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春秋左氏傳(2)

춘추좌씨전(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춘추좌씨전(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元年春王正月 齊師宋師曹師次于聶北하야 救邢하다注+齊帥諸侯之師救邢 次于聶北者 案兵觀釁以待事也 次例在莊三年 聶北 邢地
[經]夏六月 邢遷于夷儀하다注+邢遷如歸 故以自遷爲辭 夷儀 邢地
[經]齊師宋師曹師城邢하다注+傳例曰 救患分災 禮也
[經]秋七月 戊辰 夫人姜氏薨于夷하니 齊人以歸하다注+傳在閔二年 書地者 明在外薨
[經]楚人伐鄭하다注+荊始改號曰楚
[經]八月 公會齊侯宋公鄭伯曹伯邾人于檉하다注+檉 宋地 陳國陳縣西北有檉城 公及其會而不書盟 還不以盟告 [附注] 林曰 衣裳之會六
[經]九月 公敗邾師于偃하다注+偃 邾地
[經]冬十月壬午 公子友帥師敗莒師于酈하고 獲莒挐하다注+酈 魯地 挐 莒子之弟 不書弟者 非卿 非卿則不應書 嘉季友之功 故特書其所獲 大夫生死皆曰獲 獲例在昭二十三年
[經]十有二月 丁巳 夫人氏之喪至自齊하다注+僖公請而葬之 故告於廟而書喪至也 齊侯旣殺哀姜 以其尸歸 絶之於魯 僖公請其喪而還 不稱姜 闕文
[傳]元年春 不稱卽位 公出故也注+
公出復入이로되 不書 諱之也
諱國惡 禮也注+掩惡揚善 義存君親 故通有諱例 皆當時臣子率意而隱 故無深淺常准 聖賢從之 以通人理 有時而聽之可也
[傳]諸侯救邢하다注+實大夫而曰諸侯 摠衆國之辭
邢人潰하야 出奔師注+奔聶北之師也 邢潰不書 不告也하니 師遂逐狄人하고 具邢器用而遷之하되 師無私焉하다注+皆撰具還之 無所私取 [附注] 林曰 具邢器用
[傳]夏 邢遷于夷儀어늘 諸侯城之하니 救患也
凡侯伯救患分灾討罪 禮也注+侯伯 州長也 穀帛 [附注] 林曰 分穀帛以別天灾
[傳]秋 楚人伐鄭하니 鄭卽齊故也
盟于犖하니 謀救鄭也注+犖 卽檉也 地有二名
[傳]九月 公敗邾師于偃하니 虛丘之戍將歸者也注+虛丘 邾地 邾人旣送哀姜還 齊人殺之 因戍虛丘 欲以侵魯 公以義求齊 齊送姜氏之喪 邾人懼 乃歸 故公要而敗之
[傳]冬 莒人來求賂注+求還慶父之賂어늘 公子友敗諸酈하고 獲莒子之弟挐하다
非卿也 嘉獲之也注+莒旣不能爲魯討慶父 受魯之賂而又重來 其求無厭 故嘉季友之獲而書之
公賜季友汶陽之田及費하다注+汶陽田 汶水北地 汶水出泰山萊蕪縣 西入濟
[傳]夫人氏之喪至自齊하다
라하니 女子 從人者也ᄅ새니라注+言女子有三從之義 在夫家有罪 非父母家所宜討也


원년元年주왕周王정월正月제사齊師송사宋師조사曹師섭북聶北주둔駐屯[次]하여 나라를 구원救援하였다.注+나라가 제후諸侯의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섭북聶北에 주둔한 것은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틈을 엿보아 기회를 기다린 것이다. 장공莊公 3년 에 보인다. 섭북聶北나라 땅이다.
여름 6월에 나라 사람들이 이의夷儀로 옮겨 갔다. 注+나라 사람들이 옮겨 가는 것을 마치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즐거워하였기 때문에 자발적自發的으로 옮긴 것으로 말을 만든 것이다. 이의夷儀나라 땅이다.
제사齊師송사宋師조사曹師나라에 성을 쌓았다. 注+전례傳例에 “환난患難구제救濟하고 재해災害분담分擔하는 것이 이다.”고 하였다. 같은 일에 재차再次 세 나라를 열기列記한 것은 글에 제후諸侯의 군대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을 7월 무신일戊辰日부인夫人강씨姜氏에서 하니, 제인齊人이 그 시신屍身을 가지고 갔다.注+민공閔公 2년 에 보인다. 제인齊人살해殺害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숨긴 것이고, 살해殺害지명地名을 기록한 것은 국외國外에서 한 사실을 밝힌 것이다.
초인楚人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注+이 비로소 국호國號로 바꾸었다.
8월에 희공僖公제후齊侯송공宋公정백鄭伯조백曹伯주인邾人에서 회맹會盟하였다.注+나라 땅이다. 나라 진현陳縣 서북에 정성檉城이 있다. 희공僖公이 그 회맹會盟에 참여하였는데도 결맹結盟하였다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돌아와서 결맹結盟한 것을 종묘宗廟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주]林: 이것이 여섯 번째 의상지회衣裳之會이다.
9월에 희공僖公에서 주사邾師패배敗北시켰다.注+나라 땅이다.
겨울 10월 임오일壬午日공자公子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에서 거사莒師패배敗北시키고 거나莒挐를 잡았다.注+나라 땅이다. 거자莒子의 아우이다. 아우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아니면 기록하지 않는다. 계우季友을 아름답게 여겼기 때문에 특별히 그가 잡은 사람을 기록한 것이다. 대부大夫을 잡으면 산 채로 잡거나 죽은 채로 잡거나 모두 ‘’이라 한다. 소공昭公 23년 에 보인다.
12월 정사일丁巳日부인씨夫人氏(靈柩)이 나라에서 돌아왔다.注+희공僖公나라에 시신屍身반환返還을 요청하여 장사葬事 지낸 것이다. 종묘宗廟하였으므로 ‘상지喪至’라고 기록한 것이다. 제후齊侯애강哀姜을 죽인 뒤에 그 시신屍身을 가지고 돌아가서 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였으나, 희공僖公이 반환해 주기를 요청하므로 그 시신屍身을 돌려보낸 것이다. 강씨姜氏라고 칭하지 않은 것은 궐문闕文이다.
원년元年 봄에 즉위卽位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희공僖公출분出奔하였기 때문이다.注+나라가 어지러워 출분出奔하였다가 다시 들어왔기 때문에 즉위卽位를 거행하지 않은 것이다.
희공僖公출분出奔하였다가 다시 들어왔는데도 이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 사실을 숨긴 것이다.
나라의 좋지 않는 일을 숨기는 것이 이다.注+좋지 않은 일은 숨기고 좋은 일만을 드러내는 것은 군친君親명예名譽를 보존하기 위한 의리義理이다. 때문에 모든 일에 하는 가 있다. 《춘추春秋》에 한 것은 모두 당시의 신자臣子가 자기 생각에 따라 숨긴 것이므로 심천深淺에 일정한 기준이 없다. 성현聖賢께서 그 한 것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따라 사람의 도리道理를 밝힌 것이니 때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제후諸侯나라를 구원救援하였다.注+사실은 대부大夫인데 제후諸侯라 한 것은 모든 나라를 한 데 묶어서 한 말이다.
형인邢人이 흩어져 제후諸侯의 군대로 도망해 오니,注+섭북聶北에 주둔해 있는 제후諸侯의 군대로 도망해 온 것이다. 나라가 패전敗戰해 군대가 흩어진 것을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에 통고通告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제후諸侯의 군대가 드디어 적인狄人축출逐出하고서 형인邢人기물器物을 모두 꾸려 옮겨 주었는데, 제후諸侯의 군대 중에 그 기물器物을 사사로이 한 자가 없었다.注+모두 꾸려 형인邢人에게 돌려주고 사사로이 취한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부주]林: 기용器用을 갖추었다는 것은 나라에 제복祭服과 소‧양‧돼지‧닭‧개와 문재門材어헌魚軒승마乘馬중금重錦 등을 보내 준 것과 같은 것이다.
여름에 형인邢人이의夷儀로 옮겨가자 제후諸侯이의夷儀에 성을 쌓아 주었으니, 이는 나라의 환난患難구제救濟하기 위해서였다.
후백侯伯환난患難을 구제하고 재해災害분담分擔하고 있는 자를 토벌討伐하는 것이 이다. 注+후백侯伯주장州長(方伯)이다. 곡식과 포백布帛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부주]林: 곡식과 포백布帛을 나누어 주어 천재天災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가을에 초인楚人나라를 토벌討伐하였으니, 이는 나라가 나라에 붙었기 때문이다.
희공僖公제후諸侯들과 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나라 구원救援하는 일을 모의謀議하기 위해서였다.注+은 바로 이니, 지명地名이 둘이다.
9월에 희공僖公주사邾師에서 패배敗北시켰으니, 허구虛丘를 지키다가 돌아가려는 자들이었다. 注+허구虛丘나라 땅이다. 주인邾人애강哀姜나라로 송환送還한 뒤에 제인齊人애강哀姜살해殺害하니, 그대로 허구虛丘를 지키고 있으면서 나라를 침벌侵伐하려 하였다. 그런데 희공僖公이 의리로써 나라에 애강哀姜시신屍身을 돌려주기를 요구하니 나라가 강씨姜氏의 시신을 나라에 돌려주었다. 그러자 주인邾人은 두려워서 돌아가려 하였기 때문에 희공僖公이 그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여 패배시킨 것이다.
겨울에 거인莒人이 와서 뇌물賂物을 요구하자,注+경보慶父를 돌려준 것에 대한 뇌물賂物를 요구한 것이다.공자公子에서 그들을 패배敗北시키고서 거자莒子의 아우 포로捕虜로 잡았다.
이 아닌데도 기록한 것은 그를 잡은 계우季友공로功勞를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注+거인莒人은 이미 나라를 위해 경보慶父를 치지도 못했으면서 나라의 뇌물賂物을 받았는데, 또 거듭 와서 뇌물賂物을 요구하니 그들의 요구가 끝이 없었다. 그러므로 계우季友를 잡은 을 아름답게 여겨 기록했다는 말이다.
희공僖公계우季友에게 문양전汶陽田비읍費邑를 주었다.注+문양전汶陽田문수汶水 북쪽의 토지土地이다. 문수汶水태산泰山내무현萊蕪縣에서 발원發源하여 서쪽으로 흘러 제수濟水로 들어간다.
부인의 상구喪柩나라에서 돌아왔다.
군자君子제인齊人애강哀姜을 죽인 것을 너무 심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여자는 남을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注+여자는 삼종三從의 의리가 있으므로 남편 집에서 저지른 죄를 친정집에서 처벌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주
역주1 一事而再列三國 於文不可言諸侯師故 : 僖公 14년에 “諸侯가 緣陵에 성을 쌓았다.”고 한 것은 성을 제대로 쌓지 않았기 때문에 나무라는 뜻에서 國名을 列記하지 않고 諸侯라고 總稱한 것이다. 이곳에 만약 “諸侯의 군대가 邢에 성을 쌓았다.”고 기록하면 마치 성을 제대로 쌓지 않은 것처럼 비쳐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글의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再次 세 나라를 列記했다는 뜻이다.
역주2 不言齊人殺 諱之 : 조선 학자 徐壽錫의 《潁水全書》에는 小君도 君과 같기 때문에 殺害된 것을 諱한 것이라고 하였다.
역주3 國亂……故卽位之禮有闕 : 《潁水全書》에는 “先君이 非命에 죽었으면 그 아들이 차마 卽位式을 거행할 수 없기 때문에 卽位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고 하였다.
역주4 如歸衛祭服……重錦之類 : 林氏는 邢나라의 器用을 꾸려 옮긴 것으로 보지 않고, 諸侯가 邢人을 옮기고서 필요한 器用을 보내 준 것으로 보았다.
역주5 公[分] : 저본에는 ‘公’으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分’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君子以齊人之殺哀姜也……從人者也 : 여자의 도리는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시집가기 전에는 친정아버지의 명을 따르고, 시집간 뒤에는 남편의 명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長子의 말을 따르는 三從의 도리만이 있을 뿐이다. 哀姜이 이미 魯나라로 出嫁하였으니, 잘못이 있으면 魯나라가 알아서 처벌할 일이지 친정인 齊나라에서 상관할 일이 아닌데, 그를 죽인 것은 지나친 처사라는 말이다. 徐壽錫은 “哀姜이 先君에게 罪를 지고서 도망갔다가 方伯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어찌 다시 宗廟에 配享해서야 되겠는가? 齊桓公이 이미 王法에 의거해 죽였으니 魯나라 臣子가 사사로이 요청해서는 안 되는데, 齊桓公이 魯나라의 요청을 들어준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춘추좌씨전(2)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