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二十有八年春王三月甲寅
에 제인齊人伐
위衛하니 위衛제인人及
제인齊人戰
타가 위衛제인人敗績
注+제인齊侯稱제인人者 諱取賂而還 以賤者告 不地者 史失之하다
[經]夏四月丁未
에 주자邾子𤨏卒
注+無傳 未同盟而赴以名하다
[經]秋
에 형荊伐
정鄭하니 장공公會齊人宋人救
정鄭注+[附注] 林曰 諸侯救 始此하다
[經]冬
에 築
미郿注+미郿 魯下邑 傳例曰 邑曰築하다
[經]大無麥禾
注+書於冬者 五穀畢入 計食不足而後 書也하다
[經]
장손신臧孫辰告糴于
제齊注+장손신臧孫辰 魯大夫 장손신臧文仲하다
傳
戰
하야 敗
위사衛師하고 數之以
주왕王命
하고 取賂而還
注+[附注] 林曰 言不能正위사衛之罪하다
傳
[傳]
진헌공晉獻公娶于
가국賈나 無子
注+가국賈 姬姓가국國也하고 烝於
제강齊姜注+제강齊姜 武진헌공公妾하야 신생生진목공秦穆夫人及大子
신생申生하고
又娶二女於
융戎하니 대융大戎호희狐姬生
중이重耳注+대융大戎唐叔소융자子孫別在융적戎狄者 [附注] 朱曰 대융大戎 唐叔之後호희姬姓 出自호희狐伯行 故以호희狐爲氏하고 소융자小戎子生
이오夷吾注+소융자小戎 允姓之융戎 소융자子 女也하다
진晉伐
여융驪戎에 여융驪戎男女以
여희驪姬注+여융驪戎 在京兆新豊縣 其君여희姬姓 其爵男也 納女於人 曰女하니 歸
하야 生
해제奚齊하고 其娣生
탁자卓子하다
驪姬
동관폐오嬖하니 欲立其子
하야 賂外
동관폐오嬖양오梁五與
동관폐오東關嬖五注+姓 양오梁 名 양오五 在閨闥之外者 동관폐오東關嬖五 別在동관폐오關塞者 亦名양오五 皆大夫 爲헌공獻公所동관폐오嬖幸 外事하야 使言於
헌공公曰
곡옥曲沃은 君之宗也
注+곡옥曲沃 桓叔所封 先君宗廟所在오 포蒲與二
굴읍屈은 君之疆也
注+포蒲 今平陽포蒲子縣 二굴읍屈 今平陽北굴읍屈縣 或云二當爲北니 不可以無主
니이다
宗邑無主면 則民不威하고 疆埸無主면 則啓융적戎心이니
若使大子主
곡옥曲沃하고 而
중이重耳이오夷吾主
포蒲與
굴屈이면 則可以威民而懼
융적戎이오 且旌君伐
注+旌 章也 伐 功也이리이다
使俱曰
융적狄之廣莫
이 於
진晉爲都
니 진晉之啓土
가 不亦宜乎
注+廣莫 융적狄地之曠絶也 卽謂포蒲子北굴屈也 言遣二헌공公子出都之 則진晉方當大開土界 헌공獻公未決 故復使二五俱說此美잇가
진후晉侯說之
하야 夏
에 使大子居
곡옥曲沃하고 중이重耳居
포성蒲城하고 이오夷吾居
굴屈하고 羣公子皆鄙
注+鄙 邊邑하고 唯二姬之子在
강絳하다
二
양오五卒與驪姬譖羣公子而立
해제奚齊하니 진인晉人謂之二
양오五耦
注+二耜相耦 廣一尺共起 言二진인人俱共墾傷진인晉室若此라하다
傳
[傳]
초楚영윤令尹자원子元欲蠱
문부인文夫人注+문부인文王문부인夫人 息嬀也 자원子元 문부인文王弟 蠱 惑以淫事하야 爲館於其宮側
하고 而振萬焉
注+振 動也 萬 舞也 [附注] 林曰 蓋作樂以蠱之하니
夫人聞之
하고 泣曰 先君以是舞也
로 習戎備也
注+[附注] 朱曰 蓋舞有 卽陳法也러니 今
영윤令尹不尋諸仇讎
하고 而於未亡人之側
하니 不亦異乎
注+尋 用也 婦人旣寡 自稱未亡人 [附注] 林曰 仇讎 謂鄭也아
御
문부인人以告
자원子元注+御문부인人 문부인夫人之侍문부인人한대 자원子元曰 婦
문부인人不忘襲讎
어늘 我反忘之
注+[附注] 林曰 문부인文夫人乃婦문부인人 尙能不忘討襲仇讎之國 我爲丈문부인夫而反忘仇讎之當討로다
秋
에 자원子元以車六百乘伐
정鄭注+[附注] 朱曰 欲以說息嬀也하야 入于
길질문桔柣之
길질문門注+길질문桔柣 정鄭遠郊之길질문門也하다
자원子元투반鬪御彊
투반鬪梧耿之不比爲旆
注+자원子元自與三자원子 特造以居前 廣充幅長尋 曰旐 繼旐 曰旆하고 투반鬪班王孫游王孫喜殿
注+三자원子在後爲하야 衆車入自
순문純門하야 及
규시逵市注+순문純門 정鄭外郭순문門也 규시逵市 郭內道上규시市나 縣
순문門不發
하고 초楚言而出
이어늘
자원子元曰
정鄭有人焉
注+縣門 施於內城門 정鄭示초楚以閑暇 故不閉城門 出兵而效초楚言 故자원子元畏之 不敢進이라하다
정인鄭人將奔
동구桐丘注+許昌縣東北有同동구丘城러니 諜告曰
초楚幕有烏
注+諜 間也 幕 帳也 [附注] 林曰 大將所居 以幕帳蔽禦風雨 軍衆屯聚 烏不敢止 今초楚幕有烏 知초楚師已遁也라하야늘 乃止
하다.
傳
[傳]冬
에 饑
어늘 장손신臧孫辰告糴于
제齊하니 禮也
注+經書大無麥禾 傳言饑 傳又先書饑在築郿上者 說始糴 經在下 須得糴 嫌或諱饑 故曰禮라
傳
凡邑有宗廟先君之主曰 都
요 無曰 邑
이니 邑曰 築
이요 都曰 城
注+周禮 四縣爲都 四井爲邑 然宗廟所在 則雖邑曰都 尊之也 言凡邑 則非例이라
28년 봄 3월 갑인일에
제인齊人이
위衛나라를 토벌하니,
위인衛人이
제인齊人과 전쟁하다가
위인衛人이
대패大敗하였다.
注+제후齊侯를 ‘인人’이라 칭한 것은 뇌물賂物을 받고 환군還軍한 것을 숨기고 또 미천微賤한 자를 노魯나라에 보내어 통고하였기 때문이다. 전쟁한 지명地名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사관史官이 지명을 잊었기 때문이다.
여름 4월 정미일에
주자邾子쇄𤨏가
졸卒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동맹同盟하지 않았는데도 이름을 기록해 부고하였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가을에
형荊(楚)이
정鄭나라를 토벌하니,
장공莊公이
제인齊人‧
송인宋人과 연합하여
정鄭나라를 구원하였다.
注+[부주]林: 제후諸侯가 서로 구원하는 것이 이때부터 비롯하였다.
겨울에
미郿에 성을 쌓았다.
注+미郿는 노魯나라의 하읍下邑이다. 전례傳例에 “읍邑에 성을 쌓는 것을 ‘축築’이라 한다.”고 하였다.
보리와 벼가 모두
흉작凶作이었다.
注+겨울에 이를 기록한 것은 오곡五穀을 모두 수확收穫해 들여 식량을 계산해 보아 부족한 뒤에야 기록하기 때문이다.
장손신臧孫辰이
제齊나라로 가서
양곡糧穀의
판매販賣를 요청하였다.
注+장손신臧孫辰은 노魯나라 대부 장문중臧文仲이다.
傳
28년 봄에 제후齊侯가 위衛나라를 토벌하였다.
전쟁하여
위사衛師를
패배敗北시키고서
주왕周王의
명命으로
죄罪를 꾸짖고는 뇌물을 받고 돌아왔다.
注+[부주]林: 위衛나라의 죄罪를 다스리지[正] 못했다는 말이다.
傳
진헌공晉獻公이
가국賈國에서 아내를 맞이하였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注+가국賈國은 희성姬姓의 나라이다. 제강齊姜과
간음姦淫하여
注+제강齊姜은 진무공晉武公의 첩妾이다.진목공秦穆公부인夫人과
태자太子신생申生을 낳았고,
또
융戎에서 두 여자를 맞이하였는데,
대융大戎호희狐姬는
중이重耳를 낳고,
注+대융大戎은 당숙唐叔의 자손으로 갈리어 융적戎狄으로 가서 거주居住한 자이다.[부주]朱: 대융大戎은 당숙唐叔의 후손後孫으로 희성姬姓인데, 호백행狐伯行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호狐를 씨氏로 삼았다. 소융자小戎子는
이오夷吾를 낳았다.
注+소융小戎은 윤성允姓의 융적戎狄이다. 자子는 여女이다.
진晉나라가
여융驪戎을 토벌할 때
여융남驪戎男이
여희驪姬를
헌공獻公에게 주니
注+여융驪戎은 경조京兆신풍현新豊縣에 있는데, 그 임금은 희성姬姓이고, 그 작위爵位는 남男이다. 딸을 남에게 주는 것을 ‘여女’라 한다. 그녀를 데리고 돌아왔는데,
여희驪姬는
해제奚齊를 낳고
여희驪姬의 동생은
탁자卓子를 낳았다.
헌공獻公이 여희를
총애寵愛하니, 여희는 제 자식을
태자太子로 세우고자 하여,
외폐外嬖양오梁五와
동관폐오東關嬖五에게 뇌물을 주고서
注+성姓이 양梁이고 이름이 오五인데, 규달閨闥(임금이 거처하는 궁전宮殿의 문門) 밖에 있는 자이다. 동관폐오東關嬖五는 따로 관새關塞(邊方의 관문關門)에 있는 자인데 그 또한 이름이 오五이다. 이들은 모두 대부大夫로서 헌공獻公의 사랑을 받아 외부의 소식을 정탐해 보고하는 자들이다. 그들을 시켜
헌공獻公에게 “
곡옥曲沃은 임금님의
종묘宗廟가 있는 곳이고,
注+곡옥曲沃은 환숙桓叔이 봉封해진 곳으로 선군先君의 종묘宗廟가 있는 곳이다. 포蒲와 두
굴읍屈邑은 임금님의
변경邊境이니,
注+포蒲는 지금의 평양平陽포자현蒲子縣이다. 이굴二屈은 지금의 평양平陽북굴현北屈縣이다. 혹자或者는 “이二는 북北으로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주관主管하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종묘宗廟가 있는 고을에 주관主管하는 사람이 없으면 백성들이 위복威服(두려워 복종함)하지 않고, 변경邊境에 주관主管하는 사람이 없으면 융적戎狄에게 침범할 마음을 갖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융적戎狄이 침범할 생각을 내고 백성들이 임금의 정령政令을 경시輕視하는 것은 국가國家의 우환憂患이니,
만약
태자太子에게
곡옥曲沃을
주관主管하게 하고,
중이重耳와
이오夷吾에게
포蒲와
굴屈을
주관主管하게 하신다면 백성들을
위복威服시키고
융적戎狄을 두렵게 할 뿐만 아니라 임금님의
공덕功德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注+정旌은 드러내는 것이고, 벌伐은 공功이다.”라고 말하게 하였다.
여희驪姬는 또 두 사람에게 함께 가서
헌공獻公에게 “
융적戎狄의
광대廣大한 땅이
진晉나라의
도시都市가 될 수 있으니,
진晉나라가
강토疆土를
개척開拓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게 하였다.
注+광막廣莫은 융적戎狄의 땅이 광절曠絶(廣闊한 황무지荒蕪地)하다는 말이니, 바로 포蒲와 굴屈을 이른다. 두 공자公子를 그곳으로 내보내어 도읍都邑하게 하면 진晉나라가 바야흐로 국토의 경계境界를 크게 개척開拓할 수 있다는 말이다. 헌공獻公이 결정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여희驪姬가 다시 두 오五를 시켜 이렇게 좋은 일이 있다고 자세히 말하게 한 것이다.
그러자
진후晉侯는 기뻐하여 여름에
태자太子를
곡옥曲沃으로,
중이重耳를
포성蒲城으로,
이오夷吾를
굴屈로, 여러
공자公子들을 모두
변방邊方으로 보내어
注+비鄙는 변방의 읍이다.거주居住하게 하고, 오직 여희와 그 동생의 아들만을
강絳에 남아 있게 하였다.
양오梁五와
동관폐오東關嬖五가 마침내 여희와 함께 여러
공자公子들을
참소讒訴하고서
해제奚齊를 태자로 세우니,
진인晉人이 이를 ‘
이오우二五耦’라 하였다.
注+두 개의 보습으로 짝을 이루면 넓이가 1척으로 일벌一伐을 일으키는데, 두 사람이 함께 짝이 되어 진晉나라 공실公室을 간상墾傷(損傷)하는 것이 이와 같다는 말이다.
傳
초楚나라
영윤令尹자원子元이
문부인文夫人을
고혹蠱惑하고자 하여,
注+문부인文夫人은 초문왕楚文王의 부인夫人식규息嬀이다. 자원子元은 문왕文王의 아우이다. 고蠱는 음란한 일로 미혹迷惑시키는 것이다. 그녀의
궁宮 곁에 집을 짓고서 방울을 흔들며
만무萬舞를 추니,
注+진振은 흔드는 것이고, 만萬은 춤이다.[부주]林: 음악을 연주하여 그를 고혹蠱惑하려 한 것이다.
부인夫人이 듣고 눈물을 흘리며 “
선군先君께서는 이 춤으로
전비戰備(전쟁준비)를
연습演習하였는데,
注+[부주]朱: 춤에도 부곡部曲과 항오行伍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진법陣法이라는 말이다. 지금
영윤令尹은 이것을 원수를 치는 데에 사용하지 않고
미망인未亡人 곁에서 추니, 이상하지 않은가.
注+심尋은 사용하는 것이다. 부인婦人이 과부寡婦가 되면 스스로 ‘미망인未亡人’이라 칭한다.[부주]林: 구수仇讎는 정鄭나라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어인御人이 이 말을
자원子元에게 고하니,
注+어인御人은 부인夫人을 모시는 사람이다. 자원子元은 “
부인夫人도 오히려 원수를
습격襲擊하기를 잊지 않고 있는데, 나는 도리어 잊었구나.”라고 하였다.
注+[부주]林: 문부인文夫人은 여자인데도 오히려 원수 나라를 토벌해 습격하기를 잊지 않고 있는데, 나는 사내가 되어 도리어 원수에 대한 토벌을 잊었다는 말이다.
가을에
자원子元이
병거兵車 6백
승乘을 거느리고
정鄭나라를
침공侵攻하여
注+[부주]朱: 식규息嬀를 즐겁게 하고자 해서이다. 길질문桔柣門(혈절문)으로 쳐들어갔다.
注+길질문桔柣門은 정鄭나라 원교遠郊에 있는 문門이다.
자원子元‧
투어강鬪御彊‧
투오鬪梧‧
경지불비耿之不比가
패旆(先鋒)가 되고
注+자원子元이 세 사람과 함께 특별히 패旆를 만들어 선봉先鋒에 선 것이다. 넓이가 1폭幅(1尺 2촌寸)이고 길이가 심尋(8尺)인 것을 조旐라 하고, 조旐의 끝에 베 조각을 붙여 제비꼬리처럼 만든 것을 패旆라 한다. 투반鬪班‧
왕손유王孫游‧
왕손희王孫喜가
전殿(後軍)이 되어,
注+세 사람은 뒤에 있으면서 반어反禦가 된 것이다. 모든
전거戰車가
순문純門으로 들어가서
규시逵市에 이르렀으나,
注+순문純門은 정鄭나라 외곽外廓의 문門이다. 규시逵市는 외곽내外廓內의 도로道路가에 있는 시장市場이다. 정鄭나라는
내성內城의
현문縣門(閘門)도 내리지 않고
정鄭나라
병사兵士들이
초楚나라 말을 흉내내며 나왔다.
그러자
자원子元은 “
정鄭나라에
인재人材가 있다.”고 하였다.
注+현문縣門은 내성內城의 문門에 설치한 것이다. 정鄭나라가 초사楚師에게 한가로움을 보이고자 했기 때문에 현문縣門을 내리지 않은 것이고, 정鄭나라가 군대를 내보내어 초楚나라 말을 흉내내게 했기 때문에 자원子元은 두려워서 감히 진격進擊하지 못한 것이다.
제후諸侯가 정鄭나라를 구원救援하니 초사楚師가 밤에 도주逃走하였다.
이때
정인鄭人은
동구桐丘로 도주하려 하였는데,
注+허창현許昌縣 동북에 동구성同丘城이 있다. 첩자諜者가 와서 “
초楚나라
군영軍營에 까마귀가 앉아 있다.”고 보고하였으므로
注+첩諜은 간첩間諜이다. 막幕은 장막帳幕이다.[부주]林: 대장大將이 거처하는 곳에는 장막帳幕을 쳐서 풍우風雨를 막는다. 군대가 주둔駐屯해 있으면 까마귀가 와서 앉을 수 없는데, 지금 초楚나라 장막帳幕에 까마귀가 앉은 것으로 보아 초군楚軍이 이미 도주逃走했음을 안 것이다. 도주할 계획을 취소하였다.
傳
겨울에
기근饑饉이 들자,
장손신臧孫辰이
제齊나라로 가서
양곡糧穀의
판매販賣를 요청하였으니,
예禮에 맞는 처사였다.
注+경經에는 ‘대무맥화大無麥禾’라고 기록하였는데 전傳에는 ‘기饑’라고 말하였고, 전傳에 또 ‘기饑’를 ‘축미築郿’의 위에 먼저 기록한 것은 구매購買의 시작을 설명한 것이고, 경經이 아래에 있는 것은 구매購買가 끝나기를 기다려 기록했기 때문이다.
傳
미郿에 성을 쌓았다고 하였으니 도성都城이 아니기 때문에 ‘축築’이라 한 것이다.
읍邑에
종묘宗廟와
선군先君의
신주神主가 있는 곳을 ‘
도都’라 하고, 없는 곳을 ‘
읍邑’이라 하는데,
읍邑에 성을 쌓는 것을 ‘
축築’이라 하고
도都에 쌓는 것을 ‘
성城’이라 한다.
注+《주례周禮》 〈지관地官소사도小司徒〉에 “4현縣이 ‘도都’이고, 4정井이 ‘읍邑’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종묘宗廟가 있는 곳은 비록 읍邑이라 해도 ‘도都’라고 하니, 종묘宗廟 때문에 높여 칭稱하는 것이다. ‘범읍凡邑’이라고 말하였으니, 기타의 축築은 이 예例와 무관無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