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持敬之道는 當合三先生之言而用力焉이니 然後內外交相養之功이 始備니라
然師說에 又以敬字惟畏爲近之라하시니 蓋敬者는 此心肅然하여 有所畏之名이라
畏則心主於一이니 如入宗廟見君父之時엔 自無雜念이요 閑居放肆之際엔 則念慮紛擾而不主於一矣라
敬字之義甚大하니 先師朱子 裒集程門論敬要語가 詳且密矣어시늘 黃氏又述先師敬字之義惟畏爲近之 尤精切하니
蓋人之一心이 虛靈知覺이 常肅然而不亂하고 炯然而不昏이면 則寂而理之體 無不存이요 感而理之用이 無不行이라
惟夫虛靈知覺이 旣不能不囿於氣하고 又不能不動於欲이면 則此心之體用이 亦將隨之而昏且亂矣리니 此所以不可不敬也라
苟能惕然悚然하여 常若鬼神父師之臨其上하고 深淵薄冰之處其下하면 則虛靈知覺者 自不容於昏且亂矣리라
嘗卽其本原而深思之호니 敬該動靜하고 主一亦該動靜하니
無事時에 此心湛然常存은 此靜而主一也요 有事時에 心應此事하고 更不雜以他事는 此動而主一也라
靜而主一은 卽中者天下之大本이요 動而主一은 卽和者天下之達道라
學者誠能盡取而融會하여 精思其實體하면 則庶乎得之矣리라
原注
“배우는 자들은 굳이 먼 데서 구할 필요가 없고, 가까이 자기 몸에서 취하여 다만 사람의 도리道理를 밝혀 경敬할 뿐이니, 이것이 곧 간략한 곳이다.
《주역周易》의 〈건괘乾卦〉에는 성인聖人의 학문을 말하였고 곤괘坤卦에는 현인賢人의 학문을 말하였는데, 오직 ‘경敬하여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워 밖을 방정하게 하여 경敬과 의義가 확립되면 덕德이 외롭지 않다’고만 말하였으니,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러서도 이와 같을 뿐이요 다시 딴 길이 없다.
천착穿鑿하고 얽매임은 자연 도리道理가 아니다.
그러므로 도道가 있고 이치가 있으면 하늘과 인간이 하나여서 다시 분별되지 않으니,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바로 나의 기운이다.
이것을 기르고 해치지 않으면 천지天地에 충만하고, 조금이라도 사심私心에 가려지면 감연欿然히 줄어들어서 작아짐을 안다.
사무사思無邪와 무불경無不敬 다만 이 두 구句를 따라서 행하면 어찌 어긋남이 있겠는가.
어긋남이 있는 것은 모두 공경하지 않고 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原注
“반드시 일삼음이 있으나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말라는 것을 맹자孟子가 본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기 위하여 말씀하였는데, 정문程門에서는 마침내 바꾸어 마음을 수양하는 방법으로 삼았으니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잠실진씨潛室陳氏(陳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맹자孟子》 한 책은 경敬을 잡아 지키는 공부가 적으니, 이 한 구句와 같은 것은 가장 세밀하나 또한 다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데에만 시행하였으니, 이른바 ‘일삼는다[事]’는 것은 의義와 곧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대체로 공부하는 것이 비교적 조금 거칠으니, 〈정자程子가〉 이른바 ‘맹자孟子가 영기英氣가 있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다.
정문程門에서 이 두 구句를 좋아하여 빌어다가 마음을 수양하는 법으로 삼았으니, 마음을 길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다.
그러므로 그 일삼는 것이 경敬을 잡아 지키는 공부이니, 그 말은 세밀하나 공부를 하는 방법은 또한 맹자孟子의 절도節度와 같음에 불과할 뿐이다.”
原注
협지夾持의 뜻을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이 두 글자를 놓은 것이 가장 좋으니, 경敬은 마음속을 주장하고 의義는 밖을 막아서 두 가지가 서로 잡아 지켜 잠시 놓아 두려 해도 될 수 없고 다만 곧바로 위로 올라간다.
그러므로 곧 천덕天德을 통달할 수 있는 것이다.”
“표리表裏를 서로 잡아 지켜서 다시 동東‧서西로 달려가는 곳이 없으면 상면上面에 다만 천덕天德이 있을 뿐이다.”
“경敬과 의義를 내內‧외外로 서로 길러 잡아 정하여 이 가운데에 있게 해서 하나라도 달아나지 말게 하여야 하니, 이와 같이 하면 아래로 물욕物慾에 물들지 않고 다만 위로 천덕天德을 통달하게 될 것이다.”
原注
단서丹書에 ‘경敬이 태만함을 이기는 자는 길吉하고 태만함이 경敬을 이기는 자는 멸滅하며 의義가 욕심을 이기는 자는 순하고 욕심이 의義를 이기는 자는 흉하다’는 내용을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공경하면 곧 꼿꼿이 서고 태만하면 곧 방탕하여 쓰러지며 도리로 종사하면 의義이고 도리로 종사하지 않으면 욕심이다.
이 경敬과 의義는 바로 체體와 용用이니, 곤괘坤卦의 말과 같다.”
原注
“무왕武王이 처음 즉위할 적에 태공太公에게 단서丹書를 물었으니 도道를 듣는데 급한 자라고 이를 만한데, 태공太公이 아뢴 내용이 경敬과 의義의 한 마디 말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경敬하면 온갖 선善이 모두 확립되고 태만하면 온갖 선善이 모두 폐해지며, 의로우면 이치가 주장이 되고 욕심을 부리면 물건이 주장이 된다.
길흉吉凶과 존망存亡이 이로 말미암아 나누어지니, 상고上古의 성인聖人이 이미 여기에 지극히 삼가셨다.
무왕武王이 이 말씀을 들으시고 척연惕然히 계구戒懼하여 기물器物에 새겨서 스스로 경계하였으니, 잠시라도 이것을 보존하지 아니하여 태만함과 욕심이 그 틈을 탈까 두려워한 것이다.
그 뒤에 공자孔子가 《주역周易》을 찬贊하실 적에 곤괘坤卦의 육이효六二爻에 이르기를 ‘경敬하여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워 밖을 바르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하시자, 선유先儒들이 해석하기를 ‘경敬이 확립되면 안이 곧아지고 의義가 나타나면 밖이 방정해진다’하였다.
경敬하면 이 마음이 사사롭거나 간사함의 얽매임이 없어지니 안이 이 때문에 곧아지는 것이요, 의義로우면 모든 사물이 각각 그 분수에 합당하니 밖이 이 때문에 방정해지는 것이다.
황제黃帝로부터 무왕武王에, 무왕武王으로부터 공자孔子에 이르기까지 그 실제는 동일同一한 도道이시다.”
原注
‘경이직내敬以直內’와 ‘의이방외義以方外’를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말은 이렇게 하였지만 모름지기 스스로 가서 공부를 하여야 비로소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경이직내敬以直內’는 털끝 만한 사사로운 마음도 없어서 가슴속이 환하여 위를 통하고 아래를 통해서 표리表裏가 한결같은 것이요,
‘의이방외義以方外’는 옳은 곳에는 결단코 이렇게 해야 하고 옳지 않은 곳에는 결단코 이렇게 하지 않아야 함을 견득見得해서(알아서) 절연히 방정方正하게 하는 것이니, 모름지기 스스로 가서 공부를 하여야 한다.
성문聖門의 배우는 자들은 한 구句를 물어서 성인聖人이 한 구句를 답해 주시거든 곧 그것을 알아 가지고 가서 실제로 행하려고 하였는데, 지금에는 말은 진실로 많이 하나 다만 일찍이 자기 몸을 가지고 실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만약 실제로 잡아 공부를 한다면 오직 ‘경이직내敬以直內 의이방외義以方外’ 여덟 글자를 일생토록 사용하여도 다하지 않을 것이다.”
原注
주자朱子가 자양서당紫陽書堂 옆의 두 협실夾室에 한가로운 날 묵묵히 앉아 이 사이에서 책을 읽으셨는데, 그 왼쪽을 이름하여 경재敬齋라 하고 그 오른쪽을 의재義齋라 하고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일찍이 《주역周易》을 읽다가 두 마디를 얻었으니, 바로 경이직내敬以直內와 의이방외義以方外이다.
생각하기를 ‘학문하는 요점은 이것을 바꿀 수 없다’고 여겼으나 공부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는데, 《중용中庸》을 읽다가 수도지교修道之敎를 논하면서 반드시 계신戒愼과 공구恐懼를 시작으로 삼은 것을 본 뒤에야 지경持敬의 근본을 알았으며, 또 《대학大學》을 읽다가 명덕明德의 순서順序를 논하면서 반드시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를 우선으로 삼은 것을 본 뒤에야 의義를 밝히는 단서를 알게 되었다.
이윽고 살펴보니 두 가지의 공부가 일동일정一動一靜이 서로 쓰임이 되어서 또 주자周子의 태극론太極論에 부합함이 있었다.
그런 뒤에야 천하의 이치가 유幽‧명明과 거鉅‧세細, 원遠‧근近과 천淺‧심深이 하나로 꿰지지 않음이 없음을 알았다.
즐거워하면서 이것을 완미하면 충분히 내몸을 마치도록 싫지 않을 것이니, 또 어느 겨를에 외물外物을 사모하겠는가.”
原注
“ ‘경敬하여 안을 곧게 한다’하였으니, 안에 주장함이 있으면 마음이 비워져서 자연 그르거나 나쁜 마음이 없게 되고, ‘반드시 일삼음이 있다’하였으니, 모름지기 경敬을 잡아 지켜서 한 가지 일을 하여야 하니, 이 방도方道가 가장 간략하고 가장 쉬우며 또 공부하기가 쉽다.
이 말은 비록 천근하여 상인常人에 해당되는 듯하나 오랫동안 잡아 지키면 그 효험이 반드시 각별해질 것이다.”
原注
“감동하지 않았을 때에는 마음을 어디에 붙여 두어야 합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마음은〉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출입하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어 그 방향을 알 수 없으니, 다시 어떻게 붙여 둘 곳을 찾겠는가.
다만 잡을 뿐이니, 잡는 방도는 경敬하여 안을 곧게 하는 것이다.”
原注
혹자가 “경敬을 어떻게 공부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자, 정자程子가 말씀하기를 “하나를 주장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소계명蘇季明(蘇昞)이 말하기를 “저는 항상 사려思慮가 안정되지 못하여 혹 한 가지 일을 생각하여 마치기도 전에 다른 일이 삼처럼 또 생겨나는 것이 걱정입니다.” 하자,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그래서는 안 되니, 이는 성실하지 못함의 근본이다.
모름지기 익혀야 하니, 익힘은 전일專一할 때에 좋게 된다.
사려思慮하거나 일에 대응함에 구애하지 말고 모두 전일專一하기를 구하여야 한다.”
○ ‘주일무적主一無適’의 뜻을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단지 마음이 딴 데로 달아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지금 사람들은 한 가지 일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한 가지 일을 하려고 하여 마음속이 천 갈래 만 갈래이다.”
“학문은 단지 전일專一하여야 하니, 예컨대 수양가修養家들이 무無를 생각하여 유有를 이루고 석씨釋氏가 유有를 생각하여 무無를 이루니, 이것은 단지 전일專一함이다.
그러나 저들의 공부는 하기가 어렵지만 자신에게 있는 도리는 본래 있는 것이어서 단지 사람이 가서 이해하기만 하면 되니, 매우 순하고 또 쉽다.
또 장자莊子의 ‘마음을 씀이 분산되지 않아야 신명神明에 응집할 수 있다’는 것도 이렇게 사람을 가르친 것인데, 다만 저들은 오직 공적空寂일 뿐이요 유자儒者의 학문은 수많은 도리가 있으니, 만약 이것을 투철하게 본다면 사물을 꿰뚫을 수 있고 고금古今을 통달할 수 있다.”
“고인古人들은 어렸을 때부터 곧 이 공부를 하였으니, 예컨대 활쏘기를 배울 때에 마음이 만약 여기에 있지 않으면 어떻게 과녁을 맞출 수 있으며, 말 모는 것을 배울 때에 마음이 만약 여기에 있지 않으면 어떻게 말을 부릴 수 있겠는가.
이제 이미 어렸을 때부터 일찍이 〈전일專一하게 하는〉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 〈지금에〉 어쩔 수가 없으나 모름지기 이제부터라도 착수해 나가야 한다.
만약 이 공부를 하지 않고 책을 읽어 의리를 알려고 한다면 흡사 집을 세울 적에 기지基址가 없어서 우선 집의 기둥을 놓을 곳이 없는 것과 같으니, 이 마음이 존주存主함이 있게 한 뒤에야 학문함에 곧 귀착점이 있을 것이다.
만약 이 마음이 잡되어 혼란하면 자연 두당頭當(定處)이 없을 것이니, 어느 곳에서 배워 가며 또 어느 곳에서 공효를 거둘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정선생程先生이 모름지기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경敬 가운데에서 공부하게 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原注
“이천伊川의 ‘정제엄숙整齊嚴肅’ 한 단락은 바로 간절하고 지극한 공부를 사람들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근래에 붕우들의 강론을 통하여 배우는 자들의 병통을 깊이 연구해 보니, 다만 본래[合下]경敬을 잡아 지키는 공부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일마다 멸렬한 것이다.
경敬을 말하는 것도 단지 ‘이 마음을 보존하면 자연 도리에 맞는다’하여, 용모容貌와 사기詞氣에 이르러서는 왕왕 전혀 공부를 가하지 않으니, 설사 참으로 이와 같이 마음을 보존할 수 있다 하더라도 또한 석釋‧노老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또 하물며 마음과 생각이 거칠고 소홀하여 반드시 이와 같이 보존하지도 못함에랴.
정자程子가 경敬을 말씀하시면서 ‘경敬은 반드시 정제엄숙整齊嚴肅과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공손히 하는 것을 먼저 하여야 한다’하였고, 또 말씀하기를 ‘두 다리를 뻗고 걸터앉아 있으면서 마음이 태만하지 않은 자는 있지 않다’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여야 비로소 지극한 의논이 된다.
나는 선성先聖이 말씀하신 극기복례克己復禮를 평소 강설할 적에 예자禮字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언제나 마음이 석연치 않아서 반드시 이자理字로 해석한 뒤에야 그만두곤 하였는데, 이제야 나는 비로소 그 정미하고 치밀함이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는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노라.”
原注
“성성惺惺은 바로 마음이 혼매昏昧하지 않음을 이르니, 다만 이것이 곧 경敬이다.
지금 사람들은 경敬을 정제엄숙整齊嚴肅이라고 말하니, 참으로 옳으나 마음이 만약 혼매昏昧하여 이치를 봄이 밝지 못하면 비록 억지로 마음을 잡은들 어찌 경敬이라 할 수 있겠는가.”
“옛사람이 고사瞽師(樂師)로 하여금 시를 외게 한 것 따위는 바로 규계規戒하고 경계하여 가르치는 뜻이 어느 때이고 이렇게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저들이 이처럼 시끄럽게 경계함을 당한 뒤에는 자연 안주할 수 없으니, 대저 학문은 모름지기 깨우치고 살펴야 한다.”
“승려인 서암瑞巖이 매양 일간日間(아침‧저녁)에 항상 ‘주인옹主人翁(마음을 가리킴)은 성성惺惺한가?’하고 자문自問하고는 ‘성성하다’하고 자답自答하곤 하였는데, 오늘날의 배우는 자들은 이렇게 하지 못한다.”
또 석씨釋氏가 마음을 해설하기를 ‘도거跳擧하지 말며 혼침昏沈하지 말라’고 한 것을 인용하여 말씀하였다.
“이는 저들이 이 마음이 단지 두 가지가 있음을 본 것이다.
도거跳擧는 마음이 딴 데로 달려가는 때이고 혼침昏沈은 방도放倒할 때이니, 오직 공경하면 이러한 병통이 모두 없어지게 된다.”
혹자가 “사씨謝氏의 말은 불씨佛氏에도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하고 힐문하자, 말씀하였다.
“이 마음을 불러 깨우는 것은 같으나 그 방도는 다르니, 우리 유가儒家는 이 마음을 불러 깨워서 수많은 도리道理를 조관照管(비추어 보고 관리함)하려 하고, 불씨佛氏는 공연히 불러 깨워 여기에 있게 하여 작위作爲(일함)하는 바가 없다.”
原注
윤화정尹和靖(尹焞)이 스스로 말하기를 “처음 이천선생伊川先生을 뵈었을 적에 나에게 경자敬字를 살펴보게 하시므로 내가 더 말씀해 주실 것을 청하였더니, 선생은 ‘주일主一하는 것이 바로 경敬이다’하셨다.
나는 당시에 비록 이 말씀을 이해하였으나 근래에 본 것이 더욱 친절한 것만은 못하였다.” 하였다.
○ 기관祁寬이 “어떻게 하는 것이 주일主一입니까?” 하고 묻자, 윤선생尹先生이 말하였다.
다만 몸과 마음을 수렴하는 것이 곧 주일主一이다.
우선 사람이 신사神祠 안에 들어가서 공경을 지극히 할 때에 그 마음이 수렴되어 다시 털끝 만한 일도 붙일 수가 없으니, 이것이 주일主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原注
“경敬이란 성학聖學의 시작을 이루고 끝을 이루는 것이다.
정자程子와 사씨謝氏(謝良佐), 윤씨尹氏(尹焞)의 몇 말씀을 살펴보면 공부할 방향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자가 세 선생이 경敬을 말씀한 내용의 차이점을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비유하건대 이 방을 사방 어느 쪽에서든 모두 들어올 수 있는데 만약 그중 한 방위를 따라 들어와 이 곳에 이르면 세 방위로 들어오는 곳이 모두 그 가운데에 있는 것과 같다.”
原注
“경敬을 잡아 지키는 방도는 마땅히 세 선생의 말씀을 합하여 공부하여야 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내외內外가 서로 길러지는 공부가 비로소 완비된다.”
“경敬을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고 한 것은 정자程子의 말씀이다.
그러나 스승(朱子)의 말씀에 또 ‘경자敬字는 오직 두려워함(조심함)이 가장 가깝다’하였으니, 경敬이란 이 마음이 숙연肅然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있는 것의 명칭이다.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마음이 한 가지(하나)를 주장하게 되니, 예컨대 종묘宗廟에 들어가고 군부君父를 뵐 때에는 자연 잡념雜念이 없어지고, 한가로이 거처하여 방사할 때에는 생각이 분분하고 요란하여 한 가지를 주장하지 못한다.
두 말씀이 서로 표리表裏가 되니, 배우는 자가 체행體行한다면 이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자敬字의 뜻이 매우 크니, 선사先師인 주자朱子가 정문程門에서 경敬을 논한 중요한 말씀을 모은 것이 상세하고 또 치밀한데, 황씨黃氏가 또 ‘선사先師의 경자敬字의 뜻은 오직 두려워함이 가깝다’고 말하였으니, 더욱 정밀하고 간절하다.
사람의 한 마음에 허령虛靈‧지각知覺이 항상 숙연肅然하여 어지럽지 않고 밝아서 어둡지 않으면, 고요함에 이치의 체體가 보존되지 않음이 없고 감동함에 이치의 용用이 행해지지 않음이 없다.
다만 허령虛靈‧지각知覺은 이미 기氣에 갇히지 않을 수 없고 또 욕심에 따라 동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렇게 되면 이 마음의 체體와 용用이 따라서 어두워지고 또 어지러워지니, 이것이 경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만일 척연惕然하고 송연悚然하여 항상 귀신鬼神과 부사父師가 그 위에 강림한 듯이 여기고 깊은 못과 얇은 얼음이 그 아래에 있는 듯이 여긴다면 허령虛靈‧지각知覺한 것이 어둡고 어지러워짐을 저절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경자敬字의 뜻이 오직 두려워함이 가장 가깝다’는 이유이니, 그 말이 바뀔 수가 없다.
일찍이 그 본원本原에 나아가 깊이 생각해 보니, 경敬은 동動과 정靜을 포함하고 주일主一 또한 동動과 정靜을 포함한다.
일이 없을 때에 마음이 담연湛然하여 항상 보존되는 것은 정靜할 때의 주일主一이요, 일이 있을 때에 마음이 이 일에 응하고 다시 다른 일을 뒤섞이지 않게 하는 것은 동動할 때의 주일主一이다.
정靜할 때에 주일主一함은 곧 ‘중中은 천하天下의 대본大本’이란 것이요, 동動할 때에 주일主一함은 곧 ‘화和는 천하天下의 달도達道’란 것이다.
만약 주자周子의 ‘일一이란 욕심이 없는 것이다’라는 일一과 정자程子의 ‘나의 일一을 함양한다’는 일一과 주자朱子의 ‘일一이란 그 마음이 담연湛然하여 다만 이 속에 있는 것이다’라는 일一을 살펴본다면 정靜할 때의 주일主一이 태극太極의 경계임을 알게 될 것이다.
배우는 자가 진실로 이것을 모두 취하여 융회融會(융통하게 이해함)해서 그 실체實體를 정밀하게 생각한다면 거의 알게 될 것이다.”
原注
“잠시라도 경敬하여 안을 곧게 하면 곧 의義로워 밖을 방정하게 할 수 있으니, 의義로우면 곧 경敬이 있고 경敬하면 곧 의義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마음을 인仁에 두면 곧 의義를 행하게 되고, 의義를 행하면 곧 마음을 인仁에 두게 되는 것과 같다.”
혹자가 “경敬은 다만 함양涵養하는 것이요 의義는 곧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굳이 이렇게 말할 것이 없으니, 경敬하지 않을 때에는 곧 의義롭지 못하다.”