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봄 주왕周王 정월에 초구楚丘에 성을 쌓았다.注+초구楚丘는 위衛나라 읍邑이다. 위衛에 성城을 쌓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위衛나라가 아직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주]林: 노魯나라가 성城을 쌓아 준 것으로 기록한 것은 위衛나라를 봉封해 준 일로 제환공齊桓公을 허물하지 않은 것이니, 이를 천하天下의 공의公義로 여긴 것이다. 제환공齊桓公을 찬미讚美한 〈목과木瓜〉 시詩와 위문공衛文公을 찬미한 〈정중定中〉 시詩로 보면 《춘추春秋》에 “초구楚丘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좋은 뜻의 말임을 알 수 있다.
여름 5월 신사일에 우리 소군小君애강哀姜을 장사葬事 지냈다. 注+전傳이 없다. 반곡反哭 등의 예禮를 갖추어 상喪을 치렀기 때문에 소군小君이라고 칭한 것이다. 예例가 정공定公 15년에 보인다.
우사虞師와 진사晉師가 하양下陽을 멸滅하였다.注+하양下陽은 괵虢나라 읍邑으로 하동河東대양현大陽縣에 있다. 진晉나라가 이때에 비로소 통고通告하였기 때문에 경經에 드러낸 것이다. 멸滅의 예例는 양공襄公 13년에 보인다.
가을 9월에 제후齊侯‧송공宋公‧강인江人‧황인黃人이 관貫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관貫은 송宋나라 땅이다. 양梁나라 몽현蒙縣 서북에 세성貰城이 있는데, 세貰와 관貫은 글자가 서로 비슷하다. 강江나라는 여남汝南안양현安陽縣에 있다. [부주]林: 이것도 의상지회衣裳之會이지만 구합九合의 수數에는 들지 않는다.
2년 봄에 제후諸侯가 초구楚丘에 성을 쌓고서 위衛나라를 그 곳에 봉封하였다.注+임금이 죽고 나라가 멸망하였기 때문에 전傳에 봉封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경經에 회합會合한 제후諸侯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노희공魯僖公이 뒤늦게 갔기 때문이다. 注+제후諸侯가 회합會合을 마친 뒤에 노희공魯僖公이 갔기 때문에 제때에 미쳐 가지 못한 것을 숨기려 하였다. 그러므로 노魯나라가 단독으로 성을 쌓은 것으로 글을 만든 것이다.
傳
진晉나라 순식荀息이 굴屈에서 생산生産되는 네 필匹의 말과 수극垂棘에서 나는 옥玉을 우虞나라에 주고서 길을 빌려 괵虢나라 치기를 청請하자,注+순식荀息은 순숙荀叔이다. 굴屈에서는 좋은 말이 생산生産되고, 수극垂棘에서는 아름다운 옥玉이 생산生産된다. 그러므로 굴屈의 말과 수극垂棘의 옥玉이라고 명칭을 한 것이다. 말 네 필匹을 승乘이라 한다. 진晉나라에서 괵虢나라로 가려면 우虞나라를 경유經由해야 하기 때문에 길을 빌리려 한 것이다.진헌공晉獻公이 말하였다.
“이것은 나의 보물이니 줄 수 없다.”
순식荀息이 대답하였다.
“만약 우虞나라에게 길을 빌릴 수 있다면 이 물건을 밖의 창고에 잠시 보관하는 것과 같습니다.”注+[부주]林: 부府는 창고倉庫이다. 옥玉과 말을 우虞나라에 준다 하더라도 종당에는 우虞나라를 격멸擊滅하고서 도로 취할 수 있으니, 이는 마치 밖의 창고에 잠시 맡겨 두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잃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헌공獻公이 말하였다.
“우虞나라에는 궁지기宮之奇가 있으니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注+궁지기宮之奇는 우虞나라의 충신忠臣이다.
순식荀息이 대답하였다.
“궁지기宮之奇는 사람됨이 유약柔弱하여 강력히 간諫하지 못할 것이고,注+나懦는 나약함이다. 또 어려서부터 우군虞君과 함께 궁중宮中에서 자랐기 때문에注+[부주]林: 궁지기宮之奇가 어려서부터 공궁公宮에서 자랐다는 말이다.우군虞君이 그를 임의롭게 대하니, 비록 간諫한다 하더라도 아마[將] 듣지 않을 것입니다.”注+우공虞公은 그를 임의롭게 대하니, 반드시 그의 말을 가벼이 여길 것이라는 말이다.
傳
헌공獻公은 그의 건의建議를 받아들여 순식荀息을 우虞나라로 보내어 길을 빌리게 하였다.
순식荀息이 우인虞人에게 말하였다.
“과거에 기冀나라가 무도無道하게 전령顚軨으로부터 쳐들어와서 명읍鄍邑의 세 성문城門을 공격한 일이 있었는데,注+이에 앞서 기冀나라가 우虞나라를 침공侵攻하여 명읍鄍邑까지 쳐들어왔다. 명鄍은 우虞나라 읍邑이다. 하동河東대양현大陽縣 동북에 전령판顚軨坂이 있다.기冀나라가 이미 쇠약衰弱[病]해진 것은 오직 임금님의 반격反擊 때문입니다.注+우虞나라가 보복해 기冀나라를 쳐서 손실損失을 입혔다는 말이다. 길을 빌리고자 하기 때문에 우虞나라의 강强함을 칭찬하여 우공虞公의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이다. 기冀는 국명國名이다. 평양平陽피씨현皮氏縣 동북에 기정冀亭이 있다. [부주]朱: 기冀나라가 손실損失을 입은 것은 우공虞公이 보복해서 쳤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괵虢나라가 무도無道하게 변방邊方의 역려逆旅에 보루堡壘를 쌓고서注+역려逆旅는 객사客舍이다. 괵虢나라가 사람을 보내어 객사客舍에 분산分散해 있으면서 무리를 모아 진晉나라의 변방邊方읍邑을 노략질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남쪽 변방邊方을 침범侵犯하기 때문에 감히 귀국貴國에 길을 빌려서 괵虢나라의 죄罪를 묻고자 합니다.”注+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괵虢나라가 우리나라를 치느냐고 묻겠다는 말이다.
우공虞公은 길을 허락하고, 또 자기가 먼저 괵虢나라를 치기를 청하였다.注+후한 뇌물에 마음이 기뻐서 진晉나라에게 잘 보이고자 한 것이다.
궁지기宮之奇가 간諫하였으나 우공虞公은 듣지 않고서 드디어 군대를 일으켰다.
傳
여름에 진晉나라 이극里克과 순식荀息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우사虞師와 연합聯合해 괵虢나라를 쳐서 하양下陽을 멸滅하였다.注+진晉나라가 군대를 지휘指揮한 것은 우虞나라를 믿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경經에 우虞를 먼저 기록한 것은 우虞나라가 진晉나라의 뇌물을 탐하였기 때문이다.注+우虞나라가 전쟁을 주창主唱한 주체主體가 아닌데도 우虞나라를 먼저 기록한 것은 뇌물을 탐한 것을 미워해서이다.
傳
가을에 관貫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강江나라‧황黃나라가 제齊나라에 복종하였기 때문이다.注+강江나라와 황黃나라는 초楚나라의 맹방盟邦이었는데, 이때 비로소 와서 제齊나라에 복종하였기 때문이 제후諸侯와 회합會合한 것이다.
傳
제齊나라 시인寺人초貂가 비로소 다어多魚에서 군사기밀軍事機密을 누설漏泄하였다.注+시인寺人은 내엄관內奄官(宦官) 수초竪貂이다. 다어多魚는 지명地名인데 소재지所在地를 알 수 없으므로 생략하고 기록하지 않았다. 제환공齊桓公은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 안으로는 부인夫人처럼 사랑하는 여인女人이 여섯이었고, 밖으로는 수초竪貂‧역아易牙 등을 총애寵愛하였는데, 끝내 이로 인해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전傳의 말은 수초竪貂가 이때부터 비로소 존귀尊貴와 총애寵愛를 독차지하여 제환공齊桓公의 군사기밀軍事機密을 누설漏泄함으로써 제齊나라가 어지러워지는 장본張本이 되었다는 뜻이다.
傳
괵공虢公이 상전桑田에서 융戎을 패배敗北시키니,注+상전桑田은 괵虢나라 땅으로 홍농弘農협현陜縣 동북에 있다.진晉나라 복언卜偃이 말하였다.
“괵虢나라는 반드시 망亡할 것이다.
하양下陽을 잃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또 전쟁하여 공功을 세웠으니, 이는 하늘이 그의 거울을 빼앗아注+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이다. [부주]朱: 감鑒은 경鏡이니, 하늘이 괵공虢公의 거울을 빼앗아 길흉을 비추어 볼 수 없게 하였다는 말이다. 그의 죄악을 더하게 한 것이다.注+교만하면 죄악이 생긴다는 말이다.
그는 반드시 진晉나라를 경시輕視하여 백성을 돌보지 않을 것이니, 5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注+임稔은 익는 것이다. 아래 노희공魯僖公 5년에 진晉나라가 괵虢나라를 격멸擊滅한 장본張本이다.
傳
겨울에 초인楚人이 정鄭나라를 토벌하였다.
투장鬪章이 정鄭나라의 담백聃伯을 포로로 잡았다.注+경經에는 ‘침侵’이라고 기록하였는데 전傳에는 ‘벌伐’이라고 기록한 것은 초楚가 본래는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으나, 형편에 따라 수단을 바꾸어 침략侵掠하였기 때문이다. 후년後年에 초楚나라가 정鄭나라를 토벌하니 정백鄭伯이 화친和親하고자 한 장본張本이다.
역주
역주1木瓜 :
狄人에게 敗亡하여 漕邑으로 나가 있는 衛나라를 齊桓公이 救援해 楚丘에 封해 주고, 車馬와 器服 등을 보내 주니, 衛人이 그 은혜를 생각하여 지은 詩로 《詩經》 〈衛風〉에 실려 있다.
역주2定中 :
衛나라가 狄人에게 敗亡한 뒤에 齊桓公에 의해 楚丘에 封해지자, 衛文公이 비로소 楚丘에 城邑을 建設해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니, 衛人들이 기뻐하여 지은 詩로 《詩經》 〈鄘風〉에 실려 있다.
역주3兵[丘] :
저본에는 ‘兵’으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丘’로 바로잡았다.
역주4例在定十五年 :
定公 15년 傳에 “小君이라고 칭하지 않은 것은 禮를 갖추어 장사 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역주5滅例在襄十三年 :
襄公 13년 傳에 “大軍을 일으켜 공격하는 것을 滅이라 한다.”고 하였다. 조선 朴致遠의 《雪溪隨錄》에 “下陽을 滅한 것만을 기록하고 虢나라를 멸한 것은 기록하지 않은 것은 ‘下陽은 虢나라의 國都이다.’고 한 公羊氏의 說이 옳은 듯하다. 下陽을 잃은 뒤에 虢나라는 衰微하여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고, 또 얼마 뒤에 망하였기 때문에 經에 虢나라를 滅하였다고 기록하지 않고 下陽을 滅하였다고 기록한 것이다.”고 하였고, 또 徐壽錫의 《潁水全書》에 “下陽은 虞나라와 虢나라에 있어 要塞의 邑이기 때문에 下陽이 滅亡하면 虞나라와 虢나라는 따라서 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虞나라와 虢나라의 滅亡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고 하였다.
역주6九合之數 :
《史記》에는 齊桓公의 九合諸侯에 兵車之會가 세 번이고, 衣裳之會가 여섯 번이라고 하였는데, 林氏는 九合을 모두 衣裳之會로 보았다.
역주7諸侯城楚丘而封衛焉 :
朴致遠의 《雪溪隨錄》에 “楚丘는 衛나라 邑인데 經에 魯나라가 성을 쌓았다고 하였으니, 魯人이 가서 성을 쌓은 것을 알 수 있고, 魯人이 가서 성을 쌓았다면 각 諸侯國의 사람들도 가서 성을 쌓은 것을 알 수 있으며, 諸侯가 衛나라 邑에 모여 성을 쌓았다면 衛나라를 위해 쌓은 것임을 알 수 있고, 衛나라를 위해 성을 쌓았다면 齊桓公이 主導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齊桓公을 말하지 않은 것은 그가 天子의 命도 없이 임의로 衛나라를 봉해 준 것을 좋게 여기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역주8代[伐] :
저본에는 ‘代’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伐’로 바로잡았다.
역주9於[欲] :
저본에는 ‘於’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欲’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0驕則生疾 :
疾은 罪惡의 뜻이다. 하늘이 虞公에게서 善惡을 判別할 수 있는 지혜[鑑]를 빼앗았기 때문에 虞公은 많은 罪惡을 저질러 나라를 망칠 것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