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十年春
주왕王正月
에 장공公敗
제齊師于
장작長勺注+제齊人雖成列 魯以權譎稽之 列成而不得用 장작長勺 魯地하다
[經]三月
에 宋人遷
숙宿注+無傳 宋强遷之而取其地 故 [附注] 林曰 此遷國之始하다
[經]夏 六月
에 齊師宋師次于
낭郎注+ [附注] 林曰 其言次 何 以桓장공公圖覇而未集也 是故書次郞 以見齊伯之難 以見楚伯之難 以見復伯之難/하니 장공公敗宋師于
승구乘丘注+승구乘丘魯地하다
[經]秋九月
에 형荊敗
채후蔡師于
신莘注+형荊 楚本號 後改爲楚 楚辟陋在夷 於此始通上國 然告命之辭 猶未合典禮 故不稱將帥 신莘 채후蔡地하고 以
채후蔡侯헌무獻舞歸
注+헌무獻舞 채후蔡季 [附注] 林曰 此書형荊之始 亦형荊猾夏之始 亦형荊專執諸채후侯之始 此夷夏之大變也 형荊敗채후蔡師于신莘 是猾夏之始也 吳敗頓胡沈채후蔡陳許之師于雞父 則諸채후侯之不亡者 寡矣 是故書형荊自此始 而하다
[經]冬十月
에 齊師滅
담국譚注+담국譚國 在濟南平陵縣西南 傳曰 담국譚無禮 此直釋所以見滅 經無義例 他皆放此 [附注] 林曰 此滅담국國之始 하니 담자譚子奔
거莒注+不言出奔 담국國滅無所하다
傳
[傳]十年春
에 齊師伐我
注+不書侵伐 齊背蔇之盟 我有辭 [附注] 朱曰 齊桓公以魯約子糾 故伐魯하다
장공公將戰
에 조궤曹劌請見
注+조궤曹劌 魯人한대 其鄕人曰 肉食者謀之
니 又何間焉
注+肉食 在位者 間 猶與也가
귀劌曰 肉食者鄙
하야 未能遠謀
注+[附注] 林曰 肉食者 所見鄙陋 未能有深遠之謀라하고 乃入見
하야 問何以戰
이닛가
장공公曰 衣食所安
을 弗敢專也
하고 必以分人
注+[附注] 朱曰 言衣食二者 雖身所安 然亦不敢自專其有 必分於人以共享之하리라 對曰 小惠未徧
이니 民弗從也
注+分장공公衣食 所惠不過左右 故曰未徧리이다
장공公曰 犧牲玉帛
을 弗敢加也
하고 必以信
注+축사祝辭不敢以小爲大 以惡爲美하리라 對曰 小信未孚
니 神弗福也
注+孚 大信也 [附注] 朱曰 此特小信 未能大孚於神 神心未必降之以福也리이다
장공公曰 小大之獄
을 雖不能察
이나 必以情
注+必盡己情 察審也 [附注] 朱曰 小獄 爭訟之類 大獄殺傷之類하리라 對曰 忠之屬也
注+上思利民忠也라 可以一戰
이니 戰則請從
하노이다
장공公與之乘
注+共乘兵車하고 戰于
장작長勺할새 장공公將鼓之
한대 귀劌曰 未可
니이다 제인齊人三鼓
하니 귀劌曰 可矣
니이다
齊師敗績
이어늘 장공公將馳之
한대 귀劌曰 未可
니이다 下視其轍
注+視車跡也하고 登軾而望之曰 可矣
니이다
彼竭我盈
이라 故克之
注+[附注] 朱曰 齊師三鼓 勇氣已竭 我師初鼓 勇氣方盈니이다
夫大國難測也
라 懼有伏焉
注+恐詐奔하야 吾視其轍亂
하고 望其旗靡
라
傳
公子
언偃曰 宋師不整
하니 可敗也
注+公子언偃 노魯大夫니이다
宋敗
면 제군齊必還
하리니 請擊之
注+[附注] 林曰 請伐宋師하소서 장공公弗許
한대
自雩門竊出
하야 蒙皐比而先犯之
注+雩門 노魯南城門 皐比虎皮 [附注] 林曰 장공公子언偃又請自雩門潛師竊出 以虎皮蒙馬而先犯宋師어늘 장공公從之
하야 大敗宋師于
승구乘丘하니 齊師乃還
하다
傳
[傳]채애후蔡哀侯娶于진陳하고 식후息侯亦娶焉이라
식규息嬀將歸
에 過
채蔡注+[附注] 林曰 식후息侯之夫人 將歸寧于진陳 道過채蔡國하니 채후蔡侯曰 吾姨也
注+妻之姊妹曰姨라하고 止而見之
하되 弗賓
注+不禮敬也하다
식후息侯聞之하고 怒하야 使謂초문왕楚文王曰 伐我면 吾求救於채蔡하리니 而伐之하라 초자楚子從之하다
秋九月
에 초楚敗
채후蔡師于
신莘하고 以
채후蔡侯헌무獻舞歸
注+[附注] 林曰 敗채후蔡而執其君 經不言執채후蔡侯以歸 蓋채후蔡自是服於초楚也하다
傳
[傳]
제후齊侯之出也
에 過
담譚하니 담譚不禮焉
하고 及其入也
에 諸
제후侯皆賀
호대 담譚又不至
注+以九年入하다
담자譚子奔
거莒하니 同盟故也
注+傳言담자譚不能及遠 所以亡라
10년 봄
주왕周王 정월에
장공莊公이
제齊나라 군대를
장작長勺에서
패배敗北시켰다.
注+제인齊人이 비록 전열戰列을 이루었으나, 노군魯軍이 속임수를 써서 시간을 끌었으므로 날짜를 끄니 제군齊軍은 전열戰列을 이루었으나 쓸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진陳을 치기 전에 공격해 승리한 것으로 글을 만든 것이다. 예例가 장공莊公 11년에 보인다. 장작長勺은 노魯나라 땅이다.
2월에
장공莊公이
송宋나라를
침공侵攻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침侵의 예例는 장공莊公 29년에 보인다.
3월에
송인宋人이
숙宿의 주민을
이주移住시켰다.
注+전傳이 없다. 송宋나라가 억지로 그곳 주민住民을 이주移住시키고서 그 땅을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체文體가 형천邢遷과 다르다.[부주]林: 이것이 나라의 백성을 옮긴 시초이다.
여름 6월에
제군齊軍과
송군宋軍이
낭郎에 주둔하니,
注+‘침벌侵伐’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제齊나라가 주장主將이 되어 기蔇의 결맹結盟을 저버렸기 때문이니, 뜻이 장작長勺의 전쟁을 기록한 것과 같다.[부주]林: 여기에 ‘차次’를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제환공齊桓公이 패자覇者가 되기를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랑次郎’을 기록하여 제환공齊桓公이 패자覇者가 되기 어려웠음을 나타내었고, ‘차궐맥次厥貉’을 기록하여 초楚가 패자覇者가 되기 어려웠음을 나타내었고, ‘차우증次于鄫’을 기록하여 진晉나라가 다시 패자覇者가 되기 어려웠음을 나타내었다. 장공莊公이
송사宋師을
승구乘丘에서
패배敗北시켰다.
注+승구乘丘는 노魯나라 땅이다.
가을 9월에
형荊이
채군蔡軍을
신莘에서
패배敗北시키고서
注+형荊은 초楚나라 본래의 국호國號였는데 뒤에 초楚로 고쳤다. 초楚나라는 땅이 궁벽하고 풍속이 더러운 이복夷服에 있는 나라로서 이때에 비로소 상국上國과 교통하였으나 외국外國에 통고通告하는 문사文辭가 전례典禮에 맞지 않았다. 그러므로 장수將帥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신莘은 채蔡나라 땅이다.채후蔡侯헌무獻舞를 데리고 돌아갔다.
注+헌무獻舞는 채계蔡季이다.[부주]林: 이것이 형荊을 기록한 처음이다. 또 형荊이 중국中國을 어지럽힌 처음이기도 하고, 형이 제멋대로 제후諸侯를 잡아간 처음이기도 하니, 이것이 이하夷夏(중국과 오랑캐)의 큰 변란이다. 형荊이 신莘에서 채군蔡軍을 패배시킨 것이 만이蠻夷가 중국中國을 어지럽힌 처음이고, 오吳가 돈頓‧호胡‧심沈‧채蔡‧진陳‧허許의 군대를 계보雞父에서 패배시킨 뒤로는 망하지 않은 제후諸侯가 몇 안 되었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형荊을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오吳나라의 회맹會盟으로 《춘추春秋》를 끝마쳤다.
겨울 10월에
제군齊軍이
담국譚國을
멸망滅亡시키니
注+담국譚國은 제남濟南평릉현平陵縣 서남에 있다. 전傳에 “담譚이 무례無禮했기 때문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담譚이 멸망당한 이유를 사실대로 해석한 것이다. 경經에 의례義例가 없으니, 다른 곳도 모두 이와 같다. 멸滅의 예例는 문공文公 15년에 보인다.[부주]林: 이것이 나라를 멸망滅亡시킨 시초이니, 바로 관중管仲이 틈을 타서 침공侵攻한다는 술수이다. 담자譚子가
거莒나라로 도망하였다.
注+출분出奔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나라가 멸망하여 나갈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傳
10년 봄에
제군齊軍이 노나라를 공격하였다.
注+침벌侵伐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제齊나라가 기蔇의 결맹結盟을 배신하였으니 우리가 정당하여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부주]朱: 제환공齊桓公은 노魯나라가 자규子糾를 제齊의 임금으로 들여보내기로 맹약盟約하였다는 이유로 노魯를 친 것이다.
장공莊公이
응전應戰하려 할 때
조궤曹劌가
알현謁見을 청하려 하니,
注+조귀曹劌는 노인魯人이다. 그 마을 사람이 말하기를 “고기 먹는 자들이 계획을 세웠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상관하려 하는가?
注+육식자肉食者는 벼슬에 있는 자이다. 간間은 여與(干與)와 같다.”고 하였다.
귀劌가 말하기를 “고기 먹는 자들이
비루鄙陋하여 원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注+[부주]林: 육식자肉食者들의 소견이 비루鄙陋하여 심원深遠한 계책을 세울 수 없다는 말이다.”라 하고
궁중宮中으로 들어가
알현謁見하고서
장공莊公에게 무엇을 믿고 싸우려 하느냐고 물었다.
장공莊公이 “몸을 편안하게 하는 의복과 음식을 감히 혼자서 누리지 않고 반드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
注+[부주]朱: 의복과 음식 이 두 가지는 비록 내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지만 감히 가진 것을 나 혼자서 누리지 않고 반드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함께 누리겠다는 말이다.”고 하니,
귀劌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작은 은혜여서 많은 사람에게 두루 미칠 수 없으니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注+장공莊公이 의복과 음식을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은혜를 입는 사람은 좌우左右의 근신近臣에 불과할 것이므로 두루 미칠 수 없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장공莊公이 “
제사祭祀에
희생犧牲과
옥백玉帛을 감히 정해진
이외以外에 더 올리지 않고
축사祝史의
고사告辭도 반드시 성실하게 사실대로
고告하게 하겠다.
注+축사祝辭에 감히 ‘소小’를 ‘대大’라 하거나 ‘악惡’을 ‘미美’라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고 하니,
귀劌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작은 믿음이라
신神이 믿지 않을 것이니
신神이 복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注+부孚는 큰 믿음이다.[부주]朱: 이것은 작은 믿음일 뿐이어서 신神에게 크게 믿음을 줄 수 없으니 반드시 신神이 복을 내리지 않는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또
장공莊公이 “크고 작은
옥사獄事를 일일이 다 살필 수는 없으나
注+반드시 나의 마음을 다한다는 말이다. 찰察은 심審(살핌)이다.[부주]朱: 작은 옥사獄事는 쟁송爭訟의 유類이고, 큰 옥사獄事는 살상殺傷의 유이다.”고 하니,
귀劌가 대답하기를 “이는
충忠에
속屬한 일이라
注+윗사람이 백성을 이롭게 하기를 생각하는 것을 ‘충忠’이라 한다. 한번 전쟁을 해볼 만하니
출전出戰하신다면
신臣도
종군從軍하도록 허락하소서.”라고 하였다.
장공莊公이
귀劌와 한 수레를 타고
注+함께 병거兵車를 탄 것이다.장작長勺에서
제군齊軍과 전투하려할 때
장공莊公이
진격進擊의 북을 치려 하자
귀劌가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고 하고,
제인齊人이 북을 세 차례 치자,
귀劌가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고 하였다.
제군齊軍이
대패大敗하자
장공莊公이 추격하려 하니,
귀劌가 ‘아직 안됩니다.’고 하고서, 수레에서 내려
제군齊軍의 수레바퀴 자국을 살펴보고,
注+수레가 지나간 바퀴 자국을 살핀 것이다. 다시 수레 앞의
식軾에 올라
제군齊軍이 후퇴하는 모양을
조망眺望하고는 ‘추격해도 되겠습니다.’고 하였다.
승전勝戰한 뒤에 장공莊公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전쟁의 승패勝敗는 용기勇氣에 달린 것입니다.
북이 한 번 울리면 용기가 진작振作되고, 두 번 울리면 용기가 쇠하고, 세 번 울리면 용기가 고갈枯渴합니다.
저들은 용기가 이미 고갈되었고 우리는 용기가 바야흐로
충만充滿하였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注+[부주]朱: 제군齊軍은 이미 북을 세 번 울려 용기勇氣가 이미 고갈枯渴하였고, 아군我軍은 처음으로 북을 울려 용기가 바야흐로 충만하다는 말이다.
대국大國은 그 행위를 예측하기 어려워 군대를
매복埋伏시켰을
우려憂慮가 있기 때문에
注+우리를 유인하기 위해 거짓으로 도망갈 수도 있다고 염려한 것이다. 신이 그들의 수레바퀴 자국을 보니 어지럽고, 그들의
기旗를 바라보니 기가 누웠습니다.
그러므로 추격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注+기旗가 눕고 수레바퀴 자국이 어지러운 것은 겁을 먹고 급히 도망갔기 때문이다.
傳
여름 6월에 제군齊軍‧송군宋軍이 노魯를 치기 위해 낭郎에 주둔하였다.
공자公子언偃이 말하기를 “
송군宋軍은
진용陳容이
엄정嚴整하지 않으니, 패배시킬 수 있습니다.
注+공자公子언偃은 노魯나라 대부이다.
송군이
패전敗戰하면
제군齊軍도 반드시 돌아갈 것이니 공격하소서.
注+[부주]林: 송군宋軍을 공격하자고 청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장공莊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자公子언偃은
우문雩門으로 몰래 나가 말에
고비皐比를 씌우고 먼저
송군宋軍을 공격하였다
注+우문雩門은 노魯나라의 남쪽 성문城門이다. 고비皐比는 호피虎皮이다.[부주]林: 공자公子언偃이 또 군대를 은밀히 이동시켜 우문雩門으로 나가서 말에 호피를 씌우고 먼저 송군宋軍을 공격하자고 청한 것이다. 그러자
장공莊公도 군대를 거느리고 그 뒤를 따라 진격하여
승구乘丘에서
송군宋軍을
대패大敗시키니
제사齊師가 돌아갔다.
傳
채애후蔡哀侯도 진陳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하였고, 식후息侯도 진陳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하였다.
식규息嬀가
귀녕歸寧(부모를 뵙기 위해
친정親庭으로 가는 것)할 때
채蔡나라를 지나니,
注+[부주]林: 식후息侯의 부인이 진陳나라로 귀녕歸寧 가는 길에 채蔡나라를 지난 것이다.채후蔡侯가 “나의
처제妻弟이다.
注+아내의 자매姊妹를 ‘이姨’라 한다.”라고 하고서 머물게 하고는 서로 만나볼 때에 공경해
예우禮遇하지 않았다.
注+예우禮遇해 공경하지 않은 것이다.
얼마 뒤에 식후息侯가 이 사실을 듣고 노怒하여 초문왕楚文王에게 사신使臣을 보내어 말하기를 “우리나라를 치시면 우리가 채蔡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그들의 군대를 끌어낼 것이니, 그때를 이용해 채蔡나라를 토벌하십시오.” 라고 하니, 초자楚子가 그 말을 따랐다.
가을 9월에
초楚나라가
신莘에서
채군蔡軍을 패배시키고
채후蔡侯헌무獻舞를 데리고 돌아갔다.
注+[부주]林: 채군蔡軍을 패배시키고서 그 임금을 잡은 것인데, 경經에 “잡았다[執]”고 말하지 않고 “채후蔡侯를 데리고 돌아갔다.”고 한 것은 채蔡나라가 이로부터 초楚나라에 복종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傳
과거
제후齊侯(桓公)가 도망다닐 때
담譚나라에 들르니,
담譚나라가
예우禮遇하지 않았고, 뒤에
환공桓公이 들어와 임금이 되었을 때
제후諸侯들은 모두 와서
하례賀禮하였으나
담譚나라는 오지 않았다.
注+노장공魯莊公 9년에 제환공齊桓公이 들어가 임금이 되었다.
겨울에 제사齊師가 담譚나라를 멸망시켰으니, 이는 담譚나라가 무례無禮하였기 때문이다.
담자譚子가
거莒나라로 도주하였으니
동맹同盟하였기 때문이다.
注+전문傳文은 담譚나라가 멀리 앞을 내다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망한 것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