春正月 齊人衛人鄭人盟于惡曹注+惡曹 地 闕 [附注] 林曰 此戰郞之諸侯也 戰稱君 盟稱人 略之也 鄭敗王師 齊滅后之母家 衛亦抗子突而自立 自有參盟 莫甚於惡曹 故略之也
하다
[經]夏五月癸未 鄭伯寤生卒注+同盟於元年 赴以名하다
[經]秋七月 葬鄭莊公注+無傳 三月而葬 速하다
[經]九月 宋人執鄭祭仲注+祭 氏 仲 名 不稱行人 聽迫脅以逐君 罪之也 行人例在襄十一年 釋例詳之 [附注] 林曰 此書執之始하다
突歸于鄭注+突 厲公也 爲宋所納 故曰歸 例在成十八年 不稱公子 從告也 文連祭仲 故不言鄭하다
鄭忽出奔衛注+忽 昭公也 莊公旣葬 不稱爵者 鄭人賤之 以名赴 [附注] 林曰 此書奔之始 忽繫鄭而突不繫鄭 以突爲簒也하다
[經]柔會宋公陳侯蔡叔하야 盟于折注+無傳 柔 魯大夫未賜族者 蔡叔 蔡大夫 叔 名也 折 地 闕 [附注] 林曰 此大夫會盟諸侯之始 故貶之 하다
[經]公 會宋公于夫鍾注+無傳 夫種 郕地하다
[經]冬十有二月 公會宋公于闞注+無傳 闞 魯地 在東平須昌縣東南하다
[傳]十一年春 齊衛鄭宋 盟于惡曹注+宋不書 經闕하다
[傳]楚屈瑕將盟貳軫注+貳軫 二國名 [附注] 林曰 屈瑕 楚大夫 將以師盟之할새 鄖人軍於蒲騷하야 將與隨絞州蓼伐楚師注+鄖國 在江夏 雲杜縣東南 有鄖城 蒲騷 鄖邑 絞 國名 州國 在南郡華容縣東南 蓼國 今義陽棘陽縣東南湖陽城하니 莫敖患之注+莫敖 楚官名 卽屈瑕한대
鬪廉曰 鄖人軍其郊하니 必不誡 且日虞四邑之至也注+虞 度也 四邑 隨絞州蓼也 邑 亦國也리니 君次於郊郢하야 以禦四邑注+君 謂屈瑕也 郊郢 楚地하소서
我以銳師宵加於鄖하리이다
鄖有虞心하고 而恃其城注+恃近其城하야 莫有鬪志하리니 若敗鄖師 四邑必離하리이다
莫敖曰 盍請濟師於王注+盍 何不也 濟 益也 對曰 師克在和 不在衆이라
商周之不敵 君之所聞也注+商 紂也 周 武王也 傳曰 武王有亂臣十人 紂有億兆夷人
成軍以出하니 又何濟焉이리오
莫敖曰 卜之하라 對曰 卜以決疑하나니 不疑何卜고하고 遂敗鄖師於蒲騷하고 卒盟而還注+卒盟貳軫하다
[傳]鄭昭公之敗北戎也注+在六年 齊人將妻之하니 昭公辭하다
祭仲曰 必取之하소서
君多內寵하니 子無大援이면 將不立이요 三公子 皆君也注+子突子亹子儀之母 皆有寵리이다 弗從하다
[傳]夏 鄭莊公卒하다
祭封人仲足有寵於莊公注+祭 鄭地 陳留長垣縣東北 有祭城 封人 守封疆者 因以所守 爲氏하야 莊公使爲卿하니
爲公娶鄧曼하야 生昭公하다
故祭仲立之注+曼 鄧姓하다
宋雍氏女於鄭莊公하니 曰雍姞이라 生厲公注+雍 氏 姞 姓 宋大夫也 以女妻人曰女하다
雍氏宗 有寵於宋莊公이라
故誘祭仲而執之注+祭仲之如宋 非會非聘 見誘而以行人應命하고 曰 不立突하면 將死라하고 亦執厲公而求賂焉하다
祭仲與宋人盟하고 以厲公歸而立之하다.
秋九月丁亥 昭公奔衛하니 己亥 厲公立하다


11년 봄 정월에 제인齊人위인衛人정인鄭人악조惡曹에서 맹약盟約하였다.注+악조惡曹지명地名인데 어디인지 알 수 없어 소재지를 기록하지 않았다.[부주]林: 이는 바로 에서 전쟁한 제후諸侯들이다. 의 전쟁에는 (侯‧)이라 칭했으면서 결맹結盟에는 이라 칭한 것은 생략한 것이다. 나라는 주왕周王의 군대를 패배敗北시켰고, 나라는 왕후王后친가親家나라를 멸망시켰으며, 나라도 〈위혜공衛惠公이〉 자돌子突반항反抗하고서 스스로 임금이 되었으니, 참맹參盟(三國의 맹약盟約)이 있은 뒤로 악조惡曹의 결맹보다 심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생략한 것이다.
여름 5월 계미일에 정백鄭伯오생寤生하였다.注+노환공魯桓公 원년에 동맹同盟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기록해 부고赴告한 것이다.
가을 7월에 정장공鄭莊公장사葬事지냈다.注+이 없다. 3개월 만에 장사 지냈으니, 너무 빨리 장사한 것이다.
9월에 송인宋人나라 채중祭仲을 잡았다.注+이고 은 이름이다. 행인行人이라고 칭하지 않은 것은 위협威脅을 받아 임금을 축출逐出하였기 때문에 그를 징벌懲罰하는 뜻에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행인行人양공襄公 11년에 보이고, 《석례釋例》에도 자세히 언급되었다.[부주]林: 이것이 잡는 것을 기록한 시초이다.
나라로 돌아갔다.注+여공厲公이다. 나라가 들여보냈기 때문에 ‘’라고 한 것이다. 그 성공成公 18년에 보인다. 공자公子라고 칭하지 않은 것은 나라가 통고한 문서文書에 따라 기록했기 때문이다. 글이 채중祭仲과 이어졌기 때문에 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정홀鄭忽나라로 도망하였다.注+소공昭公이다. 정장공鄭莊公을 이미 장사 지냈는데도 홀을 이라는 으로 일컫지 않은 것은 정인鄭人이 그를 천시賤視하여 이름을 기록해 통고하였기 때문이다.[부주]林: 이것이 도망을 기록한 시초이다. 에게는 을 붙이고 에게는 을 붙이지 않은 것은 찬역簒逆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송공宋公진후陳侯채숙蔡叔과 회합하여 에서 결맹하였다.注+이 없다. 나라 대부로 아직 을 받지 못한 자이다. 채숙蔡叔나라 대부인데, 은 그의 이름이다. 은 지명인데 어디인지 알 수 없어 소재지를 기록하지 않았다.[부주]林: 이는 대부가 제후諸侯회맹會盟한 최초의 사례이기 때문에 그를 폄하貶下하였고, 뒤의 공자公子에 대해서는 폄하하지 않았다.
환공桓公송공宋公부종夫鍾에서 회합會合하였다.注+부종夫鍾나라 땅이다.
겨울 12월에 환공이 송공과 에서 회합하였다.注+이 없다. 나라 땅으로 동평東平수창현須昌縣 동남에 있다.
11년 봄에 악조惡曹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에 빠진 것이다.
나라 굴하屈瑕결맹結盟하려할 때注+은 두 나라의 이름이다.[부주]林: 굴하屈瑕나라 대부이다. 군대로 위협하여 맹약盟約을 맺으려 한 것이다. 운인鄖人포소蒲騷에 주둔하여 수국隨國교국絞國주국州國요국蓼國 등 네 나라와 연합해서 초군楚軍을 공격하려 하니,注+운국鄖國강하江夏운두현雲杜縣 동남에 있는데, 그곳에 운성鄖城이 있다. 포소蒲騷나라 이다. 국명國名이다. 주국州國남군南郡화용현華容縣 동남에 있다. 요국蓼國은 지금의 의양義陽극양현棘陽縣 동남의 호양성湖陽城이다. 막오莫敖가 이를 근심하자,注+막오莫敖나라 관명官名인데, 바로 굴하屈瑕를 이름이다.
투렴鬪廉이 말하기를 “운인鄖人은 자기 나라 근교近郊에 주둔하였으므로 반드시 경계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고, 또 날마다 사읍四邑의 군대가 오기를 바랄 것이니,注+는 헤아림이다. 사읍四邑이다. 이다. 께서는 교영郊郢에 주둔하여 사읍의 군대를 막으십시오.注+굴하屈瑕를 이름이다. 교영郊郢나라 땅이다.
나는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가서 밤에 운국鄖國를 공격하겠습니다.
운국鄖國사읍四邑의 군대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고 또 그 을 믿고서注+과 가까운 것을 믿는 것이다. 싸우려는 뜻이 없을 것이니, 만약 운국隕國의 군대를 패배시킨다면 네 나라의 군대도 반드시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막오莫敖가 말하기를 “어찌 초왕楚王에게 증원군增援軍을 요청하지 않는가?注+은 ‘하불何不’(어찌 아니)의 뜻이다. 는 더하는 것이다.”라고 하니, 투렴鬪廉이 대답하기를 “전쟁의 승리는 군대의 화합에 있지 군대의 다과多寡에 있지 않습니다.
군대가 많았던 나라가 군대가 적었던 나라의 대적對敵이 되지 못했던 것은 께서도 들어 아실 것입니다.注+이고 무왕武王이다. 옛 기록에 “무왕武王에게는 치국治國한 신하 10인이 있고, 에게는 억조億兆의 평범한 사람이 있다.”라고 하였다.
충분한 군대를 편성編成하여 나왔는데, 또 군대를 증원增員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막오莫敖가 “점을 쳐보라.”라고 하니, 투렴이 대답하기를 “점은 의심스러운 일을 결정하기 위해 치는 것이니, 의심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점을 치겠습니까?”라고 하고는 드디어 포소蒲騷에서 운군鄖軍을 패배시키고서 예정대로 양국兩國결맹結盟하고 환국還國하였다.注+끝내 맹약盟約을 맺었다는 말이다.
정소공鄭昭公북융北戎의 군대를 패배敗北시켰을 때注+환공桓公 6년에 보인다.제인齊人이 딸을 그의 아내로 주고자 하니, 소공昭公은 사양하였다.
그러자 채중祭仲소공昭公에게 말하기를 “반드시 취하십시오.
현재 임금께는 사랑하는 여자가 많으니 세자世子(昭公)께 강력한 외원外援이 없으면 임금이 될 수 없을 것이고, 세 공자公子가 모두 임금이 될 가망이 있습니다.注+자돌子突자미子亹자의子儀모친母親들이 모두 정장공鄭莊公의 총애가 있었다.”고 하였으나 소공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여름에 정장공鄭莊公하였다.
당초에 봉인封人중족仲足장공莊公에게 총애을 받아注+나라 땅이다. 진류陳留장원현長垣縣 동북에 제성祭城이 있다. 봉인封人은 국경을 지키는 자인데, 지키는 땅의 이름을 로 삼은 것이다.장공莊公이 그를 으로 삼았다.
채중祭仲이 장공을 위해 등만鄧曼부인夫人으로 맞이하게 하였는데 등만이 소공昭公을 낳았다.
그러므로 장공이 죽은 뒤에 채중祭仲소공昭公을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注+나라의 이다.
나라 옹씨雍氏도 딸 옹길雍姞정장공鄭莊公에게 시집보내어 여공厲公을 낳았다.注+이고 이다. 나라 대부이다. 딸을 남의 아내로 주는 것을 ‘’라 한다.
옹씨雍氏의 종족이 송장공宋莊公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므로 채중祭仲나라로 유인誘引하여 억류抑留하고서注+채중祭仲나라로 간 것은 회합會合 때문도 아니고 빙문聘問 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유인되어 행인行人(使臣)으로서 나라의 명을 따른 것뿐이다.을 임금으로 세우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또 여공厲公까지 억류하고 뇌물賂物을 요구하였다.
채중祭仲송인宋人맹약盟約하고서 여공厲公을 데리고 돌아가서 임금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가을 9월 정해일에 소공이 나라로 도망가니 기해일에 여공厲公이 즉위하였다.


역주
역주1 十有一年春正月……盟于惡曹 : 周王이 子突을 보내어 衛나라 임금으로 있는 黔牟를 救援하게 하였으나, 衛惠公은 王師에 대항해 勝戰하고서 衛나라로 들어가 검모를 추방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春秋左傳莊公六年傳》
역주2 至公子結不貶 : 公子結이 陳나라 임금에게 出嫁하는 여자의 媵妾으로 가는 魯나라의 딸을 護送해 陳나라로 가다가 齊侯와 宋公이 會盟한다는 말을 듣고는 맡은 任務를 버리고서 會盟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貶下하지 않은 것은 最初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春秋左傳莊公十九年經》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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