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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3)

춘추좌씨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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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十有四年春王正月 莒子朱卒注+無傳 九年 盟于蒲 하다
[經]夏 衛孫林父自晉歸于衛注+晉納之 故曰歸하다
[經]秋 叔孫僑如如齊逆女注+成公逆夫人 最爲得禮 而經無納幣者 文闕絶也 하다
[經]冬十月庚寅 衛侯臧卒注+五同盟하다
[經]秦伯卒注+無傳 二年大夫盟於蜀 而不赴以名 例在隱七年 하다
[傳]十四年春 衛侯如晉 晉侯强見孫林父焉注+林父以七年奔晉 强見 欲歸之 하니 定公不可注+[附注] 林曰 衛定公不肯見林父 라하다
衛侯旣歸 晉侯使郤犫送孫林父而見之하니 衛侯欲辭하다
定姜曰 不可注+定姜 定公夫人 하니이다
是先君宗卿之嗣也注+同姓之卿 大國又以爲請하니 不許 將亡이리이다
雖惡之 不猶愈於亡乎잇가
君其忍之注+違大國 必見伐 故亡하소서
安民而宥宗卿 不亦可乎잇가
衛侯見而復之注+復林父位하다
衛侯饗苦成叔注+成叔 郤犫 할새 寗惠子相注+相 佐禮 惠子 寗殖 이러니
苦成叔傲어늘 寗子曰
苦成家其亡乎ᄂ저
古之爲享食也 以觀威儀하고 省禍福也
故詩曰 注+詩小雅 言君子好禮 飮酒皆思柔德 雖設兕觵 觩然不用 以兕角爲觵 所以罰不敬 觩 陳設之貌 로다
彼交匪傲하니 注+彼之交於事而不惰傲 乃萬福之所求 라하야늘 今夫子傲하니 取禍之道也注+爲十七年郤氏亡
[傳]秋 宣伯如齊逆女하니 稱族 尊君命也
[傳]八月 鄭子罕伐許라가 敗焉注+爲許所敗 하다
戊戌 鄭伯復하야 庚子 入其郛注+郛 郭也하니 許人平以叔申之封注+四年 鄭公孫申疆許田 許人敗之 不得定其封疆 今許以是所封田 求和於鄭 하다
[傳]九月 僑如以夫人婦姜氏至自齊하니 舍族 尊夫人也注+舍族 謂不稱叔孫
故君子曰
春秋之稱注+[附注] 林曰 稱 權衡也 言春秋書法 權衡其輕重 微而顯注+辭微而義顯 하고 志而晦注+志 記也 晦 亦微也 謂約言以記事 事敍而文微 하고 婉而成章注+婉 曲也 하고 盡而不汙注+謂直言其事 盡其事實 無所汙曲하야 懲惡而勸善注+善名必書 惡名不滅 所以爲懲勸 하니 非聖人이면 誰能脩之注+脩史策成此五者 리오
[傳]衛侯有疾 使孔成子寗惠子立敬姒之子衎以爲大子注+成子 孔達之孫 敬姒 定公妾 衎 獻公 하다
冬十月 衛定公卒하니
夫人姜氏旣哭而息注+[附注] 林曰 旣哭定公而止息 見大子之不哀也하고 注+[附注] 林曰 痛憤不能食 故不納酌飮 하고 歎曰 是夫也注+[附注] 林曰 夫 賤者之稱 將不唯衛國之敗 其必始於未亡人注+定姜言獻公行無禮 必從己始 下言暴妾使余 是也 이리라
嗚呼 天禍衛國也夫ᄂ저
吾不獲鱄也使主社稷注+鱄 衎之母弟 이로다 大夫聞之하고 無不聳懼하다
孫文子自是不敢舍其重器於衛注+寶器 하고 盡寘諸戚注+寘 置也 戚 孫氏邑 하다
而甚善晉大夫注+備亂起 欲以爲援 爲襄十四年衛侯出奔傳 하다


14년 봄 주왕周王정월正月거자莒子하였다.注+이 없다. 성공成公 9년에 에서 결맹結盟하였다.
여름에 나라 손임보孫林父나라에서 나라로 돌아갔다.注+나라가 들여보냈기 때문에 ‘’라고 한 것이다.
가을에 숙손교여叔孫僑如나라에 가서 제녀齊女(成公의 부인夫人이 될 여인女人)를 맞이하였다.注+성공成公부인夫人을 맞이한 일은 가장 에 맞았는데, 납폐納幣에 대한 기록記錄이 없는 것은 궐문闕文이다.
나라 공자公子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9월에 교여僑如부인夫人부강씨婦姜氏를 모시고 나라에서 돌아왔다.
겨울 10월 경인일庚寅日위후衛侯하였다.注+다섯 차례 동맹同盟하였다.
진백秦伯하였다.注+이 없다. 성공成公 2년에 나라 대부大夫성공成公에서 결맹結盟하였는데도 나라가 죽은 진백秦伯의 이름을 기록해 부고赴告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 은공隱公 7년에 보인다.
14년 봄에 위후衛侯나라에 가자 진후晉侯가 강제로 손임보孫林父알현謁見시키려 하니,注+손임보孫林父성공成公 7년에 나라로 출분出奔하였다. 강제로 알현謁見시키려 한 것은 그를 나라로 돌려보내고자 해서이다. 위정공衛定公은 만나지 않았다.注+[부주]林: 위정공衛定公손임보孫林父를 만나려 하지 않은 것이다.
여름에 위후衛侯귀국歸國하자 진후晉侯극주郤犫에게 손임보孫林父호송護送나라로 가서 위후衛侯에게 알현謁見시키도록 하니, 위후衛侯가 이를 거절拒絶하려 하였다.
정강定姜이 말하기를, “거절拒絶해서는 안 됩니다.注+정강定姜정공定公부인夫人이다.
이 사람은 선군先君종경宗卿의 아들인데다注+동성同姓이다. 대국大國이 그를 위해 요청要請하니, 허락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
그를 만나는 것이 아무리 싫어도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께서는 한 번 참으소서.注+대국大國을 어기면 반드시 토벌討伐을 받기 때문에 나라가 한다는 말이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종경宗卿을 용서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위후衛侯는 그를 접견接見하고서 그의 직위職位회복恢復시켰다.注+손임보孫林父직위職位회복恢復시킨 것이다.
위후衛侯향례饗禮를 열어 고성숙苦成叔접대接待할 때注+고성숙苦成叔극주郤犫이다.영혜자寗惠子이 되었다.注+를 돕는 사람이다. 혜자惠子영식寗殖이다.
고성숙苦成叔오만傲慢하니, 영혜자寗惠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성숙苦成叔의 집은 아마도 할 것이다.
옛날에 향사享食거행擧行할 때에는 그 사람의 위의威儀관찰觀察하고 그 사람의 화복禍福을 살폈다.
그러므로 《시경詩經》에 ‘뿔잔은 구부정하지만(兕觵其觩) 맛난 술은 부드럽네(旨酒思柔).注+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상호편桑扈篇〉이다. 군자君子를 좋아하여 술을 마실 때에도 모두 유순柔順을 생각하기 때문에 비록 뿔잔을 벌여 놓았으나, 벌여만 놓고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외뿔소의 뿔로 술잔을 만든 것은 불경不敬한 사람에게 벌주罰酒를 주기 위함이다. 는 벌여 놓은 모양이다.
저 사람 교제交際하는 태도態度 오만하지 않으니(彼交匪傲) 온갖 복이 모이리(萬福來求).’注+저 사람의 교제交際함이 태만怠慢하거나 오만傲慢하지 않으니 만복萬福이 와서 한다는 말이다. 라고 하였는데, 지금 저 사람은 오만하니, 하는 길이다.”注+성공成公 17년에 극씨郤氏한 배경이다.
가을에 선백宣伯나라에 가서 제녀齊女를 맞이하였는데, 에 ‘숙손叔孫’이라고 한 것은 군명君命존중尊重한 것이다.
8월에 나라 자한子罕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가 도리어 패배敗北하였다.注+허군許軍에게 패배敗北당한 것이다.
무술일戊戌日정백鄭伯이 다시 나라를 토벌討伐하여 경자일庚子日나라의 외곽外郭까지 쳐들어가니,注+외곽外郭이다. 허인許人숙신叔申봉지封地나라에 주고서 화평和平하였다.注+성공成公 4년에 나라 공손公孫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허전許田경계境界구획區劃할 때 허인許人정군鄭軍패배敗北시켰으므로 봉강封疆획정劃定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허인許人은 그때 획정劃定하려던 봉지封地를 주고서 나라에 화평和平하기를 요구要求한 것이다.
9월에 교여僑如부인夫人부강씨婦姜氏를 모시고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부인夫人존중尊重한 것이다.注+사족舍族숙손叔孫이라는 족명族名을 기록하지 않은 것을 이른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춘추春秋기록記錄[稱]은注+[부주]林: 은 저울추와 저울대이니, 《춘추春秋》의 서법書法은 일의 경중輕重을 다는 저울[權衡]이란 말이다. 문사文辭간략簡略하되 뜻은 드러내고[微而顯],注+문사文辭은미隱微하지만 뜻은 드러냈다는 말이다. 사실을 서술하되 뜻은 은미隱微하게 하고(志而晦),注+기록記錄함이고, 의 뜻이니, 간략簡略한 말로 사건事件기록記錄하므로 사건事件순서順序대로 기술記述하였지만 문사文辭은미隱微하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완곡하게 기록하되 장법章法(法則)을 이루고[婉而成章],注+이니, 문사文辭완곡婉曲하게 만들어 피휘避諱한 바가 있는 것은 대순大順도리道理를 보여 편장篇章구성構成했다는 말이다. 사실을 다 기록하되 왜곡歪曲하지 않고[盡而不汙],注+그 일을 솔직率直하게 말하고 그 사실을 다 기록하여 왜곡歪曲한 바가 없다는 말이다. 징계懲戒하고 권장勸獎한 것이니,注+선자善者의 이름을 반드시 기록하고 악자惡者의 이름도 없애지 않는 것은 권선징악勸善懲惡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성인聖人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편수編修할 수 있었겠는가?”注+사책史策편수編修하여 이 다섯 가지의 를 만든 것이다.
위후衛侯이 나자, 공성자孔成子영혜자寗惠子에게 경사敬姒의 아들 을 세워 태자太子로 삼게 하였다.注+공성자孔成子공달孔達손자孫子이고, 경사敬姒위정공衛定公이고, 위헌공衛獻公이다.
겨울 10월에 위정공衛定公하였다.
부인夫人강씨姜氏을 마치고 쉴 때,注+[부주]林: 위정공衛定公영전靈前을 마치고 쉰 것이다. 태자太子가 슬퍼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물도 마시지[酌飮] 않고 탄식하기를,注+[부주]林: 통분痛憤하여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작음酌飮하지 않은 것이다. “이 자는注+[부주]林: 한 자를 하는 말이다. 장차 나라를 패망敗亡시킬 뿐 아니라 그 무례無禮가 반드시 나 미망인未亡人을 대하는 데서부터 시작할 것이다.注+정강定姜이 ‘위헌공衛獻公무례無禮하는 것이 반드시 나를 대하는 데서부터 시작始作할 것이다.’고 말한 것이니, 아래 양공襄公 14년 에 “나를 잔포殘暴하게 대하여 비첩婢妾처럼 부렸다.[暴妾使余]”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아, 하늘이 나라에 를 내렸도다.
나는 으로 하여금 사직社稷주재主宰하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注+동모제同母弟이다. 라고 하니, 대부大夫들이 듣고서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손문자孫文子는 이때부터 자기의 중요重要기물器物나라에 두지 않고注+중기重器보기寶器이다. 모두 척읍戚邑에 갔다 두었다.注+이다. 손씨孫氏이다.
그리고 나라 대부大夫들과 매우 사이좋게 지냈다.注+난리亂離가 일어날 때를 대비對備하여 그들을 응원세력應援勢力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양공襄公 14년에 위후衛侯출분出奔배경背景이다.


역주
역주1 鄭公子喜 : 喜는 鄭穆公의 아들 子罕이다.
역주2 僑如以夫人婦姜氏至自齊 : 이때 宣公의 夫人穆姜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婦’라고 稱한 것이다. 시어머니가 살아있으면 그 며느리를 ‘婦’로 칭한다.
역주3 兕觵其觩 旨酒思柔 : 杜氏는 觩를 뿔잔을 벌여 놓은 모양으로 解釋하였으나, 이 說을 따르지 않고, 《詩集傳》 朱註의 ‘뿔의 윗부분이 굽은 모양이다.’고 한 說을 取하여 飜譯하였다. 思는 語辭이다.
역주4 萬福來求 : 杜注와 《詩集傳》의 朱註에 모두 ‘來求’를 福이 와서 나를 찾는다는 뜻으로 解釋하였으나, 譯者는 이 說을 따르지 않고 〈楊注〉를 取해 飜譯하였다. 楊氏는 “求는 聚이고, 來는 語中助詞이다.”고 하였다.
역주5 封[伐] : 저본에는 ‘封’으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伐’로 바로잡았다.
역주6 謂曲屈其辭……而成篇章 : 이상의 杜注는 〈春秋左傳序〉에서 필요한 부분만 引用하였기 때문에 말이 連結되지 않는다. 〈春秋左傳序〉와 그 註釋을 參考할 것.
역주7 不內酌飮 : 酌은 勺이 되어야 한다. 《禮記》 〈喪大記〉에 “君喪에 3일 후에 夫人, 世婦, 諸妻는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신다.[疏食水飮]”고 하였으니, 酌飮은 疏食水飮을 가리킨 것이다. 〈楊注〉

춘추좌씨전(3)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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